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 (최양업 토마스) 성지 최양업 도마 신부 기념성당 성당 입구 우측에 있는 최양업 도마 신부상 대성당 안의 모습 대성당 뒤 조각공원 넓은 공원 앞면 제단 좌측으로부터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 최양업 토마스신부 출생 1821년 3월1일 충남청양군화성면노암리 누곡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6형제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고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서 겸손과 심신이 두드러 졌다. 신학생으로 선발 1836년 2월6일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와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모방신부로부터 신학에 필요한 라틴어를 시작하였다. 마카오로 유학 1836년 12월3일 동료들과 함께 모방신부 앞에서 성성에 손을 언고 십자가 앞에서 선서한 후 서울을 출발 책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나고 중국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1837년 6월 7일 신학공부 1837년-1842년 마카오 파리 외 방전 교회 극동대표 부안에 설립된 임시 조선 신학교에서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와 리브와 칼레리 신부 등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과 숙명으로 철학 및신학 공부를 하였다. 동료 최방제의 죽음 1838년 11월27일 믿음이 강했고 신심이 강했든 최방제가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착하신 예수님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적 슬픔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기해박해가 일어남 1839년 3월 5일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세분의 선교사와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하였다. 그해 4월부터 11월 말까지는 마카오 지역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와 콜롬보이에서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부모님의 체포 1839년 7월 부모님과 5명의 동생들 그리고 40여명의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갈 때 부친은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갖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고격려하였다. 포도청에서 옥중생활 포도청에 갖친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견디기 힘든 문초와 고문을 받았다 이고문 외에도 마음에 큰 고통은 갓난 아기에 대한 모성애였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동생의 정야고보에게 한 어머니의 유언 곤장3대를 맞을 때까지 입을 연지 않았던 의정 야고보는 고문에 못이겨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풀려 났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풀려 났다가 다시 감옥에 갇친어머니 작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배교하고 풀려 났던 어머니는 큰아들이 유하갔다는 사실이 탄로나 형조감옥에 갇혔다 여기에 갇혀있던 신자들의 권고로 말미암아 자신잘못을 뉘우치고 배교를 취소하였다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순교 1839년 9월 12일 40일 이상 팔주리와 다리주리의 고문을 당하여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끝까지 요지부동한 항구심으로 견디어 내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옥중의 모친을 돕는 의정 야고보 한다 이상 감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는 모친과 신자들의 위하여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주실 것을 부탁하였다. 모친의 순교 1840년 1월 31일 다른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십자가 형틀에 올라갔고 안온 하고 평화 스런 얼굴로 당고개 형장에 나아갔으며 휘광이의 칼아래 영광스럽게 순교하였다 의정은 이모든 일에 증인이 되었다 어린 동생들과 다니는 의정야고보 14살의 어리 의정은 보호자도 없고 아무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아야 했는데 용인 진천 등지로 친척집을 찾아 다니면서도 오직 주님의 돌보심에 의탁하였다 소팔 까자 교우 촌에 머물은 북상하는 프랑스 함선의 통역을 맡아 마카오를 떠난 최양업은 상해요동 양관을 거쳐 1842년 11월에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있던 장춘 부근의 소팔 가자 교우 촌으로 가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슬픔과 기쁨 책문을 통해 조선교회 밀사들로부터 기해 박해로 부모님께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843년 3월 그리고 1844년 12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동료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조선입국을 위한 여정 1846년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도북방의 훈춘 경원과 서북방의 의주를 통해 두차례나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847년 8월 서해로 배를 타고 나왔으나 고군산도 부근에서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되돌아 갔다 영원한 사제가 됨 1849년 4월 15일 강남 교구장인 예수회원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상해 예수회의 서가 회의 대성당에서 사제로 수품되었다 조국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고자 천상의 도움과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였다. 귀국의 성공 1836년 조국을 떠난지 13년 1842년 마카오를 떠난지 7년6개월동안 6차례의 여행끝에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한 채 1849년 12월혹독한 추운 밤에 의주변 문을 통하여 귀국에 성공하였다 동생들과의 만남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용인의 한덕골 중백부 댁으로 가서 네명의 동생들과 울음 속에서 만났다 동생들로부터 그동안 겪은 고통들을 들으면서 슬프고 비통한 마음을 가라 앉히고 동생들을 위로하였다 열정적인 사목 활동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6개월동안 쉬지 않고 충청 전라 경상 강원 경기도 일부에 흩어져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3,815명의 교우들을 만났다 1851년에는 5,936명에 이르는 127개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다 동생들에게 혼인성사를 줌 충북진천 동골 교우 촌에 머무를 때 셋째동생 우정바실리오와 넷째동생 신정 델레신 포로를 기해 박해 순교자인 송구현 도미니코의 열심한두딸과 결혼을 시켜 혼인성사를 주었다 교우촌을 찾아가는 신부님 1851년 10월 교우들은 깍아 지른 듯한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젚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고 있었다 며칠씩 기를 쓰고 걸어 다니면서도 40-50명쯤되는 교우들을 만날 뿐이었다 안나에게 고해성사를 거행 1850년 10월 먼길을 걸어가서 외교인과 결혼하여 19년동안 성사를 받지 못하였지만 신자의 본분을 다했든 안나에게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주고 성체를 영해 준다음 나오면서 한영혼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성직자 양성과 교회서적의 번역 교우촌을 순방하는동안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고 1854년 순교자들의 순교사실과 행적을 조사하고 천주성교공과와 성교 요리의 번역과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배론 신학교의 설립과 방문 1855년 초부터 배론 장주기요셉 회장의 집에 최초의 신학교가 개교하였다 그후 프르티에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에의해 10여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는 그해 10월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진밭들 교우 촌에서 습격을 당함 1856년 진밭들 교우 촌을 방문하여 고해성사후 세례성사를 집전하던 도중 백명이 넘는 포졸들이 들이 닥쳤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이사짐을 챙겨 들고 빠져 나와 맨발로 가시덤불 사이를 혜매 기도하였다 문경에서 과로로 쓰러짐 그는 나흘밤동안 계속해서 과중한 성업을 수행하면서도 휴식을 전혀 취할 수 없어 무척 지쳐 있었다 1861년 6월 공소순방을 마치고 주교님에게 보고 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 과로로 쓰러졌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 1861년 6월 15일 푸르티에 신부는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는데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정확하게 지킨 최양업 신부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다만 두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다 배론 뒷산에 안장 그의 굳건한 신앙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신심 훌륭한 분별력으로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그해11월초 신학교 뒷산에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장례미사를 봉헌하였다 제대 와 마주보고 있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상 묘지 올라가는 곳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상 글씨 및에는 사향가(思鄕歌)가 써있음 겟세마니 동산 성인의 묘 최양업(崔良業,토마스) 신부의 묘 최양업은 1821년 3월 10일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과 이성례 마리아 (1801-1840)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양업은 1836년 12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에 유학을 떠났다 1844년 12월 중국 소립가자 본당에서 부제품을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품을 받았으며, 입국하기 전까지 만주 요동에서 7개월간 중국신자들에게 사목 활동을 했다 그해 12월 입국한 그는 11년 6개월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등지에 살고 있는 127개 교우촌의 신자들을 사목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국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정 그리고 분별력을 가지고 사목 활동을 전개했으며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에 80-100리를 다니는 사목방문, 성직자 양성, 교리서의 번역과<천주가사의 저술, 순교자 자료수집등을 수행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교우촌 순방을 마치고 교구장에게 사목 활동 결과를 보고 하려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배론에서 170리 떨어진 곳에서 과로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같은 해 11월초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그리고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인 이곳에 안장되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올라온 능선 꼭대기에 있는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 신부님과 윤재 장프란치스코의 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