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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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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그시절 스크랩 원림(園林)과 고가(古家) 순례 <3>
裕耕 박노철 추천 0 조회 66 11.03.21 15: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담양 고재선 가옥(潭陽 高在宣 家屋)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5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맞담으로 형성된 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이 주택의 뒷편 쪽문에 이른다.

 

사랑채 서쪽에 중문이 있으며 중문과 축을 맞춰 안채를 배치하였다.

중문에서 안채로 출입할 때 안채가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시선차단용 담을 ㄱ자형태로 계획 하였다.

안마당 서쪽에는 안채와 직각으로 광채를 배치하고 안채 동북쪽에는 3칸의 식료창고를 두었다.

 동북쪽에서 수로를 끌어들여 사랑마당의 동쪽에 연못을 만들었다.  

안마당과 사랑마당은 내담을 쌓아 구획하였다. 건립연대는 1933년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일자형(一字形) 6칸 전후좌퇴(前後左退) 집으로서

서쪽의 2칸부터 5칸째까지 후퇴(後退)에 다시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평면의 칸살이는 좌측으로부터 작은방, 대청 2칸이 있고

그 다음에 좌우 2칸이 큰방이며 뒤툇칸은 좌우 옷방으로 되어 있으며, 다음칸은 부엌이다.

구조는 2고주 5량으로 납도리에 장혀를 받쳤으며 보 밑에는 보아지를 끼웠다.

주춧돌은 네모꼴의 화강암 가공석이며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기단은 외벌내 죽담이며 지붕은 합각이다.

 

사랑채는 일자형(一字形) 4칸 겹집으로서 전퇴(前退)를 두고 좌측과 후면은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평면의 칸살이는 서쪽으로부터 상하로 각 1칸씩 6개의 방이 있으며

맨 끝칸은 상하 2문의 대청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2고주반 7량으로 납도리에 장혀를 받쳤다.

주춧돌은 사각형으로 화강암 가공석이고 사각모기둥을 세웠다.

단은 외벌대 죽담이며 지붕은 합각이다. 광채는 일자형(一字形) 5칸으로

북쪽 1칸 마루를 깔았으며 나머지는 흙바닥(土床)으로 되어 있다.

 

- 사이트 '한국관' 내용 참조 -

 

 

 

 

 

 돌담아래 봉선화가 심어진 노둣길을 따라가면...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타난다

 

 

 

 

 평상시는 집을 거의 비워놓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광채

 

 

 

 

 안채의 부엌과 굴뚝의 배치

 

대문칸은 모두 3칸으로 중앙칸이 평대문으로 되어 있고 우측에 방이 1칸씩 구성되어 있다. 

맛배지붕으로 되어있는 건물이 대문이다.

 

 

 

 

 마당 한켠에 심어진 목화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모양

 

 

 

 

 울을 타고 오르는 유홍초

 

 

 

 

중문 담에 매달린 박

 

 

 

 

고재선 가욱의 가장 멋진 공간이랄 수 있는 태당 연못.

연못 가운데 오죽이 자라는 동산이 있고,

건물 오른쪽 대청마루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형태인데

아쉽게도 물이 채워져있지 않은 상태다.

 

 

 

 

 

수세미꽃

 

 

 

 

 광채 끝에서 바라본 안채

 

 

 


 

 

 

 

 

담양 고재환 가옥(潭陽 高在煥 家屋)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37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155 - 1

 

 

고재환 가옥은 창평면 소재지의 남쪽부근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 자리하고 있다.

넓고 잘 다듬어진 마을 안 길을 가다 집으로 향한 좁은 골목으로 10여m 지나면 5칸의

곡간채가 나오는데 맨 좌측 끝 1칸을 대문으로 하였다.

동입서출이라고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벽돌 담장을 쌓아

대문에서 안채가 들어다 보이지 않게 하였다. 시선차단용 담장을 지나면 넓은 안마당을 두고

사방을 안채, 사랑채, 삼칸채, 문간(곡간)채가 마당을 에워싼 ㅁ자형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옥의 구성은 정면 6칸, 측면 1칸, 전후좌우퇴의 규모를 갖춘 아주 격식 있는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 간2채, 삼칸채, 뒤채로 이루어졌다.

 

재환의 선대는 증조부 고제두(高濟斗) 조부 고하주(高廈柱, 1874∼1932)

부 고광표(高光表, 1908∼1997) 순으로 이어진다.

 

안채는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두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넓은 토방과 사다리꼴 초석을 둔 다음

네모기둥을 세웠다. 민도리집의 기둥머리는 장혀와 창방이 걸치고 퇴보를 직교하여 결구하였다.

일반적인 가옥의 퇴보는 우미량형인데 본 가옥은 각형으로 잘 다듬어져 수평을 이루고 있다.

가구형식은 2고주 5량으로 다소 가는 기둥 위에 등굽고 두툼한 대들보를 걸쳤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세우고 다시 마루보를 얹었다. 마루보 위에는 원형대공을 세우고

장혀받침 종도리를 얹어 지붕을 받치고 있다.

 

방의 창살은 이분합의 겹문으로 하였으며 대청은 4분합을 들어 열개문으로 하였다.

안방과 대청을 통하는 문은 4분합의 불발기로 하였으며

이 문 역시 들어열개로 하여 대청 주변의 실들이 안팎으로 확장 가능하게 하였다.

 

실의 구성은 동쪽으로부터 1칸 반의 부엌, 부엌 앞에 1칸의 부엌방, 2칸의 큰방,

그 뒤편에 2칸의 도장방, 2카의 대청, 1칸의 건너방의 순으로 배열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홑처마로 서까래 간격이 좁고 끝을 좁게 다듬어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추녀쪽은 선자써까래를 완만히 반전시켜 지붕의 처마선을 곱게 이루었다.

 

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이 가꾸어진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안사랑과 바깥사랑, 2개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안사랑채만이 남아있다.

랑채는 네모기둥을 가지런히 세운 정면 5칸, 측면 1칸 전후퇴의 규모이다.

 

실의 구성을 살펴보면 가장 왼쪽에 곡간이 있고, 두 번째 칸은 상하방형식으로 나누어서 앞쪽은 부엌,

뒤쪽은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벽체는 대나무를 엮어서 뼈대를 삼고 흙을 바른 심벽구조이다.

한식기와를 세겹쌓기하여 우진각지붕을 만들어 얹었다.

 

부엌 앞쪽은 전퇴부분 앞으로 그 만큼의 폭을 더 내밀어 시멘트 블록을 쌓고 부엌을 넓혔다.

부엌 위쪽으로는 조그만 방이 있고 부엌 상부에 있는 다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곡간 앞쪽에는 재래식 화장실을 두었는데 사랑채와 직각방향으로 틀어서 앉혔다.

대청 뒷벽이 담장과 연결되어 문간채로 이어진다. 담장이 시작하는 곳에 골판문을 사용하여

조그만한 문을 두었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와 삼칸채의 사이에는

2짝 판장문을 설치한 일각대문을 두었다. 사랑채 앞마당은 그리 넓지 않으며

높지 않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담장 너머에는 높지 않은 굴뚝이 마련되어 있다.

 

삼칸채는 대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고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별채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고 잔치나 특별한 행사때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였다.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조촐한 규모의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에 1고주 5량가의 건물이다. 지붕형식은 사랑채와 함께 우진각 지붕으로 충량과

선자서까래의 구조미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

특히 내부에서 갈모산방과 선자연의 형태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실 구성은 좌측부터 대청,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상태는 안채 못지 않게 잘 보존되어 있고,

부재의 재료나 가구기법 등도 안채에 비해 손색이 없다. 초벌대의 자연석 기단과 잘 다듬어진 초석,

방형의 기둥, 겹문의 미서기문으로 구성된 출입구가 있다.

 

재환 가옥은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대농가옥으로 전통양반가옥이 갖추어야 할 다양한 채의

조합형식을 두루 유지하고 있다. 흔히 사랑채와 곡간, 문간이 있는 경우는 많으나

별도의 사랑채와 삼칸채, 욕실, 화장실 등을 갖춘 주거는 드물다.

 

 안채 대청의 종도리 밑에 있는 상량문에 의하면 192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가옥이 위치한 이 곳 창평현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고재환 가옥은 남도지방의 여느 양반집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지고

보존상태 역시 우수하다. 뼈대가 굵고 치목이 잘 되어 있으며

짜임이 건실하여 전통목조건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사이트 '한국관' 내용 참조 -

 

 

 

 

 

 

쇄석이 깔린 담장길 ,요번 폭우에 무너졌을성 싶은 담장이 보이고...

 

 

 

 

담쟁이가 너울대는 담장 끝 대문에 에 다다르니

묵직한 자물쇠로 가로막은 대문이 더 이상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었다.

 

 

 

 

 

이 폭염 속,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나오다 담장이 무너진 곳 앞에 이르러 주위를 살핀다.

 누군가 무너진 담장을 넘어 산두(밭벼)가 심어진 곳으로 넘나든 흔적이 보인다.

 

 

 

 

고양이 걸음으로 무너진 곳을 넘고 산두밭을 따라가니

안채로 드나드는 쪽문이 나타난다 

 

 

 

 

이 고가 역시 텅텅 비어있는 적막공간이었다.

이런 아까운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니,

이거 이래서야 어디원...!

 

 

 

 

 

 

 

 

 우물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이 곡간채이고 굴뚝 건너는 사랑채이다

 

 

 

 

안채 부엌 뒷편

 

 

 

 

마당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화단

 

 

 

 


 

 

 

 

 

 

창평 춘강 고정주 고택 (昌平 春崗 高鼎柱 古宅)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2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규 모 : 안채(정면 7칸, 측면 3칸, ㄷ자형, 팔작지붕), 곡간채(정면 4칸. 정면 2칸), [안]사랑채(정면 4칸),

[바깥]사랑채(육효당)(정면 4칸), 사당(정면 2칸), 잠실(정면 3칸), 대문(정면 5칸 솟을대문), 중문(2칸)
  건립년대 : 1913년  


이 가옥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등으로 구성되어

나름대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이다. 남서측에서 솟을3문을 통과하여 출입하면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가 나란히 위치하고

그 뒤로 안채와 곡간채가 직교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안사랑채 사당이 경역을 달리하여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는데 전라도지방에서는 보기드믄 ㄷ자형 평면의 건물로 뼈대가 굵고 간살이가 넓고 건실하다.

 낮은 두벌대의 기단위에 상부를 다듬은 돌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인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형식은 2고주 5량가로 구성하였고 안채 상량기록은

<崇禎紀元後五癸丑二月十六日癸卯亥時竪柱>로 확인되어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효당이라는 당호가 있는 바깥사랑채는 4칸집인데 전후엔 퇴가 있다.

좌우에는 퇴칸이 없고 전면에 툇마루만 설치되어 있으며 두벌대의 기단위에 사다리꼴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진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구조는 2고주 5량. 안사랑채는 4칸의 전후좌우 퇴집으로 팔작지붕이다. 

 

 

 

 

춘강선생 고택의 최대 히로인 반송 한그루.

멋드러진 살풀이를 연상시키는 저 소나무가 없었더라면 정말 정말 실망할 뻔 했다.

 

 

 

 

 

 

성균관 대제학 직각이었던 춘강 고정주 선생. 인촌 김성수의 장인이기도 하다.
100여년전에 한양에서 영어, 수학 선생을 모시고 내려와 창평 근방 인재들을 교육 시킨 인물.
월봉산 상월정에 창평 영학숙을 열어 학인들 모두를  무료로 기숙시켰다고 한다.
월봉산 상월정 영학숙의 위치가 산 속인지라 너무 불편하다고 판단하여

지금의 창평 초등학교 자리로 학숙을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의 모태라고 볼 수 있는  고정주 고택.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현대사적 의미가 매우 깊다는데.

 

하지만 2010년 여름, 

거의 주저앉기 일보직전의 퇴락한 건물 상태를 보는 이 착찹함이여....

 

 

 

 

 

 

창평지역 근세사를 오롯히 지켜봤을 춘강고택의 반송

소나무 등걸을 쓰다듬으며 그저 공손함으로 선각자의 삶에 경의를 표 할 뿐이었다.

 

 

 

 


 

 

 

 

 

 

세계적인 무용가 홍신자씨와 결혼한 독일인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선생이 거주하는 집.

 이 집은 원래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 고재욱씨(1903~1976)의 소유였는데

고인의 손자인 고영진 광주대학교교수가 사세에게 무상임대한 것이라고.

대지는 2000㎡에 이르고 건물은 본채, 사랑채, 아래채 등을 합쳐 361㎡.

이 집 역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담장이 꺾여져 있다.

 

 

 

 

 

이 댁 역시 멋드러진 수세의 소나무 두 그루가  마당을 지키고 선 모습이다.

 

 

 

 

 

굉장히 정갈하게 유지되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당의 석가산에 서 있는 존수한 형태의 반송

 

 

 

 

 

상사화를 비롯 여러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는데...

 

 

 

 

 

안채와 바깥 사랑채를 가르는 화단에는

영산홍이나 자산홍 쯤으로 보이는 나무가 울창한 모습이다.

 

 

 

 

 


 

 

 

 

 

 

근대 일본식 가옥

 

 

 

 

 팔작과 고딕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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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30 16:51

    첫댓글 너무 좋아서,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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