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필리핀으로 오기 전까지 경험해온 성탄절은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씨에 대부분의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놓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빨간 털모자와 털코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겨울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맞은 첫 성탄절은 달랐습니다. 거리에서 들리는 캐럴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보이는 나무들이 모두 초록색이고, 한낮에는 여전히 30℃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모두가 여름옷을 입고 있지만, 오직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만 털모자와 털코트를 입고 있는 아주 새롭고 신기하다 못해 어색하기까지 한 풍경이었습니다.
필리핀에 살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고 어색한 것이 성탄절뿐이었겠습니까? 날씨, 언어, 음식, 문화 등 많은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고, 어색하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것들도 자주 접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하나둘씩 적응되고 편안해집니다. 물론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나 노력함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내가 익숙했던 것들을 포기하기 위한 노력 또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 해도 익숙했던 날씨, 음식, 문화 등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하거나 그 속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결코 새로운 것에 적응하거나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살면서 필리핀 음식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플 때 당기는 음식은 여전히 한국 음식입니다. 또한, 한국에 살 때 그렇게 추위를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코끝이 찡하도록 추운 겨울 날씨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잊은 듯해도 이미 몸속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저절로 우리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열심한 단체 활동, 자선활동, 성경 공부, 피정 등을 통해서 신앙적으로 부족했거나 몰랐던 것들을 채우고 배워가는 것과 더불어 내 안에 이미 배어 있는 이기심이나 시기심, 부정적인 욕심 등 좋지 않은 나를 하나씩 포기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이 저물어 가고 2020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새해 계획을 세웁니다. 올해에는 ‘무엇무엇을 하겠다’는 계획과 더불어 ‘무엇무엇을 포기하겠다’는 계획과 결심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양상윤 신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전교회 중화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