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박정희, 당찬 박근혜, 밝은 20대! | |
산업화가 민주화를 거쳐 선전화로 가고 있다 | |
20대 젊은이가 희망!!!(웨이브 일베회원) http://www.ilbe.com/2272637448 2013.10.30 지난 대선 때 50`60이 투표율 89.X%로 해외 출장자, 병원중환자 외엔 거의 전부 투표에 참여했고 이들 중 특정지역 외의 유권자는 대부분 박근혜에 표를 주어 박근혜 당선의 1등 공신이 됐다. 10년 전 2002년 12월엔 이들이 40~50으로 당시엔 이회창 보다는 노무현에 더 많은 표를 줬다가 깽판치는 노무현에 호되게 당하고 후회하고 늦게나마 정신 차린 것이다. 이들이 베이붐 세대로 인구분포 중 가장 많은 인구수 자랑한다(1955~1963년생) 50~60이 뒤늦게 제정신 차렸다면, 20대 유권자가 장래 자유 대한민국의 희망이자 보루가 될 게 확실하다. 지난 대선때 20대 33.4%가 박근혜 후보에 표를 주어 세간을 놀라게 했었다. 네이버나 다음 아고라등 종북세력이 장악한 포털 사이트에 함몰되어 20%나 박근혜 표가 나오려나 걱정했었는데, 문재인 지지하던 골빈 어른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최근 박근혜 지지도 자료에서 연령별 지지도를 보면, 20대 젊은층의 박대통령 지지율이 30대(40대 초반) 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50% 넘는 20대 지지율 수치를 자주 보게 된다. 지금 20~30은 그 부모 세대가 50~60으로(베이붐 세대로 인구수 최다. 지금 2030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 전교조의 해악을 몸으로 겪은 5060이 자식을 전교조 종북에 오염되지 않도록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일만하며 고생하며 전교조에 자식 맡긴 6070이 자식교육 방치하여 이들 자녀들은 노사모 전교조에 세뇌되어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이리저리 분위기에 휩쓸리고 노무현의 선동에 휩쓸리곤 한다. 어렷을 적, 교복자율화, 칼라TV 세대로('80년말 칼라 방송) 유년기를 보냈는데, 6070부모들이 열심히 일한 덕에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세대인 3040(40대 초반포함)은 1987년 무렵 전교조가 태동하여, 전교조에 무방비로 방치된 세대다. 육사에 입학해서 '주적이 누구나?'는 물음에 미국이라고 답한 생도가 많았던 것도 이들 세대다. 유복하고 부족함 없이 자란 3040(40초반 포함)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 IMF가 터졌고, 3040은 처음 고통이란 걸 맛본다. 2030 보다는 3040이 현실 비판적이다(다소 삐뚫어진 시각으로 트집 잡으며 까칠한 경향). 전교조도 그렇게 가르쳤고(비판적 사고가 지식인의 소양인 양 착각) IMF란 암울한 상황이 부채질했고(이들이 취업하기 어려웠슴) 노사모가 이들 세대를 농락했다('무뇌충'이라고 놀림 받음) 3040에서 정신 차리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곤 있지만, 3040(40대 초반)이 지금도 종북정당 지지율이 제일 높다. 희망적인 건, 20대 젊은 층들이 선배들과 달리 종북적이지 않고 그들 부모를 부정하지도 않고 박정희 등 산업화 일꾼들에 대해 객관적 가치관을 갖는다는 점이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태에 대해 올바른 인식도 갖고 있고 긍정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안목도 갖추고 있는 세대로 보인다. (제갈대중부관타살 일베회원의 댓글: 그렇다! 삼사십대도 예외는 점점 많아질 테니 좋게 생각하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박근혜 대통령의 주적개념(경기병 시스템클럽 회원) 박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보수층을 많이 헷갈리게 해오고 있지요. 그러던 와중, 부임 초부터 계속되어 온 야당의 전방위적 공세에 맞불성격(?)으로 취해진 통진당 이석기 문제라든가 전두환 비자금환수, 채동욱 검찰총장에 얽힌 문제, 문재인 NLL문제 등은 혹시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차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살만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후 누가 요구한 바 없는데도 역사교과서 문제와 전교조 문제를 자발적이면서도 적극적 자세로 접근하는 것을 바라보며 이 같은 일련의 조치는 정권 안보차원을 넘어서는 보수이념 수호의지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한 가닥 믿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념면으로나 자질 면으로나 박대통령을 신뢰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념도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서의 능력도 미지수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 교과서와 전교조 처리문제를 지켜보며 그동안 불투명했던 박대통령의 주적개념이 무엇인지, 이념적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은 어느 정도 가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의 대북정책이라던가. 경제정책, 복지 정책 등은 좌익칼라가 강하지만 말이지요. 앞으로는 위와 같이 좌익과 관련하여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정리해 나가느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박대통령의 능력과 역량에 달린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면서 최종 5.18사태에 대한 바른 평가는 박대통령의 이념과 역량을 모두 신뢰케 하는 대한민국 사에 크게 빛나는 모뉴멘트가 되리라 봅니다. 부디 박대통령이 임기 내에 기필코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좌좀들을 아예 뒤비지게 하는구나(현산 시스템클럽 회원) 그제 야구 시구로 좌좀들 속을 뒤집어 놓으시더니, 저녁에는 청와대 뜰에서 느긋하게 아리랑 공연을 즐기셨구만. 호떡집에 불난 듯 방방 뛰고 있는 민주당과 좌좀들 속이 뒤집어지겠다. 특히 노숙한다며 괜히 거지복장으로 돌아다니는 한길이는 아주 환장하겠구나! 근데 우야노,,, 너들은 시방 이 시국에 어쩌구 하며 레이디각하 운동화까지 코 대고 킁킁거리지만, 레이디각하가 누대에 올라 대한민국을 바라보기로는 청풍명월이란다. 너들 태생이 천하고 무식하고 양아치인 걸 누구탓 하겠나... 좌파들이 20여년 간 굳혀 놓았다고 자부한 역사왜곡을 이미 바로잡기 시작했고, 나라의 암적 존재이나 누구도 손대지 못한 전교조 해산도 엊그제 시작했다. 다음은 아마 통진당 해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더 떨고 있제? 당분간은 다소 소란스럽겠지만 나라는 비로소 청풍명월이다. 레이디각하가 그동안 어머니 같은 맘으로 충분히 기회도 주고 배려도 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10% 지지세력에 권력을 나눠주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헌데도 레이디각하는 지지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배려해줬어? 근데 너들이 한 짓은 감사가 아니라 계속되는 뒤통수에다 배신이었다. 누가 그랬다. 배신자는 사람도 아니라고.. 이제 달 보고 짓든가, 같이 달구경에 참여하든가는 오로지 너들 맘에 달렸다. 백날 레이디각하 치맛자락 붙잡고 사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란 말이다. 하도 못 알아들으니 레이디각하가 몸소 힌트를 보여주잖어? 그래도 못 알아듣고 난동부리면 그땐 딱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하는 TV프로의 방식 - 100% 효험이 있었잖어? 아마도 국민들이 그 방법밖에 없다고 난리칠 거다. 아~ 박정희!! (메이지 유신, 장개석, 이광요와 비교)(6부능선 일베회원) http://www.ilbe.com/2269673059 2013.10.30 박정희 시대 18년의 의미에 대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제적인 진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한테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기적'이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해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세계의 대부분의 경제학자, 역사학자들이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폄하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더 잘 하지는 못해도 그 정도는 했을지 모른다.' 또는 '오히려 개발 독재의 후유증이나 상처 없이 이루어 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엄청나고 거대한 일을 해낸 것인지 우리 스스로 잘 모르고 있다. 코리아의 근대화는 세계사의 기적이며, 세계사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다. 마치 요술을 부린 것과 같고 마술이 시행된 것과도 같다.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내가 지금부터 우리가, 한국인들이 박정희라는 리더와 함께 무엇을 해내었는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 생각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1867년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의 친정을 실시하는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중세 봉건주의의 낙후된 사회체제를 일신하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1889년에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890년 첫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1회 제국의회는 야당이 170명, 여당이 84명인 압도적인 여소야대로 시작되었다. 민법은 이때 구성된 의회에서 심의하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9년 후인 1898년에 공포되었다. 민법이 제정되기도 전인 1894년에 동학봉기를 계기로 일으킨 청일전쟁에서 노대국 청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처음으로 열강의 말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의 시작으로부터 여기까지 27년이 걸렸다. 그러나 일본의 실력이나 열강이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야만적인 아시아의 후진국이었다. 다만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우등생일 뿐이었다. 일본이 구미의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1904년에서 5년에 걸쳐 진행된 러일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부터이다. 메이지유신 시작으로부터 38년이 걸렸다. 중세적 농업국가로부터 근대적 산업국가로 한 국가가 탈바꿈하는 데 걸린 최단기간의 기록이다. 516 혁명이 일어났던 1961년의 코리아는 도쿠가와 막부가 쓰러지던 1867년의 일본보다 나을 게 없었다. 오히려 모든 조건은 더욱 열악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그러니까 미국의 흑선이 동경만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무렵에 중세 봉건 일본은 당시의 전세계에서 몇 등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정확한 GNP나 국민 소득의 통계가 없던 시절이라 대충 짐작해 볼 수밖에 없지만 인민의 전체적인 삶의 질이나 금의 보유, 문화의 정도, 지식의 수준, 이런 것들을 척도로 보면 전세계에서 30위 안에는 드는 나라였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위 열강들을 제외하고는 전세계의 대부분의 나라가 형편무인지경이었다. 열강의 한줌도 안 되는 군대가 군함 몇 척 타고 가면 본국보다 열 배나 큰 땅덩어리를 줏어 삼킬 수 있는 시대였다. 516혁명이 나던 1961년에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몇 번째나 가는 나라였을까? 60년도의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79불이었다. 당시 전 세계 150개국 중에서 100에서 110번째 사이였다. 정확한 통계자료를 확인하지는 않은 거지만 슈퍼컴퓨터와 맞먹는 필자의 기억력에 의하면 그렇다.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출발선이 거기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선에서 시작하여 단 18년만에 해낸 것이다. 무엇을?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무엇을 해낸 것인지를 계속 이어서 짚어보자. 농업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 과정에서 자본의 집중과 빈부의 격차 인권과 노동문제를 겪지 않은 국가는 전 세계에 단 하나도 없다. 그 정도가 어떠한가와 그 결과가 어떤가의 문제이지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우리가 겪은 정도와 그 결과는 어떠한 것인가? '현대사의 질곡'이라 말하는 대단히 철학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한 산업화 과정을 밟아나갔다. 박정희의 가장 커다란 공로가 바로 이것이다. 산업혁명 당시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보였던 가혹한 노동력 착취나 아동학대, 인권유린의 참상과 비교해볼 때 전태일이 겪었던 우리나라 봉제공장의 현실은 그래도 천국 같은 것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초기 산업을 지탱했던 것은 역시 값싼 노동력이었다. 이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경공업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일본은 필요한 군함과 생산재를 사들일 수 있었다. 농민이 아닌 공장 노동자라는 계급이 나타난 것은 메이지 13년인 1880년경부터인데 1886년에 공장 노동자수가 약 11만명이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895년에는 약 43만명으로 증가했다. 이중 60%가 여자이고 그 반수 이상이 20세 미만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농촌의 기근을 피해 도시로 나온 여성들이었다. 이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7시간에서 18시간이었고 1895년 통계로 보면 평균 일당이 10전인데 하루 조악한 세끼 식사비가 8전이었다. 이 나머지 2전을 모아서 1년에 백중날과 신정에 두 번 지급했는데 이 피땀으로 번 돈을 가지고 여공들이 고향에 갈 수 있는 것도 1년에 두 번뿐이었다. 이 돈이라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고향집의 어린 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이 나라의 여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위해 일본 여성들도 하루 18시간의 노동을 감수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여공들의 기숙사는 1인당 다다미 1장이었다. 공장 노동의 결과는 폐결핵이었다. 먼지 날리는 열악한 방직 공장 근무 노동자 중 많은 수가 폐결핵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계천 봉제공장 근로자들이나 YH의 여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격렬하게 투쟁했고 메이지시대 내내 파업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처는 강경진압이었고 유신시대 한국 경찰보다 더욱 혹독하고 무자비했다. 그러한 질곡을 밟고 일본은 세계의 열강에 진입했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꺾고 한반도와 만주를 손에 넣고 세계의 열강의 우두머리인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자웅을 겨루게 된다. 우리와 다른 점은 지금 일본인들은 메이지 시대를 영광의 시대로 그린다는 것이고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어둡고 암울했던 질곡의 시대로 본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산업화 과정은 박정희 18년 동안에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 가장 빨랐던 일본의 절반이다. 이토록 단기간에 그토록 엄청난 국가적 사회적 경제적 대변혁을 그토록 적은 부작용과 시행착오로서 성공한 사례는 세계 역사에 없다. 같은 시기에 한국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면서 비슷한 정도의 발전을 이룬 나라는 대만과 싱가폴이 유일하다. 그런데 대만은 어떠했을까?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길 때 중국 전토에서 수집한 보물을 구축함 열 척에 실어 옮겼다. 그것이 소장되어 있는 것이 대만의 중경박물관이다. 하루에 수천점씩 바꾸어 전시해도 전부다 전시하는데 10년이 걸린다는 어마어마한 보물들이고 장개석이 보유했던 금괴는 당시 화폐가치로 수 십억 달러에 달했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시 우리가 대일 청구권으로 받은 돈이 고작 8억 달러였다. 장개석은 대만의 종신총통으로 선거를 의식할 필요도 없었고 그 권력은 제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만은 남북으로 긴 산맥으로 동서가 나뉘어 있다. 이 산맥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뚫은 것이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이다. 장경국은 이 도로를 죄수들과 원주민을 동원해서 해냈는데 희생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그 공사의 잔혹함은 보국대를 편성해서 딱은 제주도 순환도로가 감히 댈 것이 못 된다. 그 공사에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얼마나 컸는지 도로 개통 후에 만든 위령관이 벼락에 맞아서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현재 관광객들이 보는 위령관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 도로가 오늘날 대만 발전의 원동력이다. 우리의 경부 고속도로가 그러하듯이. 장개석이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를 거절하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꼬불쳐 놓은 돈이 워낙 많아서 구태여 왜넘들한테 내놓으라 사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중국 건국 시기에 벌어졌던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의 정도는 우리보다 더 심했다. 싱가폴은 어떠했나? 그야말로 이광요의 철권통치였다. 싱가폴은 산업국가라기 보다 서비스 국가이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불거졌을 뿐이다. 싱가폴은 공장 따위는 지을 땅도 없는 나라이다. 항구, 공항, 은행, 무역회사 뿐이다.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권이라는 국제서비스업의 필수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의 간디, 싱가폴의 이광요, 대만의 장개석, 한국의 박정희가 모두 식민통치를 했던 지배 국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장개석도 일본 육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초창기 손문의 혁명은 일본의 자금과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개석이 일본 육사의 교복을 입은 사진을 보고 욕하는 중국인은 없다. 간디와 이광요가 영국에 유학가서 공부한 것을 비난하는 인도인이나 싱가폴 사람은 없다. 만델라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사람이다. 2차대전 이후에 독립한 모든 신생국가들의 지도계급은 식민지 시절 통치국가에서 공부했거나 관료를 지냈거나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박정희의 허물이 아니라 남의 식민지가 되어 수십 년을 지낸 후에 독립한 나라의 숙명이다. 통치국가의 관료나 군인들을 빼면 나라를 경영할 인재가 없게 마련이다. 지금 독립한 지 반세기가 지난 노무현 정부도 인재풀의 빈곤에 고민하고 있다. 하물며 당시랴. 고작 4년 동안 독일에 지배당했던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은 어불설성이다. 조선일보를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들일뿐이다. 그런 논리로 말하면 36년 동안 조선인들은 전부다 소작이나 공장 노동만 하고 살았어야 하고 기업인도 법조인도 언론인도 군인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면 해방 후의 나라는 누가 끌어가나? 누가 있어 기업을 경영하며, 누가 있어 판검사를 하며, 누가 있어 신문을 만드나? 혹독한 환경과 불평등한 조건하에서 그래도 각계에서 좀 더 배우고 좀 더 경험하고 좀더 익힌 한 줌의 사람들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토마에서 펌) **박정희가 5.16을 일으킬 당시 상황은 2차대전 후 독립한 80개 나라 전부가 군부독재 정치를 하던 그런 시대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국민의 배고픔 해결과 북한과 체제경쟁 승리, 이 두가지 과제를 완벽히 수행했다!! 도로, 항만, 원전, 제철, 조선 등 국가인프라도 그 시대 때 완벽히 구축했었다!! | |
기사입력시간 : 2013년 10월30일 [04:0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