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손님과 어머니 패러디
박예진지음
1933년 여섯 살 박옥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중학교 다니는 외삼촌과 살고 있었다.
옥희네는 땅도 있고, 집도 있다. 조그만 산이 있는 데서 밤도 따 먹고, 농사도 짓고, 추수로 밥이나 굶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집에 풍금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사는 집 딸이다. 그래도 반찬 사고 과자를 사고 할 돈이 없어서 옥희 엄마는 다른 사람의 바느질을 맡아서 해 준다. 그걸로 청어도 사고, 달걀도 사고, 사탕도 사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옥희 아빠가 살던 사랑방이 비어 있어서 그 방도 쓸 겸 엄마의 잔심부름을 좀 해 줄 겸 해서 외삼촌이 사랑방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친구분이 그 집 사랑방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 아저씨는 교사인데, 옥희 엄마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옥희에게 관심 보이고, 굉장히 잘 해 준다. 아저씨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하자, 엄마는 그 다음부터는 삶은 달걀을 반찬으로 먹으라고 합니다. 외삼촌이 아저씨 방에 들어가서 밥과 반찬을 가져다준다. 어느 날 옥희는 집에 풍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엄마에게 풍금 칠 줄 아느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옥희는 유치원도 다니고 창가도 배우고, 댄스도 배웠다. 엄마도 그 아저씨에게 호감이 있어서, 옥희가 그 아저씨에게 갈 때는 머리도 빚어 주시고, 머리도 곱게 땋아 주시고, 저고리도 새 저고리를 내어 주시고 보냈다.
옥희는 아저씨와 뒷동산에 놀러갔다 오는데, 옥희 유치원 친구들이 그 아저씨와 옥희를 보고 옥희가 아빠와 어디 갔다 온다고 말했다. 옥희는 그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옥희는 어느 날 벽장 안에 숨었는데, 벽장 안에서 잠들다가 깨어 보니, 무서워서 울게 되고 엄마가 옥희를 찾다가 옥희의 울음소리를 듣고 벽장 안에서 옥희를 꺼냅니다. 옥희는 엄마에게 혼났다. 그 후 옥희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유치원에서 꽃병에 있는 꽃을 가져다가 그 꽃을 엄마에게 준다. “그 꽃 사랑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고 줘.”라고 말한다. 그 후 어느 날 엄마는 풍금을 치게 된다. 엄마 목소리가 곱고 노래도 잘 부르셨다. 엄마는 풍금을 치시다가 갑자기 우셨다. 훌쩍훌쩍 우셨다.
어느 날 아저씨가 옥희에게 하얀 봉투를 엄마에게 주라고 한다. 그런데 그 봉투에는 아저씨가 엄마에게 지난 달 밥값만 있는 게 아니고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는 아마도 아저씨가 엄마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옥희 엄마는 과부가 재혼하는 것을 죄인 양 생각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옥희는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아빠가 없는 게 아니라 일찍 돌아가신 것이지 그래서 엄마가 또 결혼을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저씨의 청혼을 거절한다. 아저씨는 어느 날 기차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청혼을 거절한 것은 옥희를 위해서 희생한 거 같았지만,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옥희가 6살 때는 1933년도였다. 그런데 그 후 10년 후 즉 1943년도에는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자들이 매우 많았다. 처녀들이 그 대상인데, 아줌마들도 혼인신고가 안 돼 있으면 끌려간 분들이 있었다.
1943년도에 많은 처녀들이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옥희 나이가 당시 16살이었다. 위안부에 끌려가기 쉬운 나이었다. 딱 그 나이대가 가장 많았다. 게다가 옥희가 끌려가기 쉬운 상황이 또 있었는데, 과부는 위안부에 끌려가기 참 좋은 먹잇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옥희가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가 솔직히 어려웠다.
옥희 엄마도 과부이기에, 위험한 상황이었다. 결국 옥희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것이다. 옥희는 엄마가 그 아저씨와 재혼했더라면 그래서 그 아저씨가 교사이기 때문에 옥희가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옥희는 1954년도에 러시아에서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것은 원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것이었다. 그녀가 엄마에게 원망하는 내용을 편지를 보냈다.
‘엄마에게
엄마! 저 옥희예요. 그런데 저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여섯 살 때 엄마는 우리 집 사랑방에 살던 아저씨와 결혼 얘기 오고 가지 않으셨어요? 엄마가 과부여서, 그 결혼 안 하신다고 하신 거죠?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엄마가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달걀을 안 산다고 하신 것을 보고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나이가 어렸던 저는 그 아저씨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기 때문에 진짜 아빠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엄마 그때 엄마가 결혼을 안 하신 것 때문에 저 위안부로 끌려간 거잖아요. 엄마가 과부로 있었고, 게다가 그때 16살이었거든요. 1933년도에 엄마가 만난 사람이 학교 선생님이고, 그 아저씨 만나 엄마가 결혼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어요. 엄마는 과부도 아니고, 혼인신고도 돼 있기 때문에, 일단 엄마는 위안부에 안 끌려가거든요. 그리고 저 위안부로 끌려간 게, 엄마가 그 아저씨랑 헤어진 지 딱 십 년째 되던 해에요.
저 16살 되던 해가 1943년이거든요. 그해 위안부에 안 끌려가려면, 좀 아버지 어머니 다 계시고, 또한 저도 결혼을 해야 하고요. 심지어 혼인신고도 돼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황이었어요. 엄마가 과부라고 동네에 소문이 나서 솔직히 우리 집에 빨리 일본 경찰이 온 거 알아요?
엄마가 마지막으로 경찰에게 하룻밤만 딸 하고 할 얘기 있다고 하면서, 통곡하면서 사정했지만, 일본경찰은 하룻밤은커녕 고작 1시간 우리 모녀에게 시간 준거 알아요. 눈물로 저 보낸 거 아시죠.
그때 그 아저씨가 선생님이고, 저 학교에서 전교 1등 한 거 기억하시죠? 엄마가 그날 저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네가 6살 때 만났던 그 사랑방 아저씨와 엄마가 결혼 얘기 오갔을 때 그 아저씨와 결혼을 했더라면, 위안부 안 끌려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을 거 같아요. 당시 결혼했어도 혼인신고 안 된 아줌마들도 위안부에 끌려갔는데, 엄마도 과부여서 사실 그 대상 될 뻔했잖아요. 모녀가 같이 위안부 끌려가는 상황 어떻게 막았어요? 엄마가 폐렴 증상이 나타나서, 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했잖아요. 검사 결과, 폐렴이 맞다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안 끌려가고, 저도 검사 했는데, 저는 폐렴에 안 걸려서, 저만 강제로 끌려 간 거잖아요. 엄마가 제가 강제로 끌려가는 것 보면서 하는 말이 네가 여섯 살 때 엄마가 그 선생님과 결혼을 할 것 그랬다. 재혼하면 사람들이 욕할 거라 생각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나쁜 엄마가 된 것 같구나! 당시 그 아저씨가 교사인데, 네가 공부도 잘하고, 딸로 있으면, 네가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요.
아빠가 딸 위안부 끌려가게 그냥 놔두었을 거 같아요? 아마도 위안부에 끌려가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 충격적인 사실은 그때 당시에 가장 피해를 본 사람들이 솔직히 과부와 혼인신고 안 한 아줌마들 그리고 가난한 처녀들이거든요.
물론 부잣집 딸도 위안부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우리도 못 사는 편은 아니었잖아요. 풍금도 있었잖아요. 풍금이 있는 집은 어느 정도 잘 사는 집만 있었던 것인데, 저 어떻게 됐나요?
사람들이 엄마의 재혼을 손가락질 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두려워서 그 아저씨 청혼을 거절한 것이었죠.
아이고, 엄마,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요. 그 아저씨랑 결혼하고, 이사 가서 살고 당시에는 교사로 발령 나는 것도 어렵지 않고, 또 그 아저씨가 학교선생님으로 일하게 되면 저 역시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에 시집을 갔을 거예요. 혼인신고가 돼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사는 빨리 알거예요. 왜냐하면 아빠는 일본 교사와 같이 근무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 이야기 다 엿듣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저 아무 대책 없이 심지어 엄마가 과부라고 소문나서 준비 없이 있다가 그냥 강제로 끌려갔던 거예요. 혼인신고 안 해서 끌려간 아줌마들 나중에 조선에 돌아와서 통곡하신 거 알아요?
그 아저씨와 결혼 이야기 있었다는 것을 이웃집 아줌마에게 들었어요. 그 이야기 듣고 결혼했어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엄마가 재혼하면 손가락질 한다고요? 누가요? 왜요? 아빠는 돌아가셨는데, 재혼이 뭐가 죄예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욕하는 사람들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선 엄마랑 딸이 안전한 게 중요한 거잖아요.
저는 완전히 위안부에 끌려가기 딱 좋은 처지였답니다. 좋은 신랑감 구하는 것 아예 불가능해져서 27살 되어 조선 땅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겨우 옷집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셨잖아요. 6.25전쟁 끝나고 겨우 옷집 하셨는데, 겨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정도 였던 것 같아요. 우리도 못 사는 편은 아니었긴 해요. 하숙집을 할 정도이면, 괜찮을 거라고 믿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모녀 결국 이렇게 불행해져 돌아왔어요. 엄마는 옷집 하고 있고요.
저는 러시아에서 위안부로 오래 일할 뻔했는데, 폐렴 걸려서 4개월 만에 관두고 조선으로 돌아왔거든요. 저는 심한 폐렴에 걸린 게 아니어서 위안부에서 쫓겨 난 후 갈 곳을 못 찾은 거 알아요? 집으로 돌아갈 엄두도 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목사님 댁에 잠시 머물렀다가 옷 만드는 법 배워서 겨우 살아가게 된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요.
박옥희 올림
김은희는 오랜만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고 이상하게 이 소설이 혹시 친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원래 은희는 작가가 꿈인데, 이 소설 결말이 안타까워서 그 후 이야기의 결말을 좀 더 해피엔딩으로 고쳐 볼까하고 써 보려고 하였으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 그러면 옥희를 어떻게 구제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방법은 옥희 엄마가 재혼하는 결말로 지었더라면 그래도 좀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은희는 그 이야기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쓰고 싶었다.
옥희 엄마는 그때 그 교사와 결혼을 하고 옥희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갈 상황이 오기 전에 옥희가 좋은 곳에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당연히 혼인신고도 했다. 그것은 옥희 아버지가 교사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6.25전쟁이 나서 옥희와 옥희 부모님은 모두 남한으로 내려갔다. 피난길에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옥희 엄마도 옷집을 하게 되고, 아버지 역시 다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게 그나마 은희가 생각해 낸 최선의 결말이었다.
은희는 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소설이 친일이라는 의심이 들긴 하지만, 증거라고 보기엔 조금 부족한 듯하여, 확신을 갖지는 못하였다. 어쩌면 그냥 아픈 사랑이야기를 쓴 것일 수도 있고, 미처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희는 다른 결말을 써 보았다.
1942년 어느 날.
박옥희는 오늘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옥희야. 드디어 네가 시집을 가는구나! 혼인 신고부터 급히 하고 가는 것이니, 마음 편히 먹어.”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해 줘서, 내가 오늘 시집을 가게 된 거 같아요.” 박옥희가 말했다.
“그러게, 엄마가 처음에 잘못 생각하고 아빠를 떠나게 했지만, 그리움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단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단 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직접 찾아왔단다. 결혼하자고 했지.” 엄마가 말했다.
“외삼촌이 권유한 까닭이지. 이제 곧 전쟁이 날 거라고 하더라. 불길한 느낌이 나서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던데?” 엄마가 말했다.
“큰외삼촌은 서울 갔다 와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야.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엄마가 말했다.
옥희 엄마가 재혼할 당시를 회상했다. 옥희 엄마는 이해가 가질 않지만, 전쟁날 거라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다. 과부로 지내는 것이 안심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 달 전 점쟁이가 다녀가서 옥희 엄마의 얼굴을 보더니, 얼른 시집가라고 했다.
“자네, 딸 시집 잘 보내고 싶은가?” 점쟁이가 말했다.
“네, 그런데요. 재혼 포기한 이유가 그거라서요.” 엄마가 말했다.
“자네는 딸 좋은 데로 시집을 보내고 싶으면 자네가 재혼을 해야 하는 팔자야. 곧 전쟁이 난다네. 그러면 남자 총각들, 처녀들 끌려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거든?” 점쟁이가 말했다.
갑자기 전쟁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옥희 엄마는 신문을 읽어 보았다.
1937년 일본
어쩌구 저쩌구 써 있었다.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1937년이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기사였다.
점쟁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인 게 되었다.
옥희 엄마는 사랑방 하숙을 하던 그 검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봐야 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옥희 엄마는 그 사람이 산다는 고향을 주소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때였다.
“계십니까? ○○님, 박옥희 엄마 계세요?”
옥희 엄마는 오랜만에 찾아 온 손님이 누구인가 궁금해서 대문 밖에 나가보았다.
“오랜만이에요. 기억나죠?” 석진 씨가 말했다.
“아 그때 사랑방 손님 석진씨.” 옥희 엄마가 말했다.
석진씨는 오랜만에 옥희 엄마를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 옥희는 석진이 아저씨를 보자. 사랑방 손님 그때 그 아저씨인줄 알았다.
“아직도 재혼 못하신 거예요?” 석진 씨가 말했다.
“저랑 하실래요?” 석진 씨가 말했다.
석진 씨는 지난 세월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옥희 엄마가 제 청혼을 거절하셨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옥희도 걱정되고요. 요새 과부가 재혼한다고 욕하는 세상입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막상 혼자 살아 보니, 아니다 싶더라고요. 옥희 엄마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같이 살면 좋을 것 같아서 용기 내서 찾아왔습니다.” 석진 씨가 말했다.
“아. 그래요?” 옥희 엄마는 그런가보다 했다.
옥희는 그때 그 아저씨가 저 분인가?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다른 분 같았다. 저 분도 사랑방에 살았던 것은 사실이긴 한데, 옥희가 6살 때 만났던 그 아저씨가 아닌 거 같았다.
‘아, 그러면 저 아저씨는 뭐하는 분이시라고 했던가?’ 옥희가 궁금했다.
검사였다. 옥희 엄마에게 지금 결혼하자는 사람은 직업이 검사였다. 이 검사는 이석진이라는 사람인데, 큰외삼촌 친구이고, 옥희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예전에 사랑방에 석 달 간 살다 갔었다.
검사는 적극적으로 옥희 엄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사람이었다. 둘이 커피도 마시러 갔었고, 영화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옥희 엄마와 검사가 결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검사가 청혼도 적극적으로 했는데, 옥희 엄마가 거절했지만, 후회돼서 몇 달 후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이제는 꼭 결혼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검사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 자라서 독립운동에 적극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옥희 엄마는 이석진이라는 검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옥희는 검사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흘러 1942년이 되었다.
그 해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들 딸들을 시집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검사 아빠를 둔 옥희도 급히 시집을 가게 되었다. 아예 미리 혼인신고까지 해 버렸다.
“옥희야. 너는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시집을 가게 된 거다.” 엄마가 말했다.
옥희 남편은 잘생기고, 키가 컸다. 그리고 의과 대학을 진학한 사람이었다. 나이차는 옥희보다 다섯 살 많았다. 이름은 정동길이었다.
“동길 군과 옥희 양은 드디어 부부가 되었습니다.” 주례가 말했다.
옥희는 정말 이뻤다. 옥희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다. 무사히 결혼식을 마친 옥희는 신랑 정동길 군과 신혼살림을 차렸다.
옥희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옥희는 결혼식을 서둘러 했기 때문에 겨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것도 옥희 아빠가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박옥희는 신혼살림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차렸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 고향은 북한인데, 옥희 남편은 서울사람이었다. 옥희 남편이 서울에서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옥희는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옥희 남편이 의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옥희 남편이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의사가 되어 레지던트가 될 무렴 6.25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그때 부산으로 내려가서 잠시 부산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의사가 된 남편을 따라 살게 된 옥희는 그 후로 행복했다.
이게 해피엔딩 결말이었다. 김은희는 이렇게 이야기를 썼다.
“은희야. 이게 소설 결말이야?” 석진이가 말했다.
“응.” 은희가 말했다.
“그래, 동화 같네. 어차피 소설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도 이루게 쓰면 좋지 뭐.” 진석이가 말했다.
“솔직히 서울 사는 결말이 제일 나아. 난 서울이 좋거든.” 은미가 말했다.
이제 다른 결말을 써 보자.
1933년 옥희가 여섯 살 때입니다.
옥희 엄마는 그 아저씨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김영훈씨 결혼하기로 해요.” 옥희 엄마가 말했다.
“내 청혼을 받아줘서 고마워요.”
옥희 엄마는 사랑방 손님 그 교사라는 분과 결혼을 하셨다.
“축하드려요.” 사람들의 축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옥희 엄마는 사랑방 손님이 교사이기 때문에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과부가 재혼을 하는 것이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결혼을 마음으로 축복하는 분위기였다.
옥희는 처음으로 엄마의 결혼식 날 이쁜 한복을 입고 손님들을 대접했다.
“맛있게 드세요.” 옥희는 엄마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옥희는 사랑방 손님이 아빠가 되는 일이 좋았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참으로 좋은 신랑감을 만났어요. 옥희 엄마가 혼자 아이 키우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제 행복하게 사세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었다.
결혼식이 한창 진행 중에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찬송가를 불렀다. 주로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 많았다. 옥희도 따라 불렀다.
그리고 주례가 이들 부부의 주례를 했다.
“이로서 김영훈 씨와 이한나 씨는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노라.”
옥희 엄마의 이름은 이한나였다. 옥희는 엄마가 이름 불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람들이 늘 옥희 엄마라 불러서 엄마 이름이 왜 불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 1942년도가 되었다.
옥희는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옥희야. 너도 이제 시집을 가야지.” 영훈이가 말했다.
“왜, 그렇게 빨리 시집을 가야 해요?” 옥희가 궁금해서 물었다.
“사실은 일본이 위안부를 모집하고 있단다. 그런데 거기를 가면 절대로 안 된다. 강제로 힘든 일을 시키는 곳이란다. 월급을 준다든가 그런 것도 없고 고생만 하는 곳이란다. 한마디로 노동 착취란다. 거기 갔다 오면 너는 죽을 수도 있고, 병신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단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조선 땅 고향에 돌아가는 일조차 부끄러워해야 할 일처럼 느낄 것이다. 나는 그냥 네가 거기를 가는 것 자체가 아예 딸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처음에 모르고 간 사람들이 있단다. 나는 내 딸만큼은 절대로 위안부로 보낼 수가 없단다. 그래서 지금 네가 시집을 가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시집가는 곳을 미리 알아보았다.” 영훈이는 이렇게 말했다.
옥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옥희네 반 친구들 중에는 거기를 모르고 강제로 간 친구들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다.
옥희는 아무런 사정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옥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교사이시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가장 빠른 정보를 아시고 계셔서 내가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거야.’
옥희 엄마도 남편한테서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옥희의 결혼을 일찍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혼인신고부터 서두르셨다.
“옥희는 너는 이미 혼인신고가 돼 있으니 결혼식을 느긋하게 해도 된단다.” 옥희 아버지 영훈이가 말했다.
옥희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를 마치게 된 사실에 감사했다.
결혼식 당일 날 옥희는 그 사람을 처음 보았다. 신랑감은 3살쯤 많은 사람으로 잘생기고, 학교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옥희야 결혼 축하해.” 동네 아줌마들이 축하해 줬다.
“옥희야 정말 행복하게 살아라.” 동네 친구들이 옥희 결혼을 축하해 줬다.
주례가 말했다.
“박옥희 양과 이선후 군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옥희는 무사히 결혼을 마쳤다. 그리고 옥희는 신혼 살림을 서울로 가게 되었다.
“옥희야. 남편이랑 행복하게 살아. 친정에도 자주 오고?” 옥희 아빠 영훈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났다. 북한에 살고 계시던 옥희의 부모님이 서울로 내려오셨다. 피난길에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옥희는 서울로 돌아가거라. 우리는 대전에서 살아야겠구나!” 옥희 엄마가 말했다.
옥희 엄마 한나 씨와 옥희 아빠 영훈 씨는 딸과 헤어지고 나서 대전으로 돌아갔다.
옥희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갔고, 남편이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옥희는 옷집을 하게 되었다. 옷집도 잘 되었다. 서양의복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옷 한번 골라보세요.” 옥희가 말했다.
사람들은 현대식 의상을 입어보는 데에 기분이 좋았다. 티셔츠와 잠바 스커트 등을 입고 달라진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편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옥희는 이 일이 재미있었고, 남편은 교대를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완성한 은희는 이 결말이 옳다고 보았다.
주요섭이가 친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비극으로 끝낸 결말은 정말 맘에 들지 않았고, 친일로 의심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친일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심이 되는 작품을 쓴 것 같다.
주요섭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라는 작품은 발표 당시 1935년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딱 2년 전인데, 전쟁과 관계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1937년도에 있었던 건 사실이나, 일본이 중국침략을 준비한 건 이보다 훨씬 앞선 1932년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주요섭 작가가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 같다고 추론해 본다면, 친일을 의심해 볼 만 하지 않나 싶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사실상 미혼 여성이고 과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위안부까지는 몰랐다 할지라도 소설결말을 이렇게 냈다면 조금 친일을 의심한 만 하다고 생각했다.
옥희 엄마와 사랑방 손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고 헤어진 것으로 마무리 된 결말로는 위안부에 끌려가는 결말을 피해가기가 솔직히 어렵다. 그래서 은희가 두 사람을 결혼하는 것으로 결말을 바꾼 것이다. 결혼하는 결말만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슬픈 사랑이야기를 쓰려는 의도에서 글을 썼을 수도 있지만,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친형이 친일이라는 주장이 있기에 더욱 의심을 피하기가 어려웠으나, 근거가 부족하여 그동안 친일작가로 분류되지 않았던 거 같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참 재미 있어요
종군 위안부 여성들의 피해자이지요
참으로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에 당한 수치이지요
좋은 소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단편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지금도 읽히면서 교과서로 활용되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