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택 충청대 학장
아주 특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성공여부는 사람과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성공을 꿈꾼다면 우선 원만하며 겸손하고 자기를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성공을 하려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성공을 거두려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했고, 상사가 지시하는 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자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동료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지시사항은 모두 실천해야겠지만, 상사를 일로 감동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즉필생의 신념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 본문내용중
성공을 하려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서 토목국 촉탁(囑託)이라는 임시직으로 출발하여 1급 관리관까지 초고속 승진을 한 후 헌정 50년 사상 충북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고향도지사와 5부 장관, 그리고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종택 학장(69세).
96년 환경부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고향인 청원에서 충청대학 학장을 맡아 중위권의 전문대학을 임기 중 전국 최고의 전문대학으로 탈바꿈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충북지역 발전에 누구보다 많은 발자취를 남긴 정 학장도 한때는 자신에게 닥쳤던 고난과 역경에 힘들어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생즉필사(生則必死), 사즉필생(死則必生)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고시 출신을 앞지르기 위해 밤잠을 줄여 가면서 남보다 두 배, 세 배 일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타고난 부지런함을 무기로 상사의 지시를 모두 이행함은 물론 상급자들을 일을 통하여 감동시키려고 노력해 온 그의 인생역정 속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함을 깨우쳐 주고 있다.
나의 학창 시절
나는 송강 정철의 13대 손(孫)이다. 어릴 적 이를 주지시키며 행동이 남달라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아버님은 내가 5학년 때 해방이 되자 한글(諺文) 대신 한문(眞書)을 배우라고 하기에 다니던 초등학교를 그만 두고 동네 서당으로 옮겼다.
서당에서 3개월 간 천자문을 공부하다 보니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장날 오창면 소재지를 지나다 학교에 들르게 되었는데 유리창 너머로 한글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 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래 아이들이 다 배우는 한글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부터 아버님 몰래 다시 학교를 다녔으나 공백기간이 길어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덕분에 6학년으로 올라갈 때 치른 국어성적은 32점 과락(科落)으로 반에서 최저 수준을 밑돌았다.
47년 7월 문교부의 학제변경으로 중학교도 시험제로 바뀌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한 선친이 중학교 진학을 허락할 리 만무했으나 당시 증평 중학교는 집에서 약 8km정도 떨어져 있었고 누님 댁이 그곳에 있어 신세를 지면 될 듯싶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책 보따리에 중학교 입학원서를 소중히 싸서 등에 메고 오창, 오근장을 지나 충북선 철길을 따라 내수, 증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화를 내실 아버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철길을 따라 내수 방향으로 가려면 철교를 지나야 하는데 장마가 져서 그 밑으로 시뻘건 흙탕물이 무섭게 흘렀다. 기차가 오면 그 물로 뛰어들어야 할 판국인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흐르는 물속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흙탕물과 기차가 달려올 앞과 뒤를 번갈아 보면서 건너는 철교 다리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옷은 흠뻑 젖어 있었으나 책 보따리를 풀어보니 입학원서는 괜찮았다.
아버님은 다행히 외아들인 내가 중학교에 입학 후 공부를 열심히 하자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셨다.
새로 개교한 증평중학교는 교사(校舍)가 없어 담배 창고를 개축하여 사용했는데 독한 니코틴 냄새가 항상 교실 안을 진동했다. 이러한 기억 때문에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흡연은커녕 담배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학창시절 나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다. 학년 대항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항상 5등 이내에 들어 학교 육상부에서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했다.
50년 6월초 3학년을 마칠 무렵 각 시 도에 1곳씩 영재를 뽑는 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충북에서는 청주중학교 구내에 청주고등학교가 신설되어 신입생을 모집했다. 문과와 이과로 나눠 시험을 치렀는데 나는 이과에 합격됐다.
그런데 고교에 입학한 지 보름 만에 6.25 사변이 터졌다. 아버님은 집 뒤에 토굴을 파서 폭격과 인민군의 수색을 피했고, 그러다 보니 소를 기르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선친께서는 언제나 부지런하셔서 베머기 소 10마리를 만들어 다른 농가에 주었는데 전쟁이 나자 마을사람들이 기르던 소를 다 반납하는 바람에 모두 11마리의 소를 먹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소들을 새끼줄로 엮어 미호천 제방 쪽에 몰고 가서 풀을 뜯겼다. 목동생활은 수복 후에도 계속되었고, 그 바람에 거의 출석을 하지 못하여 한때 유급의 위기도 맞았으나 다행히 기말시험 성적이 좋아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나의 고교시절은 소를 기르고 농사를 짓는 등 농부의 생활을 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유급, 고시실패의 서울대 법대 시절
중농(中農)의 가정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에는 경제적으로 빠듯했다. 나는 달동네인 서울 마포구 공덕동 산꼭대기에 방 한 칸을 얻어 대학 1~2학년 때 1년 반 정도를 이곳에서 지냈다.
그러나 아궁이가 막혀 엄동설한에도 불을 지필 수 없는 냉방에서 무명 이부자리 하나로 버텼으니 몸이 성할 턱이 없었다.
결국 한기가 이불 위에까지 올라오면서 냉병을 앓아 골병이 들었고,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허리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남들이 인정해주는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이었기에 고시공부에 매진했으나 집에서는 여전히 나의 일손을 필요로 했다. 할 수없이 등록금만 내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님은 이러한 나를 측은히 여겨 여천리 집 뒷산에 공부방을 만들어 주셨고 나는 이곳에서 홀로 고시에 전념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은 한 학년 당 3백 명이었고, 고시 합격자는 1회에 10~15명 정도 배출될 때였는데 3학년과 4학년 때 두 번에 걸쳐 사법고시에 도전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사실 고시에 합격하려면 주위의 자극도 받고, 때로는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정보교환을 하며 훌륭한 교수들의 명 강의도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논도 팔고 소도 팔아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못되는 데다 자신도 없었고,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일찌감치 고시를 포기했다.
3~4학년 때에는 주로 시험기간에만 학교에 들러 기말시험을 보곤 했다. 특히 4학년 1학기 때에는 아예 강의도 듣지 않고 시골에 내려와 아버님을 도와드리다가 결국 한 학기에 최소 15일이라는 출석일수를 채우지 못해 유급을 당했다.
그때 서울대 법대생 1천 2백 명 중 10%에 해당되는 120여명이 출석일수 미달로 시험을 보지 못해 유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등록금이라도 내 손으로 벌어보겠다는 생각에 충청북도 문교 사회국장으로 계신 정희택씨(現 러시아 정태익 대사 부친)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광혜원 중 고등학교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광혜원 중 고교에서의 짧았던 교사 경험
시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꿈꾸던 사법부나 행정부가 아닌 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학생들과 어울려 축구와 평행봉 등 운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광혜원 중 고등학교 교사시절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인근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 있었던 기관 대항 400m 계주 경기였다.
광혜원 중고 교사 팀은 무적함대로 항상 우승을 독차지하였으며 첫 주자는 남동우 체육교사가, 마지막 주자는 내가 맡았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드림팀이었다.
광혜원 중고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고교생들은 나와 연령 차이가 적어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고 특히 여학생들이 잘 따라주었다. 나는 영어와 일반사회, 독일어를 가르쳤다.
제 2외국어인 독어는 가르칠 선생이 없어 신참인 내가 맡았는데 실력이 부족해서 고전했다. 당시는 영어 참고서도 적었지만 독일어 참고서는 구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신현숙이라는 여학생이 독일어를 가장 잘 했는데 독일어에 대한 관심도 없는 다른 학생들과 수준을 맞출 수 없어서 서울에서 학습 참고서 한 권을 사다주며 자습하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런데 훗날 그 학생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여상의 독일어 선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혜원 중고 제자 중에는 박도근(쌍용증권사장), 신덕현(감사원 차장), 방용석(노동부 장관) 등 성공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보람도 느꼈다.
이렇게 해서 1년 3개월의 교사생활을 마치고 동기들보다 1년이 늦은 58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내무부 임시직 촉탁(囑託)에서
정식 직원이 되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곧바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시고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진천 출신 정운갑 의원 등 주위의 도움을 받아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토목국 임시직 촉탁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 서울대 법대 동기인 김용래가 23살의 나이로 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지방국 행정과로 부임해 왔다.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를 통해 월반을 하여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던 그는 훗날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총무처장관 등을 역임한 수재 중에서도 수재였다.
당연히 임시직으로 있던 나는 친구와의 접촉을 피하며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 느낀 좌절과 열등의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으나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말단에서 사무관까지 승진하려 해도 10년의 세월이 걸리던 시절 내 입장에서는 우선 당장 임시직에서 정식 직원으로 되는 것이 급선무이자 일차적인 목표였으나 이마저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3.15 부정선거가 터지면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부가 수립됐다. 이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내각 총리 정권이 출범했다.
만년 야당을 하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민주당 거물 급 국회의원들에게 민원이 쏟아졌는데 가장 많은 것이 취업 청탁이었다.
수많은 이력서가 직접 내무부 장 차관에게 접수되자 이들은 자릿수보다 몇 십 배 많은 청탁에 인심을 잃을 것을 우려해 아예 공개채용을 하기로 결정했다.
공채는 지방국에 세 자리, 총무과에 한 자리 등 모두 4 자리였다. 당시 지방국은 지방정부를 지도 감독하고 시장군수, 도 간부, 시도 지사, 장 차관으로 승진해 가는 직선 코스였기에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
내무부 서기와 4급 촉탁 중에서 자격자 50명을 선발 심사하여 시험을 본 결과 운 좋게도 1등으로 합격하여 지도과 병사계로 배치를 받았다.
병사계에는 손수익 서울법대 1년 선배(후일 충청남도 지사, 교통부장관 역임)가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 후 배치되어 앞뒤 자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성어에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그처럼 누구나 영광과 부침(浮沈)을 거듭하게 마련인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시직 촉탁에서 내무부 정식 직원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1년 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세상이 뒤바뀌었다.
혁명정부가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공무원을 전원 축출하라.������ 는 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5대 독자였기에 면제 혜택을 받았으나 혁명기에는 이 역시 통하지 않았고 처와 두 자식을 둔 나는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결국 사회활동을 하려면 입대하거나 국토개발단에 가야 했는데 나는 떳떳하게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받은 IQ테스트에서 140이 나오자 지능검사 점수와 행정부 경력을 고려하여 부관병과로 분류되었다. 젊었을 때는 운동에 자신이 있었으나 30세에 입소한 훈련소 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고된 논산훈련소와 영천에서의 부관학교 교육을 마치자 육군본부로 발령이 났고 보직은 부관감실 관인반으로 결정되었다. 통일호를 무임승차할 수 있는 출장명령서 등의 관인을 가지고 업무를 보는 일이었다.
주말만 되면 육본 근무 장교들이 휴가증을 타기 위하여 부관감실로 몰려왔다. 2대 이상 독자였기에 8개월 만에 군 생활을 마치고 육군 일병으로 제대하여 공무원 복직 신청을 했으나 지방국 전체 직원이 40여명에 불과해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다.
취업을 하고자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한 곳도 오라는 데가 없어 허송세월을 하던 중 뒤늦게 복직의 기회가 열렸다.
내가 가게 된 부서는 내무부 지방국 재정과 시 군계 주사보로 도와 시, 군, 읍, 면, 동의 재정을 뒷받침 해주는 자리였다.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의
신념으로
나의 동문인 고건 김용래 손수익 김태경 등은 고시에 합격하고 내무부에 배치되어 첫 출발을 5급 사무관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임시직으로 출발하여 7급으로 있는 내가 과연 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상사의 인정을 받아 승진을 한다 해도 1급 관리관까지는 못 갈 것 같았다.
임시직에서 벗어나 어렵사리 정식 직원은 되었지만 꿈은 고시에 합격한 동기생보다 높았던 나였다. 이때 나는 결심했다. 먼저 고시 합격자들을 따라잡으려면 이들보다 두 배, 세 배 일을 해야 하고 그들이 자거나 쉴 때 열심히 일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순신 장군이 즐겨 쓰던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 의 좌우명을 책상 위에 써 붙인 뒤 죽기를 각오하고 뛰고 또 뛰기로 마음먹었다.
성공을 거두려면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했고, 상사가 지시하는 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동료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지시사항은 모두 실천해야겠지만, 상사를 일로 감동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즉필생의 신념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런 내 눈에 처음으로 띈 것이 지방재정 교부금 문제였다. 예산당국에 속고 있는 교부금을 파악해 이를 시정하여 지방재정에 보탬을 주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를 선임인 주사와 계장에 상의하자 핀잔만 들었다.
그들의 답변인 즉 ������하라는 일은 않고 쓸데없는 일을 해봐야 소득이 있겠는가, 설사 이를 입증한다 해도 경제기획원에서 들어줄 리 만무하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수를 속여 가면서까지 지방을 무시하고, 지방재정을 어렵게 하는 경제기획원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 뜻을 남문희 재정과장(충남부지사 서울부시장역임)과 김보현 지방국장(전남지사, 체신부장관, 농림장관 역임)에게 보고하였더니 적극 추진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초고속 승진의 계기가 된 지방교부세법
상사들의 격려에 고무된 나는 내무부 청사 가까운 여관에 캠프를 차리고 퇴근만 하면 지방교부세법 처리 방안에 몰두했다. 먼저 착수한 것은 경제기획원(EPB)이 속이고 있는 세수의 물증을 잡는 일이었다.
이를 국세청에 요청했으나 좀처럼 협조가 안됐다. 당시 국세청은 인력이 모자라 농촌 읍, 면, 동의 국세는 지방정부인 읍, 면, 동에서 수납해주고 그 대신 10%에 해당하는 국세 징수교부금을 받는 상부상조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전국의 지방정부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세수를 총 집계해 보니 지방정부에 배정되어야 할 지방교부세가 기획원 관리들의 조작으로 중앙정부에 귀속되고 있음이 파악됐다.
이를 효과적으로 시정하려면 지방교부세법을 개정하여 결산을 한 뒤 다음 연도에 정산하는 제도를 만드는 길 밖에 없다고 보고하자 윗분들도 크게 기뻐했다.
반면 칼자루를 경제기획원에서 쥐고 있으니 그들이 반대하는 예산관련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상사들 사이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나는 이에 물러서지 않고 아예 국회의원 발의로 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이때부터 아침저녁으로 여야 국회의원 댁을 찾아다니면서 설득작업에 들어가 의원발의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는 국회의원 집을 세 곳 정도 들러 출근을 했고, 사무실에 나오면 반드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양 부처의 캐비넷을 무단으로 열어 필요한 서류를 복사해 오곤 했다.
그 결과 백남억, 이충환 여야 정책의장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헌법 개정선인 116명(국회의원 총수 175명) 보다 16명이 많은 132명의 서명날인을 받아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기영 부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내무부 재정과에 있는 실무자 한 사람이 여야 국회의원들을 총동원하여 지방교부세법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이 법이 통과되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큰 차질이 생길 것.������ 이라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크게 진노하여 정구영 민주공화당 의장 서리에게 법률안이 당장 철회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결국 그날 저녁에 비상 당무회의가 소집되었고 장 부총리는 당 중진들에게 ������이 법을 취하하면 당신들 지역구 시 군에는 몇 배 더 많은 보조금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하겠다.������ 며 역공세를 펴고 나왔다.
나 또한 ������지금 후퇴하면 지방재정은 백년하청이니 끝까지 싸울 것이며 문제가 생기면 혼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 고 말하자 상사들도 진퇴양란이 되었다.
다시 공화당 당무회의가 열리는 반도호텔 회의장을 찾아가 참석의원 한 분 한 분을 붙들고 설득했다. 회의는 3시간이 넘도록 진행됐으나 찬반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입장이 거북해진 정구영 당의장 서리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산회를 선포한 후 사직서를 제출하고 온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경제기획원과 청와대 일각에서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냇물을 흐린다.������며 나를 집중 성토했다.
집권 여당의 당의장이 사표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었으나 난리를 치른 이후에도 해당 법안은 국회에서 심의도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국회에서 잠자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제 2단계로 이만섭 의원을 찾아갔다.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 의원에게 장 부총리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지방교부세를 속여 지금 일선 읍, 면, 동에서는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 의원이 세수를 속여 가며 지방재정을 어렵게 한 경제기획원의 부도덕성을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질타하자 장 부총리와 기획원은 입장이 난처해졌고, 그는 이 발언으로 일약 스타 국회의원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지방교부세법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상사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덕분에 직급 당 승진 연한만 차면 승진이 되어 65년 주사 3년 만에 사무관으로, 그것도 가장 요직이라는 교부세 계장 보직을 맡게 되었다.
지방교부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박경원 장관이 장 부총리의 미움을 받아 물러나고 후임으로 이호 장관이 부임했다.
장 부총리는 신임 국무위원 축하 만찬 자리에서 이 장관에게 ������정종택 사무관의 사표를 받든가, 지방으로 전출시키면 지방국은 물론 치안국의 예산도 잘 봐 주겠다.������ 면서 나의 퇴진을 간곡히 요청했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이 장관은 내무부 간부들에게 사연을 알아본 뒤 나를 불러놓고는 ������앞으로 조심하라.������ 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격려를 해주셨다.
그 이후 이 장관은 경제기획원과 충돌되는 사안은 일체 결재하지 않았으나 ������장관님의 묵시적 승인으로 알고 제 책임 하에 추진하겠다.������ 고 하면 말없이 승낙해 주었다.
얼마 후 물러났던 박경원씨가 내무부장관으로 재차 부임했다. 입장이 난처해진 장 부총리는 나를 서기관으로 승진시켜 기획원으로 스카우트를 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그러자 박 장관은 사무관이 된 지 4년 밖에 안 된 나를 서기관으로, 그것도 고참들이 탐내는 지방국 재정과장으로 발령을 내니 내무부 전체가 또 한 번 술렁였다.
물론 나의 승진은 국회의원 발의 입법으로 지방교부세법을 두 번 더 통과시키고 경제기획원과 10여 년간 투쟁하는 과정에서 3전 3승을 올려 지방재정을 괄목할만하게 신장시킨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새마을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재정과장으로 부임한 후 2년만인 71년 하루는 청와대 홍성철 정무수석 비서관이 경기도지사로 영전한 김태경 정무비서관의 후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나를 지목했다.
반면 새로 부임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은 지방교부세 문제를 내게 맡겨 기획원과 상대하고, 국회 대책도 세우며, 재정국 독립과 국장 승진 등 나름대로의 복안을 갖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강력히 반발했다.
홍 수석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을 전해들은 박대통령은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진짜 일꾼.������ 이라며 나에게 새마을 운동을 맡기라고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서기관 승진 2년 만에 다시 3급인 부이사관으로 수직 승진하게 됐는데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의 발탁 또한 파격적 인사였다.
박 대통령은 내게 ������10명 범위 내의 엘리트들을 발탁하여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라.������ 고 지시를 내렸다.
각 부처에서 차출된 엘리트들로는 송언종 서기관(내무차관, 전남지사, 체신부장관역임), 이원종 사무관(서울시장, 서원대 총장, 현 충북도지사), 한호선 농협과장(농협중앙회장, 국회의원), 유태영 건국대 교수 등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국정의 제 1과제>를 새마을 운동으로 정하고 모든 부처에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3대 정신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 지도층에 대한 새마을 교육이 먼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따라 나는 수원 새마을 연수원을 개설하는 한편 모든 부처의 교육원(직무교육 기관)을 새마을 연수원 체제로 전환하였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위해 먼저 1, 2급 공무원부터 연수원에 1주씩 차출하여 새마을 복으로 갈아 입혀 합숙시키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행하고, 이어 장 차관 국영 기업체 임원 및 개인 기업체 임원들에게 까지 이를 확대하는 등 매년 수천 수만 명을 교육시켰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은 농촌에서 도시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지도자의 강력한 추진 의지와 부락의 성공사례가 발표되고 ������우리도 하면 된다.������ 는 자신감이 확산되면서 새마을 운동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나는 청와대 박진환 특보, 김 준 새마을 연수원장 등과 함께 교육원과 기업체를 밤낮 없이 뛰어다녔다. 어떤 때에는 출근 전 또는 점심시간과 밤에도 특강을 하러 다녔기 때문에 잠은 자연스럽게 차안에서 해결했다.
당시엔 대통령의 지도 이념을 교육할 강사가 그리 많지 않아 나는 새마을 정신의 지도 이념에 대한 강사로 1인자 역할을 하다시피 했다.
청와대와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5년 동안 근무하면서 관계 부처 기업체 등에 새마을 특강을 수천 번 다녔고 아직도 그 때의 일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업체 등 교육기관에서 소정의 특강료 외에 거마비 등 금전적 대가를 받은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나는 이것이 늘 마음에 걸려 이후 76년 고향도지사로 발령받으면서 고해성사를 통해 자수를 했고 그 후로는 청백리 공직자로 새롭게 태어났다.
목장지폐(木長之弊) 인장지덕(人長之德)
목장지폐(木長之弊) 인장지덕(人長之德)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큰 나무가 있으면 주변이 피폐해지고, 큰 사람이 있으면 주변이 덕을 입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백화점이 입점하면 주변의 상권이 죽지만 호텔이 들어서면 주변의 상권이 살아나듯, 사람의 관계도 주변을 빨아먹고 자신만 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주변을 살찌우게 하는 큰 사람도 있는 법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삼천리를 덮는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표현으로 육영수 여사, 전두환 대통령 등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보곤 했다.
60년대 말 충북에는 실내체육관이 없었다. 내무부 재정과장으로 근무하던 나는 정해식 충북도지사에게 체육관 건립에 필요한 철근을 확보하도록 특별교부세를 충청북도에 배정해 놓고, 71년 7월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나는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새마을 현장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하루는 육영수 여사를 수행하는 도중 ������충북의 숙원사업이 무엇이냐?������ 고 묻기에 ������실내체육관������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옥천군이 고향인 영부인께서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당시에는 거북선 모형으로 전국에서도 훌륭한 충북실내체육관을 건립케 해주었다.
또한 비서관 시절 영부인에게 농민을 위한 뽕따기 누에치기를 건의하여 73년 청원군 강내면에서 행사를 치른 적이 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중앙의 예산지원을 받아 잠사박물관을 건립했다.
그런데 이듬해 8월 15일 육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고 타계하셨으니 잠사박물관은 그가 고향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됐다.
한번은 80년대 초반에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청원군 남이면사무소를 지나는데 고속도로 갓길에 유난히 많은 중장비들이 눈에 띄었다.
해당 면장에게 물어보자 청남대로 들어가는 IC를 건설하는데 평상시는 폐쇄하였다가 대통령(VIP) 행차 때만 사용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청남대 건설로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심한데 청남대 때문에 덕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들어야 할 것 아니냐. 기왕 IC를 만들려면 일반 차량들도 활용할 수 있고, 지역주민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고 요청하였다.
청와대 경호실 담당관과 청주 강서 비하동 출신인 이관영 건설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건설부 및 도로공사 기술진들이 현장 답사를 했는데 일반 IC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인 즉 경사가 심하고 굴절이 되는 곳이라, 대형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VIP 인터체인지를 만들면 민심은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재차 설득하여 결국은 남이면 소재지에서 3km 더 남쪽으로 내려온 곳에 IC를 건설하게 됐다.
청원 IC의 건설로 VIP가 결과적으로 왕복 6km를 더 돌게는 되었지만 덕분에 남이 현도 부용 문의 뿐만 아니라 가덕 미원, 보은 그리고 연기군 동면과 조치원으로 연결되는 교통 여건이 크게 좋아지면서 그 일대가 크게 발전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를 개방한 후에는 현재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원래대로 VIP용 IC가 개설됐다면 지금쯤 무용지물이 되어 폐쇄과정을 밟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충북도지사 시절
내무부 기획실장을 하다 고향 충북지사로 내려가라는 발령을 받았다. 임시직으로 출발한 오창면 여천리 촌놈이 공무원 생활 17년 만에 고향 도지사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실로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76년 10월 취임사를 통해 나는 ������8천여 충북 공직자중 부정비리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신임 도지사가 1번일 것.������ 이라고 말하고 ������과거는 피차 불문에 붙이되 다만 오늘 이 순간부터의 부정 비리는 절대 용서치 않는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권 부서, 민원 부서 공무원을 거의 전원 교체하여 부정 비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당시에는 지방의회가 없고 시, 군의회 권한은 도지사가, 특별시 광역시 및 도의회 권한은 내무장관이 대신할 때였으며 시민단체도 미약하여 도지사의 권한은 막강했고,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었다.
도지사가 이권의 최종 결재권자이니 관련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정치권과 권력기관 및 언론기관에 상납하는 먹이사슬 관계가 성행할 때였다.
나는 국회 육인수, 민기식 등 충북 출신 의원들과 검찰, 경찰, 정보부 등 권력기관, 신문사, 방송국에도 이 뜻을 전하고 ������일체 청탁을 하지 말라.������ 고 선언한 뒤 원칙대로 밀고 나갔다. 그리고 총화은행이라는 도민은행을 만들어 이권을 모두 기금으로 흡수했다.
이권에서 소외를 받게 된 도내 권력기관들은 불만스런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내가 청와대 초대 정무 및 새마을 담당비서관 출신으로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과장된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79년 10.26 사건이 터져 박 대통령이 시해되자 나에 대한 모함과 투서가 청와대와 감사원, 검찰, 계엄사 등에 쏟아졌고, 서슬이 퍼런 계엄사령관은 검찰총장에게 충북 지사의 비리를 조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검찰은 내가 서울 법대 출신이기에 고대 법대 출신 허은도 특수부 (현 중앙수사부)부장검사 팀을 충북에 파견했다.
그런데 3일간 외곽조사를 마치고 4일째 되던 날 허은도 부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 ������모금하는데 다소의 무리는 따랐으나 단돈 10원의 판공비도 헛되이 쓴 바 없고 20억 원을 예금하는 등 도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 청백리(淸白吏)를 발견하고 떠난다.������ 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조사결과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면서 누명을 벗은 것은 물론 투서를 계기로 덕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농수산부 장관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건강을 지탱해 준 자전거 타기
나는 초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자전거를 즐겨 탔다. 내무부 재정과와 청와대에 근무할 때는 매일 새벽 아들을 깨워 두 대의 자전거에 나누어 타고 답십리에서 뚝섬까지 왕복 8km를 달렸다.
그곳에서 외아들 태봉에게는 공을 올려놓는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나는 7번 채 등을 휘두르며 골프연습을 했다. 청운동에 이사한 뒤에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중앙청에 들러 테니스를 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출근을 했다.
충북지사로 부임 후에도 아침과 저녁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볐다. 자전거 타기는 건강관리를 위해 시작했으나 지사 재직 시에는 복합적인 목적도 있었다.
70년대 말은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절약을 솔선수범해야 했다. 또한 시 군 출장도 자주 다녀야 하는데 기사가 격무에 시달리면 운전 중 졸게 돼 사고의 요인이 됐다.
따라서 자전거를 타면 건강관리와 에너지 절약, 공해대책은 물론 바쁜 기사를 쉬게 하는 일거 4득의 효과가 있었다.
새벽에 자전거로 나와 거리청소를 하고, 도민들과 공을 찬 뒤 해장국을 먹고, 대중탕에서 목욕을 하면 민정파악은 저절로 됐다.
향교 옆에 있는 도청 뒤편의 지사 관사는 전망이 좋았다. 부지도 꽤 넓어 가끔 꿩도 날아들고 도토리와 밤도 많아 다람쥐가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반면 지대가 높았기에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페달을 힘껏 밟아야했고 그러면 등 뒤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샤워를 하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해졌다.
시내에 나올 때에는 휘발유를 아낀다고 자전거를 주로 탔고, 어두울 때 타면 전등을 켜는 경우도 잦았다.
전등은 바퀴가 도는 힘으로 켜지는데 오르막길에서는 더욱 힘이 든다. 나의 자전거 타기는 비가 오거나 출장 갈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임기 말까지 3년 3개월 간 계속했다.
96년 환경부 장관에 부임한 후에는 극성스러울 정도로 자전거 타기 범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청주국제공항과 나의 인연
청주국제공항이 신행정수도의 관문으로 급부상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초창기 청주공항 건설과 관련하여 나는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공항에 얽힌 사연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76년 10월 충북 도지사로 부임 후 주민들의 민원을 들어보니 오근장 근처의 공군 전투비행장 건설에 따른 불평불만이 대단했다.
즉시 비행장 건설현장으로 가서 브리핑을 받았다. 그러자 부대장은 ������이곳이 우리나라 전투비행장 중 지리적 여건이 가장 좋아 앞으로 팬텀기 등 최신예 전투기가 배치될 예정이며 또한 미 공군이 탄약 창고를 신설하기 위해 토지수용이 추가로 필요하니 지사님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 는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미 공사가 70%이상 진척이 되어 취소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으나 청주지역이 발전하려면 전투 비행장을 반드시 다른 곳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지사의 임기를 마치고 노동청장과 농수산부 장관 및 정무 제 1장관을 거쳐 11대 국회의원을 하고 있을 무렵인 84년 초 교통부에서 수도권 신 공항을 재건설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정보가 내게 들려왔다.
청남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김포공항의 이전계획을 교통부가 수립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축 이전부지는 청주공군비행장으로 하여 주시고 청주 전투비행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고 요청을 하여 반승낙을 얻어냈다.
이 사실을 손수익 교통부장관에게 전했더니 비밀리에 항공국으로 하여금 청주 공군비행장의 이전 문제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며칠 후에 급히 찾기에 장관실로 달려가니 수도권 신 공항이 청주로 결정된 대통령 결재문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손 장관은 언론이나 타 부처 그리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몹시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인 84년 4월 20일자 중앙일보에 1면 톱으로 공항기사가 실리더니 이어 모든 신문 방송이 기사, 사설 칼럼 등을 통하여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내용인 즉 ������지구상에 있는 수도권 공항 중 수도에서 제일 먼 곳이 브라질 공항인데 그래도 수도에서 98Km에 위치해 있다. 청주는 수도권에서 120Km나 멀다. 일본에서도 1시간 반이면 한국에 도착하는데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데 2시간씩 걸려서야 말이 되겠는가.' 라는 요지의 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부터 교통부가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나는 손 장관과 서둘러 상의 끝에 ������청주공항은 수도권 신 공항이 아닌 중부권 국제공항으로 활용하고 수도권 보조공항의 역할을 담당할 것.������ 이라고 언론에 발표토록 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 이후 충북지사를 비롯한 수급 기관장들을 초청하여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한 뒤 ������청주전투비행장은 소음 공해와 엄청나게 저장된 폭탄 등으로 청주권 안전에 큰 위협 요인이 될 것인 바 충북도민이 청주공항 유치 환영대회를 열어 교통부의 입지를 살려주자.������고 제의했다.
또한 청주공항을 수도권 공항으로 기정사실화해야 청주가 발전한다고 설득하여 청주 실내 체육관에서 국제공항 환영대회를 열고, 시 군은 물론 읍 면 동에도 청주공항 유치 경축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도록 했다.
그러자 제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야당과 무소속의 모든 후보들이 ������선진국에서는 소음공해가 심한 공항을 데모까지 하며 못 들어오도록 막는데, 정종택은 오히려 환영대회까지 연 사람.������ 이라고 매도했다.
덕분에 나는 14대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낙선의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부덕의 소치이지만 청주공항을 유치한 것도 한 몫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얼마전 치러진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너도나도 청주국제공항을 신 행정수도의 관문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나섰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부 방침이었던 청주전투비행장의 이전사업은 대통령의 약속 시한을 넘겨 13년이 지났다. 청주국제공항을 위해서라도 공군부대와 전투비행장은 반드시 이전돼야 하나 이 역시 강력한 도민운동이 없이는 힘들다.
공군 비행단의 이전은 청주 뿐만 아니라 충북 더 나아가 국가발전을 위해 청주국제공항이 신행정수도의 유일한 관문 공항과 중부권 국제공항, 그리고 우리나라 물류중심 공항으로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청주국제공항의 발전을 위해 충북 도민의 역량을 다시 한 번 하나로 모아야 할 때다.
마지막 봉사 충청대 학장
96년 12월 20일 환경부 장관을 떠나면서 기자실에 들렀더니 소회를 묻기에 ������고향의 면장이라도 시켜주면 마지막 봉사를 하고 싶다.������ 고 말했다.
이 말이 다음날 일부 신문 가십난에 게재되었고 이를 본 고향의 대 원로 선배인 故오범수 충청전문대학 이사장께서 ������4년제 충청공과대학의 인가 신청을 교육부에 내놓았으니 초대 4년제 충청 공과대학 총장과 함께 충청전문대 학장을 겸직해 달라.������ 고 요청해 왔다.
97년 3월 충청전문대 학장으로 취임 후 이사장을 비롯한 대학의 이른바 실세들을 모두 학장실로 오시게 하여 ������임기는 4년이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때는 언제든 물러날 것이다. 그리고 학장의 권한사항이라도 인사와 이권에는 일체 개입치 않을 테니 담당 처장들, 즉 시스템이 권한을 행사토록 하고 재단은 학교 발전을 위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해 달라.������ 고 요청했다.
사학은 재단 이사장과 총 학장 간에 마찰이 자주 일어난다. 그 이유는 권한다툼 때문이며 이것이 불거져 외부로 표출되어, 언론에 공개되는 일들이 많다. 따라서 나는 위임전결 규정에 따라 아래 부서에서 소신껏 일하도록 하는 한편, 지침은 학장보다 이사장의 의견을 참고하도록 했다.
사심이 없이 뛰다 보니 공직자의 정년을 넘겨 임기가 끝났다. 그런데도 재단 이사장은 내게 연임을 의뢰해 다시 4년의 임기에 들어갔으나 언제든 물러날 자세로 일하고 있다.
나는 5년 동안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장과 명예회장으로 청와대 총리실과, 재경부 예산청 예산처 기획예산처 국회 교육위원회, 국회 예산결산위원회를 찾아다니며 말단 주사는 물론 사무관 서기관 국장 차장 청장 차관 장관 국회의원들을 만나 전문대학 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그 결과 96년과 2002년 사이에 전문대학 예산은 550억에서 1824억으로 3배 이상 늘어났고, 교육부에서 충청대학에 지원한 예산도 96년 5억8천2백만 원에서 2002년에는 32억 3천만 원으로 5.5배 이상 증가됐다.
물론 충청대학은 6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교육인적자원부와, 정보통신부, 중소기업청, 노동부, 산업자원부 등 중앙 관서로 부터 67개 분야에서 최우수 또는 우수대학으로 평가받아 교육부를 비롯한 각 부처청의 국고를 지원 받고 있다.
전문대 최초 대통령의 졸업식 참석
역대 대통령들은 해마다 한차례씩 대학 졸업식장에 나가서 치사를 했는데 그것도 연례행사처럼 서울대학교 육사 공사 해사 경찰대학만을 고집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손명순 영부인의 모교인 이화여대 졸업식에 참석하자 숙명여대에서 청와대에 항의해 그 이듬해에는 숙명여대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 서울시내 체육관에서 1만여 명 이상이 모인 전국 규모의 방송통신대학 전체 학위수료식에 참석한 사례가 있다.
나는 청와대 여러 곳에 전화를 하여 대통령이 전문대나 지방대학 학위 수여식에도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그런 뜻을 전하고 교육부에도 건의를 드려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지방대학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하니, 전문대학뿐만 아니라 지방대에서도 대통령을 자기 대학에 모시려고 경쟁 아닌 경쟁이 치열했다.
결국 나의 집요한 요구와 인맥을 통한 로비가 받아들여졌는지 김대중 대통령은 충청대학 학위 수여식에 참석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2001년 2월 21일 서울역에서 청주역까지 내려온 김 대통령은 우리 대학 학위 수여식에서 축사를 하고 캠퍼스도 돌아본 다음 상경했다.
이로써 충청대학은 헌정사상 50년 동안 4년제 지방종합대학과 서울을 포함한 전국의 전문대학 중에서는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학위 수여식에 모신 새로운 역사를 만든 셈이다.
2003년부터 고교 졸업생수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아지면서 일부 대학이 벌써부터 문을 닫거나 학생 수의 감축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대학 간 인수 합병이 시작되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충청대학은 대통령도 인정한 전문대학으로 자리매김하다 보니 대학의 홍보는 계량으로 측정할 수 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대통령이 다녀간 이후 학교에 대한 홍보효과가 1백억 원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보건복지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의 특강에 이어 여러 현직 장관들의 방문이 잇따랐고, 이원종 지사의 배려로 학교 진입로 뒤편도 복개했다.
충청대학은 지금 전국 158개 전문대학 중 항상 1~3위를 다투는 최고 수준의 단계에 올라와 있다.
고시 실패에서 얻은 교훈
일본 내쇼날 상표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세계적 부호이면서도 94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린 사업가다. 그래서 일본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낳으면 고노스케를 본받으라고 했고, 경영자들 사이에서는 <마쓰시다 주의>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산하 570개 기업, 13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그룹 총수에 오른 마쓰시다에게 어느 날 직원 한 사람이 성공비결을 묻자 그는 ������3가지 하늘의 은혜를 입고 태어났기 때문.������ 이라고 답했다. 그가 말한 은혜란 놀랍게도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 것이었다.
가난했기에 부지런히 일해야 했고, 또 허약하였기에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90살이 넘도록 겨울철에도 냉수마찰을 했으며,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에 세상사람 모두를 스승으로 받들고 배워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그는 불행한 환경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이 자신을 성장시켜 주기 위해 준 시련이라 여기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한 것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으나 나 역시도 지나온 나날을 되돌아보면 사법고시에서 떨어진 것이 더 할 수 없는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면 기고만장한 나머지 잘돼야 검사장이나 지방법원장 밖에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시에 낙방하고 내무부에서 촉탁이라는 임시직으로 공직생활을 출발했기 때문에 남보다 두 배 세배 노력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 날 나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공직자는 집안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집안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도지사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관사출입을 할 수 없도록 했다.
76년 10월 청주고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충북 도지사에 부임하자 많은 동문들로 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내 고향 오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이들을 보살피지 않자 ������사람을 안 키워 준다.������������취직도 안 시켜 준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가하면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비판과 함께 모함도 많이 받았다.
노동청장 시절 부친상을 당했을 때 당시 진의종 총리를 비롯한 중앙의 장 차관 등 고위 관리들과 지인들이 조문을 하려고 내 고향을 찾은 적이 있는데 ������도지사까지 한 사람이 자기 고향마을 오창 여천리 진입로에 대한 시멘트 포장은커녕 길도 내지 않고 제일 낙후된 마을로 그대로 두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며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반면 나도 사적인 것을 떠나 지역 발전과 관련된 것은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이를 성사시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노선이 천안에서 조치원을 경유하여 대전으로 설계되어 공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무부 재정과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유호근 주사(후일 시장, 군수, 청와대 1급 비서관 역임)에게 전지 크기의 지도를 구해 오라고 하였다.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먼저 서울과 대구를 거쳐 부산지점에 자를 고정시키고 그 자리에서 줄을 그어 보라고 하여 일직선상에 음성과 괴산 조령의 3관문이 걸쳐 있고 청주가 근접되는 것을 확인시킨 뒤 고속도로 노선이 청주방면으로 지나도록 설계도면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건의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렇게 하여 만든 건의서를 서울시 부녀사업관장으로 있던 육인순 관장을 통하여 여동생이자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에게 전달하자 박 대통령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시찰하면서 실제로 이 노선을 확인해 본 뒤 고속도로 노선을 천안에서 청주 쪽으로 향하도록 당초의 설계를 변경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 노선이 청주와 조치원의 중간지점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청주가 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청주공항 유치가 결정된 후인 1980년대 중반 건설부에서 대전~서울 간 신설고속도로를 설계하는데 그 노선이 대전, 공주, 안양, 광명 등 서부 인구 밀집과 공업지역으로 결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도로의 투자 효율성을 위해 중부고속도로를 청주국제공항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그러자 전 대통령도 건설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노선이 현재의 광주, 이천, 음성, 진천, 청주로 바뀌었는데 이 역시 청주국제공항의 공익성과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공직생활 첫 출발하는 공무원의 자세
78년 충북지사로 있을 때 대전에서 이따금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공직생활 첫 출발하는 공무원의 자세> 를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나는 칠판에 삼각형 형태의 피라미드를 그린 뒤에 삼각형의 꼭지점에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의 직함을 써놓고 ������이 자리는 고시 1등이 가는 자리가 아니다.������ 라고 단언을 한 뒤 ������일생의 인간관계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처신을 해야 대법원장도 검찰총장도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모두(冒頭) 발언을 하고 강의를 시작하면 수강생들의 태도도 사뭇 진지해 졌다.
그러면 비록 고시에 합격하진 못했으나 고시 출신 동기보다 빨리 장관 대열인 충북 지사가 되기까지의 나의 살아온 과정을 소개해준 뒤 ������공직자는 상하좌우의 인간관계가 좋아야 하며, 일단 첫 출발을 디뎠으면 최소한 대법관 검찰총장과 국무위원을 목표로 삼아 나아가라.������ 며 포부를 크게 가질 것을 주문했다.
또한 성공의 비결은 인간관계에 있음을 강조한 뒤 ������근면 성실하며 궂은일에 남보다 앞장서고, 직장에서는 일에 미치고, 양보하는 미덕과 참는 즐거움을 가지라.������ 고 강조했다.
강의가 끝나자 ������내용이 매우 인상 깊었고, 공직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며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연수생들이 많았는데 이때의 일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연락을 취하며 지내는 사람도 있다.
버클리 대학을 나와 장래가 촉망되는 대구지검 형사부장 오병주 부장검사도 그렇게 해서 만난 사이인데 나 또한 환경부 장관 시절 그가 공주지청장으로 있을 때 지청을 찾아가 격려해 주기도 했다.
오 부장검사는 공직을 떠난 내게 명절이 되면 마음의 선물을 보내오는 등 지금까지도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 결정 된다
미국의 카네기재단에서 성공한 사람 1만 명을 놓고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성공요인이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85%가 <인간관계>라고 대답했으며, 나머지 15%가 기술, 능력, 재능 순으로 응답했다.
빌게이츠처럼 아주 특출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성공여부는 이처럼 사람과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원만하고 겸손하며 자기를 낮출 줄 알아야 한다.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의 예결위원장을 맡았을 때 화내지 말고 성내지 않고, 욱하지 않으며 그저 그러려니 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다.
성질 급한 사람이 욱하는 버릇을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스티커를 발부받은 데 항의해 자신의 트럭으로 파출소에 진입한 사람이 구속됐고, 주차 시비로 아파트 경비와 싸우다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수양부족에서 나타난 어처구니없는 사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에서는 65세 이상이 되면 지하철 공사에서 경로우대증을 발급해 준다. 그런데 지하철 직원들이 이따금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노인들이 화를 내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짜증을 내봐야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만 해칠 뿐이다.
이보다는 ������젊게 봐주어서 고마워요.������ 하면서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좋고, 본인의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나는 온갖 세파에도 좀처럼 굽히지 않고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온 편이다. 가난한 농군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왔지만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라는 정신 하나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고 실천에 옮겨왔다.
또한 젊었을 때는 ������내가 옳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륜이 쌓이면서 ������옳은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는 것으로 조금씩 관점이 바뀌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감정개입이 줄어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 상대방과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 결정되어 진다는 사실이었다.
첫댓글 이보님!
정종택 씨도 당신의 후원자에 대하여는 기록을 하지 않았군요.
집안이 하도 곤궁하여 때꺼리가 없어서 당시 거주지 양조장 사장이 거의 생활비를 대주고 학비와 서울에서의 자금소요 상당부분을 지원 하였답니다. 추후 사위를 맞으려고. 그 보은의 댓가로 그 집의 사위가 되였으며신부가,인물면에서 부족함이 많었지만 항상 청와대등 모임에 못 생긴 부인을 극진히 아껴주는 모습에 박 정희 대통령은 항상 그를 보살피고 공직자 에게 본보기를 삼았다는 일화는 빼어놓았군요,
이보님의 자세한 정종택님의 프로필에 감사를 드림니다.
정종택씨가 증평중학을 다닐 때 저희 선친께서 30초반에 증평읍장에 계셨습니다. 정종택씨처럼 수재였지만 서울대 등독금이 없는 딱한 처지의 학생을 재력있는 독지가를 찾아 학비를 보태주었는데 나중에 장성하여 국내 굴지의 재벌회사 사장까지 올랐건만 선친의 만년까지 인사 한번 찾아 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옛날 동신화학(東자 고무신, 한 때 국내 10대 기업이었음) 회장은 곤궁한 시절에 받은 혜택을 잊지 못해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요. 그 재벌 사장 지낸 사람은 나중에 법망을 오락가락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하더니 요즘은 뭐 하고 지내는지...^-^
이보님의 선친께서는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군요.
일찌기증평읍장을 하신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은혜에 보답치 못하는 인간들은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