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인욕이란 욕됨 참는 것 아니라 욕됨이란 상 내지 않는 것
보시바라밀은 무주상이라야 복덕이 무량하여 헤아릴 수가 없어
몸 찢기는 고통당했어도 나라는 상 없으면 가해도 피해도 없어
싫고 좋은 감정이 사대로 조합된 인연 대상 향해 끊임없이 작용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설하시는 제일바라밀이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제일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을 말한다. 육바라밀의 첫번째 바라밀이 보시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처음 설하실 때 무주상보시를 찬탄하시기를 그 복덕이 무량하여 시방허공과 같이 헤아릴 수 없다 하셨다. 왜냐하면 생김과 시작과 원인이라는 상이 없으니 인(因) 자체가 무상이요, 결과인 과(果) 역시 상이 없는 무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상이 없는 무상의 인과는 곧 부처를 이름 함이다.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마음을 깨친 이가 제일 희유하다 하였는데, 이는 사상이 없는 까닭이다. 왜냐? 사상이 사상 아님을 앎이요, 사상이 사상 아님을 알면 어떻게 되는가? 곧 상을 여읜 부처라 이름 함이다.
이렇게 마음을 깨친 이는 보시바라밀도 보시바라밀이 아니요, 이름이 보시바라밀일 뿐이라는 것을 앎이니, 무주상보시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시방허공과 같다하지만, 이 경의 뜻으로 봐서는 무량복덕이 무량복덕 아님이요, 그 이름만이 무량복덕이고, 무주상도 무주상이 아니요 그 이름이 무주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진실된 무주상 보시라고 한다면 무주상보시인 줄도 몰라야 하느니, 바로 이 같은 상을 갖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주상보시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이 보시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만이 보시바라밀이다. 그런 까닭에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님이요, 그 이름만이 제일바라밀이니라 하신 것이다.
수보리 인욕바라밀여래설 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須菩提 忍辱波羅蜜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께서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만이 인욕바라밀이라 하시느니라.
인욕바라밀 역시 육바라밀의 하나이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忍)이요, 마음이 매우 불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욕(辱)이라 한다. 즉, 욕됨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에 상을 두지 않음으로 욕됨이 욕됨 아닌 것이 됨이니, 이를 인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안팎의 일체상을 여읜지라, 호호탕탕하여 털끝만큼도 걸림이 없음이니, 욕이 된다는 상이 없고 참는다는 상이 없으므로, 인욕은 그저 이름뿐인 것이 됨이다. 부처님께서는 목숨을 바쳐서 보시를 하는 것도 큰 공덕이 되겠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복을 받을 뿐이라 하시고, 신명을 다 바쳐 보시하는 것보다도 완전한 공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의 하나만이라도 설법할 수만 있다면 이 공덕이야 말로 허공보다 더욱 넓은 무량한 복덕이라 하시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그렇다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과연 있을까? 이를 아신 세존께서는 인욕바라밀을 설하시어 대중의 의심을 말끔히 끊으셨으니, 진정한 인욕이란, 욕된 것을 무조건 참는 것도 큰 공덕이 되겠지만, 이보다 완전한 인욕이란, 욕이라는 상, 참는다는 상까지도 아예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루에 화를 내는 횟수는 얼마나 될까? 아주 미세하게 기분이 나쁜 때도 많지만, 때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를 때도 있다. 혼자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날 때가 있는가하면, 대부분은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을 때 몹시 화가 난다. 하물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원하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정말 화가 많이 난다. 보통 하루에 8만4천 번 기분이 나쁘다. 화가 나는 것은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다.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쁜 원인을 대부분 상대방이나 일에서 주로 찾는다. 나에게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문제라기보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화를 내고 기분이 나쁜 것은 내 마음이요 나의 감정이다.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게 되는 근본원인은 기분이 좋은 감정에 있다.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분별이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긴다. 예쁜 것은 더 예쁜 것이 나타나면 더 이상 예쁘지 않다. 맛있는 것은 더 맛있는 것이 나타나면 더 이상 맛이 없게 된다.
따라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은 기분 좋은 감정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기분 나쁜 감정도 많아진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사람은 기분이 좋은 것도 별로 없지만, 기분 나쁜 것 또한 별로 없다. 그 예로, 부처님은 기분 좋은 상 자체가 없으므로 기분 좋은 것도 공하다. 때문에 그에 대한 인과의 과보가 없으니 기분 나쁜 상이 없고 기분 나쁜 것이 공하다. 그래서 절대 기분 나쁜 마음 감정이 없다. 그러니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 기분 좋은 것을 알고 있고 기분 좋은 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상이 가지고 있는 한, 비교적으로 언제라도 기분 나쁜 인연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가 나는 일이나 기분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면, 내 마음속에 있는 기분 좋은 것에 대한 상을 멸해야 한다. 기분 좋아지려하면 할수록 기분 나쁜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과의 법칙은 극락이나 지옥에서도 똑 같다. 몸이 찢기는 일이 생기더라도 기분이 좋고 나쁜 상만 없다면 몸이 찢기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이적이라 하고, 이적은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 인과를 없애고,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질 때 저절로 생기게 된다.
만약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나의 마음속에 아직도 기분 좋은 것을 바라는 욕심이 있구나하고 생각하여, 재빨리 기분 나쁜 마음을 접어야 한다. 그리고 좋지 않은 상을 일으키는 마음을 잠재워 나가야 한다. 모든 감정은 나 스스로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사지가 갈기갈기 찢길 적에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옛적이란 전생을 말한다. 가리왕은 전생에 만났던 왕이다. 가리(歌利)란 극악(極惡)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되기 전 전생에 산중에서 인욕행을 닦는 수행자이셨다. 그때 가리왕은 산중으로 사냥을 왔는데 사냥을 하는 사이, 궁녀들이 수행자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본 가리왕이 수행자에게 질투를 느껴서 ‘너는 어찌하여 여색을 보는가?’ 수행자는 ‘탐하지 않노라’고 말했다. ‘어찌하여 여색에 탐심이 없는가?’ ‘나는 계를 지킨다.’ ‘계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욕(忍辱)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다.’
이때 가리왕은 칼로 수행자의 몸을 베면서 말하기를 ‘아픈가?’ ‘아프지 않다.’ 가리왕은 수행자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물었다. ‘나를 원망하는가?’ 수행자는 ‘나라는 아상이 본래 없거니 어찌 원한이 있겠는가?’ 이때 하늘이 노하여 석우(石雨-돌비)를 내리니 가리왕은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데 수행자의 몸은 그대로였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수보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때 나의 마음은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하심이다. 사상이 없으므로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니니, 안으로 진실이 공하고, 밖으로 몸에 대한 신상이 공하여, 가해자와 피해자도 공하여 없었으므로, 고통 또한 공하고 아픔 또한 공하여 없었다. 만약 인욕을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사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면치 못하였음이니, 어찌 내가 신상이 없었을 것이며, 동시에 고통이 없었을 것이며, 또한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시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대상은 역시 가족일 수밖에 없다. 가족 구성원은 대개 부부와 부모, 자식을 가리킨다. 감정으로 치면 가장 큰 정이 오고 가는 대상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그 어떤 큰일보다 우선시 한다. 가족을 제외한 친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정이 두텁냐 두텁지 않느냐의 정도에 따라, 나에게 중요한 사람 또는, 가까운 사람의 척도를 삼게 된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결론적으로 설명하자면, 모든 고락은 정에서 비롯되고, 정을 느끼고 있는 한, 고통과 괴로움의 상태는 계속 유지되고 윤회하게 된다. 정이란 고운 정, 미운 정, 좋은 정, 싫은 정, 즐거운 정, 기쁜 정, 괴로운 정, 슬픈 정 등 이 모든 것의 느낌을 정이라 한다. 정을 느낀다 하여 중생의 다른 이명을 유정이라 한다고 수차례 설명했다. 정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는 인과가 따른다고 했으니,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정이다. 즉 사람이 느끼는 모든 기분 역시 정의 일환이다. 기분이 좋은 것도 정이요, 기분이 나쁜 것도 정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모든 모습은 인과요, 인과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연기라고 했다. 밀물과 썰물이 인과요, 일출과 일몰이 인과요, 맑은 날과 흐린 날이 인과요, 춘추와 하동이 인과요, 태어남과 죽음이 인과요, 생겨남과 사라짐이 인과요, 오고 감이 인과요, 노소가 인과요, 높고 낮음이 인과요, 좋고 싫음이 인과요, 기쁨과 슬픔이 인과요, 즐거움과 괴로움이 인과요. 그래서 정도 인과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이나, 육근과 육경으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나의 마음도 인과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연 대상들도 지수화풍 사대로 빚어진 모양들로서 인과 인연에 따라 만나지고 있다. 따라서 진짜는 내가 지니고 있는 업, 즉 좋고 싫은 고락의 정이, 사대로 모여 만들어진 인연 대상들을 향해,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도 지수화풍 사대요, 나와 관계된 모든 대상들 역시 지수화풍 사대로 만들어진 물질들일 뿐, 그 물질 대상들을 상대로 나의 업 즉, 좋고 싫은 나의 고락 정을 내뿜고 있으니, 내가 나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에 의해 나의 업, 정이 움직이는 것은, 진짜 상대가 아닌 나의 업이 사대로 만들어진 대상들을 향해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변하고 연기하는 것들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육근 육경으로 감지하는 대상들 역시 사대로 이루어진 공성인 것들이다. 그래서 가족도 사람도 모두 공일 수밖에 없고, 감정 역시 고락의 인과이니,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1-1=0 이니, 공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81호 / 2023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