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viniendo a su patria, les enseñaba en su sinagoga, de tal manera que decían maravillados: «¿De dónde le viene a éste esa sabiduría y esos milagros? ¿No es éste el hijo del carpintero? ¿No se llama su madre María, y sus hermanos Santiago, José, Simón y Judas? Y sus hermanas, ¿no están todas entre nosotros? Entonces, ¿de dónde le viene todo esto?». Y se escandalizaban a causa de Él. Mas Jesús les dijo: «Un profeta sólo en su patria y en su casa carece de prestigio». Y no hizo allí muchos milagros, a causa de su falta de fe.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나자렛 사람들과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도 또 나자렛에서도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모습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이나 나자렛 사람들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는 이유가 다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만 놀랐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으니까 말씀에만 집중했고,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말씀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그들 입장에서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야 했나?
당신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포기하셨어야 했나?
아니면 사람들이 못 알아보게 변장했어야 했나?
사실 근본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나자렛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정말로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까?
아닙니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내가 나자렛 출신이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입니다.
사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도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의 함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판단합니다.
잘못된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 등은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도
자기 자신은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예가 판관 기드온의 경우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기셨을 때,
기드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전후 상황을 볼 때, 기드온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시면서
믿음과 용기를 주셨습니다(판관 6,16).>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의 함정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잘 알려면,
우선 먼저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박사 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해야만 복음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무식하고 평범한’(사도 4,13) 사람들을 통해서도 선포됩니다.
(‘파티마’에서처럼 어린이들을 통해서 계시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골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황제의 아들이었다면 사람들이 더 잘 복음을 믿었을까?
정말로 그랬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 계층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기적)에 대해서도
카파르나움 사람들과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7-28).”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마르 1,32-33).”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이나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았고, 그래서 ‘온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모인 사람들은 모두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마르 1,34).
반면에 나자렛 사람들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만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가 적었다는 뜻입니다.
안 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안 받는 것은,
또는 얻을 수 있었던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자신을 믿어버린 수학자의 운명
쿠르트 괴델이란 천재 수학자가 있는데 그는 심한 불안증 때문에 스스로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의 업적은 어떤 이들의 평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는 27살에 수학으로 모든 것이 증명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있는 학자들 앞에서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논문을 써서 학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미국에 살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초대로 괴델은 미국으로 건너가 그와 오랜 우정을 쌓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수준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자 괴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고 의심이 많아 불안증에 시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대학 강사를 할 때는 그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했고,
교수가 되어서도 그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오직 술집에서 만난 댄서였던 연상의 아내 아델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델이 해 주는 음식만 먹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천재이기 때문에 타살을 당했다고 믿은 그는
자신도 사람들이 죽이려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델이 수술을 하여 입원을 하게 되자
그에게 음식을 주는 어떤 이들도 믿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음식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괴델은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음식 안에는 반드시 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망 당시 168cm의 키에 몸무게는 고작 29kg에 불과했습니다.
이 천재 수학자는 수학의 불완전성은 믿었지만 자신의 불완전성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누구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남은 나의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완전하다면 남자를 만날 필요가 없고 남자 역시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는 만남 없이는 인류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면 반드시 서로 간에 부족한 면을 채워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남 없이 완전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넘어서서 본래 악의 성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생각들은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적인지 모르면 괴델처럼 결국 스스로를 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신뢰하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고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에 반응하지 않는 유다 백성과 같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피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을 믿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는 자신을 파괴시키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믿으면 손해보고 자신을 믿지 않으면 이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믿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 때처럼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이를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를 초월시켜주는 이는 더 큰 사랑을 지닌 이입니다.
기적을 행해주는데도 그를 믿지 않으려하면 어떻게 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도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를 두라고 한 것뿐입니다.
자신을 보낸 것이 하느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는 이를 믿으면 실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로 내어주는 분보다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도 자신만을 믿고 입을 닫고 있다면 우리 운명은 안 봐도 뻔합니다.
살려고 하거든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납시다.
벗어나는 길은 사랑을 믿는 이에게 신뢰를 둘 줄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타인이 주는 사랑이 나를 이용하려는 술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용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잘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지 않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큰 낭패를 보지 않습니다.
큰 낭패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에서 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린 이들은 욕심도 없어서 큰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믿어서 손해를 봐야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리고 아이 뒤에는 든든한 부모가 버티고 있습니다.
혹시 속아서 큰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에게 양심의 가책을 남기게 만들어
상대가 회개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그의 술책에 손쉽게 당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다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그저 주님의 뜻에 맡기기 위해 생각을 끊어버린다면 빠르게 자아의 압제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속아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또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아직도 성경험 유무로 거룩함을 따지나요?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6
53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54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55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57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마태 13,53-58)
마태오 복음서 13,1-53에 나오는 예수의 여러 비유 말씀을 마감하는 곳이 곧 53절이다. 53절은 마태오 복음서 19,1과 비슷한 내용이다. 예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사람들은 54절, 56절에서 두 번씩이나 묻고 있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6,1-6에서와 다른 점이 몇 가지 보인다. 제자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의 형제 중 마지막 두 사람의 이름 순서가 바뀌었다. 예수의 능력에 대해 의심받을 수 있는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마르 6,5)를 마태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언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사례에서 유독 친척이 빠져 있다. 복음서 저자마다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태오는 조심스런 편집자다.
54절에서 마태오도 마르코처럼 “고향”이라고 말할 뿐 ‘고향 나자렛’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고향이 나자렛이란 사실은 전제되어 있다. 개역 개정 성경에는 ‘그들의 회당’으로 제대로 번역되었지만, 공동번역에는 아쉽게도 ‘그들의’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공동체와 유다교의 서먹한 거리감을 나타낸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는 모습은 복된 선언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다(마태 7,28).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의심스런 반응을 나타낸다. 지혜는 예수의 설교를 가리키고 능력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언제나 예수의 이적과 관계되는 단어다.
“목수”(tekton)는 나무나 돌로 집이나 도구를 만드는 직업을 가리킨다. 나무가 적었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집은 대개 점토와 돌로 지어졌다. 예수는 나무보다 돌을 더 자주 만지지 않았을까 나는 추측한다.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걸을 때나 돌담을 볼 때, 나는 돌을 만지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한다. “목수”(마르 6,3)에서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바뀐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다인의 방식으로 부친의 직업을 단순히 기록했을 수 있다. 목수를 구세주로 내세우기 멋쩍어서 그럴 수 있다. 방랑설교자로 사는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55절에서 히브리어 표현으로 마리암(Mariam)이 보인다. 동정탄생은 여기서 암시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동정탄생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부를 마태오가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의 예수 이해에서 동정탄생은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형제(adelpos)라는 단어는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척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부모의 핏줄을 같이 하는 친형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작은 동네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예수에게 보인 거리감이 마태오 복음 독자들에게 더욱 충격이다. 57절 예언자 부분에 마태오 공동체의 방랑설교자들이 겪던 경험이 투사된 것 같다. 그들은 생전의 예수가 돌아다니며 가르칠 때 맛본 쓰라린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제 집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예수에게 큰 부담이 될 말을 감히 마태오가 꾸며냈을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성서 해석 역사에서 오늘의 본문은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평생동정교리와 연결되어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친형제를 가리키는지 친척을 가리키는지 성서신학적으로 누구도 100%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지배적인 흐름은 예로니모 이래 예수의 사촌들을 가리킨다는 의견이었다. 그 주장은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19세기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예로니모 이전에도 그리스 교회에서는 요셉의 첫 번째 결혼 때 낳은 자녀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요셉은 재혼한 셈이고 마리아는 후처로 결혼한 셈이겠다. 초대교회 때 테르툴리아노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후에 낳은 자녀라고 주장하였다. 그 의견이 19세기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받아들여져 오늘에 이른다.
대부분 가톨릭 학자들은 놀랄 만한 조심성으로 이 주제에 대해 언급을 피한다. 교회정치적 측면에서 그렇게 처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주제에 대한 언급 탓에 처벌받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그동안 적지 않았다. 소심한 나도 다치기 싫어서 내 의견을 밝히지는 않겠다.
마리아 평생동정교리는 그 의미 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성(性)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져왔다. 원죄는 출산을 통하여 전달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잘못된 표현도 성에 대한 오해를 부추겼다. 바울이 그리스 철학 용어를 빌려 영 육을 구분한 것에서 육이 마치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된 것도 부작용을 낳았다.
그래서 성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덜 거룩한 것으로 오해되었다.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마치 기혼 신자들보다 더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잘못 가르쳐졌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서 이제 얼른 벗어나야 한다. 창조신학 관점에서 보면 성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인간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부족한 사람이다. 성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는 성에 대해 말한 적 전혀 없다.
만일 동정을 의학적 관점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본다면, 예수의 형제, 자매에 대한 논란은 간단히 풀린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성경험 유무에 무관하게― 누구나 신학적으로 동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성경험이 전혀 없더라도― 신학적으로 동정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동정인 매매춘 여성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으로 동정이 아닌 독신자도 있을 수 있다. 성경험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유물론적 시각에 불과하다.
오늘 단락의 주제는 예수의 형제, 자매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느님 말씀이 풍부하게 가르쳐지는 곳에서보다 더 그 말씀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다’는 루터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무의미하다.
김근수 (요셉)
«Un profeta sólo en su patria y en su casa carece de prestigio»
Rev. D. Jordi POU i Sabater
(Sant Jordi Desvalls, Girona, España)
Hoy, como ayer, hablar de Dios a quienes nos conocen desde siempre resulta difícil. En el caso de Jesús, san Juan Crisóstomo comenta: «Los de Nazaret se admiran de Él, pero esta admiración no les lleva a creer, sino a sentir envidia, es como si dijeran: ‘¿Por qué Él y no yo?’». Jesús conocía bien a aquellos que en vez de escucharle se escandalizaban de Él. Eran parientes, amigos, vecinos a quienes apreciaba, pero justamente a ellos no les podrá hacer llegar su mensaje de salvación.
Nosotros —que no podemos hacer milagros ni tenemos la santidad de Cristo— no provocaremos envidias (aun cuando en ocasiones pueda suceder si realmente nos esforzamos por vivir cristianamente). Sea como sea, nos encontraremos a menudo, como Jesús, con que aquellos a quienes más amamos o apreciamos son quienes menos nos escuchan. En este sentido, debemos tener presente, también, que se ven más los defectos que las virtudes y que aquellos a quienes hemos tenido a nuestro lado durante años pueden decir interiormente: —Tú que hacías (o haces) esto o aquello, ¿qué me vas a enseñar a mí?
Predicar o hablar de Dios entre la gente de nuestro pueblo o familia es difícil pero necesario. Hace falta decir que Jesús cuando va a su casa está precedido por la fama de sus milagros y de su palabra. Quizás nosotros también necesitaremos, un poco, establecer una cierta fama de santidad fuera (y dentro) de casa antes de “predicar” a los de casa.
San Juan Crisóstomo añade en su comentario: «Fíjate, te lo ruego, en la amabilidad del Maestro: no les castiga por no escucharle, sino que dice con dulzura: ‘Un profeta sólo en su patria y en su casa carece de prestigio’ (Mt 13,57)». Es evidente que Jesús se iría triste de allí, pero continuaría rogando para que su palabra salvadora fuera bien recibida en su pueblo. Y nosotros (que nada habremos de perdonar o pasar por alto), lo mismo tendremos que orar para que la palabra de Jesús llegue a aquellos a quienes amamos, pero que no quieren escucharn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