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매섭던 가을태풍들이 모두 지나갔다
이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게 이제 완연한 가을날씨다
어제같이 무더운 여름이더니 벌써 세월은 9월 중순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 빠름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곧 온누리가 가을빛으로 물들여 지리라
60대 중반이 지나가면서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변화가 느껴진다
모두들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들 하던데 ..맞는 말이다
이젠 잠자리에 들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얕은 가수면 상태로 아침을 맞이할 때가 종종 있더라
또 한가지는 유년시절의 정겨운 추억들이 무시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요즘 너너 나나 감염병으로 인한 외로움 불안 우울함이 부쩍 늘어났다고들 한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 후휴증이 더 무섭다고들 하니 행동반경이 더 움추려진다
매일같이 안좋은 뉴스를 접하다보니 정신머리가 사나을 때가 많다
마음이 심난할 때 평온을 찾으려면 용뇌수 나무속에 함유된 용뇌향의 향기처럼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필요하리라
그 처방전은 바로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의 동심의 추억들을 되세겨 봄은 나의 마음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고향 풍각 송서리에서 같이 자란 1-2년 선배인 이기윤, 변명현씨는
5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가끔 만날때 마다 한결같이 대화의 주제가 어린시절의 동심의 애기를 꺼집어낸다
미물인 여우도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고 한다
핵가족화 시대인 요즘 실버(노년)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남은 여생에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화두이리라
풍각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치 소 뿔 사이처럼 넓고 풍성해 풍각이라는 지명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동심의 시절 아련히 떠오르는 편린의 추억들을 조각조각 모아본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탑동 (탑이 있는 마을)에서 성장했던 초근목피의 보릿고개 추억이 하나 둘 생각난다
코흘리게 시절 풍각장 옛탑터의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학교수업을 파하면 집으로 돌아와 보리밥 몇 숫가락으로 요기를 하고 야산이나 들녁에 소꼴을 베어와서 소여물도 썰어 놓는게 반복되는 하루일과였다
그땐 낫이 대부분 오른 손잡이로 만들어져
낫질이 왼손잡이인 나는 꼴을 베다 빈번히 오른 손가락을 베이곤 했는데
집에 가면 아버지께서 낫질도 못하는 왼짝베기라며 핀잔을 주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상처로 인한 비애가 컷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중학교 교가 가사 중 방갓소 맑은 물은 그침이 없고 ...란 가사가 있다
당시의 고향 냇가의 흐르는 시냇물은 수량도 많았으며 참 맑았었나보다
요즘과 비교하면 참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그땐 냇가의 송어 피라미 등 물고기를 초망이나 뜰채로 잡아 배만 따서 생으로 초장에 찍어 먹던 그 싱싱한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소몰이꾼의 추억도 생각난다 그 당시 소몰이꾼을 해봤던 이기윤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시절이다
풍각 우시장에 해그름녁 ..시장이 파할 즈음이면 소주인들에게 풍각에 거주하는 10대 중,후반의 어린애들이 소몰이꾼을 지원한다
인솔자외 몇사람의 성인을 빼고는 대부분이 나의 몇해 선배나 또래의 친구들이 소몰이꾼을 자원했는데
그 중 생각나는 몇몇 사람은 명대리에 살던 합죽이(별명)라는 형,그리고 풍각의 이기윤 선배 등의 이름이 생각난다
불과 수 십년 전의 일인데 지금 10대의 청소년들은 소몰이꾼의 경험을 애기하면 그 누구도 아는 이가 없으리라
소떼의 행렬은 풍각 우시장을 출발하여 소떼와 사람간 긴 행렬을 이루는 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더라
1인당 소 한 ~두 마리씩 이까리를 잡고 20여 마리가 일렬종대를 이루며 걷는다
이서면 가금리 경유 팔조령과 가창을 경유하여 대구 내당동 우시장까지 밤새도록 걷는다
익일 아침 도착지에서 소 한마리당 인건비 조로 800원을 받은 후 남부정류장으로 이동, 풍각방면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맡은바 역할이 끝이 나는 어린 청소년이 겪기에는 너무나 고되고 극한 작업이었다
밤새도록 걸어서 산길을 이동하다보니 어떤 소는 화들짝 놀라 달아나곤 했었는데 그럴땐 소를 잡기위해 갖은 고생을 했었다고 회고한다
특히나 한 밤중에 소 눈을 보면 너무커서 더욱 더 겁이 난다고들 한다
초근목피의 어린시절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으로 곤궁했던 그 시절이
바로 우리들의 씁쓰레한 자화상이었다
호기롭던 20대 초반 그 시절
7월 말 어느 무더운 여름날 풍각우체국 아래 월산떼기 아주머니의 막걸리집에서 이기윤선배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온현수와 막걸리 한 잔하다가 몇 순배 돌때쯤 입빠른 현수가 한 마디 내밷는다
예정에도 없이 다짜고짜로 "우리 오늘밤에 강원도 설악산 갈래" 라고 제안한다
그 말이 나오자 말자 술이 어느정도 취한 우리 모두는 앞,뒤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지금 당장 출발하자"며 호응했으며
30분 내로 풍각시외버스 주차장으로 집결하자 약속하고 각자 집으로 가서 등산복및 텐트와 쌀 조금 그리고 부식 그리고 여분의 돈을 조금 준비하여 시외버스에 탑승 곧바로 청도역으로 향했다
이 모든 계획의 결행에 걸린 시간이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채 30여분이 걸리지도 않았었다
참 무모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바람이 들어 무작정 제멋대로의 여행을 떠났었는가 싶다
그때 우리 모두는 왜 그리 귀가 얇았었는지... 괜시리 생각만해도 쓴읏음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던 시절 .. 망아지같은 행동거지들이 무모하다 싶기도 하지만 가끔은 젊었을 때의 그 무모한 열정이 부럽기도하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도 들기도 한다
우린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출발했다
동대구역에서 기윤선배의 대구 여자친구가 합류하고 ...
4명은 서울역 도착후 우린 마장동으로 이동 그기서 강원도 속초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이다보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불편했던지...
설악산 초입에 늙은 소나무가 빽빽한 그늘 아래에 텐트를 치고 1박2일동안 밥해먹고 물놀이하고 술 한잔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두 동의 텐트를 쳐서 한 텐트엔 현수와 내가 또 한 텐트엔 기윤과 여자친구가 나누어 취침했었는데
밤이 이슥할 무렵 현수 왈..."기윤이 저거 텐트에 들어가서 뭐하는가 한 번 훔쳐 보자" 며 유난스레 장난끼 많았던 그 표정이 눈에 선하다
무모하고 허당끼 가득했던 그 시절의 추억 또한 그리웁다
1970년대 초반 풍각 동산배기 영풍루 아래 냇가에서는 해마다 지역 씨름대화가 열렸었다
지역장사들인 배영호 하동훈 변승현 박태주 허헌열 최종필 박윤관 장사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 옛날 장사들이 어깨를 맞대어 자웅을 겨루면서 활화산같은 힘을 뽐내며 씨름을 하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 이름 중에 벌써 몇몇 사람은 북망산천으로 떠난지 오래라 마음이 짠하다
당시 동산배기는 청소년기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영풍루 누각은 우리들의 피난처요 보금자리였었다
늦은 밤까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싸돌아 다니다가 통금시간이 지나면 영풍루 누각에서 잠자곤 했었는데 ...
그땐 왜그리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었던지...
그리고 생각나는 것이 동산배기의 밤은 동기생 박병철의 데이트 코스였다
동산배기에서 여자 친구가 수시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고 보면 대머리가 정력이 세다는 애기... 친구를 비유해보면 그 속설이 딱 맞는 것 같다
당시 친구가 풍각의 카사노바로 이름을 떨쳤다는 소문도 자자했지만 이기윤 선배도 녹녹치 않은 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자웅을 겨루었다면 서로의 내공이 고수의 경지에 도달한지라 막상막하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 될 거란 저잣거리의 소문이 자자했었다
70년대 중반 어느 여름날 오전
풍각의 선배들과 함께 청도 화양읍 소재 "약수 폭포"로 단합대회차 떠났다
이기윤 최기술 고춘길 변명현 온현수 박창섭 선배등 7~8명의 인원이 참석한 것 같다
폭포에 도착, 옆에있는 간이 식당에서 닭백숙과 소주 한 잔 나눈 후, 높이 30여 메타의 폭포수를 맞으며 피서를 즐겼다
폭포수를 맞으면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인근에 나이든 어르신들이 많이 있었다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이 온누리에 비추고 있을 때
우리 일행은 폭포 윗쪽으로 올라가 텐트를 치고 난후 노래자랑을 개최했다
심사위원장은 고춘길이었고 당시 제2의 나훈아를 꿈꾸며 가수의 꿈을 키웠던 온현수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
모두들 자신의 애창곡을 한 곡씩 뽑았는데 난 페티김의 이별을 부른 것 같다
노래의 소질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맞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온현수는 제2의 나훈아가 되겠다며 가수가 되기위해 최선의 열정을 기울였었는데 ..
결국은 가수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생전 현수가 즐겨 부르던 애창곡 "라노비아"란 노래의 가사가 생각난다
떠나는 내 사랑 라노비아 사람들 틈에 숨어서...로 시작하는 노래를 무시로 부르던 기억이 난다
온현수 동생이 대구지역에서 가수 온문현으로 활동 하고 있는 걸 보면 가수라는 직업을 가질려면 목소리가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한다는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 혈기왕성한 시절..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서의 "약수 폭포 노래자랑"은 참으로 유쾌한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요즘은 나이가 들다보니 18번 곡을 나훈아의 "공"으로 바꿔야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노랫말 중
살다보면 알게 돼,잠시 왔다가는 인생,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의 가사가
인생의 의미가 함축된 글귀라 느껴지기에
깊어가는 가을에 부르기 딱 좋은 노래라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 중반 고교 3년 때 어느 봄날
학교를 파하고 수성동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고향 1년 선배인 변규헌씨가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
우린 저녁때 대구시내 동성로 맘모스 빵집엘 갔었다
옆자리에 대구 신명여고에 다니는 여학생 2명과 합석하여 이런 저런 애길하다가 중앙공원 앞 중앙상가에 위치한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 변규헌의 부산 동의공고 졸업식에 축하차 풍각에서 춘열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졸업식 축하후 시내
남포동 막걸리집에서 뒷풀이를 했었던 추억도 기억 저편에 또렷이 남아있다
10대 후반에 만난 각남의 김병주에 대한 애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군대 제대후 공교롭게도 한 조직내에서 30년을 넘게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냈으니 요즘도 은퇴전의 직장에 대한
애기를 나누다보면 공감과 소통이 되는 부분들이 참 많아서 좋다
김병주 친구의 고교 얄개 시절의 무모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자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가 싶다
2층교실에서 수업하던 중 선생님이 머리 긴 학생들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니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럿 학생들이
2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려 도망갔었다는 무모한 무용담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청도 하양 각남 풍각의 여러 불량친구들 10~15명이 모여 각남면 예리리 소재 김병주친구 과수원에 모였다 과수원 뒤 냇가로 몰려가 고기잡는 뜰채 반도로 물고기를 잡으며 진탕 놀았던 추억도 눈에 선하다
그해 어느날엔 각남 우체국옆 선술집에서 병주 권희와 3명이 무슨 연유로 막걸리와 소주를 얼마나 퍼마셔댓는지 ..
늦은 밤 비몽사몽간에 신작로 길을 따라 각남에서 풍각으로 터벅터벅 걸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각박한 세상속에서 가끔 옛추억을 떠올림은 괜시리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정신건장에 좋은 것 같다
살아보니 이런 저런 걱정없이 지냈던 청소년기의 그 시절이 그리웁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이미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것이라
그리운 옛시절은 추억속에만 존재하고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 앞에 가끔은 가슴 먹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옛 감성 추억여행을 마치고 문득 거울을 들여다본다
낯익은 초로의 중년사내가 벌써 지공대사(만 65세 지하철 공짜 나이, 여자는 "지공여사"라 호칭함)의 반열에 올라가있다
여테껏 살아온 인생여로가 얼마나 힘겹고 부대끼었는지...
얼굴엔 그늘진 응달이 드리워진 것 같아 왠지 처연한 생각도 들기도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온전히 살아갈 나이는 기껏 많이 잡아봤자 10년 밖에 더 남지 않았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9년 총인구 통계에서 75세까지 생존확률이 54%라고 한다
그 이후의 삶의 질은 산에 누워 있으나 집에누워 있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인생은 물이요 바람이요 구름이라 했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물과 바람과 구름에 비유하는 공통점이 있다
천 년전 페르시아의 시인의 삶의 정의가 담겨있는 시 한구절을 인용해본다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고 했고
고려말 나옹선사의 시 한구절에도 인생을 이렇게 비유했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고 읊었다
이 나이가 되니 그 말씀들의 속뜻을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바램이 있다면 그냥 바람처럼 "휙"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깃털처럼의 삶을 갈망한다
이제 나의 유전자가 이끄는 대로...
내가 편한 대로의 삶을 살아야 편할 것 같다 는 생각이 머무는 요즈음이다
60대 중반 초가을 9월을 보내면서 ..문득 아련한 옛추억이 떠올라 이런저런 넊두리를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