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이발소 이야기
요즘은 동네 이발소조차 명맥을 잇는 곳이 큰 목욕탕, 이른바 사우나에 가야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시골 마을 어귀에 있었던 이발소는 선친과 연배가 비숫하셨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폐가가 되고 결국 허물어져 지금은 고향마을에 가도 흔적조차 없습니다.
몇해 전 TV에 아직도 1960~1970년대 골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강화도 교동도 시장에 있는 이발소가 소개되었는데, 옛날 어렸을 때의 추억을 되살리는 듯했습니다.
면도칼을 가죽에 쓱쓱 문질러서 날을 세우는 모습, 면도하기 전에 비누거품을 내서 솔로 안면에 묻히는 모습, 머리감을 때 조리로 물을 내려 머리를 행구는 풍경 등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이발소가 아직도 잘되는 곳, 예외적인 곳도 있기는 합니다.
종로3가역에서 파고다공원이나 세운상가쪽으로 가다보면 노인대상의 이발소 몇군데가 성업중입니다. 이발은 4천원~5천원, 염색까지 모두 합쳐서 세종대왕 한분에 모시는 토털 이발소가 몇군데 있습니다. 염색까지 하지 않고 이발만 했을 때는 머리도 감지 않고, 낡은 청소기를 머리에 대고 머리털을 빨아들이게 해서 결국 청소기의 소음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게 합니다.
대도시의 손님이 많이 몰리는 큰 사우나 탈의실 한쪽에 있는 이발소도 성업 중이지만, 작은 규모의 지하에 있는 사우나에 함께 있는 이발소는 손님도 많지 않고 한가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이발사님도 연세가 지긋해서 결국 단골 위주의 영업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가는 이발소가 두군데 있습니다. 지난 해까지는 딸이 아기를 맡기지 않아서 집사람이 구청의 문화센터에서 배운 서툰 가위질 덕분에 집에서 대충 머리손질을 하곤하였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맡아서 양육을 하다보니까, 중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차마 머리손질을 부탁하기가 민망해서 사우나 이발소를 자주 찾습니다.
한군데는 머리염색까지 15000원, 다른 사우나 이발소는 이발과 염색을 각각 만원씩 2만원을 받습니다. 물론 2만원을 받는 곳이 손님이 더 많습니다. 2만원을 받는 이발소도 하나의 단골 쏠림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발소 주인께서는 매주 화요일은 쉬고, 대체 이발사님께서 오셔서 하루 일하고 일당을 챙겨가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같습니다.
우연히 어제는 아침에 사우나에 갔다가 화요일마다 오시는 대체 이발사님한테 이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먼저 궁금한 내용을 여쭤보았더니, 의외로 선선하게 대답을 잘해주셨습니다. 70대 중반의 이발사님은 그동안 자신의 이발사로서의 이력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옛날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이 변경된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에서 무려 40년동안 기능직 공무원으로 이발사로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정보부장들 머리는 다 깎아봤다고 자랑하시면서, 그중에서도 멋쟁이 부장들은 이발을 자주 하였는데, 지갑에서 빳빳한 세종대왕을 몇장 뽑아서 팁으로 건네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무원 퇴직연금으로 생활하시면서 쉬엄쉬엄 일주일에 하루 일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세상사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에도 능숙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나님께서 성악을 전공했다가 트롯가수로 전향한 김호중의 열혈팬인데, 컴퓨터에 까막눈인 아내를 위해 사위가 김호중팬클럽에 대신 가입시켜줘서 '효자사위'라고 칭찬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 일요일밤에 SBS 미우새 프로그램에 김호중이 나오니까 마니님께서 너무 좋아하였고, KBS의 <불후의 명곡>에서 엄청난 가창력으로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를 핸드폰의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시도 때도 없이 듣는다고 흉아닌 흉을 보는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원래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노래는 트롯의 황제로 등극한 임영웅이 TV조선의 트롯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서 불렀던 버전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노래였습니다. 아마 그 인기를 자신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김호중이 작심하고 성악풍으로 부른 버전이 바로 그 노래로 단숨에 유튜브 100만회 조회를 선회하였던 영상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굳혀온 이발사님 덕분에 이발소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짧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발 솜씨도 능수능란해서 제가 머리를 깎아보니까 확실이 잘 깎으시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발을 마치고 일어설 즈음에도 두세 분의 어르신들이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나이를 먹는 탓인지, 요즘은 모임에서 들은 지인들의 이야기도 좋고, 이발소 어르신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오래된 묵은 장맛'같은 서민들의 세상사 이야기와 삶의 역정을 듣는 귀의 호사,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푹 빠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첫댓글 이발소 관련 이야기를 읽으니, 친정아버지가 생각나며 옛 기억이 새롭네요. 고맙습니다~
이발사님들은 직업의 특성상 그런지 입담이 좋으신분들이 많더군요. 어색해서 먼저 말걸어드리면 줄줄 세상이야기 듣는 재미가 고향에 계신 아버님 생각이 절로 나게 하지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