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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다섯 번째)
(신탄진→공주 곰나루, 2016. 9. 24∼9. 25)
瓦也 정유순
다섯 번째 금강 걷기를 하기 전에 대청호 절벽 위에 있는 구룡산현암사 계단을 가파르게 올라간다. 현암사(懸巖寺)는 백제 전지왕3년(406년) 달솔 해충(達率 解忠)이 발원하여 고구려 청원선경(淸遠仙境) 대사께서 개산초창(開山初創)하였다고 한다. 懸巖寺(현암사)는 말 그대로 바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사찰로 대청호의 아침을 내려 볼 수 있는 명소이다.
<현암사>
<현암사에서 본 대청호>
아침 햇살에 가을이 익어가는 감나무를 뒤로하고 삼성각(三聖閣) 앞으로 하여 오가삼거리 쪽으로 산길로 내려온다. 아침 길 치고는 좀 어려운 길이었지만 우두둑 떨어지는 상수리 소리에 살아 있음을 깨닫고 숲에서 우러나오는 향기에 부족한 기(氣)를 채우며, 네 번째 마지막 지점이었던 신탄진 조정지 댐 건너에 있는 충북 청주시 현도면 노산리 들녘으로 접어든다.
<현암사 감나무>
골드카펫으로 물든 벼이삭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어서 오라 한다. 길옆의 코스모스도 고요한 햇살에 하늘거린다. 꽃무리 중에 어느 한 송이는 꽃대 하나에 두 송이가 피어나와 별난 구경을 시켜 준다. 분명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고, 혹시 환경 이상(異常)으로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며 노산리 솔밭으로 들어선다.
<벼이삭>
<샴쌍둥이 코스모스>
금강 변 노산리 솔밭에는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지만 아쉽게도 우리 토종 소나무가 아니고 리키다소나무다. 솔밭캠핑장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절벽의 허리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아름다운 벼룻길이 나온다. 금강 변 무주벼룻길이 으뜸이라면 이곳 벼룻길은 그 다음은 될 것 같은데 아직 소문이 나질 않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리키다소나무 숲>
<금강 변(현도면) 벼룻길>
벼룻길 끝 무렵 숲 사이 금강 위로는 국도 제17호가 지나는 현도교와 경부선열차가 건너다니는 철교가 보이고 그 뒤로 신탄진의 고층건물 들이 하늘을 찌른다. 그 옛날 ‘통행금지(通行禁止)’가 있던 시절 신탄진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금 시간이 되면 현도교를 바삐 건너와 통금이 없는 충북 현도에서 다시 술판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도교 북쪽 끝에는 오래된 장어요리집 등이 여러 곳이 있다.
<(앞)현도교, (뒤)경부선철교>
<신탄진 주변 금강>
신탄진에서 건너오는 제17호 국도는 여수∼용인을 연결하는 국도로 대전과 청주를 경유하는 교통량이 많은 도로이다.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상당거리를 올라와야 했고 주어진 횡단시간도 비교적 짧게 느껴진다. 길 건너 지하차도를 빠져나오니 ‘태극기마을 현도면 양지2리’가 나온다. 마을 앞 도로에는 국기게양대가 줄을 서서 늘어서 있고, 태극기가 걸려 있지만, 언제쯤 걸어 놓았는지 걸려 있는 태극기마다 땟국이 흐르고, 헤진 국기는 바람에 펄럭일만한 힘조차 잃어버린 것 같다.
<제17호 국도>
<태극기마을 현수막>
양지2리 쪽 금강 변 자전거 길로 나오니 경부 고속도로(금강1교)와 경부고속철도(KTX)가 분주하다. 그리고 주말이라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길을 메운다. 수초가 우거진 하천부지를 따라 강변 가까이 접근하는데, 공사로 깊게 파 논 구덩이를 어렵게 지나자 대전에서 흘러나오는 갑천이 금강과 합수(合水)하는 지점이 보인다. 갑천(甲川)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경계에 걸쳐 있는 대둔산(대芚山, 878m)에서 발원하여 유입되는 하천으로 대전시내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천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으나, 대전도심부터는 인위적인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
<금강과 갑천 합수부>
갑천의 밀어내는 힘이 센지 합수부 앞에서는 금강도 우측 북으로 90°로 꺾이어 휘어진다. 하천부지에는 수초가 잘 발달된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시박’ 넝쿨이 뒤덮었다. 가시박에 덮인 다른 나무나 풀들은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말러 비틀어진다. 가시박은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농가에서 박과 식물의 접목에 사용하려고 도입하였다. 강변을 따라 촉촉한 지역에 급속 확산되는 생태계를 교란하는 식물의 하나이다.
<가시박 넝쿨>
<가시박 열매>
그래도 가시박이 넘보지 못한 곳에는 고마니와 역귀꽃 같은 예쁜 꽃들이 피어 고개를 내밀고, 여물지 않은 이삭을 뽑아다 말려서 빗자루를 만들던 갈꽃은 우리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어머니가 생전에 만들어 주신 갈꽃 빗자루가 20여년 넘게 우리 집 구석구석을 지금도 쓸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 닦여진 자전거도로는 금강하구둑을 향하여 늘어서있고, 아직 길이 연결이 안 된 곳은 자전거도로를 개설하기 위한 공사장에는 하천 변이 파 해쳐져 있다.
<갈꽃>
<공사안내판>
세종특별자치시와 경계를 이루는 청주시 현도면 시목리가 나온다. ‘농촌건강 장수마을’로 지정된 시목리는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 골이라 하였단다. 아마 감나무를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감나무 시(柿)자에 나무 목(木)자를 써서 ‘시목리’로 바뀐 것 같다. 강 가운데로 길을 새로 만드는지 중장비(포크레인) 1대가 바삐 움직인다. 치수(治水)를 더 잘해 보겠다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라는 영원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하천공사 중>
세종자치시 부강면에 들어서니 먼저 우측으로 산업단지다 보인다. 전깃줄이 하늘에 그물을 친 것처럼 뻗쳐있고, 공장에서는 굴뚝의 연기 대신 하얀 수증기를 내 뿜는다. 그러나 부강은 금강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는 내륙의 마지막 포구로 충청내륙을 이어주는 ‘부강포구’였다. 현 부강중학교 앞으로 백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은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3백여 척의 배를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강산업단지>
<부강포구로 가는 길>
충청도 내륙 도시의 근대화 과정에서 부강포구는 “충청지역 경제발전의 모체와 시원(始原)이라고 청주대 김신응교수가 평하였다.” 그리고 “전성기에는 초사흘과 보름에 한 번씩 지내는 배 고사떡만 얻어먹고도 인근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배들이 싣고 온 해산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조기로 부채질 하고 미역으로 행주를 삼았으며 명태로 부지깽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신정일의 저서 새로 쓰는 택리지 5)”고 한다.
<왜가리의 비상>
부강포구의 흔적이라도 찾아볼 심산으로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간이 철제다리를 건넜는데, 흔적도 없이 수초만 무성하다. 금강 위로 새로 난 호남선고속(KTX)철교에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흐르는 강물도 때론 외로웠는지 여울을 만들며 울음소리를 낸다.
<호남고속철도>
<물여울>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을 어찌하랴. 부강포구의 영화는 전설이 되어 버렸는걸. 아쉬움을 뒤로하며 조금 더 밑으로 내려와 현수교(懸垂橋)인 아람천교 북쪽 밑으로 가까운 곳에는 합강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이 금강의 제1지천인 미호천과 만나는 합수지점이다. 미호천(美湖川)은 충북 음성의 망이산(472m)에서 발원하여 청주의 무심천(無心川) 등 여러 개의 지류를 합쳐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부강(芙江) 서쪽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금강과 미호천 합수부 지도>
<금강과 미호천 합수부>
세종시청 쪽을 향해 내려오면 하천부지 가운데로 난 길 우측으로는 한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겉에서는 안내판 외에는 확연하게 눈에 띠지 않는다. 아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한 것에 착상한 것 같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무슨 공사를 하려는지 파 헤쳐진 건물의 유구(遺構)들이 을씨년스럽고 흉물스럽다.
<한글공원 안내판>
<파 헤쳐진 건물유구>
세종특별자치시는 우리나라 17번 째 광역 지방자치단체로 기초단체(시·군·구)가 없는 유일한 단층 구조이다. 지리적으로는 충남·북과 대전광역시 사이에 길쭉하게 끼인 형태로 옛 충남 연기군을 중심으로 청주시 일부와 공주시 일부가 편입되어 이루어진 행정복합도시이다. 2012년 국무총리실부터 이전하기 시작하여 현재 대부분의 정부 중앙부처가 이전해 와 있다. 햇무리교 근처 ‘나라키움 세종국책연구단지’ 가까이에 오니 해는 세종시를 석양으로 물들인다. 알 찬 내일을 저 붉은 석양에 저축하듯 오늘도 땅거미 속에 묻는다.
<나라키움 세종국책연구단지>
<세종시의 석양>
계룡산갑사청소년수련원에서 계룡산의 정기를 듬뿍 받고 먼동이 트기 전에 갑사에 오른다. 갑사(甲寺)는 420년(백제 구이신왕1년)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쳤으며, 영주 부석사를 세운 의상(義湘)이 679년에 다시 중수하여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전소된 것을 1654년부터 여러 차례 손질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 앞에 그 흔한 탑이나 석등이 없이 마당만 보인다.
<갑사 대웅전>
계룡산(鷄龍山, 845m)은 임진왜란 이후 유행했던 정감록(鄭鑑錄)의 ‘계룡산 천도설(遷都說)에 명시된 미래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이다.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春麻谷寺 秋甲寺)”라는 말처럼 계룡산은 가을이 더 아름다운 곳이다. 닭벼슬 같은 정상을 이고 있는 대웅전을 뒤로하며 우측 문으로 나온다. 메주 돌로 쌓은 홍예문(虹霓門)은 안으로 난 돌계단과 조화를 이루고, 그 옆의 큰 바위 옆 밑으로 金鷄嵒(금계암)이란 각자(刻字)가 수줍게 새겨져 있다.
<계룡산>
<홍예문>
<금계암 각자>
조금 아래에 있는 마당에 ‘공주갑사승탑’이 나온다. 승탑이란 승려들의 유골을 안장한 묘탑이며 팔각형의 지붕을 가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이란다. 이탑의 아래 지대석 부분에 연꽃과 사자, 구름과 용을 새겼고, 지붕 아래 탑신부에는 사천왕상이 부조되어 있다.
<공주갑사 승탑>
승탑 바로 아래에는 불교의 깃발(佛幡) 내 걸던 철제당간(鐵製幢竿)이 우뚝하다. 어림짐작으로 15m정도 높이의 당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이 갑사의 원래 입구인 것 같다. 그리고 갑사 입구 마을에는 매년 정월 초사흘에 마을사람과 승려들이 정성들여 제사를 올리는 괴목대신(槐木大神) 상석이 있다.
<철제당간>
<괴목대신 상석>
가볍게 조반을 마치고 다시 세종시로 들어가 장군면에 있는 ‘장군산영평사(將軍山永平寺)’로 간다. 영평사는 오래된 고찰(考察)도 아니고, 특별히 내세울만한 보물도 없는 사찰 같다. 그러나 일반 사찰과는 달리 대웅전 앞마당에 탑이나 석등도 없고 푸른 잔디를 깔아 놓았는데 우선 포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대웅전 좌측 옆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 입상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 삼라만상을 굽어본다.
<장군산영평사 전경>
꽃무릇은 곱게 피었건만 여름 내내 무더위와 씨름하며 키워 준 잎은 만날 길 없는데, 눈치 없는 구절초는 축제를 앞두고 가을이 더디다고 아우성이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
세상만사 이놈의 조화라
오늘의 내 모습 이놈의 그림자
오늘의 요동친 맘 다음 생 내 모습
한번 착하면 만 년 행복
한번 악하면 만 년 불행”
사찰 벽면에 쓰여 있는 이글이 누구의 천 마디 말보다도 내 마음을 흔드는 이유는 무슨 연유일까?
<꽃무릇>
<구절초>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
서둘러 세종호수공원으로 이동한다. 세종호수공원은 금강 물을 끌어와 인공호수로 만든 공원이다. 일산호수공원 보다 1.1배의 크기로 2013년 3월 완공된 국내 최대 인공호수라고 한다. 오전5시에 개방하여 23시까지 연중무휴로 개방되며, 자작나무 등 여러 나무로 테마 숲을 조성하여 가족단위로 소풍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꾸며졌다. 잔디로 단장한 ‘바람의 언덕’은 전망이 좋은 곳으로 조성되었고, ‘수상무대 섬’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세종인공호수>
독락정(獨樂亭)은 충북 옥천의 대청호 주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 세종시에도 금강을 굽어보는 독락정이 있다고 하여 들러본다. ‘독락정역사공원’ 조성공사로 잠시 길을 잃어 헤매다가 겨우 소재지를 확인하고 찾아간다. 독락정은 임목(林穆)이란 사람이 1437년(세종19년)에 부친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지은 정자로 금강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곳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어가는 입구가 잡초에 묻혀 있어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락정>
공주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창벽(蒼壁·푸른 암벽)은 금강 변의 잘생긴 벼랑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한가롭고 여유가 있다면 뱃놀이라도 하면서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라도 읊어보고 싶지만, 배 대신 세월을 타고 “인생이란 게 푸른 바다에 던져진 좁쌀 한 알 같다(창해일속 滄海一粟)”를 음미하며 공산성으로 이동한다.
<창벽>
마침 공주에서는 제62회 백제문화재(2016. 9. 23∼10.2)가 열리고 있었다. 물의 흐름방향으로 공산성 뒤편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좁은 길은 가파르고 숨도 차다. 참나무에서는 상수리가 떨어지고, 밤나무에서는 알밤이 뚝뚝 떨어진다. 길목 바위에는 주먹만 한 불상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양 참선수도에 열중이다.
<백제문화제 홍보탑>
<바위 위의 작은 불상>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사비(부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항전하였으나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는 ‘공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강력한 남진정책에 밀려 오백년 가까이 이어 온 한강의 위례성을 버리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백제의 두 번째 수도다.
<공산성 정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패색 짙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장으로 5대왕 64년의 웅진백제사를 써내려간 곳이란다. 또한 조선조 인조는 이괄의 난 때 이곳으로 파천하여 엿새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성 밑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은 그때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다.
<공산성 아래 금강>
성내의 여러 유물 중 나라를 다시 찾은 기념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광복루(光復樓)’,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를 기리는 ‘명국삼장비’, 동성왕의 사연이 담긴 ‘임류각(臨流閣)’ 등 유물들을 뒤로 하고 정문 쪽으로 나오는데, 마침 ‘웅진성문병근무 교대식’이 막 열린다.
<광복루>
<임류각>
<웅진성문병 근무 교대식>
강 물 위에는 ‘빛과 이야기가 있는 백제등불향연’을 하기 위해 돛단배를 줄로 이어 띠워 놓았다. 그런데 성곽 길바닥에 이족오(二足烏) 문양이 박혀 있으나 아무런 설명이 없다. 동이족은 ‘태양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삼족오(三足烏)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 헷갈린다.
<백제등불향연>
<성곽 길바닥의 이족오>
축제를 보러 온 인파로 북적거리는 공산성을 빠져나와 ‘공주 정지산 유적’지로 간다. 이곳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유적으로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국가적 차원의 제의(祭儀)시설로 추정한다. 유적지 내에서는 국가의 주요시설에만 사용되는 8잎 연꽃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정지산 유적지>
국립공주박물관 쪽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우거진 잡초가 길을 막는다. 어렵게 뚫고 후문으로 들어갔는데, 화단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금송이 기념식수로 심어져 있다. 백제 무령왕의 관을 금송으로 만들어져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시기적으로 가까운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다른 곳도 아닌 국립박물관에 심어져 있다는 것은 국가의 자존이 걸린 문제이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의 금송>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관람하고 고마나루로 간다. 공주의 고마(곰)나루는 금강의 옛 나루터로 ‘웅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마나루에는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이 공주의 나무꾼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다가 나무꾼이 도망을 가자 새끼들을 차례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신도 빠져 죽었는데, 그 후 곰의 원혼이 금강에 풍랑을 일으켜 나룻배를 뒤집히게 하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곰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니 무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마나루와 연미산>
고마나루에서 하류 쪽으로 공주보가 물길을 가로 막고 서있다. 금강변의 넓은 백사장과 솔밭이 아름다움을 더 했으나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공주 보는 백사장을 다 삼키고 초대 받지 않은 손님처럼 이유도 모른 체 곰나루를 바라보고, 곰 할머니를 모시는 사당은 슬픈 전설을 지금도 이야기 한다.
<금강 공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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