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목자의 모습
함석헌
거짓 목자의 시대
오늘의 인류는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보기 싫고 듣기 싫은 더러운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소위 목자라는 소리다.
물건이 더러우면 사람의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일이 더러우면 몇 사람을 상처 낼 수가 있으나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전체를 그릇치게 한다.
세상에 소위 자칭천자(自稱天子)란 말이 있다. 스스로 잘난 체하는 건방진 협잡꾼이라는 뜻으로 쓴다. 천자란 옛날 임금을 부르는 이름인데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라 하는 까닭은 전체의 사람을 대표하여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은 힘으로 될 것 아니라 거룩한 하늘 뜻을 체받은 사람이라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맹자보고 “요(堯)가 순(舜)에게 천하를 줄 때에 어떻게 주었습니까?” 물었을 때에 맹자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천하는 누가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했다. 그래 묻는 자가 “그럼 어떻게 임금이 됩니까?” 하니 다시 대답하기를 “하늘이 명령한다고” 했다. “하늘이 그럼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하면서 주십니까?” 하니 맹자는 잊을 수 없는 유명한 말로 다시 대답을 해주었다. “하늘은 말하는 법 없다. 사람들의 하는 일을 통해서 대답하신다. 백성들이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하늘이 주신 것이다” 했다. 인심이 천심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자유니 민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있기도 전에 전제군주(專制혀主) 시대의 일인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런 때에 있어서도 참 목자는 민중이 뽑아서 되는 것이니 스스로 내가 하겠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칭천자라면 부끄러운, 용서 못할 교만이요 협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스스로 자기를 말할 때는 고(孤)라 과(寡)라 불곡(不穀)이라 불렀다. 스스로 덕이 없고 알들지 못한 곡식 같은 것이라 겸손하는 말이다. 그 겸손 하는 데가 목자로서의 자격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후에 차차 폭력주의의 시대가 되면서부터 지배자들이 힘으로써 하려 할 때에 자기를 스스로 높여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격을 주장하고 스스로를 말할 때에 짐(朕)이라고 하게 됐다. 그것을 시작한 것이 저 유명한 진시황이었다.
오늘은 시대가 원체 씨의 대낮이 되어 감히 임금 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것은 못 쓰지만 그 속알은 놓고 싶은 생각들이 없다. 그래서 발명 해낸 것이 목자라 하는 말이다. 그것도 옛날에는 인심을 천심으로 아는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스스로 자칭 천자 노릇을 하고 싶어도 표면에 내놓고 자칭하지는 않고 옆에 있는 옳지 못한 것들 시켜서 떠받듬을 얻어서 하는 체하려 했는데 지금은 아주 노골적인 현실주의의 시대인지라, 그 점에서는 선진국 후진국 독재주의 민주주의의 구별이 없다. 어린 조카를 밀어버리고 임금 자리를 뺏으려고 나라의 모든 어진 인물들을 죽이고 즉위식을 거행할 때에 옥쇄를 받드는 성삼문이 참다못해 통곡하는 것을 보고 하던 절을 멈추고 눈을 흘기면서도 그래도 양위와 형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던 수양이 오늘 세계를 와서 본다면 아마 나는 공연히 체면을 차렸지 하고 후회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거짓 목자의 시대다. 스스로 문명이라 자랑하느니만큼 그만큼 도리어 어둠이요 야만적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건지는 길의 중요한 하나는 우리 속에 품은 목자의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 요새를 오염의 시대다 공해의 시대다 하지만 오염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오염은 그 그리는 목자의 모습으로 인해 되는 오염이다.
이 사람을 보라
더러운 것을 씻는 데는 우선 반대로 깨끗한 것을 보는 것이 첫째다.
역사 있은 이래,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목자라면 누구일까? 그것을 골라내는 데는 아마 만일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인류 역사가 어찌 됐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방법에서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전연은 아닐지 몰라도, 거의 모든 사람의 반대 없이 일치할 인격은 예수일 것이다. 기독교나 아님을 말할 것 없이, 유신론자거나 무신론자거나 물을 것 없이, 객관적인 태도로 판단해본다면 예수의 영향이 아니고는 인간이 도저히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은 부인은 못할 것이다. 세상이 결코 예수의 가르침대로 다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위에서 말한 대로 이 문명은 결코 아름다운 문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이날까지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기를 면하고 이만큼이라도 오는 데는 그의 힘이 가장 컸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의 모습을 그럼 어떻게 그리면 될까? 크게는 신약 전체가 그것일 것이고 요약하면 네 복음서라 할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더 결정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아마 마태복음 12장 18절로 21절에 적혀 있는 말이 가장 적당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그 복음서를 쓰는 사람이 예수의 모습을 요약하여 그려보려 할 때에 옛날 유명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생각나서 그것을 인용한 것임을 생각할 때에 그렇다. 다시 바꾸어 말한다면 이것은 히브리 민족의 지혜와 양심을 다해서 닦아낸 인류의 이상적인 목자의 모습이었다. 마태복음에 있는 것과 이사야서에 있는 것이 서로 조금 다른 귀절이 약간 있으나 대체로 같다. 여기는 이사야 42장 1절로 4절까지에 있는 것을 쓰기로 한다.
『내가 붙들어 세우는 나의 종을 보라.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부어주었으니
그가 정의를 나라들 위에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고
거리에 들리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가물거리는 등잔도 끄지 않고
그는 정의를 참되게 실현할 것이다.
실패함도 없이 낙담함도 없이
땅 위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가르침을 우러르리라.』
정의의 사람
먼저 주의할 것은 이 몇 귀절 아니되는 말 속에 정의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와 있는 일이다.
참 목자는 정의의 사람, 정의를 세계적으로 실현하는 사람이다. 혹은 심판을 선포한다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인류의 양심 앞에 권위를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판단해주는 사람이다. 지금 인류의 양심은 표준을 잃고 있다. 그 때문에 혼란하다. 기독교가 예수의 교훈에 충실하려 힘썼을 때 믿는 자 아니 믿는 자의 구별 없이 권위를 가지고 인류의 양심에 임할 수 있었다. 참 권위는 정의에서 나온다.
구경의 목적은 세계 평화에 있지만 평화는 정의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 사람은 근본이 사회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각각 떨어져서는 못사는 것이면서도 자주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개인으로 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 판단과 주장이 늘 서로 맞서고 엇갈리기 쉽고 그 하는 일이 서로 얽히고 충돌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므로 인간 살림에서 무엇보다 먼저 요청되는 것은 공정 공평이다. 더구나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소질은 꼭 같은 것이 아니고 천차만별이어서 그것을 조화해서 하나를 이루기가 참 어렵다. 힘의 정도도 각각, 지식의 정도, 감정의 정도, 양심의 정도도 각각이니 그것을 어떻게 하면 통일하고 조화할 수가 있을까? 그것을 하는 것이 참 목자다.
정의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날까지 역사를 보면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지 않은 압박자 없고 공평을 주장하지 않고 나선 강탈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이라는 말에는 익살이게도 가장 발달한 것은 전쟁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놀랍고 그것을 실지에 적용해서 얻은 기술도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그것들이 첨부터 약속했던 대로 행복은 얻어졌던가?
지금 세계의 힘은 있지만 정의는 없다. 물질의 풍부는 있지만 공평은 없다. 미국이나 일본이 돈이 많은 줄은 다 알지만 누가 그 하는 정책이 공정하다 할 사람이 있을까? 소련이나 중공에 힘이 있는 줄을 모를 사람 없지만 누가 그들을 정의의 나라라 할까? 아마 어린아이도 그것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힘의 숭배, 돈의 숭배를 그만두는 일이다. 오늘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것은 군국주의 제국주의 산업주의의 국가관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수두룩이 있는 소위 후진국이라는 밤낮 말썽만 일으키고 있는 나라들이다. 큰 배가 지나간 뒤에 작은 배가 그 물결을 겪듯이 앞서 해먹고 간 힘 숭배 돈 숭배자들이 일으키고 간 죄악의 결과를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형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앞의 것을 따라가려 부국강병만 외우고 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양심이 예민하고서 소위 강력한 목자 될 수는 없다. 성인들이 정치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위 지도력이란 결국 자기 생각을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연령이 낮은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이제는 이미 그것이 사회악의 근본인 것을 안 시대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는 아니된다.
그들 거짓 목자들은 이 시대에 거꾸로 가는 것을 하면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힘쓴다.
루이 14세같이 “내가 곧 나라다” 해가지고는 그것으로 자기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고 자기는 전체를 위해 십자가를 진다고 선전한다.
조직이 나타나면 인격이 숨어버린다. 그러므로 아무 비난을 받음 없이 또 고민하는 자기 양심을 달래가면서 불의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다. 비아야(非我也)라 병야(兵也)라 식이다. 이것이 옛날식의 인심 곧 천심이 오늘에 통용되지 않는 까닭이다.
제법 진리 비슷하면서도 모든 사회악을 만들어내는 근본이 소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내세워서 하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모인 단체 위에 씨로 하여금 거짓으로 꾸며 따라가게 한다.
하나님의 종
그러나 진정한 목자 곧 정의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것은 철저히 겸손한 사람이다. 선언 첫머리에 내 종을 보라고 한 것은 이 뜻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 사회에는 종이란 것이 있었다. 종은 사람은 사람이면서도 제 인격을 완전히 내버리고 주인이라는 남의 뜻에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죽은 사람이다.
그 관계를 빌어서 인간과 하늘 곧 전체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종이 온전히 겸손하여 자기주장을 내버리고 주인의 명령에 충실할 때 그 집을 위하여 참 일을 할 수 있듯 이 인간이 자기중심의 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전체의식에 대해 순종 하는 태도로 나올 때 참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내가 붙들어 세운다고 했다. 하나님이 붙들어 세운다는 것은 그 개인 제 스스로나 그의 주위에 있는 어느 당파에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내세우고 지지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전체의 마음에 꼭 든 사람, 전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령의 사람이다.
즉 자기 개인으로서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요 전체의 뜻을 남김없이 알고, 알 뿐 아니라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지만 생각은 하면서도 무엇이 참 선임을 모르며, 또 생각하여서 무엇이 선임을 깨달았다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 혼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중용』에 “인심유위(人心唯危) 도심유미(道心唯微)”라 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부어줌을 받았다는 것은 그러한 분열이 없이 온전히 전체의 선한 영으로 통일이 된 인격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능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정의를 전체에 실현할 수가 있다.
이 점이 거짓 목자와 참 목자의 아주 다르게 대조되는 점이다. 거짓 목자는 철두철미 자아의식 자기주장의 사람 곧 강한 사람인데 참 목자는 온전히 겸손한 부드럽고 순한 사람이다.
강함으로 우리는 속기 쉽다. 그것은 우리 누구의 속에도 다 자기주장의 욕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참 목자는 겸손하기 때문에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또한 스스로 자기를 남의 위에 주장하자는 마음이 없이 전체를 생각하는 자리에 갈 때 그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거짓 목자는 다스리는 자요 지배하는 자요 사람을 폭력을 써서 몰아치는 자지만, 참 목자는 가르쳐주는 자요 같이 짐을 져주는 자요 받들어 섬기는 자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자다.
조용한 사람
그렇기 때문에 참 목자는 조용한 사람이다.
세상의 목자라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떠드는 사람이다.
오늘 문명은 포스타의 문명이요 확성기의 문명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발달이라 하지만 생각 있는 사람은 이것이 결코 발달이 아니요 정신의 타락임을 알 것이다.
참일수록 말이 없다.
그가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자기를 길거리에 들리게도 아니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꽃은 말이 없다. 말이 없어도 보는 눈이 올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선전을 부끄러워한다.
참 지도자는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다.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요 자기를 기계로 쓰시는 전체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요, 그 전체는 자기 속에만 아니라 누구의 속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의 속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것은 억지로는 될 수 없음을 그는 안다. 그러나 자기를 믿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거짓 목자는 전체를 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가 위대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될수록 모든 사람의 스스로 하는 것을 막고 자기 것만을 억지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므로 선전하고, 달래고 강제하고 속이는 것까지 꺼리지 않는다.
사람은 깊을수록 조용하다. 소리가 높은 것은 옅은 여울물이다.
조용할수록 넓어진다. 모든 고기는 소로 모여든다. 어불가탈어심연(魚不可脫於深淵)이라 잘되는 나라는 조용한 법이요, 치국약팽소선(治國若烹小鮮)이라 백성을 될수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잘하는 정치다.
정치를 잘하게 되면 정치 없는 것같이 보이게 될 것이다.
노자가 잘 말하지 않았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다. 선언불미(善言不美)요 미언불선(美言不善)이다. 불출호이치천하(不出戶而治天下)다.
떠들지 않고 하는 것이 참 정치다. 사람을 떠들게 만들기는 쉬워도 조용하게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하려니 어렵지 내가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되기를 바라면 세상이 조용해지기는 참 쉽다.
가장이 술이 취하지 않으면 집안은 오손도손한 법이요 아기는 젖을 먹기만 하면 잔다.
왜 민중만은 조용하게 만들 줄을 모를까?
죽는 사람은 몸부림을 한다. 그러나 감격에 찬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골짜기를 찾는다.
알아주는 마음
그러면 어찌해서 그런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악한 것으로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사람을 선한 것으로 대접하는 것이 어짊이다.
죽은 평안은 공동묘지에 있겠지만 산 참 평안은 일터에 있다.
사람의 선한 바탈이 저절로 싹터 나오도록 하는 것이 지도다.
맹자가 말한 송나라 사람같이 되지 마라. 곡식을 빨리 키우기 위하여 속을 뽑아 올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2천 년 전에도 이미 정치란 것이 곡식의 순을 뽑아 올려서 빨리 크게 하려는 것 같은 어리석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지만 오늘은 순을 뽑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뿌리까지 흔들고 있다.
인심이 뭔지, 생명이 뭔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을 밝게 만들려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약한 국민일수록 그렇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끄물이는 등잔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다.
모르는가?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가?
스스로 함이다. 자유다 자발이다. 자명(自明)이요 자성(自誠)이다.
이 우주가 뭐냐?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있는 이, 스스로 하는 이, 그것이 거룩함이요 하나님이다.
네가 어리석어 자라는 곡식의 순을 뽑으며 키우는 줄로 알고 그것을 교육으로 알고 개량이라 자랑하지만, 네가 그런 장난을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시는 이가 너를 스스로 하도록 두기 때문이다.
근본은 스스로 하는 자아다.
그 본성을 죽이고는 아무것도 못한다. 곡식 순을 뽑았을 때 말라죽지 않았던가?
사람 중에는 상한 갈대 같은 자가 있다. 아니다, 파스칼이 어질게도 인간은 갈대라 하지 않았던가? 모든 인간은 갈대다. 그리고 모든 갈대는 꺾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꺾어지지만 꺾어지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그 약한 것 넘어진 것이 문제 아니라 그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생각하는 마음은 넘어진 갈대보다도 더 연하고 약한 것이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그 속에 우주를 품는다.
네가 그것을 짓밟고 무엇을 하겠단 말이냐?
그 마음을 키우는 것이 우리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알아주는 마음으로 싸매주고 붙들어 주어야 한다.
곡식이 뽑혀서 자라지 못하는 것같이 사람은 상주고 벌줌으로는 키울 수 없다.
잊지 마라.
지극히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그 속에 하늘의 아파하는 마음이 와 있다.
사람 중에는 또 끄물거리는 등잔 같은 마음이 있다.
밝은 불꽃을 올려 사방을 비추어야 할 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타다가는 꺼지려 하고 꺼지다가는 또 불길을 올려 보고, 빛보다는 그을음을 더 많이 내며서 눈물만 지는 연한 깨진 등잔 같은 마음이다. 기름은 다 닳았고 바람은 사나워 펄럭펄럭 미치는 등잔이다. 욕심은 강하고 믿음은 적고 환경은 곱지 않고 삶은 야속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할까?
잘난 것은 가꾸지 못난 것은 떼버리지 하는 공리주의에 젖은 네 마음은 그까짓 것은 아예 꺼버려라 할지 모르지만 하늘마음은 아니 그렇다.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어버이 마음이다. 쓸데 있는 것만 가꾸는 것이 사람의 일 아니다. 쓸데없는 것도 가꾸는 것이 인간이다.
쓸데없는 것이야말로 쓸 데가 있다.
병신자식이 아니었더라면 어버이 마음은 자라지 못했을 것이요.
낳아 놓아서부터 날고 기어 제 살아갈 길을 찾을 줄 알았다면 교육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 없이는 사람 못된다.
선발대만 목적지에 가고 떨어진 것은 다 죽게 내버려둔다면 행군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산 맛이 무엇이 있겠는가?
약한 것을 끌고 밀어 같기 올라갈 때 비로소 산에 올라간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튼튼한 것은 네 일을 도와주기 위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것은 네 양심을 먹여주기 위해 있다.
물질에서는 얻는 자가 부자지만
정신에서는 주는 자가 부자 아니냐?
꺼져가는 등잔을 끄지 말고 두 손을 오그려 보호해 보라. 네 속의 등잔이 높이 불꽃을 올릴 것이다.
거짓 목자는 훈장을 타고 기뻐할지 모르지만 봉사자는 죽던 것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하늘의 상을 느낀다.
전체가 구원이 돼야만 하늘나라다.
그리고 그 전체의 구원은 알아주는 마음 즉 인격을 대접하는 마음으로만 된다.
혼은 전체의 혼이지 너나 나의 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많고 적고도 없다.
하늘에서는 하나가 아혼 아홉보다 크다.
아혼 아홉 개는 개체지만 하나 속에는 전체가 있다.
우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인간의 혼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깨끗해졌을 때 하늘의 기쁨이 컸다.
그리고 그 상처난 혼을 씻은 것은 감옥이나 법관이 아니라 남은 다 버리는 것을 불쌍하여 받아주는 그 마음이었다.
人者無敵
그렇게 하면 정치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것도 못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서는 아니 그렇다. 그 연한 마음, 상한 갈대 하나도 차마 못 꺾고 꺼져가는 등잔 하나도 차마 못 끄는 그 연약한 마음이 이긴다.
역사더러 증언하라 해봐라, 어느 편인가?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믿지 못할 것은 눈이요 귀다.
사실 보는 것은 눈이 아니요 듣는 것은 귀가 아니다.
마음이지.
마음이 맑으면 맑은 것이 뵈고 마음이 흐리면 흐린 것이 뵌다.
그렇건만 생각 없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모른다.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눈을 보는 것으로 알고 귀를 듣는 것으로 알아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그러나 눈과 귀는 하나의 기관이요 자주하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이랬다저랬다 한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다.
마음이 주인인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을 맑히기를 힘쓰고 마음이 맑아서 보면 참이 보인다. 어떤 것이 맑음이요 어떤 것이 흐림인가?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역사에 환한데도 불구하고 모든 목자라는 사람들이 하루 이틀 살고 죽는 모기의 용맹을 부려 황소를 제가 다 먹은 줄 알다가 죽어버리는 이유다.
그것들이 피를 몇 방울 먹었고 소가 몇 번 놀라서 꼬리를 저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씨의 소는 한없이 큰 소다. 모기로서는 그 생명을 모른다. 소는 몇 방울의 피를 잃었고 한두 번 따끔따끔했으나 그 큰 혓바닥으로 한 번 핥으면 그만이다. 낳는 힘이 스스로의 안에 있다. 그리고 살의 근본인 푸른 풀은 무한히 있다.
폭력주의는 모기 기른 것이요 그 무기는 모기의 쏘는 침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소는 그것을 이기고 남을 것이다.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참되게 실현하고야 말 것이라 했다.
사랑은 길이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줄 모르고 낙담할 줄 모르는 힘, 그것이 정말 승리가 아닌가?
어째서 실패할 줄을 모르나?
본래 성공이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째서 낙담할 줄 모르나?
첨부터 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자무적어천하(仁者無敵於天下)라. 싸울 마음 없는 사람을 이길 놈이 세상에 없다.
대적을 많이 죽이는 것이 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정말 위대다.
있다가 없어질 세상에서는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목자 노릇을 하겠지만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은 없어질 것이다.
돌로 만들고 나무로 만들어 신당 속에 모신 것이 우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목자의 상이 이날껏 인류를 속여 온 우상이다.
탐심이 우상이다. 욕심 없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권력과 부의 세상에서는 서로 동지가 원수다. 나에게 가장 가까웠던 자가 나의 대적이 되어 나를 죽인다.
모든 영웅이라는 것들을 보라.
그러나 참 나라에서는 반대로 원수를 동지로 대접한다.
出於幽谷 遷于裔木
맹자는 모처럼 유교의 진리를 배웠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혹해 그것을 버리고 다른 사상으로 넘어간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겨울 지나고 봄이 되면 겨울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움츠리고 있던 새도 봄이 오면 그 음랭한 골짜기를 빠져나와 높은 나무에 올라간다더라. 그런데 너는 어째서 하우교목 입어유곡(下于喬木 入於幽谷)이냐? 거꾸로 높은 나무에서 내려와서 어두운 골로 도리어 들어가느냐 했다.
오늘 우리 꼴도 그렇지 않을까?
역사에 방향이 있는가 없는가? 진화에 목적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
제법 개관적인 진리를 찾는 체하는 사람들은 과학적이기 위해서 진화에는 아무 목적도 없고 순전히 우연으로 된 것이라 하고, 역사에도 아무 방향도 없고 그저 그때그때 당하는 문제를 치루어 나갈 뿐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이비 학문 때문에 오늘같이 거짓 목자가 판을 치게 됐다.
눈에 뵈는 현실밖에 없으니, 여기서는 힘센 놈이 왕이요 살았을 때에 왕이면 그만이지 죽으면 다다 하니 두려워할 것도 꺼릴 것도 없지 않겠나?
소위 문명이란 사람의 눈을 거의 완전히 영원에서 떼어서 현실이라는 요 발부리 앞에만 솝게 했다. 그러므로 우주를 다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철저한 권력주의 향락주의 오늘주의에 빠져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아침에 내몰면 초장으로 나가고 저녁에 들여몰면 외양간으로 들어오는, 그리고 한동안 그러다가는 결국 푸주깐에 가고 마는 가축의 때가 돼버리고 말았다.
역사에 방향 분명히 있다.
진화의 목적 틀림없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나?
그 방향이 무엇인가?
자유다, 점점 더 자유하는 데로 나가는 것이 역사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군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영원한 정신을 드러냄이다.
그 목적 그 방향에 견주어 볼 때 어찌 됐을까?
봄이 온 줄 알고 어두운 데를 빠져나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올라갔던 것을 도로 내려와 나왔던 굴텅으로 들어가는 건가? 골 밖은 뭐며 깊은 골은 뭐고 높은 나무는 뭐며 내려오는 건 뭔가?
정신적인 것이 있는 데가 높은 나무다. 가이인이불여조호(可以人而不如鳥乎)아, 씨이 꾀꼬리보다는 나을 것이다, 꾀꼬리도 봄을 알고 유곡(幽谷)을 빠져나올 줄 아는데 사람이 자유를 찾을 줄 모른단 말인가? 꾀꼬리도 자유하면 노래할 줄 아는데 사람이 정신의 찬양을 못한단 말인가?
돌아만 오면 나갔던 탕자가 집에 있던 맏아들보다 낫다.
인류 역사에서 뒤떨어졌어도 그것을 살려 새 목자 상을 우리가 닦아내면 우리가 앞선다. 꼭대기다.
우리는 지금 정신의 자유를 느끼는가? 음랭한 감옥의 구속을 느끼는가?
우리 맘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가? 한숨을 쉬고 싶어 하는가?
나는 거짓 목자와 거기 붙어 얻어먹는 학자처럼 남의 말까지 대신 다하려 하지 않는다.
씨알의소리 1973년 3월 20호
저작집30; 16-229
전집20; 5-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