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까지는 아니고 가까이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참사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 같은 사회적 재앙에서는 당연히 국가의 책임문제가 불거지고 이는 곧 해당 기관장이나 소속 공무원의 책임소재로 이어진다. 일단은 이렇게 큰 참사에서는 작위(作爲)나 부작위(不作爲)에 따른 공무원의 책임유무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 공무원의 책임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책임을 질 일의 대부분은 인과관계에 따른 법률적인 민·형사책임이 있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치 못할 도의적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위직 공무원(정무직 공무원)에게 있는 정치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태원참사만 보더라도 국민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책임을 져야할 행정안전부나 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이나 용산구청 등 어느 사람도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형사적 책임이 없을 수도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말하는 것처럼 죄 없는 사람을 벌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책임정치나 책임행정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임정치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뼈대라 할 수 있고, 책임행정은 행정력을 담보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아주 정교한 조율이 있어야 한다. 엄혹하면 복지부동(伏地不動)할 것이고, 느슨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방임(放任)과 방기(放棄)라는 사태를 맞는다.
그러나 하위직 공무원과 달리 고위직 공무원들에게는 그 직위에 걸맞은 책임의식과 국민의 기대가 반영되어진 정치적 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등가성(等價性)을 넘는 것이다. 이러한 대참사에 법 기술적인 것만 따지고 있고 고위직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고급공무원들에게는 개념이란 것이 있는지 의아심이 들게 하고,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예(禮)는 서민에게 미치지 않고, 형벌은 사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 禮不上庶人 形不上大夫 –禮記-’고 하여 명예형(名譽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얼핏 양반이나 귀족들에게 특권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고 진퇴(進退)는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였다.
조선시대 관인들은 시비(是非)의 대상이 되면 흔쾌히 사직하고 떠나고, 탄핵(彈劾)의 대상이 되면 기꺼이 처벌해 달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고 도리였다. 이는 병자호란 때 부인 이씨는 자결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으로 평생을 살아간 윤선거의 상소문 마지막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삼가 성상께서 얼른 잘못 내려진 은명을 거두고 떳떳한 형벌을 바르게 하여 인신으로 명을 어긴 것과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라고.
아무리 환경이 달라졌다 하고,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옛사람과 오늘날 사람과의 교양이나 수양은 물론 치열함이나 미의식(美意識)에서조차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남을 느낀다.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고, 화분 안에 있다고 다 화초라고 여기는 것도 그 원인일 것이다. 삼가 애꿎은 영령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2024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