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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 일자무식 천재화가
꼬지35 추천 0 조회 52 13.09.28 2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장승업    張承業

 

 

 

 

장승업(1843~1897) ..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이며, 부친이 무반이었다고 하나, 장승업은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수표교에 살던 이응헌(李應憲) 또는 역관 출신의 변원규(卞元奎)로 알려진 사람의 집에서 기식을 하게 되면서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元,明 이래의 그림들을 접하고 스스로 익혀 어느날 문득 화리(畵理)를 터득하고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솜씨는 날로 높아져 왕실에서는 그를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여 그림병풍을 제작하게 하였으며, 이 때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하였고, 특히 어떤 것에도 얽메이기 싫어하는 성격때문에 궁궐에서 3번이나 도망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장승업은 40대 무렵에는 오경연(吳慶然) 등의 역관(譯官) 中人 계층과 가깝게 지내면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녹청색 창의(彰衣)차림의 특이한 모습으로 그림 판 돈을 술집에 맡겨놓고 매일 들러 마시면서 취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과 墨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히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 엿 볼 수 있다. 

 

 

 

 

 

 

 

 

 

 

                                                          나도 원(園)이다 .. 吾園 張承業

 

 

 

우리 근대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넘치는 작품을 남긴 장승업...그는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 왕조의 쇠망과 일본 제국주의, 청나라 러시아 같은 서구 열강의 침략 속에 비극적으로 몰락해 가는 상황에서 장승업은 바로 500년을 지속해온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조선왕조가 마지막 빛을 발하듯이 배출한 천재화가이자, 狂人畵家이었다. 장승업은 죽은 지 1세기가 겨우 지난 인물로 조선 말기의 최대의 화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지 않다.

 

 

 

 

 

                                              장승업의 작품세계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그는 술과 여자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을만큼  그에게는 오직 그림과 그림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 뿐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곧 예술계의 총아가 되어 고종의 명으로 벼슬까지 지냈으나, 그는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메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일체의 세속적인 관습에 구애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숨막히는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기도 하였다.

 

 

그의 화풍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호방하고 활달하여 작품의 격조보다는 기량면에서 더욱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대표작으로는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귀거래도(歸去來圖), 호취도(豪鷲圖) 등이 전한다. 그는 산수, 인물, 화조영모(花鳥翎毛), 기명절지(器皿折枝), 사군자 등 여러 분야애서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까막눈 장승업의 천재성

 

 

 

 

 장승업은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쓸 줄 아는 까막눈이었다.그러나 그는 급격하게 몰락해 가는 한 시대의 분위기를 몸으로 읽고 괴로워했다. 기존 가치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조선 말, 세기말 상황은 그의 삶을 떠돌이 생활로 몰아 넣었다. 그에게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 자체가 속박이었다. 그림을 그려 번 돈은 언제나 술값으로 날아갔고, 배가 고프면 부잣집을 찾아가 술과 밥으로 배를 채운 뒤 흥이 나면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는 왕명도 두려워 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화풍 못지않게 자유분방한 삶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이름 자체가 한시대의 분위기를 상징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종의 대령화원(대령화원)으로서 임금에게 그려 바쳤던 그림을 비롯하여, 밥이나 술을 먹으려고 붓을 휘두른 작품에 이르기까지 약 60여점의 그림이 전해져 남아있다.

 

 

 

 

 

 

 

 

 

 

 

                                              장승업의 천재성 

 

 

 

그의 천재성은 조선의 고유한 색채를 계승,발전시키거나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것에서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독창성은 오히려 중국의 그림을 본받아 그리는 (倣作)데에서 빛을 발했다. 19세기 당시 조선말기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청조(淸朝) 고증학이 조선 성리학의 뒤를 이어 조선의 새로운 이념 기반으로 자리 잡은 다음 청조의 문인화풍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 의하여 추사체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중인 출신인 추사 김정희의 제자들은 스승의 문인화풍이 갖는 심오한 내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형식만을 모방하였다. 추사의 제자들은 진경 풍속화풍의 전통을 외면하고 중국화풍을 맹복적으로 모방했는데, 장승업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였던 그 제자들의 다음 세대이다.장승업은 맹목적으로 중국을 모방하는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었던 셈이다.

 

 

 

장승업이 중국 모방에 천재성을 발휘한 연유는 그의 출신 성분과 화가로서의 입문 동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어린 시절 중인 풀신인 동지중추부사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심부름하던 상노이었는데, 이응헌은 원,명이래 중국의 그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주인집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던 그림을 제법 그려내는 그 아이에게 주인이 종이와 필묵 등 모든 두고를 갖추어주고 오직 그림만 그리게 하자, 장승업은 비로소 그림에 접하게 되는것이었다.

 

 

 

북학(北學 ..淸의 고증학)에 기울어 있던 중인 출신 후원자들은 장승업으로 하여금 중국 정통 화법에 충실하도록 강요하였다. 그의 중국적 화풍은 당시 청나라 풍조에 빠져있던 궁중에서도 크게 환영받아 高宗은 특명을 내려 그를 畵員으로 불러들였다. 장승업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그리워하며 몇번이나 시도한 끝에 결국 숨막히는 궁궐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가 고종에게 그려 바쳤던 어용화를 비롯한 뛰어난 그림들은 한번 본 그림은 무엇이든 재현해내는 놀라운 기량을 통해 탄생한 것들이다.

 

 

 

 

 

 

 

 

 

그와 동 시대를 살았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은 그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장승업은 어려서부터 글자를 알지 못했으나 명인의 진적(眞跡)을 많이 보았고, 또한 기억력이 좋아서 비록 몇 년이 지난 뒤에라도 안 보고 그리되 터럭만큼도 틀리지 않았다 ... "

 

 

장승업이 비록 일자무식이었다고 소문이 나리만큼 기초 학문이 없었으나,문인화마져도 회화적인 차원으로 소화해 버리는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몰락해가는 시대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떠안고 살다 간 조선시대의 마지막 천재 화가는 비록 중국화를 소화, 再現하는데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나, 정통 화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대담한 필치는 현대 한국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원 장승업이 현대 한국화의 시조오, 그의 회화 세계가 현대 한국화의 源流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작품 몇 가지 .....

 

 

 

 

 

                                          삼인문년도  三人問年圖

 

 

 

 

 

 

 

 

 

 

 

 

 

 

 

 

 

 

 

 

                                               

                                                송록도   松鹿圖

 

 

 

 

 

 

 

종이에 그린 수물 담채화이며, 크기는 58.5cm x 32cm이다. 소나무나 사슴은 모두 십장생(十長生)에 속해서, 예로부터 천년을 산다고 하였다. 사슴은 천년을 살면 푸른 빛을 띄고, 다시 오백년이 지나 흰빛을 띄며, 또 오백년이 지나 검은 빛을 띈다고 하였다.

 

 

그림 속의 사슴은 고개를 들어 솔잎을 먹고 있다. 깨끗한 털, 날씬한 다리, 맑고 푸른 눈빛, 가지런한 뿔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소나무 둥치 아래에는 도장에 "장생안락(長生安樂)"이라고 새겨져 찍혀 있다. 편안하고 즐겁게 오래 산다는 의미... 그러므로 이 송록도는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사슴이 실제로 천년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예로부터 사람들이 사슴을 신비한 동물로 여기게 된원인 중의 하나는 숫사슴의 머리에 달린 뿔에 있다. 이 뿔은 마치 풀이나 나무처럼 해마다 다시 돋는다. 봄에 난 새 뿔은 녹용이라고 하며, 점점 딱딱한 각질로 변하여 이듬해 봄에 떨어진다. 사람들은 이 뿔이 나뭇가지와 비슷한 모양이며, 매년 새로 돋아나는 이치를 보고 사슴을 여느 동물고 ㅏ다르게 보았던 것이다.

 

 

 

 

 

 

                                           귀거래도   歸去來圖 

 

 

 

 

 

 

 

 

 

 

장승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는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으로 비단에 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136cm X 32.5cm이다.

 

 

장승업 그림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위아래로 긴 화면에 전경에서 원경으로 급격하게 포개지듯 이어진 구도의 그림이다. 열린 사립문에는 병아리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담벼락에는 수탉이 올라 앉아 홰를 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모양은 세부적인 묘사가 매우 치밀하다. 또한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의 표현 등에서 장승업의 활달한 필력을 느끼게 한다. 경물(景物)의 연속감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의 표현에서 장승업의 활달한 멋을 볼 수 있다.  

 

 

 

 

 

 

 

                                           귀거래사  ... 도연명

 

 

도연명은 팽택(彭澤)의 수령이 되었으나, 관리생활에 염증을 느끼자 80여일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심정을 읊은 귀거라사의 첫 대목을 그려낸 것이 바로 장승업의 귀거래도이다. 

 

도연명이 뱃머리에서 바라본 고향집의 소나무는 늙은 둥치를 사립문 옆에 기대어 서 있고 노란 국화는 삿자리 울타리 밑에 무더기로 피어있다. 주인없이 닫혀있던 서재도 활짝 열려 갑(匣) 속의 서책과 초록 비단으로 감싼 현금(弦琴)이 반쯤 드러나 주인을 반기는 고향집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 내고 있다.

 

바람맞은 버드나무의 물기 어린 생생한 모습 등 경물의 사실적 표현은 장승업의 놀라운 기량을 대변해 주고 있지만, 문 곁에서 아비를 기다리는 어린 자식 대신 병아리 딸린 어미닭 한쌍을 그려 놓은 것은 도연명의 격조있는 전원취(田園趣)를 장승업이 자기 식으로 이해하였던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아야 할 것이다. 

 

 

 

 

 

 

                                        귀거래사 , 도연명

 

 

           돌아가리라.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몸에 사역하였으니, 어찌 근심하여 홀로 슬퍼할 것이 있으랴

           지난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장래에는 쫓아서 틀리지 않을 것을 알았노라

           참으로 길을 잃고 헤매이었으나 그리 심하게 틀린 것은 아니니                             

           지금이 옳고 어제까지는 틀렸음을 알았노라

 

           재는 흔들거리며 가볍게 밀려가고

           바람은 옷자락을 펄럭인다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어서 가니

           새벽 빛이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도다

           이에 내 집의 처마를 바라보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달려 간다

           동복은 환영하며 맞이하고, 어린 아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누나

           어린 것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니, 술이 통에 가득하구나

           술병과 잔을 끌어 당겨 스스로 잔을 기울이며

 

           정원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얼굴에 기쁨이 가득해진다

           남쪽 창에 기대어 태연스레 앉으니

           무릎에 겨우 거둘만한 작은 방이나 편안키만 하여라

           정원을 날마다 거닐어도 언제나 색다른 풍경이 눈 앞에 펼쳐 지고

           문은 비록 달려 있지만 항상 닫힌 채 그대로다

           지팡이로 늙은 몸을 부축하여 다니다 아무 곳에서나 맘대로 쉬고..... 

 

 

 

 

 

 

 

 

 

                                             호취도   豪鷲圖

 

 

 

 

영모화(翎毛畵)란 .. 새와 동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영(翎)은 새 날개의 긴 털을 의미하고, 모(毛)는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의미한다. 원래 영모(翎毛)는 새털의 의미로 쓰여, 새 그림만을 의미하였으나, 근래에 오면서 점차로 짐승까지 포함한 새와 짐승의 그림을 뜻한다.

 

 

 

 

 

 

위의 호취도(豪鷲圖)는 영모화에 있어 장승업의 재능과 필묵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목에 앉아있는 두 마리의 매를 그렸는데, 살기등등한 매의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발톱 등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여 마치 살아있는 매를 보는 듯하다. 또한 古木은 진한 먹을 사용하여 힘차게 표현한 반면 꽃과 풀 등은 연하게 채색을 가미하여 갸냘프게 묘사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은 종이에 수묵 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135.4cm x 55.4cm로 호암미슬관이 소장하고 있다. 나뭇가지들의 변화있는 굽음새와 두 마리 매의 당당한 앉음새가 잘 조화를 이루었고, 특히 매의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등은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古木의 묘사에 더해진 대담한 묵법과 바위,대나무,나뭇잎들의 표현에 보이는 장식성 높은 설채법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갑자기 화폭에 선득하니 찬바람이 인다. 그것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다. 장승업이 큰 붓에 진한 먹물을 듬뿍 묻혀 사납게 휘둘러 댄, 고삐 풀린 천성의 자유분방함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인 것이다.

 

 

 

장승업은 글을 몰랐다. 그리하여 장승업 그림의 낙관이나 화제(畵題)는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이 호취도의 화제(畵題) 역시 정학교(丁學敎 1832~1914)가 쓴 것인데, 그는 장승업의 심사를 잘 알아 굵고 가늘게 퉁길 듯 날아갈 듯 변화무쌍한 필획들을 번드쳐 쌩하는 삼엄한 소리를 내는 듯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써 내여 갔다.

 

 

 

              지활산고첨의기   地闊山高添意氣   땅 넓고 산 드높아 장한 의기 더 해주고

              풍고초동장정신   楓枯艸動長精神   마른 잎에 가을 풀 소리 정신이 새롭구나

 

 

 

 

 

 

 

붓질은 물기가 홍건하여 윤택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호방한 붓질로 장승업은 정신이 번쩍 들게 때려 넣는가 하면 당겨 뽑고, 꺾어 냈는가 하면 잔가지를 이리저리 삐쳐댔다. 나무 이파리는 크고 작은 울림이 자진모리 장단을 타고 달리는 듯 하더니, 급기야 독수리며 나무이끼의 반복되는 점들에 이르자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인냥 두들겨 댔다.

 

 

그것은 형상이기 이전에 움직임이고, 보고 있는 동안 그대로 음악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나무는 나무, 독수리는 독수리, 풀잎은 풀잎이다. 어느 하나 틀에 맞춰 그린 것이 없으니,장승업의 호취도는 과장이고 애곡이다, 그런데도 넘쳐나는 이 생명력은 무엇인가.

 

 

 

 

 

 

 

 

                                            쌍치도   雙雉圖

 

  

 

 

 

 

 

 

 

쌍치도(雙雉圖)는 두 마리의 꿩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장끼(수꿩)는 나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까투리(암꿩)는 고개를 뒤로 돌려 바위 사이에 활짝 핀 화초를 바라보는 생동감있는 모습이다. 

 

 

 

 

 

                              영모도대련 (翎毛圖對聯) .. 호취도 + 쌍치도

 

 

 

 

 

 

왼쪽 그림이 쌍치도(雙雉圖), 오른쪽 그림은 호취도(豪鷲圖)이다.  영모(翎毛)는 "새 갓 영(翎)"과 "털 모(毛)"자로 새의 깃털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를 그린 그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새의 깃털과 동물의 털로 의미가 확장되어 새나 털이 있는 짐승 등을 소재로 그린 동물화를 통틀어 영모도(翎毛圖)라고 한다.

 

 

 

또 대련(對聯)은 동일한 형식으로 나란히 붙는 글이나 그림을 말하는데, 그래서 원래 호취도는 쌍치도와 함께 짝을 이루는 그림으로 "영모도 대련"이라고 한다. 위의 호취도와 쌍치도는 그 크기도 각각 135.5 x 55.0cm로 동일하며,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고목을 배치하여 두 폭의 그림이 하나의 그림인 것처럼 보이게 한것도 대단한 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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