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허공에는 자취가 남지 않아요』 를 읽고
영운 / 운문사한문불전대학원
이황 선생의 도산십이곡 가운데 아홉 번째 계송을 특별히 좋아한다. 옛 성인도 날 못 보고 나도 옛 성인을 못 보지만, 옛 성인께서 가시던 길이 앞에 있으니 그 기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뵈올 수 없는 성인의 가신 길도 그리워하며 따라가는데 하물며 동시대 한 공간에 함께 하는 스승을 따르려는 마음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길을 알려 주는 고구정녕한 말씀들은 각 자가 서 있는 길 앞에서 조그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한 권의 책은 『허공에는 자취가 남지 않아요』 법계 명성 스님의 인품이 빚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담긴 수채화 같이 작고도 얇은 책이다.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듯, 이야기 편편이 작고 청량한 자취를 모아 놓은 관찰자 시점의 일화 모음집이다. 책 속에는 지금 나의 삶에 조도助道가 되는 말씀들이 무겁지 않게 전개된다. 평범 속의 비범이 이런 것이리라.
오늘의 운문사를 전국 최대 규모의 승가대학으로 발전시키고 한국 비구니 위상 정립과 세계 여성 불교 발전의 지침석을 다지시는 분! 한 도량에서 오십년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일상 속에서 한 번도 두 번을 살지 않는 삶! 그런 이야기가 소박하게 담겨져 있다.
늘 모시고 살며 강의를 듣지만 일상의 삶은 둔탁하여, 한 말씀한 눈빛이 떨어진 그 자리의 깊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채 머뭇 거릴 때면 후학의 둔함이 부끄러워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매사에 진실하게 사는 일상생활 그 자체가 수행인 것 특별히 다른 높고 고귀한 무엇을 찾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르친 것이다. 삶 속에서 하루를 열며 한 순간이라도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던가. 삶의 속성은 덤덤하고 때로 기쁘고 때로 슬프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일회성 위에 놓인 유일무이의 특별한 순간들인 것이다. 익숙한 삶 속에 한 번도 똑같은 순간을 산 적이 없이 유유자적하신 큰스님의 모습이 글 줄 속에 배회한다. 늘 만나면서도 처음 인 것처럼 말이다.
평생 교육자다운 언행으로 단정하시고 평온하시며 거친 말씀 한 번이 없으셨던 스님은 단발머리 여행생 때부터 부지런하고 타고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정리 정돈을 잘하셨다. 여고시절 '새가 날아간 흔적' 을 그려내라는 미술 선생님의 선적禪的 주제에 최상의 배틀을 던진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허공을 담은 '하얀 백지' 를 제출한 것이다.
"선생님, 비가 오고 바람 불고 나뭇잎이 떨어져도 허고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아요."
물들지 않는 텅 빈 허공, 허공과 같은 마음에서 나온 만법이 다시 일심으로 돌아가는 둘이 아닌 소식을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여학교 시절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사유를 통하여 자신의 숙업을 감지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수록 소녀는 더욱 조신하게 행동하였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분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자시의 행복이자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가 된 것이다. 여러 생을 닦은 보살의 원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스님은 당신의 수업시간에 늦거나 빠지는 날이 없으셨다. 교육자적 자세, 배우고 가르치는 자의 자기원칙에 철져하셨다. 행여 학인들이 아파서 함께 수업에 동참하지 못하면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며 '아픈건 아픈 대로 두고 나와서 공부해요.", '시자의 시자' 를 사시며 한없이 지켜보고 기다려 주시는 따뜻함이 있으셨다.
'중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예요. 참을 인자忍字 3개를 가슴에 품고 마음에 새기고 하심下心하고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대중생활 속에서 수행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운문인, 우리 모두는 서로 도에 이르게 해 주는 도반들이다. 위로는 명성 회주스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아래로 일진 율자스님과 진광 학장스님, 운산 주시스님 영덕 학감스님 여러 어른스님을 바라보며 상중하좌가 함께 흘러가는 승가공동체에 몸을 담고 사는 삶! 오늘 이자리,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제불보살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스님의 평생 좌우명은 '즉사이진卽事而眞' 매사에 진실한데 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라는 것이 요점이다. 일마다 불공 올리는 마음으로 산다면 무슨 부끄로운 남으랴. 번뇌 없는 마음 청정한 삶을 근간으로 날 적마다 함께하는 아집과 법집을 철저하게 녹여 없을 때, 이 길에 선 의미를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리라.
오늘도 스님의 창 앞에는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이 구십 노장인 명성明星을 그윽이 지켜본다. 스님의 법체청안을 기원하며 더 오래 스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 글은 불기2564년 雲門지 가을호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홈폐이지 계관운문에서 더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운문사 사리암 도반 법우 여러분 나반존자님의 가호 가피 많이 많이 받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첫댓글 비가오나 눈이오나
항상 좋은글 좋은사진 감사드립니다
장마에 건강도 자알 챙기십시요
감사합니다 _()_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 ()()()
모처러 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한낮입니다. 눅눅했던 이불 볕에 일광욕 하며 말려봅니다. 건강유의하시고 안전을 기원합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