중동지역의 역사와 지리
이집트 역사와 지리 (1)
- 김윤기 목사님 정리 -
이집트와 성서의 출애굽
1. 면적 : 1,102,000 ㎢
2. 인구 : 5,500 만명
3. 수도 : 카이로
4. 종교 : 이슬람(90%), 기독교(10%)
5. 언어 : 아랍어, 영어, 불어
6. 통화 : 이집트 파운드 (£E)
7. 전압 : 220 V
8. 기후 :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성 기후 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비'를 뜻하는 말이 아예 없을 정도로 건조하다.
성서와 이집트
이스라엘은 그 지정학적 위치상 주변의 강대국인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서기전 2625-2130)부터 시나이 반도의 쎄라빗트 엘-카딤(Serabit el-Khadim)에 위치한 터키옥 광산을 개발했으며 선박 건조용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레바논의 비블로스(Byblos)와 해상 무역을 하는 등 일찍부터 가나안 지역에 진출했다. 신왕국 시대에는 이스라엘 남부 아라바 광야에 위치한 팀나 구리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했고 특히 서기전 1550년 신왕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제18왕조의 초기 파라오들은 조직적인 팔레스타인 침공을 통해서 가나안 전체를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이집트의 가나안 진출의 역사적 배경은 창세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격인 아브라함이 비록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나 시리아(하란) 출신이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후 이집트를 방문한 것을 통해서 재확인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출세를 계기로 야곱의 기족 70인이 고센 땅에 정착하고 그 후예들이 400여년 동안 이집트에 체류하게 됐다. 이어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와 구성된 12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집트를 이스라엘의 기원지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와의 관계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집트학(Egyptology)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인두스(Indus), 황하와 함께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손꼽힌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경에 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고등문명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인두스는 서기전 2600년부터 1000년 정도 지속되다가 인도 본토로 그 중심 무대가 옮겨졌고, 황하 문명은 이보다 훨씬 더 늦은 서기전 160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는 고등문명의 차원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사방으로 개방되어 시대에 따라 주인공들이 여러 번 바뀐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는 광야에 둘려 싸여 외부와는 고립되었고 오직 나일 강이라는 단일 교통로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대 이집트 3000년 역사를 통하여 단일 민족과 문화의 동질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문명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그리스 문명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라는 사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면서 이집트 문명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집트학의 기원과 발달
이집트학이란 고대 이집트의 언어, 문학, 지리, 역사, 고고학 등을 다루는 총체적인 ‘지역연구’이며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과 탐사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798년 5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통하여 인도에 이르는 영국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대규모의 함대와 3만 5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집트 정복에 나섰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의 유적들을 탐사하기 위한 학자들이 175명이나 포함되었고 그들은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지도제작자, 건축가, 동양학자, 화가, 그리고 역사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1799년에 지중해변의 엘-라쉬드(로제타)에서 높이가 1.1미터에 달하는 현무암의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
를 발견했다.
서기전 196년 3월 27일 기록된 것으로 밝혀진 이 석비에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4세의 대관식에 세워진 일종의 기념비로서 그의 공적이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 상형문자의 흘림체인 민용문자(demotic), 그리고 그리스어(greek)등 세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석비는 프랑스 군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1801년에는 영국의 전리품이 되었지만 이 석비의 탁본을 참고로 프랑스 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던 탐사단은 프랑스에 돌아와서 약 20년(1809-1828)에 걸쳐 그 결과를 이집트 묘사(Descrption de l'Egypte)라는 제목으로 모두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집으로 편찬하였다.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이 로제타 석비에 나타난 이집트 상형문자 부분의 카르투쉬 안의 왕의 이름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다른 비문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중복되는 알파벳의 음가를 하나씩 발견해내면서 비로소 서기 395년 이후 잊혀졌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1400여 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이집트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들: 케멧트, 미쯔라임, 이집트, 콥트의 어원
1) 케멧트(Km.t)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멧트(Km.t), 즉 “검은 땅”이라고만 불렀다. 검은 땅이란 다름아닌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말하며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검은 색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검은 땅 케멧트는 “붉은 땅”을 의미하는 데쉬렛트(D?r.t)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데쉬렛트는 이집트의 광야가 주로 누런 색과 갈색을 띤 풍화된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 미쯔라임
오늘날 아랍어로 이집트를 “미쎄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같은 셈어 계열에 속하는 성서 히브리어의 미쩨르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은 “두 개의 미쩨르”, 즉 “두개의 이집트”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를 한꺼번에 지칭하기 때문이다.
3) 이집트(Egypt)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스를 그 곳의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Hut-ka-Ptah)”,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신왕국 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Hi-ka-Ptah)”로 불렀고, 서기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와 4세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편지에서는 멤피스가 아카드어(Akkadian)로 “히-쿠-우프-타(Hi-ku-up-ta)”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에-기-프토스(Αι-γυ-πτο?)”로 발음되었고, 라틴어로 에깁투스(Aegyptus), 즉, 이집트(Egypt)로 발전되었다.
훗트-카-프타 --> 히-카-프타 -->히-쿠-우프-타-->에-기-프토스-->에깁투스-->이집트
4) 콥트(Copt)
오늘날 콥트(Copt)는 이집트의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기독교인들과 이집트 기독교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칭은 이집트의 라틴어식 이름인 에깁투스의 아랍어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서기 640년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이슬람 세력의 무슬림들은 이집트를 점령하여 카이로를 건설했고, 그들은 이집트를 “다르-알-깁트(Dar al-Gibt)”, 즉 “이집트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점령 당시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한 식민지로서 국교가 기독교였던 만큼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깁트(Gibt)”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콥트(Copt)”로 발전되었다. 후-카-프타-->에깁투스-->다르-알-깁트-->깁트-->콥트
나일 강
이집트는 북부 아프리카의 거대한 광야에 자리잡고 있어서 원래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는데 중부 아프리카 고원지대에서 북쪽의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 때문에 그 강변을 따라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나일 강은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아테루(I3tr.w)라고 불리웠는데 그리스 시대에 들어와 네일로스(Νειλο?)로 불리며 오늘날 나일 강의 어원이 되었다. 나일 강은 전체 길이가 6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 강의 전체 중 오직 1/5만이 이집트 지역을 통과한다. 나일 강의 배수유역은 300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한다. 나일 강의 원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서 비가 많이 오지만 이집트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광야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아스완 댐의 영향으로 홍수기인 7-8월을 제하고는 연중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지만 그 이전에는 갈수기에는 초당 방류량이 120입방미터, 그리고 홍수기인 7-8월에는 약 75배인 초당 9,000입방미터에 달하는 등 연중 수량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졌다. 또한 범람 지역과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의 토양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결과 연평균 1밀리미터의 충적토가 쌓인 것으로 드러났다. 나일 강의 물은 7월 초부터 서서히 불어나서 8월 중순 최고 수위에 달했다가 그 후 줄어들기 시작하여 11월 말부터 갈수기에 이르면 1-2월에는 최저 수위에 도달하게 된다. 나일 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7-10월의 범람으로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서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일 강은 지중해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대부분이 광야이지만 나일 강변과 특히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에는 해마다 여름철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토로 기름진 경작지를 형성한다.
상 이집트(Upper Egypt)와 하 이집트(Lower Egypt)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 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했는데, 상 이집트가 나일 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 이집트는 지중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 킬로미터 지점의 멤피스(Memphis)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정치적, 종교적 수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두 개의 이집트 개념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집트를 미쯔라임(?????), 즉 두 개의 미쩨르(??? = 이집트)로 표기한데서도 그 유래를 잘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 이집트는 22개 그리고 하 이집트는 20개의 주(nome)로 구분되어 있으며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첫번째 주에 속하였다. 서기전 3000년경 상 이집트 세력이 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집트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 후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징물을 이용하여 그들의 왕권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하 이집트(Lower Egypt) = 나일 삼각주
이집트의 농경지는 삼각주와 나일 강 변을 따라 양쪽으로 띠 모양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면적은 전체 100만 평방 킬로미터 중에서 3퍼센트의 땅인데 오늘날 이 곳에 전체 인구의 96퍼센트가 나일 강 변에 거주하고 있다. 삼각주는 전체 면적이 22,000평방 킬로미터이며 이 지역은 흙과 물과 태양이 일년 내내 충분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농작물도 경작이 가능한 낙원 같은 곳이다. 삼각주 지방의 중요한 고대 도시들의 유적은 해마다 나일 강의 끊임없는 범람으로 인한 퇴적층의 증가와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혀버렸다. 상 이집트와는 달리 이 곳에는 석재가 귀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흙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잘 보존되지 못한 점도 있다. 오늘날까지 약 20여 군데의 유적지에서 이집트 왕조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집트 역사의 시대 구분
1)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제 1-3 왕조 (서기전 2920-2575)
2) 고왕국 시대 (Old Kingdom): 제 4-6 왕조 (서기전 2575-2134)
3) 제 1 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 제 9-11 왕조 (서기전 2134-2040)
4) 중왕국 시대 (Middle Kingdom): 제 11-13 왕조 (서기전 2040-1650)
5) 제 2 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제 14-17 왕조 (서기전 1650-1540)
6) 신왕국 시대 (New Kingdom): 제 18-20 왕조 (서기전 1540-1070)
7) 제 3 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제 21-24 왕조 (서기전 1070-712)
8) 후시대 (Later Period): 제 25-30 왕조 (서기전 712-332)
9) 그리스-로마 시대 (서기전 332-서기 395)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 족장들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로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었을 때 일년 내내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성서의 이집트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 즉 ‘요셉 하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기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 이 도시의 아피온(Apion)이라 불리는 한 이집트인은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하여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모셔다 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하여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고 그는 이 글에서 서기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서기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 시대까지 자기 나라의 역사를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 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되었지만 ‘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 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부터 쳐들어와서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 민족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나중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날 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갔으며 유다 지방에 강력한 요새인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1824년 영국의 윌킨슨(G. Wilkinson)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의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했다. 모두 39개나 되는 이 무덤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왕국 시대인 제 11왕조와 12왕조 시대의 이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었다. 이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영주의 무덤 벽에는 농사짓는 모습과 사냥을 하는 장면, 다양한 동작으로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는 모습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벽화 중에서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주목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무덤은 서기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연대 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의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히브리 족장들 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Ra)였다. 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서 풍뎅이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었으며 도장으로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되어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분명하게 상형문자로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 야곱은 서기전 1750년경의 인물로 밝혀졌다. 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제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제 2대 왕으로서 서기전 1600년경 통치했었다. 우리는 이 조그만 도장들을 통하여 야곱은 당시 가나안의 왕족들에게 주어진 흔한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1900년경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서른 일곱 명의 힉소스들, 서기전 1750년경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한 도시의 왕 야곱, 그리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서기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가 창세기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비록 창세기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지만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약 1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식민지로 통치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장 사이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잃어버린 시간이 존재한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 체류하다가 모세의 지휘 아래 출애굽을 감행했다. 당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를 건설하면서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부렸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출 1:11). 그들은 이집트 감독들의 엄한 감시 아래 흙을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 국고성을 건설하였다. 영국의 이집트 탐사재단은 바로 이 흙벽돌로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의 국고성의 흔적을 찾기 위해 1882년에 처음으로 설립됐다.
1873년 겨울철 어느 날 아멜리아 에드워스(Amelia Edwards)라는 한 영국인 여류 수필가는 친구들과 함께 펠루카라 불리는 전통적인 돛단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하여 이집트 탐사에 나섰다. 나일 강을 따라 두 달 동안 이집트 전역을 여행한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 온 후 ‘나일 강 천 마일을 거슬러’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여행기를 출판했고 이는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며 이집트에 대한 대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서 이집트의 유적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으며 특히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쓰러지고 황폐해지는 유적들에 대한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녀는 영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집트 중에서도 성서의 고센 땅으로 여겨지는 삼각주 지역을 발굴해야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1882년 런던에서 ‘이집트 탐사재단’의 설립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 단체를 처음에는 ‘삼각주 탐사재단’으로 부를 만큼 초기의 이집트학자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고센 땅의 도시들의 흔적을 밝혀내길 원했다.
이집트 탐사재단은 그들의 첫 번째 발굴지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건설노동자로 고생했던 국고성 비돔을 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넓은 고센 땅 중에서도 과연 비돔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이집트 성지 발굴의 책임자는 스위스 출신의 에두아드 나빌(Edouard Naville)이었다. 1883년 1월 나일 강의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어 삼각주 지역의 발굴이 가능해졌을 때 나빌은 그의 첫 번째 발굴에 나섰다. 그는 우선 고센땅 자체가 삼각주 지방 중에서도 되도록 가나안에 가까이 있는 북서지역임을 알아냈고 이곳에 널리 흩어져 있는 기존의 텔, 즉 유적지들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를 비돔으로 여기고 발굴을 시작했다. 원래 비돔은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서는 고대 이집트어로 ‘페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태양신 아툼의 신전’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이집트어의 체쿠는 히브리어로는 숙곳으로 발음될 수 있고, 숙곳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한 장소(출 13:20)이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비돔으로 확정짓게 된 것이다.
이곳은 현지 아랍어로 “우상들의 언덕”이라는 뜻이고 원래 여러 종류의 석상들이 널려 있었던 유적지였다. 또한 이곳은 히브리 족장시대의 배경이 되는 이집트 제 15왕조 힉소스 민족의 중심도시였다. 이 곳은 파괴된 후 계속 폐허로 남아 있다가 서기전 610년경부터 로마시대까지 요새로 재건됐다. 네코 2세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는 나일 강 하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는데 비돔은 이 운하 변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3개월간의 발굴이 끝난 후 나빌은 1885년에 ‘국고성 비돔과 출애굽 경로’라는 제목의 발굴보고서를 출판했다.
한편 비돔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국고성 람세스는 원래 람세스 2세가 건설한 하 이집트의 수도였던 ‘피람세스’를 말한다. 또한 구약성서에서는 야곱의 가족들이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요셉의 배려로 거주했던 이집트의 한 지방을 고센 땅 중에서도 ‘람세스의 땅’(창 47:11)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람세스 2세의 고향이었으며 서기전 13세기에 그가 건설한 ‘람세스의 궁전’이라는 뜻의 ‘피람세스’는 삼각주 지역의 가장 화려했던 왕도였다. 물론 지금은 폐허가 되어서 그 옛날의 영화를 찾아 볼 길은 없다. 두 개의 국고성 중에서 비돔은 지난 1883년에 나빌에 위해 처음으로 발굴됐지만 람세스 도시는 유적으로서의 흔적이 거의 지상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 이후 그 지리적 위치가 어렴풋이 확인됐다. 1960년대 완공된 아스완 댐으로 삼각주 지역의 지하수면이 높아지면서 웬만한 저지대는 일년 중 절반가량은 침수되는 상태였고 람세스 도시도 벼농사를 하는 논과 밭으로 경작되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에드가 푸쉬(Edgar Pusch)는 독일의 펠리제우스 박물관의 후원으로 1987년부터 나일 강의 한 지류였던 펠루시움 강변에 위치한 칸티르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궁전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이 유적이 람세스 2세의 궁전과 신전 유적이며 따라서 이 곳이 ‘피람세스’, 즉 람세스 궁전이 있었던 출애굽기의 국고성 람세스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에드워스 여사와 나빌, 그리고 푸쉬 등의 노력으로 구약성서의 신앙적 기초가 되는 출애굽 사건의 현장인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 발굴을 통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 속에서 성서를 직접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레미야의 이집트 체류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느부사라단을 만나 석방되었다(렘 40:1). 그후 그는 미쯔파(미스바)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꼭두각시 총독 그달리야와 함께 지냈다. 유다의 군대 장관이었던 이스마엘은 암몬 왕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아 그달리야를 암살하고(렘 41:2) 미쯔바를 파괴한 후 포로들을 잡아 암몬으로 데려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요하난 일파는 기브온에서 이스마엘 세력과 전투를 벌여서 포로들을 석방시켰고 이스마엘은 부하들과 함께 암몬으로 도망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바빌로니아에 대항했던 이스마엘을 물리친 요하난 일파가 바빌로니아 세력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난가게 되었다는 것이다(렘 41:16-18).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예레미야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렘 42:8-22). 하지만 요하난과 아자리야 등은 예레미야와 나머지 유다 거민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다. 예레미야는 삼각주 지역의 탁흐반헤스에 거주하면서 예언 활동을 계속하였다(렘 43:8).
이집트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
서기 4세기에 기록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II.16)에 의하면, 네로 황제 시대(서기 54-68)에 예수의 요한 마가에 의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이 곳에 정착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개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기 150년경 콥트어로 기록된 요한복음서의 단편이 이집트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마가의 선교 이후 100년이 되지 않아서 기독교는 이집트 전역으로 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이집트의 기독교를 콥트교회(Coptic Church)라고 부르며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와는 구분되는 그들만의 신학과 제의를 지니고 있다.
출애굽과 이집트
엑소더스 / EXODOS (1)
애굽에서 시나이 반도를 지나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블레셋 사람의 길 (출13:17) 이다. 그러나 블레셋 길에는 막강한 애굽의 군사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많은 믹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군사 진지는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대상로를 보호하거나, 팔레스타인이나 아라비아 반도로의 정벌을 위한 군 주둔지들이었다. 실제로 모세의 출애굽은 시나이 반도를 남행하는 우회로를 택하게 된다
비돔
'아톰신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노역하던 국고성 건축지이다.
※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 1:11)
숙곳
'와디 투밀랏'의 동쪽에 있는 현재의 '체쿠'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애굽에서 추방된 자들이 대개 경유하던 길목이다.
※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출 13:20)
※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출 13:20)
※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진쳤고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쳤고 (민 33:5~6)
믹돌과 바다사이, 바알스본 앞
바알스본 : '남쪽의 바알' 또는 '북방의 신'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명칭은 하애굽의 여러 지역에서 경배했던 가나안의 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지명은 하나의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보다 셈계의 예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바알스본이나 믹돌이 하나의 특정 지명이나 마을이 아닌 일반적인 명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팀사호 근처의 투쑴 언덕에서는 해마다 7월 14일에는 종교 축제가 있다.
믹돌
'요새' 또는 '탑'이라는 뜻을 지닌다. 시나이 반도로부터 유입되는 유목민들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워 놨던 여러 요새의 하나였을 것이다. 여러 믹돌 둥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경로로는 텔 엘헤이르 (tell el Heir) 로서 펠루쉬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북동 쪽의 성 (성채 Fortress) 펠루시움 남쪽 18Km,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로 가는 중의 첫 도시였다. 우리나라의 전방의 군사도시 정도였을 것이다.
▲ 진흙 벽돌
비하히롯 (Pi hahiroth)
'운하의 입'의 뜻을 지닌 지역으로 이집트 지명은 Pi kerehet 또는 Pi keheret ('퀘르헷 여신의 집')이다. 이집트의 여신 하토르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기도하다. 팀사호 남쪽의 게발 마리암 (마리암 山) 지역, 현재의 세라피움(Serapium)으로 추정한다.
※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출 14:2)
※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 미치니라 (출 14:9)
※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민 33:7)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우셨음이라 (출 15:21)
엑소더스 / EXODOS (2)
홍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 북쪽 지역의 '팀사' 호수와 '비터(Bitter)' 호수 지역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갈대바다'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갈대(파피루스 등)가 무성했던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의 위치는 현재의 와디 투밀라트 동쪽의 팀사호로 추정한다. 물이 갈라지는 사건은 만젤라 호에서 목격된 것을 토대로 할 수 있다.
에담 광야
'에담'의 뜻은 '방어벽' 이고, '수르'의 뜻은 '성벽'이다. 같은 지역을 표현하고 있는 이집트어와 히브리어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이집트 본토로 유입하는 유목민들이나 이방인들을 제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수에즈 운하지역을 중심으로 길게 방어벽(믹돌)을 쌓아 두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현재 '엘림 광야'로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색은 거의 풀이 자라지 않는 벌판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쳤고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하히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민 33:6~8)
※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삿 5:8)
※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삿 5:11)
오윤무사
'모세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수에즈에서 54 Km, 터널에서 홍해변으로 남쪽 26 Km 지점에 있다. 한때 10여개의 우물(샘)과 500여 그루의 종려나무가 자리했던 이곳에는 현재 거의 말라가는 우물 하나가 시멘트로 단장된 가운데 있고, 주위에는 많은 야자수 (성경에는 종려나무로 기록되어 있다) 들이 있다. 그리고 이 종려나무 외의 다른 수종의 나무가 보이는데 이 나무는 상수리과에 해당하는 에셀 나무이다.
초기 여행자들의 기록에는 야자수 숲과 연중 마르지 않는 10여개의 샘이 있는 아름다운 오아시스로 묘사되어 있지만 현재는 그간의 중동전 등으로 파괴되어 그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1798년 12월 하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과정 중 수에즈에 머무는 동안 이곳을 방문 하기도 하였다.
마라
'쓰다'는 뜻. 홍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물이 염수 (소금물)였을 것이다. 오윤무사를 마라로 간주 하기도 하지만, 이 지점 보다 80Km 남쪽의 '아인 하와라' 지역을 마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홍해 (갈대바다)를 건넌 후 3일 길 (민 33:8)을 걸어서 도달하였다는 점과 엘림과 근접한 지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이다. 게벨 함맘 파라운 (바로의 온천산)이 멀리 보이는 홍해 변의 풀이 많이 자라 있는 지역이다. 라스 말라암 (Ras malaab : 운동장 같은 곳이라는 뜻) 이라 부르는 지점 2 Km 남쪽 지점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 히하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마라에서 발행하여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으므로 거기 진쳤고 (민 33:8~9)
※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마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4~25)
엘림
'아인 하와라' 남쪽 11Km 지점의 '와디 그란델'. 아흐마드 함디 터널에서 11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에는 물샘 열 둘과 종려 70그루가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이곳에는 적절한 물을 공급해주는 담수샘이 있고,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 멋있는 협곡과 종려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비가 온 뒤에 움푹 패인 땅에는 물이 가득한 것들을 목격할 수 있다.
※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 15:27)
엑소더스 / EXODOS (3)
신광야
황량한 벌판이 끝나면서 이제는 작은 모래 산들이 점점 높아 보이기 시작한다. 석회암 절벽 사이사이에 산들이 형성 되어있다.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에담 광야에서 신광야로 들어가는 특징이다. 성경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 (출 16:1) 로 이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신광야'라는 지명은 당시 이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달신 SIN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건조한 불모 해변 평야인 엘 뚜르 항구의 북쪽 엘 까아 (el qaa), 구리와 망간의 제련지역인 와디 마가라 (wadi maghara)에서 약 150 Km 지점으로 이집트의 신왕국 때에는 항구 마가라항이 있었고 지금 이 지역에는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처음 목격하게 된다. 음식과 물의 부족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또한 만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두번째로 법도와 율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다. 또한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도록 하신다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출 16:3)
르비딤
현재의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 레파이드'로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다. 홍해에서 60Km, 시내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운다.
창세기 21장 12절의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 이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며,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모세 기념 예배당과 여자 수도원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아랍화 이전까지 이곳은 기독 신앙의 중심이었던 지역이다.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1)
※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8)
※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9출 19:2)
※ 알루스에서 발행하여 르비딤에 진쳤는데 거기는 백성의 마실 물이 없었더라 르비딤에서 발행하여 시내 광야에 진쳣고 (민 33:14~15)
엑소더스 / EXODOS (4)
시내광야
시내광야는 시내산 동쪽에 있는 에르 라하 (er Raha) 평원 지역으로 해발고도 800m 로서 현재 성 캐더린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시내산의 한 줄기이다. 시내광야 주변의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모세산 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2,285m), 캐더린산(2,642m), 세발산, 세일산 등으로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이들 산악과 평야는 화강암, 편마암, 섬록암이 그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 (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시내산은 가데스에서 11일 길(신 1:2)이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장 30절, 38절, 갈라디아서 4장 24~25절 등 4번 언급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출애굽 1년 3월 15일에 이곳에 도달한다. 이곳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은 '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이 평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기간 체류하였다.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출 19:1~2)
※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레 7:38)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 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1: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 1:19)
바란광야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a) 계곡을 따라 나가면 아인 후드라 (Ain Hudra)라고 불리는 바란 광야에 이른다. 바란광야의 뜻은 '굴이 많은 땅'이라는 것으로서 이 지역은 노년기의 산악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온갖 색깔을 띠고 있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산의 골격이 다 돌출된 모습들은 파충류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균 해발 600~750 m 정도의 석회암 산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고 두려운 광야' (신 1:19)로 일컬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있던 땅' (신 1:1) 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쫗겨나 살았던 지역 (창 21:21)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 중 정탐꾼을 처음 보냈던 (가데스 : 민 13:3,26) 곳이며, 38년 이상의 긴 시간을 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사무엘이 죽은 뒤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들었던 지역 (삼상 25:1)이기도 하다. 민수기 33장 2절, 하박국 3장 3절의 바란 산은 아카바만 서쪽 해안에 있는 바란 광야의 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카바 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서, 아카바 만의 누에바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 Km 를 가면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타바에 도착하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와 지리 (2)
- 김윤기 목사님 정리 -
우리는 9박 10일의 성지 순례를 주 안에서 잘 마쳤다. 저에게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때 유대 땅에 오셨다는 것 하나 만으로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였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아랍권의 집요한 공격과 테러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지키며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스라엘이 전시경제라는 특수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그러한 고도성장을 기록하였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모든 것은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나름대로 민족의 아픈 역사가 있고 이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현재의 이스라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역사적 개관을 통해서 현재의 이스라엘이 있기까지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2. 일반적 개관
1) 지리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는 레바논, 북동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에 접한 이스라엘의 면적은 국경선과 휴전선 내에서 27,800㎡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길고 좁은 형태의 모습이다. 길이는 약 510㎞, 가장 넓은 곳은 폭 135㎞이다.
이스라엘은 지리학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은 세 개의 긴 땅과 남쪽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부분이 불모지인 넓은 지대로 나눌 수 있다.
가. 해안평야
해안평야는 지중해까지 펼쳐 있고 이스라엘 국민 반 이상의 고향으로서 주요한 도시 중심지, 심해항구, 산업, 농업과 관광시설들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 산 맥
북동부에서는 화산의 폭발로 형성된 골란 고원이 해발1600피트에서 4000피트의 높이로 솟아 있으며 사계절 흐르는 시내와 풍부한 강우량은 일년 내내 국토를 푸르게 한다. 이스라엘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갈릴리와 골란의 거주민들은 농업, 관광 관련업, 사업, 경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마리아의 언덕들과 갈릴리 고지를 가르는 이즈르엘 계곡은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써 수많은 공동체(키부츠와 모사브)에 의해서 경작되고 있다.
다. 네게브
이스라엘 땅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네게브에는 단지 7%의 인구가 거주하는데 그 대부분은 북쪽에 살고 있으며 농업과 산업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네게브는 낮은 사암 고지와 평야가 특징을 이루는 불모지로 갑작스런 홍수를 일으키는 곳이다.
라. 요르단 계곡과 아라바
이 나라 동부를 따라 쭉 뻗어있는 요르단 계곡과 아라바는 수백 년 전 지각을 분열시켰던 커다란 시리아 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분이다. 그 곳의 북쪽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남쪽은 반건조 지역이다.
2) 기후
온대기후에서 일사량이 풍부한 열대기후까지 골고루 분포한 이스라엘 기후는 두 개의 뚜렷한 계절로 나뉘는데 11월에서 3월까지의 겨울 우기이고 나머지 달은 여름 건기 이다.
강우량은 비교적 북쪽과 중부지방이 많고 네게브는 아주 적은 편이다.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온화하다. 봄과 가을은 일교차가 심하고 그 기간은 짧은 편이다. 지역적인 날씨 차이가 심한 편이고 산악지대는 가끔 눈이 내리기도 하며 봄가을에는 무더운 바람으로 기온이 높다.
예루살렘의 경우 12월과 2월 사이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데 연 강우량은 500㎜정도이다. 12월까지는 연 강우량의 30%가 내리며 2월과 3월까지는 연 강우량의 40%가 내린다. 그러나 우기라고 해서 비가 규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예루살렘의 기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 강우량이 가장 높을 때에는 1,062.5㎜였고 가장 낮게는 202.5㎜였다. 결국 이러한 예측 불허의 강수량은 물 저장소, 수로 등을 만드는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이스라엘의 주요 수로는 1964년에 완공되었고 거대한 파이프, 개방운하, 저수지, 터널, 댐 그리고 펌프사용시설 등을 통해 수송된다.
3) 인구 및 주요 도시와 농촌
가. 인구
현재 이스라엘 인구는 5백만 명 이상이 모여 살고 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 본토인이고 나머지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서로 다른 종교적인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산다.
유대인 400만 명 이상이며 대부분 아랍인으로 구성된 비 유대인 95만 명이다. 생활방식도 집단생활, 개인생활, 농촌생활, 도시생활을 하는 부류가 있다.
최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인구는 1960년에는 2,150,400명에서 1996년에는 5,471,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의 인구는 무려 일곱 배로 증가했는데 서로 다른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유럽과 아랍 그리고 최근에는 소련과 에티오피아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한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야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나. 주요 도시와 농촌
이스라엘 인구의 90%이상이 도시에 산다. 많은 현대적 도시들은 예전부터 알려진 장소에서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면서 건설하였다. 예루살렘, 텔아비브, 하이파, 브엘세바, 등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왕이 3000년 전에 수도로 정한 후에 유대 민족의 역사와 정신, 국가의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텔아비브는 지중해 연안의 현대적인 도시이다. 문화생활의 중심지이며 이스라엘의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대부분의 산업과 농업에 관련된 단체들과 은행, 주요 일간지, 정기 간행물의 출판사가 그 곳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하이파에는 이스라엘의 주요 항구가 있으며 국제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북 이스라엘의 행정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브엘세바는 북네게브에 위치해 있으며 지방의 의료, 교육, 문화시설이 있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이다.
인구의 약 10%정도가 시골에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키브츠와 모샤브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 집단 농장은 20세기초에 발달하였다.
키브츠는 구성원의 협의에 따라 모든 결정이 내려지고 재산과 생산수입은 공동소유하는 사회적, 경제적 단위이다. 인구의 약2.5%가 약 270개의 키브츠 농장에서 살고 있다. 최근에는 농업이 주업이었던 키브츠가 관광산업과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모샤브는 가구마다 독립적인 농가를 유지하면서 물품구매, 마케팅 그리고 공동사회의 서비스 분야에서는 서로 협동한다. 각 모샤브 당 60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이 나라 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4)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아브라함이 곧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었다.
유대인의 역사는 약 4,000년 전에 조상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기록으로 그들의 유목생활의 양상이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같은 셈족 계통의 집단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명도 이들 선주민족(先住民族)의 일파였던 팔레스틴족(族)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가운데 아랍인들(이스마엘의 후예)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이주해 갔으며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이주했다가 팔레스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13세기에서 12세기경이었다.
모세의 인도로 다시 팔레스틴 지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음 2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민과 장인으로 변신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잡았다.
이스라엘은 이제 군주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초대 왕 사울은 흐트러진 부족시대와 완전한 군주시대로 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선주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왕에 의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예루살렘을 도읍으로 정하고 사울과 다윗 밑에서 신정 정치를 실시하며 번영해 나갔다. 민중의 불만을 야기한 솔로몬의 치세로 말미암아 기원전 930년에서 586년까지 왕국이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남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각각 망하면서 구약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를 제1성전시대라고 하고 제2성전시대는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면 페르시아 시대(주전 516년-주전 332년). 헬라시대(주전 332년-주전 167년), 하스몬 왕조시대(주전 167년-주전 63년), 로마시대(주전 63년-주후 70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 바벨론시대(기원전 586-538)
바벨론의 정복으로 유대 왕국은 망하였다. 첫 번째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유랑이 시작된다. 제1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시작된다. 제2성전 시대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 보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나.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16-332)
바벨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키루스가 일부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1차 귀환 때 약5000명 정도가 귀환하였다. 여기서 키루스는 우리말 성경에는 고레스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제2차 귀환은 율법사 에스라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다. 헬라시대(기원전 332-167)
알랙산더 대왕의 정복은 세계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리스와 마게도니아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고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아시아 전역에 분산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이후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우쿠스, 프롤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크스 왕조가 가장 큰 제국이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다스리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그리스문화와 동방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였다. 코이네 헬라어는 세계를 묶는 공용어가 되었다.
종교적으로 혼합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이 결과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정복자 셀레우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의 종교 전통을 인정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는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로마의 견제를 받고 이집트에서 철수하였고 팔레스틴으로 돌아오자 마자 반 종교정책을 폈으며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지시켰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대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운동이 일어났다.
주전 167년에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제사장 마타디아스는 이교 제사를 수행하는 한 유대인을 죽이고 피신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가세하였으며 마카비라 불리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서 이 저항운동은 계속된다. 그들은 셀레우쿠스군에 항거하여 승리를 거두고 성전을 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유대는 하스몬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누카 축제로 경축하고 있다.
라. 하스몬 왕조 시대(기원전 167-63)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국가로 형성되었다. 하스몬이라는 이름은 반란의 선봉이었던 마타디아스의 선조 하사모나이오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스라엘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였는데 이제 셀레우코스 왕조의 붕괴로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하스몬 왕조는 세습하여 왕이 되었고 솔로몬 왕의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이 때에 유대인의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불루스, 힐카누스- 즉 형제간의 왕위 다툼으로 로마의 폼페이 장군을 예루살렘에 불러 들였고 여기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에서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기원전 63-기원 313)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틴은 로마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나비타안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고 팔레스틴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힐카누스는 왕이라는 칭호도 없이 지내야만 하였고 오히려 그들 도왔던 안티파테르는 로마의 신임을 얻어 유대인이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안티파테르는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한다. 여기서 헤롯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가 바로 헤롯 대왕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 박사가 헤롯을 만나는데 왕이 났다고 하자 자기 왕권유지를 위해 무고한 신생아를 죽인 잔인한 인물이다.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그는 자신의 친아들과 아내마저 왕권 유지를 위해서 죽이는 인물이었다. 아내 미디암이 자신이 항상 열등감을 느끼는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로마의 고위직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으며 안토니에이어 아구스도 옥타비우스의 호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디아스포라에 있는 유대인들의 권익을 신장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헤롯이 죽은 후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 이들은 로마에 의해서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헤롯 아겔로오가 선정을 베풀지 못하여 실각 당하고 로마는 예루살렘과 유대, 이두매, 남부 사마리아 지역에 직접 총독을 보내 다스린다. 헤롯 빌립은 갈리리 북부지방을 다스린다. 그의 영토는 아그립바 1세가 계승하게 된다.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리던 헤롯이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권유로 로마에 가서 왕권을 가져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반역죄로 몰려 추방당한다. 성경에 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므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그립바 1세는 로마의 호의로 헤롯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17세에 불과하였고 로마는 그의 삼촌에게 지배권을 주었다. 아그립바 1세가 통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로마에서 총독을 보냈는데 총독의 착취는 극심하였다. 이것이 결국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에게 증오심을 불러 일으켜서 로마의 지도부는 불안하였고 AD. 66년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반란은 갈릴리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단일지도 체제조차 되어있지 않았던 반란군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멸망당했으며 파괴당하였다.
135년에도 반란이 있었지만 로마에 의해서 진압 당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거주하지 못하였으며 이름조차 속국 유다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개명시켜서 철저히 핍박당했던 것이다.
바. 비잔틴의 지배(313-636)
4세기말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과 비잔틴 제국건설로 이스라엘은 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던 종교였지만 이제 기독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고 유대교는 계속적인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보호하고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에는 유대인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대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8년에 그 법을 종합화시켰다. 기독교의 공인으로 유대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그 결과로 유대인들과 특별히 유대교인인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불평등한 대우로 기독교에 대한 안 좋은 선입감이 자리 잡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 모슬렘의 지배(640-1099)
무하마드가 죽은 후 팔레스타인은 4세기동안 모슬렘이 지배하였다.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의 모슬렘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슬렘 제국을 확장시켜 나간다. 모슬렘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대인 공동체도 모슬렘의 인정아래서 존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세의 납부로 보호받는 비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점점 비회교들에 대한 제한법이 적용되는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차별이 심화 되어가자 11세기말경 이 땅에 유대인들은 상당수 떠나고 종교적인 결속력도 희박해져 갔다.
파티미드 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을 이슬람의 몰락과 십자군의 진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 십자군 시대(1099-1291)
모슬렘의 몰락과 더불어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해방시켜야 된다는 것을 호소함으로 유럽 각국의 십자군에 의해서 이 지역은 지배를 받게 된다.
예루살렘은 5주간 포위 당하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은 살해당했고 회당 안에서 장벽을 쌓고 방어하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죽고 노예로 끌려갔다. 십자군은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러 순례의 길이 대중화 되게 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고향으로 가고자하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십자군은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퇴색되어 가고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그 자리를 대신 하였다. 결국, 이집트에 거점을 둔 맘루크에게 십자군은 패하고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종말을 고한다.
자. 맘루크의 지배(1291-1516)
이슬람군의 엘리트 계급인 맘루크는 악고,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도시를 파괴함으로 국제적 무역로가 상실되었고 경제적으로 쇠퇴해갔다. 15세기의 악화된 경제사정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하였다.
차. 오스만 터키의 지배(1517-1917)
오스만 터키의 술탄셀림 1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된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제국을 약화시키고 헝가리, 흑해연안,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페르시아 북부만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모슬렘 제국을 건설한다. 17세기 메시아 도래를 다리는 유대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츠바츠에는 직물의 중심지, 유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터키는 변화하는 유럽을 수용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반란으로 터키의 지배는 종식을 고하며 1917년 팔레스틴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19세기 서양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열강들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미국, 프랑스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였다. 영국, 프랑스, 구소련, 오스트리아, 미국에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정기기선이 왕래하였고 우편과 전신도 개설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생활조건은 개선되었다. 인구는 폭팔적으로 증가하였다. 예루살렘 성안에 인구가 조밀하기 때문에 1860년 최초로 성밖에 이스라엘 마을을 만들었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전역에 매입하였고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시오니즘에 고무된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으로부터 이주하여 왔다. 시온이라는 것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말한다. 바로 조상의 땅에서 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조국건설의 꿈을 심어준 것은 한 오스트리아 신문사의 파리 특파원 테오도어 헤르츨에 의해서 였다. 국제 감각이 뛰어난 그는 그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희생 양이 될 가능성을 간파하고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활로를 유대인 국가건설에 두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반유대적인 물결이 밀어 닥쳐 왔다. 19세기에 러시아도 반유대인 법령을 반포하여 유대공동체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이런 동부유럽과 서유럽에서의 박해와 차별대우가 시오니즘을 탄생시킨 요인이 되었다.
제1차 바젤대회는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헤르츨이 주창한 유대인 국가건설이 전 유대인의 정신적 모토가 되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이 시오니즘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오스만 터어키의 압제적인 태도에 시달려야만 했으나 이주를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이전 1,500년대에 5,000명에 불과하던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85,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4세기 걸쳤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끝났다.
영국은 1차 대전의 전략상 아랍과 유대인들로부터 동시에 지원을 얻고자 팔레스타인 지역에 동시 독립을 약속하는데 아랍에게 독립을 약속하는 맥마흔 서한을 보낸다.
재미 유대인 재벌에 재정적인 도움을 얻고자 영국외상 발포어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할 것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하게된다. 이러한 발포어 선언은 이스라엘 독립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요르단과 이라크지역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복속시킨다.
카. 영국의 지배(1918-1948)
영국 정부의 통치 방법은 오스만 터어키의 통치와는 달랐다. 히브리어를 세 번째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서로 다른 문화적인 환경을 지닌 유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아랍인들이 반유대적인 폭력단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나치의 등장으로 戰前과 戰後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 때 상당한 자금력을 가지고 들어온 유대인들은 불모지를 사들이며 투자를 시작했다.
1933년과 1936년 사이에 164,000명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해 들어 왔다. 유대인들의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소유지가 확대되었다. 아랍인들은 자극 받아 반유대인 운동, 반영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영국은 뒤늦게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유대인들의 이주를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후 아랍의 협조를 얻기 위해 유대인 이주를 더 강력하게 규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反英 테러단체 이르건 하가나를 조직하여 반영 테러를 한다. 영국은 이 문제를 마침내 1947년에 국제연합(UN)에 넘기고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가 조직된다. 여기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준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 안은 올리브농장의 80%, 아랍인 공장 40%가 유대인들이 분할 받는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아랍은 즉각 반대, 유대인들은 수락으로 나타난다. 영국은 직면한 경제문제와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국제연합의 분할 안 제시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타. 독립과 중동전쟁
팔레스타인에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직후 65만 명의 유대인 거주자가 생겼고 이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조직사회가 되었다. 명목상 국가가 아니었지 이미 국가나 다름없었다. 1948년 5월에 영국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할 때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독립을 선포하자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가 무력공격을 개시하였다.
1차 중동전쟁은 병력과 무기면에서 절대 우위인 아랍측이 유리하였으나 내분으로 효율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고 이틈을 이용하여 해외로부터 무기를 조달 받은 이스라엘은 전세를 만회하여 건국 초기보다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90만이 넘는 아랍인들을 축출함으로 지금도 분쟁의 소지가 되는 팔레스타인 난민문제가 발생되었다.
파. 정부수립
전쟁이 끝나자 총선이 실시되고 초대 의회 크리세트가 구성되었다. 다비드 밴구리온이 초대 수상으로,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실제적으로 이 지역은 아랍 각 지역에서 피난 온 30만 명 이상을 포함하여 1951년 69만여 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떠나간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인과의 인구교체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전쟁으로 인한 부담을 미국의 원조, 유대인들의 기부금, 독일의 배상금으로 충당해 나갔다.
모든 지원금과 자금을 주택건설, 농업의 기계화,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개발, 전기통신망에 투자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주력하였다.
제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낫세르가 야심적으로 수에즈운하를 국유함으로써 1966년 10월에 발생한 전쟁이었다. 이스라엘 선박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티란 해협도 봉쇄 당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점령하였고 티란 해협에 위치한 에일라트항이 자유롭게 이용되고 티란 해협이 개방된다는 조건으로 시나이반도에서 이스라엘을 철군하게된다.
이스라엘은 1958년에서 1968년까지 나라의 확립기를 거치면서 국내산업의 발전과 외교력 향상에 주력하게된다. 이집트가 시나이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키며 시리아를 이스라엘이 침공한다면 이집트가 즉각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겠다고 하였고, 그 당시 상황은 북이스라엘 국경지대에서 시리아와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도 강경한 입장이었다. 1967년 6월5일에 개전된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본토에 5배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라마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성격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전쟁이 아니라 빼앗긴 지역을 회복하고자 발발되었고 처음에는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이 유리하였으나 이스라엘이 만회하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큰 인명피해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하. 장애가 있지만 평화로 가고자 하는 시대(1979- )
4차 중동전쟁은 산유국들의 석유화가 이루어졌고 PLO의 존재가 정착되었다.
이집트는 4차례의 걸친 중동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모든 기간시설이 파괴되고 국민경제는 파탄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집트는 이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게 되었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미국의 증재로 1979년 3월26일에 캠프데이비드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 중동평화협상에 조인하게된다. 합의된 사항은 시나이반도 반환, 국교정상화,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권 인정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은 아랍세계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집트가 아랍세계로부터 고립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였다.
이집트 내에서도 극렬한 반대시위가 있었고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에 이슬람 원리주의자 단체인 지하드 요원에게 암살 당하게 된다.
1982년 PLO의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실상 시리아, 레바논군과 전면전을 벌였다. 이 결과로 PLO는 레바논의 근거지를 잃어버리고 튀니스로 근거지를 옮겼다. 1987년에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지배로 인한 억압에 대해 대규모 봉기가 있었다. 1987년말 인티파스라 불리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점령지역 안이나 주변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테러단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1991년 걸프전이 끝나고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의 다자간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미국과 소련에서 8차례나 실시되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3년 8월30일 이스라엘과 PLO의 그 동안 노르웨이에서 진행된 비밀교섭을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PLO의 아랍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의 역사적인 평화협상 조인식을 워싱턴에서 가졌다. 과거 이스라엘 국민은 PLO인사와 비공식 통로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정상이 만난 것은 그들의 정서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양쪽의 극우파 세력은 반발하였고 결국 라빈 수상도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주장하는 극우파에게 희생된 것이다.
팔레스타인人 가운데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은 아랍파트를 배신자로 생각하고 급진전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하마스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극우세력들이 테러의 주범들이다. 이들은 텔아비브의 번화한 거리에서 시내버스를 폭발하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며 이스라엘 군인을 납치 살해하는 것을 알라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LO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상은 다른 아랍권에 영향을 주어 1994년 7월에 라빈 수상과 요르단의 후세인 왕과의 최초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요르단은 실제로 380㎢의 영토를 돌려 받을 뿐 아니라 用水도 공급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국경지대와 접한 시리아 레바논을 제외한 아랍권의 3개국과 평화협상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PLO가 1988년에 동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지역을 영토로 독립국가 건국을 선포하였는데 100개국에서 승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축소된 제한된 자치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맺은 데에는 PLO의 입지가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최대의 후원국이던 구 소련이 공증분해 되었다. 걸프전 이후 아랍국가들이 분열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상황이 작용한 결과였다.
1987년이래 무슬림 형제단 아랍 민족주의 운동단체에서 갈려나온 하마스, 지하드가 급속히 PLO대신에 세력을 잡아 나가자 PLO는 차선의 선택으로 이 제한된 자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PLO의 자치가 시작되었다. PNA(The Palestinian National Authrity)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 자치지구는 가자지구, 여리코 지구에 제한되어 있고 우리 나라 경기도의 60%에 해당하는 면적 6,200㎢이며 현재 2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PNA는 독자적인 자체경찰 9,000명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교육, 문화, 관광, 조세 등의 업무에서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외교권은 없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대도전 받고 있다. 열악한 경제사정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PNA의 실패는 그 동안의 평화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써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에는 가자지구와 서안지대에 166개의 정착민들이 있으며 골란 고원에도 13,000명의 정착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만약에 자치구역이 확대될 경우 이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들의 반발은 극렬하다.
이스라엘 내에서 평화협상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들 정착민 뿐만 아니라 우익사회단체, 야당인 리쿠트黨 일부 군부세력들도 반대하고 있다.
PLO내에서 평화협상에 반대세력은 앞서서 설명한 하마스, 지하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평화로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제적인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두 측의 강경론자들의 비타협적인 자세, 테러, 도전 받는 팔레스타인 자치 등이다.
아랍권, 팔레스타인과 이미 진전된 평화협상을 뒤엎기는 어렵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한국중동학회 회원이며 중동문제 전문가인 한국외국어 대학교 홍순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생존권과 안보문제에서 유대인 정착민의 생존권과 안보문제로 중동문제는 축소되고 있다"
5) 정치
히브리어로 나시라고 부르는 대통령은 그 임무가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이다. 실제적으로 행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후보자개인 보다는 정당에 대한 투표에 근거한다. 단원제 의회인 크리세트는 이스라엘의 의회이다. 의회는 10개의 상임위원을 두고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토론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지만 의원들도 아랍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두 가지 언어가 다 공용어이다.
사법부는 완전히 독립되며, 법관은 3명의 대법원 판사, 2명의 이스라엘 법조계인사, 4명의 공직자(장관, 국회의원)로 구성된 9인의 특별의원회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스라엘에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이스라엘 방위군이 있다.
6) 이스라엘의 경제
가. 고도 성장한 이스라엘 경제
이스라엘 경제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초고속으로 성장하였다.
이스라엘은 다른 서방들이 3-4%내외의 군사비를 지출하는 반면에 지금도 GDP의 15-20%의 군사비를 지출해야 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경제구조가 석유일변도의 단순한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하여 잘 발달된 산업을 기반으로 공산품을 수출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선진국형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조업이 GDP에 차지하는 비율은 30%에 가까우며, 수출은 70% 정도가 공산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조업 가운데서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발전되어온 전자, 항공산업, 생명공학 등은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놀라운 경제성장을 한데에는 전 세계에 산재한 유대인들의 지원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의 후원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이스라엘 경제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며, 건국 후 9-10%의 성장을 보여왔던 것이 4차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성장속도가 둔화되었고, 인플레가 연간 200%가 넘었다. 또한 실업이 급증하는 위기 상황도 있었으나 1985년도의 경제 안정화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차츰 정상궤도를 찾게 되었다.
1990년대에 또 한번 이스라엘 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것은 구 소련의 분해로 무려 53만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두 자리 치솟는 실업률이 경제현안이 되었다.
나. 특이한 혼합 경제체제
이런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야 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국민은 저임 단순한 육체노동을 피하기 때문이다.
집단이 강조되는 분위기 가운데 민간부분 자체에도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역할이 큰 특이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연합단체인 히스타드릇은 정부와 맞먹는 경제활동의 주체이다.
키부츠, 모샤브 등의 농촌공동체도 경제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집단의식이 강조되는 것은 건국 초기의 이주자들로 구성되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행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협력하는 분위기는 예전에 비해서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며 기업들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 고도의 기술에 대한 협력이 필요할 때 키부츠 정신과 모샤브 정신이 재현되고 있다.
다. 평화정착의 관건 팔레스타인의 경제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지역은 가자지구와 에리코시인데 서울의 70%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세계은행이 1인당 GNP가 1991년 기준 $650이하인 저소득 국가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이곳의 경제는 외부에 높은 의존도를 보이며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종속성을 보이고 있다.
1991년말 전체 노동인구의 40%인 12만 명이 이스라엘에 취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저임 노동자로써 국경에서 통제를 받으며 출퇴근하는 불안정한 취업상태에 시달린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경제는 내부에서 소득을 창출하지 못하는 취약한 산업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투자의 소홀로 사회간접자본은 거의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전기도 이스라엘 국영 전기회사의 공급을 받는다.
자치지역에서도 이스라엘의 세겔화가 통용되고 있다. 최근 이슬람 테러단체들에 대한 보복조치로 취업인구를 제한함으로써 양측간의 커다란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PNA가 앞으로 자치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취약한 경제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하며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유지와 직결된 문제이므로 양쪽 다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라. 농업
이스라엘은 제한된 경작지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영농과 수자원의 관리의 효율성 덕분에 경작면적이 증대되었다. 경작면적은 1948독립이후 1,650㎡에서 4,450㎡로 늘어나게 되었다. 농업생산은 16배로 증가하였다. 농작물 유전자학에서 사막 재배기술까지 연구와 발전으로 농수산물의 자급은 물론, 1993년 통계로 연간 6억5천만 달러를 수출하고 있다.
7) 사회, 문화, 종교
가. 사회, 문화
이스라엘 사회는 역사와 종교면에서 하나의 민족이나 수세기 동안 분산되어 있다가 이주라는 방식으로 모였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들은 주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오스트리아로 이주해 간 유대인으로 유럽의 유대인의 후손이며 1930년대 유대인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임), 스파르디 유대인(15세기말 스페인과 포르투칼에 추방당한 후 터어키, 이탈리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에 정착한 유대인들임), 동양계 유대인(북아프리카와 중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 중 고대 유대인 공동체라는 배경을 지닌 유대인들임)들로 나눌 수 있다.
수세기 동안 그 지역에서 살아 온 스파르디, 새로 이주해 온 아슈케나지 유대인들과 나중에 이주해 온 동양계 유대인들간의 인종적인 갈등이 있다. 이런 갈등은 동양계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점차로 증대됨에 따라 극복되어 가고 있으며 미국의 융합을 모델로 사회 문화적 다원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유대인 가운데 극도의 정교 신봉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통치는 메시아 강림 후에 재건될 수 있다고 믿으며, 유대 종교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자기들만의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국가에 대하여 고립된 생활을 하는데 이들을 '하레임'이라고 부른다. 하레임들은 초 정통주의 자들로서 이들도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분파에 따라 투표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국가 기관에 어떤 협력도 거부하는 분파도 있다. 이들은 세속 국가를 증오하며 극단적인 저항운동을 벌이는데 그런데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주의와 유대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복무는 남성과 여성은 18세에 징집되며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 복무한다.
나. 종교
정통 유대교 측에서는 유대교의 동질성을 드러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종교적인 입법을 주장하고 있지만 세속적 유대인들은 이것을 국가의 민주적 특성을 침해하는 것이라 본다.
대부분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은 수니파이며 비유대인구의 76%에 이른다. 기독교 아랍인들은 14만 명이 있는데 그리스정교회(42%), 동방정교회(32%), 로마카톨릭(16%)이다.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국가 선언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긴 하다.
8)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이스라엘은 30년이 넘도록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근래에 두 나라간의 적극적인 관계가 개선되어 1992년에 서울에 상주대사관을 다시 개설하였고, 한국은 이스라엘에 1993년 12월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한국의 고도 산업능력과 이스라엘의 고도기술의 접합은 두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이미 한국의 현대, 삼성, 대우, 쌍용 등이 방문하였고 자동차 수출도 현실화되었다.
한국과 이스라엘간의 교역량도 꾸준히 증가하여 1993년도에는 2억7천5백만 달러에 달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한국에 대한 수출이 1990년 5천5백만 달러에서 1994년에는 1억4백만 달러 증가하였다. 한국으로부터 수입도 1990년 4천7백만 달러 1994년에는 2억3백만 달러로 모두 증가하는 추세이다.
요르단 역사와 지리 (3)
- 김윤기 목사님 정리 -
요르단의 역사와 지리
1. 면 적 : 91,869 ㎢
2. 인 구 : 약 500 만명 / 암만-160만명
3. 수 도 : 암만
4. 종 교 : 이슬람(국교)
5. 언 어 : 아랍어 / 영어, 불어도 통용
6. 통 화 : 요르단 디나르
8. 기 후 :
건조하고 더우며, 겨울은 가끔 눈이 내릴 정도로춥다.
건기(5-10월)와 우기(11-4월)로 분명히 구별되며, 우기에는 집중적인 강우가 있다.
요르단 역사 개관
▶ 구석기 시대 : 500,000 - 17,000 B.C.
네안데르탈인들이 요르단의 남부 지역과 아즈랔(AZRAQ) 부근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다.
▶ 후기 구석기 시대 : 17,000 - 8,000 B.C.
정착지가 생겨났으며, 요르단 남부의 타바가(TABAGA)와 동부 사막 지역, 그리고 펠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 신석기 시대 : 8,000 - 4,500 B.C.
농경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베이다(BEIDHA)와 페트라 근처, 여리고의 정착지들은 자연적인 사회의 발달을 보여준다. 암만의 북쪽 아인 가잘(AIN GHAZAL)의 정착지에서 인류의 조각상을 만들려는 첫 시도가 있었음이 목격된다.
▶ 금속 병용기 시대 : 4,500 - 3,000 B.C.
구리가 처음으로 제련되었다. 요단 계곡지역에서 발굴된 툴레이탙 가술(TULEITAT GHASSUL) 마을의 역사는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로 이루어진 벽과 흙으로 만들어진 가옥들은 프레스코 기법으로 장식되었으며, 도기 제조소와 여러 도구들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 초기 청동기 시대 : 3,000 - 2,100 B.C.
정착지들은 그 규모라든지 다양성, 문화적 산물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아마도 가나안 인들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마을을 정비하고, 농사 기술과 도구들을 발전시켰다. 침략 활동은 이러한 화려한 문명을 먼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 중기 청동기 시대 : 2,100 - 1,500 B.C.
문명의 발달과 교역의 발생은 고대 요르단을 가장 번영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발굴 품들은 예술적 노하우를 가진 막대한 재산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사람들은 한 지역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는데, 일부는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지며, 거기에서 그들은 '힉소스' (외지로부터 온 지도자) 로 알려진 통치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약 1,900 B.C. 경에 가나안 땅에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 적으로는 이 시기가 대략 족장 시기에 해당되며, 아브라함의 이주 후에 이삭, 야곱이 대를 이어 가나안 땅에 살았다. 요셉 때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야곱)의 전체 자손이 이집트로 이주한다.
▶ 후기 청동기 시대 : 1,500 - 1,200 B.C.
이집트와 아나톨리아의 힉소스, 이 두 개의 대제국이 후기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였다.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모든 중동 지역과 그 외의 지역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무역으로 잘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 애굽이 이루어지며, 광야 생활을 거친 후 가나안에 정착한다. 가나안 땅을 각 지파별로 나누어 정착해 가며 초기 사사들의 활동이 전개된다.
▶ 철기 시대 : 1,200 - 332 B.C.
구약 사건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일어난다. 이 시기의 기록들은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증거들을 통하여 정리되어 있다. 항아리와 석상들, 주상들, 이집트의 풍뎅이 모양의 주형물들, 앗시리아의 인장들, 이집트 형식을 갖춘 토기 관등이 이 시기에 속하는 유물들이다. 13세기초에 이곳에 새로운 형태의 농경문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에돔, 모압, 암몬, 아모리 족속을 말하며 철기 문명을 사용하던 자들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며, 모압과 암몬은 롯으로 비롯된 민족이다. 아모리 족속은 셈계의 족속으로 북쪽에서 이주해 온 족속이다. 이들 족속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당시에 요르단에 있던 민족들이다. 이들은 모두 13세기에 철기 문명을 경험하였으며, 이것은 주후 6세기까지 이어진다.
▶ 페르시아 제국 : 549 - 331 B.C.
고레스 왕은 539 B.C.에 그의 영향력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펼쳤고,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고레스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 모두와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었다.
▶ 헬라 시대 : 332 - 63 B.C.
서아시아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헬레니즘 문화를 옮겨왔다. 아랍인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두 알 콰르나니' 즉 '두 뿔을 가진 단 한사람' 이란 의미로 불린다. 고대 왕국은 알렉산더의 제국에 편입되었고 중동의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채택하였으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323 B.C. 알렉산더의 죽음은 그의 제국이 두장군, 프톨레미와 셀루커스에 의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톨레미 2세는 기원전 3세기에 랍바를 재건하였고 이름을 '필라델피아'라 개칭하였다. 나중에 이 필라델피아는 데카폴리스(데가볼리) 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주 후 2세기 로마의 통치하에서 도시 규모가 확장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 전쟁의 과정에서 요르단은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았다. 알렉산더 군대의 목적은 페르시아의 저항군을 격파하는 것이었고, 요르단 지역에서의 페르시아 세력은 약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나누어진 왕국은 프톨레미에 의해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지역에 이르기까지 프톨레미 왕조로 뭉쳐진다.
▶ 나바테안 시대 : 400 B.C. - 160 A.D.
B.C.1세기-A.D.1세기에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라비아인들을 일컬어 '나바테아인'이라 부른다. 구약과 신약에는 이들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들과 연관된 기록으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레다왕 4세(Aretas 4)의 방백이 그를 잡으려고 하자 간신히 도망쳐온 사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고후11:32, 이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설명이 행9:23-25에 나옴).
이에 관련된 또 다른 언급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갔다고 기록한 것으로 (갈1:17),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나바테안의 영토를 뜻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바테안에 관한 것은 디오도루스(Diodorus Siculus), 스트라보(Strabo), 플리니(Pliny the Elder), 같은 고대 작가들의 글을 통해서 얻었으나, 그들의 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정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요세푸스의 글에는 나바테안 들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바테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1812년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나바테아, 즉 성서의 에돔의 수도 페트라(Petra)의 경이를 밝혀낸 후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나바테아 비문(Nabatean inscription)을 판독하는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주로 장례식이나 봉헌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1930년대에 와서는 나바테아 영토에 대한 철저한 고고학적 탐사가 행해졌는데, 그 결과 이들의 문명과 왕국의 범위에 대한 분명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바테안들이 B.C. 6세기초에 이곳으로 이동하여 에돔 땅을 점령하자, 에돔 사람은 유대의 남부로 쫓겨나 살게 되었던 것 같다. 이 같은 이동이 군사적인 정복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계속된 침입으로 이루어진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아 그들은 B.C.4세기에 이미 에돔과 모압 땅에 정착했고 네겝(Negeb)의 남부와 와디 엘 아라바(Wadi - El-Araba)를 점령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요새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영토를 남쪽과 동쪽으로 더 확장해 다음 세기에는 네겝 지역 안에 아브데(Abde), 쿠르눕(Kurunb), 스베이타(Sbeita) 같은 요새들을 새로 세웠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으며, 그 같은 상태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B.C.333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바테아의 역사에서 최초의 분명한 연대는 B.C.169년으로 이 해에 야손(Jason)이 아레다(Aretas)의 성전을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야손은 유대 대 제사장의 직위를 얻으려던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아레다 왕은 나바테아의 폭군이었다(마카베오 하5:8 에는 '아레타스'). 아레다 2세는 B.C.96년 통치했던 왕으로 수리아 왕조의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Jos.Antiq,8) 이때부터 나바테아 왕의 이름과 그들의 통치 기간이 알려지게 되었다.
즉 오보다스 1세(Obodas 1, B.C.95-87년), 라벨 1세(Rabel 1, B.C.87년경), 오보다스 2세(B.C.62-47년), 말리쿠스 1세(Malichus 1, B.C.47-30년), 오보다스 3세(B.C.30-9년), 아레다 4세(B.C.9 -A.D.40년), 말리쿠스 2세(A.D.40-70년), 라벨2세(A.D.70-106년)등이 통치했다. 이 기간의 대부분은 나바테아 사람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들의 공동의 적인 수리아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 협조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영토적으로 서로 경쟁자였던 그들은 결국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한 번은 헤롯 안디바가 그의 조카딸이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나바테 왕의 딸과 이혼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전쟁에서 때로는 유대인들이 승리하고, 때로는 나바테안들이 승리할 때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나바테안들이 유대의 베뢰아와 헬라의 데가볼리의 동부지역, 즉 요단 동편의 북부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B.C.85년에는 자유도시 다메섹 시민들이 아레다 3세를 자기들의 통치자로 초청하기도 했다. 나바테안들은 폼페이우스가 그 도시를 점령한 B.C.65년까지는 그곳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A.D.37년경 칼리 굴라(Caligula)가 다시 나바테안들에게 그 도시를 주었으므로 A.D.54년경 네로(Nero)의 통치가 시작될 때까지 그들은 계속 남아 있었고, 그후 나바테 왕국은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졌다. 남부 지방에는 많은 나바테안들이 살고 있었는데 북부 지방과의 경계는 마다바(Medeba)를 거쳐 동으로 이어진 하나의 선으로, 동쪽으로는 바이르(Bayir)샘까지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한편 북부지방은 단순히 나바테의 통치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남부와 북부 지방은 팔레스타인의 동부 사막에 있는 와디 시란(Wadi-Sirhan)이라는 상업로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나바테안들이 통제했다. A.D.106년 , 라벨 2세가 죽자 트라야누스(Trajanus)는 모든 나바테 왕국을 합병했다. 이것은 파르티아(Parthians)에 대한 전쟁을 계획하면서 남부 측면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이후로 그들의 번영은 잠시 더 계속되었지만, 이 때 합병된 이후 나바테아는 더 이상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 244-249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 필립(Philip the Arab)은 나바테안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는 하우란(Hauran)의 보스트라(Bostra)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독립을 얻지 못한데다가 로마 제국에 닥쳐온 재앙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나바테안들은 그들의 동질성을 잃어버린 채 그 지방의 다른 주민들 속에 동화되고 말았다.
▶ 로마 시대 : 63 B.C. - 330 A.D
로마의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이 후(63 B.C.)에 팔레스타인을 장악했던 셀루커스 왕조를 무너뜨린다. 풍부한 로마의 지방 도시들이 현대 요르단의 도시들이 있는 곳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일명 데카폴리스로 알려진 열 개의 지방 도시들이 상업적, 군사적 목적에서 연맹체를 이루었으며, 무역을 발달시키는 한편, 유대와 나바테아 세력을 공동으로 견제하였다. 그들의 대다수가 요르단 지역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필라델피아(암만), 게라사(제라시), 가다라(움 카이스), 펠라, 디온 (이르비드)등이 데가볼리의 도시들이다. A.D.106년에 로마는 나바테안 세력을 합병하였고, 그들의 무역로를 관장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당대의 평화는 무역에 적합한 안정된 환경을 이끌어 내었고, 잘 닦여진 로마의 최고의 도로들이 일익을 담당했으며, 보다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 졌다.
▶ 비잔틴 시대 : 324 - 632 A.D.
무역로는 멀리 동부 지역까지 확장되었으며 그 길을 따라 농업이 발달하였다. 로마의 황제가 콘스탄틴으로 바뀐 후에는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기독교가 중동 지역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기독교 유적지에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면서 이 지역은 번성되었다. 527-565 A.D. 저스틴(JUSTINIAN) 황제 때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여러 마을들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지금까지 당시에 교회를 장식했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보존되어 있다.
▶ 아랍 왕국 : 634 - 1,099 A.D.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고, 636A.D.의 야르묵 전투에서 아랍 모슬렘 군대가 대 승리를 거둔 후 대부분의 중동 지역은 아랍의 통제하에 놓여졌다. 예루살렘이 정복되었고(638A.D.) 곧이어 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 모슬렘의 영향하에 놓였다. 8세기에 들어 모슬렘의 세력이 스페인으로부터 북 아프리카 지역을 지나 중동과 페르시아 지역, 인도까지 확산되자 다메섹은 메카로의 순례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점차 이슬람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마야드 시기에는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 십자군 시대 : 1,099 - 1,268 A.D.
십자군의 침입으로 중동 지역에는 십자군의 요새가 건설되었다. 케락이나 쇼박과 같은 요새들은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일조하였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들에게 통행료를 징수하는 장소의 역할을 했다.
▶ 마멜룩 시대 : 1,263 -1,516 A.D.
이집트에서 발생한 강력한 아유비드(AYYUBIDS)가 일어나 많은 요르단의 요새들을 지배하고 재건했다. 1,400년에 몽골의 타물레인(TAMURLAIN)에 의한 침입이 있었으나 마멜룩에 의해 물러갔다. 그러나 이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오토만 제국이 지배하기 전에 분열되었다.
▶ 오토만 터어키 시대 : 1,516 - 1,918 A.D.
터어키의 지배권은 4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아랍 세계가 그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요르단의 중요성은 메카와 메디나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
▶ 영국 위임 통치 시대 : 1,919 - 1,946 A.D.
1916년 터어키의 지배하에 샤리프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 혁명군이 영국의 지원하에 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오토만 터어키의 지배가 종식된 후에는 영국의 위임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1921년 3월에 압둘라 토후는 트랜스 요르단 토후국을 건설하고 1023년 5월, 영국은 요르단의 독립을 인정하나 진정한 독립은 23년이 지난 후인 1946년 5월 22일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 현대의 요르단 : 1,946 A.D. --- 현재
런던 협정으로 요르단은 영국의 위임 통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고 1946년 5월 25일에 압둘라 토후의 국왕 즉위와 함께 트랜스 요르단 하심 왕국이 탄생된다. 1947년에는 헌법을 공포하고 양원 의회가 창설되었으며 1949년에는 국명을 트랜스 요르단에서 요르단으로 변경한다. 1951년에 압둘라 국왕이 예루살렘의 엘 앜사 사원에서 피살됨으로 그의 장남인 탈랄 국왕이 즉위를 하나, 단 1년만에 왕위를 17세의 후세인에게 물려준다. 후세인 국왕은 그가 1998년 2월에 서거하기까지 대외 외교의 수완가로서, 중동 평화를 위한 중재자로서, 세계사에 위대한 자취를 남겼으며, 현재는 후세인 전왕의 장남인 압둘라 국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다.
성경의 땅 요르단의 지리
성경을 접하면서 이스라엘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이 요단 동편 지역, 즉 현재의 요르단이다.
현재의 요르단 왕국은 성경에 요단 동편 지역으로 언급되는 곳으로, 주요한 네 개의 강을 경계로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최북단은 골란(바산) 고원 지역으로 갈릴리 바다 남단 동쪽에 위치한 야르묵 강의 북쪽을 말하며, 야르묵 강에서 아르논 강까지는 길르앗 산지로 구분된다.
아르논 강의 남쪽 지역은 세렛 강을 경계로 북쪽의 모압과 남쪽의 에돔이 위치해 있으며, 또한 길르앗 산지의 얍복 강과 아르논 강의 동부는 암몬의 지역이다.
◈ [구약 시대]
▶ 바산 골란고원 지역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평지로 상부 골란과 하부 골란으로 나뉘어 진다. 좋은 목초지가 형성되어 있어 목축에 적합하다. (시22:12, 암4:1, 겔39:18) 성경에 하우란산 또는 바산으로 언급되는 고지대이다. (신4:43, 수20:8, 21:27, 대상6:71) 야르묵 강을 경계로 길르앗 지역과 구분된다.
▶ 길르앗 산지 지역
얍복 강을 경계로 상부 길르앗과 하부 길르앗 지역이 구분된다. (수12:2,5)
지형이 대체로 높고, 나무들이 많아 유향으로 유명하다. (렘22:6, 신3:12, 삼하18:8,렘8:22, 46:11) 강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지로, 특히 얍복 강과 같은 계곡은 붉은 사암 층이 만들어낸 깊은 협곡으로 브누엘, 마하나임, 숙곳을 통하여 요단 강으로 내려온다. 높은 지역은 해발 1000 미터가 넘으므로 일반적으로 '고원' 또는 '산지' 로 부른다. 출애굽 시대에는 '아모리 족속의 땅' 으로 불렸으며, 이스라엘에 정복당한 후,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수13:15-28)
▶ 암몬 지역
일반적으로 암몬의 서쪽 경계는 요단 강이고, 동쪽 경계는 시리아 사막, 남쪽 경계는 아르논 강, 북쪽은 얍복 강으로 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 땅을 차지하고 난 뒤에 아르논 강으로부터 사해의 북단 끝까지는 르우벤 지파 (수13:15-23), 사해 북단으로부터 얍복 강까지는 갓 지파 (수13:24-28), 이 두 지파가 과거 암몬 족속의 땅을 대부분 분배 받는다. 그때 암몬 족속은 현재의 요르단의 수도 암만, 즉 랍바를 중심으로 동편의 땅 일부를 차지하고 남게된다. 성경에서는 길르앗 지역과 암몬 지역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 모압 지역
모압 지역의 경계는 서쪽은 사해, 동쪽은 사막지대, 남쪽은 세렛 강, 북쪽은 아르논 강이나, 성경은 종종 모압 북쪽의 여리고 맞은편 평지를 일컬어 '모압 평지' 라고 부른다. (민:21:12-14, 20, 22:1, 수13:32) 산지는 주로 해발 900 미터 이상 되는데, 이러한 고산 지대는 겨울철에 풍부한 습기로 인해 포도와 농사에도 적절할 뿐만 아니라, 좋은 목초 지를 형성하여 목축에도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모압 땅의 환경으로 인해 모압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로, 모압의 조공은 해마다 새끼양 털 10만과 수양의 털 10만을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바쳤다. (왕하3:4)
▶ 에돔 지역
에돔은 '붉다'는 뜻이며, 붉은 빛을 띠는 누비안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창25:25, 36:8-9) 북쪽 경계는 세렛 강, 동쪽은 요르단 사막, 남쪽은 홍해, 서쪽은 아라바로 주로 아라바 동쪽에 위치한 이 지역을 일컬어 '에돔땅' 이라고 부른다. 성경에 '세일', '에돔', 또는 '에서의 산지'라고 일컬었다. (창36:8, 신2:15, 대하20:23) 에돔 산지의 융기로, 높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쪽보다 남쪽이 750 미터 이상 더 높은데, '페트라' 근처의 '호르산'은 1450 미터이나 아카바 동쪽의 '알 히스마 산'은 그 높이가 1800 미터 이상 된다. 이러한 요새와 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에돔 지역은 자주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고원 지역은 아주 널따란 초지를 형성하여 목축에 적합하다.
◈ [신약 시대]
▶ 베뢰아 지역 (베레아 PEREA)
'건너편의 땅' 이라는 뜻의 베레아는 요단강 동편 요르단의 요단 골짜기를 따라서 사해 북동쪽의 유대인 지역을 말한다. 동으로는 거라사(제라시)와 필라델피아(랍바 암몬), 히스반, 마다바와 경계를 이루었다. 주요 도시는 가다라(움 카이스), 아빌라와 리비아스(벳세다)이다. 페르시아 제국 때는 이 지역을 토비아드(TOBIADS)가 다스렸다. 하스몬 왕가의 마카베는 인근 아랍 나바테안들로 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보호하였다. 요한 힐카누스 1세는 나바테아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베레아 지역을 확장하였다. 후에 헤롯 대왕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가다라를 이 지역의 수도로 삼았다. 헤롯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가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나바테안들에게 동부 지역을 빼앗겼다. 뒤에 이곳은 아그립바 2세의 영지가 되었으며, 제 1차 유대인 폭동때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헬라의 통치 아래에서 베레아는 얍복강의 남단, 모압 평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제한된 지역이 가지고 있던 이름이었으며, 헤롯 대왕의 통치 이후 예수님 시대에는 북으로는 펠라의 남부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아르논 강에 이르는, 마다바와 필라델피아(랍바 암만)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을 폭넓게 일컫는 지명이 되었다.
▶ 데가볼리 지경
로마 시대에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기원전 63년 이후에 형성되었다. 몇몇 도시들이 새로이 지어지고, 10개의 도시들이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을 데카폴리스 연맹(데가볼리 지경)이라 하였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는 북부 요르단 지역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마4:25) 데가볼리의 경계는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도시들은 남쪽으로는 베레아와 북쪽으로는 헤롯 빌립의 영지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이 도시들 중 요단강 서편의 스키토폴리스(벧산)는 지중해를 상하로 잇는 해변길의 교통로였다.
도시 연맹은 상호 경제적인 이익의 확보와 인근 민족들로부터의 공동 방어에 목적을 두었다. 이들 도시들은 시리아의 로마 총독(통치자)에게 복종하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적었다. 연맹에 소속되었지만, 도시 각자가 자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개의 작은 마을이나 도시를 포괄하고 있었다. 또한 각 개별 도시들의 역사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연맹의 존립 자체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 연맹체는 2세기까지 존재하면서 풍부한 헬레니즘 문명을 만들어 내었다. 데가볼리의 가장 초기의 언급은 신약 성경 (마4:25, 막5:20)이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의 처음 수도였고, 이어서 다마스커스가 이어 받았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키토폴리스가 가장 큰 도시였다.
▶ 이두매 지역
구약의 에돔 지역을 헬라화 시켜서 부른 이름으로, 이 이름은 '붉다'는 의미를 지닌 '에돔'에서 파생되었다. 오늘날의 지정학적 구분으로는 사해 남단의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포함하고 있다.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기원전 3세기)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곳은 이집트의 해외 전초 행정 본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원전 163년에는 셀루시드 조르지아스 장군의 통치를 받으면서 다시 정비되고 확장되었다. 헤롯의 통치시기에 이두매 사람들은 왕실 친위대의 핵심 세력을 이루었다. 이것은 헤롯 대왕 자신이 이 지역 출신인 까닭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성지의 도로
1. 국제 해안 도로 (해변 길 : VIA MARIS 사9:1-2, 19:23, 마4:15)
이집트 - 가사 - 해안 평야 - 아벡 - 므깃도 - 이즈르엘 평야 - 아르벨 계곡 - 갈릴리 바다(막달라 평지) - 훌라 분지(하솔, 단) - 다메섹 - 바벨론
2. 왕의 대로 (KINGS HIGHWAY 민20:17)
이집트 12 왕조의 파라오, 세소스토리스 1세가 처음 북방 무역의 길을 열기 위해 가나안 경영에 착수했으며, 신왕국에 들어 와서는 투트모스 1세 때부터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 시리아를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정복했다는 기록과, 지리적으로도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보다 요르단에 훨씬 가깝고, 당시 이집트의 국력에 비추어 모세의 출애굽 이전 시기인 중왕국이나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가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요르단의 남북으로 길게 종단하고 있었으며, 이 대로는 낙타를 이용한 대상들의 무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바벨로니아, 앗수르, 터어키 지역의 힛타이트, 이란의 페르시아 등의 여러 제국의 군대와 문물이 오가던 주요한 길이었다.
여기에 동방에서 시작된 비단길의 주요 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왕의 대로를 오가며 이 지역을 장악했던 나바테 족, 로마, 비잔틴, 아랍, 십자군, 오트만 터어키 등은 모두 독특한 문명의 흔적을 이 땅 여러 곳에 남겨 놓아 오늘날 이곳은 진주와 같이 빛나는 소중한 문화적 유적들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아카바 - 에돔 - 모압 - 암몬 - 길르앗 - 바산 - 다메섹 - 바벨론
3. 족장의 도로(PATRIARCHS' ROAD 창세기)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이용했던 길, 중앙 산악 지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이다.
세겜 - 실로 - 벧엘 - 미스바 - 라마 - 기브아 - (예루살렘) - 베들레헴 - 헤브론- 브엘세바
4. 사막의 도로(DESERT HIGHWAY 에돔, 모압 광야길)
고대 모슬렘들의 '순례의 길' 이기도한 도로로, 미디안 지역(사우디 아라비아)과 동부 아프리카를 연결하였고, 국제 무역을 통한 에돔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던 도로이다. 지금은 마안으로 부터 수도 암만 까지 사막 고속 도로가 뻗어 있다.
* 이들 도로 중 왕의 대로와 사막의 대로가 현재의 요르단에 속해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