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어떻게 쓸까?
강 경 주(쓰고, 일부 편집)
1. 우리 시, 시조의 이해
우리 시조가 3장 6구로 되어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 3장의 구조 속에 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리듬과 가락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니 나아가서 시조의 존재와 그 정체성마저 잊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하이쿠가 일본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고유한 시형식인 데다가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음에 대해서는 부러워한다. 그러나 우리 시조가 하이쿠와 같이 인정받지 못하는 데 대해서는 시조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 정작 일본의 하이쿠가 그들의 범국민적 문화정책에 의해 전국민들에게 사랑받게 되었음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바담 풍’ 해도 너희들은(시조인들) ‘바람 풍’해서 시조를 부흥하지 않고 뭐하느냐는 식이다. 이것이 외래시(시)에 경도되어 있는 그들의 시조에 관한 애정의 본모습이다.
시조가 갖고 있는 고유의 형식이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형식이 경직되어 있고 담겨지는 내용이 자유롭지 못하여 현대인인의 구미에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시조인들이 시조의 현대화를 위하여 시조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열정을 받치고 있지만 일본처럼 문화정책적으로 지원 받지 못하고 있어 그 효과가 미미하다.
일본의 하이쿠가 가장 짧으면서도 선시禪詩와 같이 깊이 있어 세계적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우리 시조의 가장 중요한 종장만으로도(절장시조, 단장시조) 하이쿠보다 짧으면서 더 멋들어진 가락에 얼마든지 좋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걸 모른다.(시조의 한두 수는 트위터에 올리기도 적당하다 )
우리 음악을 ‘국악’이라 하고 우리 미술을 ‘한국화’라고 하여, 마치 서양음악이나 서양미술은 그냥 음악이고 미술이지만 우리 것들은 별종 취급하는 것과 같이, 우리 시인 시조는 굳이 ‘시조’라 하고 서양, 일본을 거쳐 들어온 외래시는 ‘시’라 지칭하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처음부터 ‘시조’라 하지 않고 ‘시’라 하여야 했다. 그것은 국악을 그냥 ‘음악’이라고 하고 서양음악은 ‘서악’이라 별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과 같다.
너무 국수주의, 민족주의자 입장이라고 비판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넘칠수록 좋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도 퇴색해 가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시조는, 우리의 것이며 그야말로 한국 고유의 정형시이다. 우리 글자인 한글이 우리 민족에게서보다는 다른 나라로부터 그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시조도 오히려 외국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파급되어 가는 실정이다.
2. 시조의 짜임새와 율격
우선 시조의 종류를 보면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장시조) 등 세 형식이 있다. 이 세 형식에는 모두 초장(初章) 중장(中章) 종장(終章)의 3장이 있고 바로 이 3장이 시조의 골격을 이룬다.
흔히 유행하는 3행시쯤으로 생각한다면 시조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평시조 외에 엇시조나 사설시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형이 답답하다 하여 자유시 형식의 대안으로 사설시조를 쓰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기준점 없는 시조창작으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사설시조에는 사설시조 나름의 특유한 리듬과 가락이 있다. 아무나 흉내 낼 일은 아니다.
시조의 정격은 시조(정형시조)이다. 그 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여나 다칠세라/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정완영.조국>
평시조(정형시조) 자수율(34조,44조)이 잘 들어맞는 작품이다. 시조는 단수가 그 정수이나, 일부러 연시조를 예로 들었다. 그것은 현대시조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으로서 참고가 될 것 같아서이다.
자수가 잘 지켜졌고, 각 장의 첫 구가 3자로 시작되어 모두 자연스러운 가운데. 특히 종장의 첫 구가 3자이어야(불문율) 함도 잘 지켰다.
시조를 쓰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형식을 수없이 반복해 익혀야 한다. 이와 같은 자수율이 뼈 속에 녹아 체질화 되었을 때, 자연스런 시조의 가락을 앉히게 되는 것이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수많은 작품을 필사하며 외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익혀진다. 강의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익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다음에 파격, 즉 자수의 변용을 시도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파격은 의도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밤송이가 익으면 저절로 벌어지듯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종장의 첫 구가 불문율로 되어 있고, 다음에 오는 둘째 구는 적어도 5자 이상이어야 어울린다. 그러므로 뒤따르는 셋째 구는 5자보다는 작은 4자이거나 둘째 구의 리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마지막 구 역시 셋째 구의 흐름을 이으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3자이거나 셋째 구의 리듬에 준한다.
시조의 각 장의 끝맺음(넷째 구)은 아주 중요하다.
각 장 넷째 구는 대체로 4자이어야 하기도 하지만, 위 글 첫수 초장은 ‘줄 고르면’으로 풀고, 중장은 ‘에인 사랑’으로 맺고, 종장은 다시 ‘가얏고여’로 풀었다.
다음 수는 ‘달이 뜨고’로 먼저 풀고, ‘꽃잎도 떨리는데’로 한 번 더 풀고, ‘흰 옷자락으’로 맺었다. 그 다음 수는 풀고, 풀고, 또 풀었으나 첫수 종장은 풀고, 2수 종장은 맺었으며, 3수 종장은 다시 풀어 전체적으로 어울린다. 이와 같이 시조의 가락은 맺고 풀어주는 묘미가 잘 어우러지는 것이 좋다.
한 편의 시조를 이루는 3장은,
초장은 끄집어내거나 은근히 제시하고, 중장은 그것을 한 번 구슬리거나 뒤집어 종장에서 풀거나 혹은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흔히 그것은 기승전결의 구조로 보기도 한다. 사실 종장만으로도 독립적으로 그러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하이쿠보다 더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조는 강물의 흐름에 비유할 수 있다. 초장을 강물의 근원(상류)으로, 중장을 강물의 중류로, 종장을 하류 혹은 폭포를 이루는 모습의 다름 아니다. 특히 종장의 첫 구는 폭포수에 이르기 전의 강물이 고요히 숨을 고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둘째 구는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셋째 구는 떨어진 물의 맴도는 모습에, 넷째 구는 다시 아래로 서서히 흘러가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시조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양하다 할 수 있으나, 그 양에 관하여서는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면 아주 답답해지기 쉽다.
이것은 주제의 무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 마리 수와 같은 것이다. 너무 많은 수의 금붕어를 넣으면 답답하다 못해 숨막혀 죽을 것이고, 너무 적은 수의 금붕어를 넣으면 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쓴 사람의 입장이나 독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곧 풀면 맺고, 맺으면 다시 풀어주는 흐름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다.
3. 정형과 파격
시조가 정형시라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엄격하게 따지면 한국에는 정형시가 없다- 정형시이기 때문에 시조만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고 운치를 더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되짚어 보면 꼭 시조에만 정형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정형시인 시조에 비해 자유시는 전혀 정형과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 자유시에도 어느 정도 정형이 유지되기에 음악적 리듬감각으로 운문이란 틀이 주어진 것이다.
만약 자유시에 음악적 요소가 없다면 시조형식에서 말하는 파격이 되는 것이고 이는 평문(산문)과도 별 차이가 없다.
시조 창작에서 정형을 좇다보면 어디엔가 숨어 있을 자수율에 알맞은 적재적소의 절묘한 시어를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적당히 얼버무림을 가하여 이루어지는 단순한 변용을 두고 파격이라 하지 않는다. 이를 내재율의 변용인 파격의 한 수단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다.
자수율에 의한 정형적 가락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절묘한 가락으로 다가오는 것이 파격이다. 그러므로 이를 ‘파격’이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파격적 작품이란 없는 것이다. 파격은
물건너 제주에서는 섬처녀를 비바리란다
비바리 비바리라니 물새를 닮은 이름
그 이름 죽지쯤에는 소금기가 묻어 있다.
<정완영.비바리>
자수가 늘어난 곳이 보인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다. ‘비바리’를 반복함으로써 섬처녀가 물새처럼 우는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다.
이것을 글자수에 맞춘다고 ‘물건너 제주에는 섬처녀를 비바리래/비바리 비바리라 물새를 닮은 이름’ 하는 식이라면 얼마나 그 맛이 죽어버리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가. 그리고 오히혀 ‘갈매기’였을 법한 새를 ‘물새’로 바꾸어 앉혀 자수율은 지키고, 종장의 소금기와 연결시켜 바닷새를 연상케 하는 시적 에스프리가 대단하다. 갈매기나 바닷새였다가 또 소금기 운운하였다면 중복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바리와 갈매기는 어째 좀 어색하다. /갈매기‘가 주는 어감과 ’물새‘가 주는 어감의 차이는 현명한 독자라면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이름 어딘가에는’하고 표현해도 무난할 것 같은데 ‘죽지쯤에는’ 하였다. ‘-쯤’이라고 유보하면서 자수율도 맞추고 소금기가 ‘어딘가(그 언저리) 묻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죽지에는’이라고 확실하게 단정지었다면 이 시의 맛은 한결 떨어졌을 것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승무(일부)>
어떤가. 한 편의 시조로서는 어떤가?! 종장의 셋째 구가 약간 늘어났으나.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고 그 셋째 구를 약간 빠르게 붙여 읽어 보라. 이 글을 시조의 정형에 맞추어 보겠다고,
‘ 얇은 사(紗) 하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푸르게 깎은 머리 그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 너무 고와 설워라’고 하는 것이 시조답다고 주장한다면 시조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말은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라는 지시성 외에도 말이 가진 가락과 리듬이 있고 무게가 있으며 그 말 속에 전 민족의 애환이 담긴 정서가 깃들어 있다. 말 속의 리듬이나 가락과 무게는 그 겨레의 전 역사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불 불 불조심’하는 표어를 보자. 이것이 시조의 한 구를 이룰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상정할 때, 3・4조의 가락에 맞지 않으므로 쉽게 ‘불불불 산불조심‘으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경망스러우며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갑갑하기조차 하지 않은가. 그것은 ’불‘자가 가진 무게와 리듬, 그리고 반복함으로써 일어나는 시간의 등장성 때문이다. 그것은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미 3자의 효과(시간의 등장성)를 가질 뿐 아니라, 뒤따르는 ’불조심‘은 3자이지만 앞 구가 2장인 까닭에 4자와도 같은 효과를 갖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경우는 참으로 많은데, 이는 자수율이라기 보다 내재율이 가깝다. 자수율보다 내재율의 호흡이 현대적 음보이고, 양반들이 팔자걸음을 걷는 조선시대의 보법이 아니라 바쁘기 살아가는 현대인의 걸음걸이이거나 호흡일진대. ‘승무’의 ‘정작으로 고와서(한 음보)’를 굳이 ‘정작으로/ 고와서’라고 두 음보로 읽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시조의 음보가 아니라는 주장은 시조의 지평을 넓혀가는 데 상당한 장애가 되리라 믿는 것이다.
4. 시간의 등장성(음보율)
시의 언어는 '리듬' 이 있는 언어로 만들어지고, 이러한 리듬을 '운율' 이라고 한다.
이 때, 운율은 크게 '압운'과 '율격'으로 나누기도 한다. '운'은 같은 소리 또는 비슷한 소리의 반복을, '율'은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운(韻)이란 같은 소리 또는 비슷한 소리의 반복을 그 기본 형태로 하는 것을 말한다.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서정주, '귀촉도‘에서>
이 시에서는 자음 'ㅅ'과 'ㅇ'이 반복되어 운(韻)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시에서의 운은 서구시나 한시에서처럼 엄격하거나 다양하지 못하고 단조로우며 발견하기도 어렵다. 대체로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거나 동어 반복 정도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시의 운이다. 그것은 우리말이 교착어인 까닭으로 어절이나 단어의 끝 음상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다시 여러 하위 범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오늘날 이 말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압운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뿐만 아니라 형태로 포착할 수 없는 내재적 리듬을 말할 때도 운율이라는 말을 쓴다.
'음보율' 이라는 의미와 '음수율' 이라는 의미는 '율격'의 한 종류이다.
우선 ‘음보율’의 이론적인 설명을 보자면, '음보율' 이란 '음절 발음 시간의 등장성을 기준으로 하는 운율' 이라고 한다. 여기서 등장성이란 '길이가 같은 성질' 을 말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라는 구절을 한 번 읽어보라.
음악으로 치자면 4분의 4박자에 맞추었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나 보기가 /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 고이 보내 / 드리오리다' 라고 나누어진다.
이 때, 시를 가장 안정적인 운율로 읽을 수 있는 단위를 '음보' 라고 한다.
그러니까 김소월의 '진달래꽃' 은 '나 보기가' 가 1음보, '역겨워' 가 2음보, '가실 때에는' 이 3음보, 이렇게 나뉘므로 '진달래꽃'은 3음보의 시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음수율' 이란, '각 행의 음절수에 의한 규칙적인 운율' 을 말한다. 흔히들 말하는 '7.5조'네 '3.4조'네 하는 것들이 바로 이것이다. 음절이라는 것이 글자 수를 뜻하는 것이므로 각 행별로 대강 글자수를 일정하게 만들어 운율감을 만들어주는 것이 음수율이다.
위에서 예로 든 '김소월의 진달래꽃' 도 굳이 따지자면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으로 나누었을 때 '7.5조'의 음수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경우에는 음수율을 따지는 것보다 음보율을 따지는 것이 더욱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보통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3음보의 시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에서는 두운, 요운, 각운 등 글자의 위치를 맞추어주는 운율이나 글자수를 맞추는 음수율보다는 음보격이 적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음보니, 3음보니, 4음보니 하는 것이다.
사실 시를 읽을 때에 생기는 안정감이란 읽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기 때문에,이 시가 3음보이다'라는 말에 대해 '그 시가 왜 3음보이냐' 라고 되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저 보편적인 안정감을 기준으로 해서 음보율을 따지는 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가시리' 와 '베틀노래' 의 경우,
우선 '가시리'는 3.3.2조의 3음보라고 보통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3.3.2조라고 하는 것은 음수율이고, 3음보는 음보율로 따져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베틀노래'는 4.4조 4음보이다
5. 한 편의 詩(時調)는 어디서 오는가
한 편의 詩(時調)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향기로운 마음의 꽃이다. 아니 시는 모든 문학 장르의 상좌에 앉혀진 꽃인 동시에 칠흑의 어둠속에서 뱃길을 열어주는 환한 등대, 반쯤 쓰러진 영육을 떠받치는 조그만 등불과도 같은 들꽃의 흔들거림이다.
삶의 노정에서 피워낸 마음의 꽃인 시는 곱씹고 음미할수록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가슴이 울렁거리고 때로는 눈시울이 붉어져 물기마저 배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아무 소리도 없는 절창의 명시의 위력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에 심취해 있는, 또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겐 어떻게 하면 좋은 명시를 만나고 빚을까 싶어 밤낮으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빵가게의 쇼윈도 앞에 섰다고 하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음직스러운 저 빵은 어떻게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인가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실제 제빵이 되기까지의 이면적 과정을 볼라치면 일시에 먹고 싶다는 충동이 확 달아날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편의 시 작품이 탄생된다는 것은 제빵의 그것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사물과 부딪히게 되고 여러 삶을 통해 겪는 감정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들이 체험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로부터 들었을법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읽었을 듯한 글귀, 가상적 공간에서 그려보는 밑그림, 무의식 속에서 잠재적인 것을 끌어내어 물화(物化)하는 작업 등이 추상에 해당된다. 이러한 추상, 즉 상상과 체험이 균형을 이루어 작품 소재인 밀가루와 물이 잘 융합되어 반죽이 되듯, 한 덩이 원자재가 될 것이다.
다음은 오랜 시간을 두고 얼마만큼 추고(퇴고)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부수가 나기 마련이고 그 완성도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준다. 조탁. 탁마. 연금술사의 노력이 화려한 변신을 가져오듯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동질의 미(美)적 언어인, 아름답다, 예쁘다, 어여쁘다, 곱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눈부시다, 찬란하다, 자랑스럽다, 별 같다, 꽃 같다 등 이러한 시어들을 적재적소에 선택하는 능력이 바로 기술자인 시인의 역할인 것이다.
단 여기서 명심해야 될 것은 체험에만 근거한다면 시가 거칠고 무거워지는 반면, 상상력에만 의존한다면 현실성의 결여로 무의미를 불러올 소지가 없지 않다. 일정량의 밀가루(소재)에 적당한 물과 소금 설탕 향, 그리고 알맞은 불의 조화가 구미욕을 불러오는 빵이 되듯 한 편의 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음은 작품의 창작동기(배경)와 그 동기가 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자.
죽은 그의 얼굴엔
젖은 신문이 흡착되어
그의 눈과 귀와, 그리고 코를
그 입을,
잘 염습하여
숨을 막고 있었다
죽은 그의 귀와 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엔
썩은 텔레비전이, 텔레비전 애벌레가
살았다, 살아있었다
신문을 뚫고 기어 나왔다
<강경주.어떤 죽음>
졸시 ‘어떤 죽음’은 신문으로 얼굴을 덮어 둔 어느 노숙자의 주검을 본 순간 충동을 받아 쓴 시조이다. 그것은 평소 내 의식과의 돌연한 만남이었다. 그 노숙자는 아마 기아와 한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얼굴에 덮혀 있는 신문지 한 장 때문에, 그 죽음의 원인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언어 등에 의한 무차별적 공격성에 있다는 충동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 등의 언어에 의해 종속되고 오염되고 세뇌되어 휩쓸린다는, 그래서 개인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신문이나 텔레비전만 얼굴 없는 대중(민중) 속에 살아있다는 평소의 고뇌가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이 노숙자의 죽음을 보는 순간 부싯돌을 치는 것처럼 뜨거운 영감과 함께 풀려나온 것이다.
신문이 젖어 흡착되었다느니, 생명의 구멍들을 모두 막아 염습하였다느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에서 텔레비젼이 기어나온다는 것 등은 물론 팽배한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본디 온전한 생명력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분별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능력을 잃게 된다고, 그것이 곧 적응이라고 탈무드에서도 그리했듯이, 성경에서는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분별심(선이니 악이니 하는)이 생겨 마침내 완전한 삶을 상실하고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는 알음알이와도 같은 분별심을 버리는 것을 해탈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분별심은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 관념이다. 우리들은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고 완성한다. 그러나 사실 언어 때문에 관념이 형성되고 모든 고통은 관념 때문에 일어난다. 언어가 없는 동식물이나 무정물은 사고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관념을 만들어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만든 것에 종속되고 노예처럼 끄달리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모두 행복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그런 분별의 언어 장난으로 생사를 구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신神 또한 인류가 만들어낸 환상의 지팡이이며 굴레가 아니던가.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거나 완성한다. 그러나 시인이 표현하고 완성코자 하는 세계는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창조의 세계이다. 언어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많은 량의 언어를 소유하고 이용하지만 언어에 대한 믿음과 애착은 옛 사람들에 비해 빈약하다. 언어의 지시성, 도구성에만 의지하다 보니 언어가 가진 고유의 정서적 환기나 음악성 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언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어 언어의 객관적 일반적 지시성보다는 주관적인 창조성과 음악성을 믿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내부에 켜진 불뿜는 이미지를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이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 시인은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언어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동반자가 된다.
언어는 인간과의 관계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언어를 사고의 통로라고도 하고 존재의 집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한 겨레의 언어는 그 겨레가 전 역사를 통해 이룩해 낸 온갖 사고의 집약이라고 일찍이 석학들은 설파했다. 그러므로 언어 속에는 의미가 갖는 지시성 외에 그 겨레의 얼과 문화와 정서, 역사적인 환기, 음악적 문양 등 독자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언어가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상황을 새롭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내포적 의미를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언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일상적인 삶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언어의 일상적 의미 즉 지시성이나 도구성에 의존하는 신문 같은 기사 속에는 그것을 쓴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량의 언어군이 우리 생활 속에 정보라는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지만 우리는 그 정보에 대해 자신 있는 결단을 내릴 수도 없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오히려 상황은 더욱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신문에 사용되는 언어가 기업이나 권력 따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신문의 언어가 권력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핍박당하고 있는가. 그들이 보도하는 뉴스는 사건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그들의 상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 속의 언어는 온갖 관념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죽은 언어이다. 사어의 바다에서 숨가쁘게 자맥질하는 시인은 이러한 현실이 괴롭다. 어떤 대상이 언어에 의해 종속되어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도 괴롭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외부현실을 내부적 현실로 받아들여 고뇌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외부현실을 의식 속에 가열케 하고 성숙케 하여 새로운 내부적 현실로 발효시킨다.
말이 한참 돌아왔지만, 결국 시인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상적의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을 형상화하여 설명이나 객관성을 벗어나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시의 작법에 대해 소개해 놓은 대부분의 책들은 시를 쓰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소재, 제재, 모티브(동기), 테마(주제)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 쓰기의 통일된 생명력을 분해하여 나열해 놓은 것으로서 마치 삶을 분해,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일부분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는 없다. 삶이란 총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시 또한 삶에 대한 이해와 주장이므로 이러한 방법은 시를 쓰는 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를 써 보면, 의식화되어 있는 혹은 시인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어떤 강렬한 충동이(동기,주제) 어떤 대상이나 현실과의 돌연한 만남에 의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인의 내적 충격이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비로소 도구적 차원에서 승화되어 시적상황, 시적현실로 창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의 내적충격은 목적이나 본질에 앞서는 불가피성에 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불가피성은 평소 시인이 쌓아온 경험과 사상과 철학과 사회현실 혹은 역사의식 같은 총체적으로 들끓고 있는 에너지에서 분출하게 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에너지가 늘 충만해 있는 긴장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백일장 같은 행사에서는 소재 혹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시 쓰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소재가 시를 쓰는 사람의 내적충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실패할 수 있다. 화가들은 자기가 터득한 기법에 의해 언제나 어느 정도 수준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겠으나, 시인은 한 마디도 쓸 수 없을 수 있다. 시는 손끝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문학의 꽃, 예술의 꽃이라고 특별히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언어이다. 그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언어 안에 불씨처럼 박혀있는 상상력에 의한 영상의 환기 같은 것이다.
한 편의 시의 가치는 현실 속에 있는 외적인 사물이나 외적인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재는 시의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시에 동원된 소재, 현실의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일단 시적 언어 속, 허구 속에서 해체 되거나 재조립을 본 언어의 관계 속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의 재료는 물감이고 시의 재료는 언어이다. 화가는 물감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인은 언어로 되어 있는 환등이요 꿈이다. 시인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말은 시의 재료가 바로 시인 자신이라는 뜻이다. 시인 내부에 몽롱하게 켜져 있는 의식의 등불이 대상(언필칭 '소재'는 촉매일 뿐이다)을 꿈속처럼 비추어 새롭게 하는 것이다.
6. 시어(詩語)와 시적 표현
가끔씩 열병을 앓는 문학 지망생으로부터 어떤 것이 시어(詩語)가 될 수 있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 선뜻 대답하기가 무엇해 '시어'란 사전 속에 다 있는 단어이며 한편으로 창자(創者)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고상스런 언어일 뿐이다고 치부해 버린다. 우선 시어의 사전적 의미를 볼라치면 ①시에 쓰는 말. ②시인의 감정(사상)을 나타낸 함축성 있는 말, 이렇게 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쓰는 일상적 언어가 다 시어가 아닌 것이 없다. 문제는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따라 시어(단어)가 달라질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에 부응할 수 있는 사고가 보다 좋은 시어를 낳게 되리라 여겨진다.
국민시인 김소월의 시는 대체로 순한 작품들이다. 작품구성이 매우 음악적으로 고매한 가락을 지녔으며 톡톡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그 시대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토속적 이미지로서의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 만인의 대변자로서의 솔직한 감정처리가 오늘날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시혼(詩魂)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초보자 일수록 김소월과 같은 시 경향을 으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문명의 속도는 광속과도 같은 천문학적 수치다. 꿈, 밤, 눈물, 그리움, 마음, 님, 생각 등등 관념적 시어는 별 효용가치가 없다.
혼란 속의 마찰음, 이율배반적 비정,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병폐. 이러한 경계스러운 급변의 구조 속에서 내면적 고찰과 현실적 직시를 보다 정확하고 심도 있게 간파하느냐에 따라 현대시(시조)에서의 시적 성공을 거둘 것이다.
밥을 먹었는데 똥이다. 고기를 먹었는데 똥이다
향기로운 미주美酒와 감미로운 과일을 먹었는데
똥인데, 똬리를 틀고 앉아 날 자꾸 째려본다
〈강경주· 똥〉
위 작품은 위장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풍자성이 강한 작품이다. ‘밥’이니 ‘고기’니 ‘미주’니 ‘과일’이니 하는 것들은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것들이 모두 똥으로 변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시적화자)의 자괴감, 그리고 그 똥이 ‘째려보는’ 시선을 통해 똥보다 오히려 못한 삶, 구린내 나는 삶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창자(創者)의 눈에 비친 세상보기의 진실성이 성공을 거둔 동시에 내적인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키스를 하고 돌아서자 밤이 깊었다
지구 위의 모든 입술들은 잠이 들었다
적막한 나의 키스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정호승.키스에 대한 책임>
입맞춤을 하고 돌아서는 깊은 밤, 너는 눈물을 흘리는데 나의 키스, 나의 사랑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적막해지는 심정을 '적막해지는 나의 키스'라고 표현했다. 신선하지 않는가.
또 다른 예로서, 첫 키스의 느낌을 각자 한 번 시로 표현해 보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첫 키스의 느낌을 수식하는 말을 만들어 보자고 하면 '황홀한' '달콤한' '갑작스런' '아련한' '부끄러운' '잊지 못 할' '지워버리고 싶은' '감미로운' '떨리던' 등등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표현들 중에 참신한 표현은 무엇일까. 잘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용운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70여 년 전 그런 참신한 말로 표현했다. '날카로운'이란 형용사는 키스라는 말이 주는 느낌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다. 광물질적인 속성, 금속성 이런 이미지를 주는 말이다. 그러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말이 결합하면서 '갑작스런' '충격적인' '강하게 다가온' '찌르듯이 내게 온' 이 모든 느낌이 함께 들어 있는 다양한 의미 공간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런 신선한 언어의 만남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을 둘러 앉혀 놓고
지글지글 고깃근이라도 구울 때
소위 오르가슴이란 걸 느낀다는데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
그것은 마치 중생대의 지층처럼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을 층층히 켜켜로 머금고
낯뜨거운 오르가슴에 몸부림친다
그 환상적인 미각을 한 점 뜨겁게 음미할 새도 없이
식구들은 배불리 식사를 끝내고
삼겹살을 구워 먹은 뒤 폐허 같은 밥상은
..........
헐거운 행주질 한 번으로도 절대 깨끗해지질 않는다
하얀 손등에 사막의 수맥 같은 파란 심줄을 세우고
힘주어 밥상을 닦는 아내의 마음속엔
수레국화 꽃다발 사방으로 흩어지고
- 「돼지」 중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을 무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 그렇게 표현했다. 비유가 신선하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보며 떠올린 '중생대의 지층' 그리고 '층층히 켜켜로 머금은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 이런 비유들은 이 시를 쓴 사람만이 본 독특하고 새로운 시적 발견이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고기와 오르가슴을 연상시킨 비유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전혀 상투적인 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가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렇듯 시어는 현실적 삶의 의미를 얼마만큼 적절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한 알의 보석이 될 것이다. 마치 돌멩이에 불과한 원석을 밀도 있게 가공하여 탄생된 한 알의 투명한 유색보석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눈부신 광채, 바로 그것이 시어인 것이다.
7.조어(造語)에 관하여
한 줄 한 줄의 시구(詩句)는 보석의 결정체와도 같은 오묘함의 함축성을 요하기 때문에 실로 적재적소에 영롱한 시어(詩語)를 앉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 자기만의 온갖 표현 방법을 다 동원하다 보면 간혹 조어(造語)를 쓰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사전에서 조어는 〈①말을 새로 만듦, 또는 이미 있는 말을 엉구어서 새로운 뜻을 지닌 말을 만듦. ②꾸며댄 말. 날조한 말.〉이렇게 표기돼 있다.
조어는 명사와 명사를 접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기만의 느낌과 표현으로 자연의 소리 뿐 아니라 인의적 소리, 특히 짐승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의성어인 면에서 적잖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어라 해서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다거나 혼자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인 양 해독 불가능한 암호와도 같은 조어를 만듦으로서 문장 전체를 잃게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조어에서의 성공은 독자 쪽의 반응여하에 달렸다. 그러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조어는 사어(死語)나 마찬가지다.
성공적인 조어의 예를 보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조지훈 ․「승무」中에서〉
위 밑줄 친 부분의 조어와 같이 어감이나 느낌이 무리가 없어야 되며, 작품 전체의 균형미에 있어서도 무게중심을 받쳐줄 수 있어야 된다. 〈나빌레라:'나비일레라'의 준 꼴로 '나비와 같구나', '일레라'는 '이겠더라'의 뜻으로 쓰였다.〉〈파르라니:파르라니는 파랗게의 운율적인 신조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근래에 언론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먹거리인데 〈먹거리는:'먹다+거리'이다.〉 또한〈조붓하다:조붓하다는 '조용하다+오붓하다'〉의 조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어는 함축적인 의미를 집약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오묘한 발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 창작에 있어 초보자 일수록 주의해야 될 것은 멋이나 무게를 주는 듯한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한자어 사용은 문장전체를 딱딱하고 굳히는 듯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문(死文)을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한자어는 약(藥)으로 한두 자 쓰였을 경우 꽃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이다.
8. 시제(詩題)의 의미
이름이 그 사람의 얼굴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제목은 한 작품의 전문(全文)을 대신하는 얼굴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난다고 가정했을 때 우선적인 관심거리가 그 사람의 외형적 모습, 즉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잘라보지 않고서는 무의 속을 모르듯 단적인 시간 속에는 그 외형적인 요소만이 그 사람의 성품과 진실성의 여부까지도 점지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모든 문학 장르에서 제목이 갖는 역할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제목은 미인의 얼굴과도 같다.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미인 앞에선 누구나 조건 없이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 듯 제목이 참 좋다거나 멋있다거나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섰을 때 빨리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그만큼 제목이 갖는 비중이 크다고 할 것이다.
적게는 3할 내지 많게는 5할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문학 작품에서의 제목 붙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내세워 독자들의 상상에 작품성을 맡기기도 하니 말이다. 특히 백일장에서의 시제(詩題)는 참가자의 의욕을 저울질 하는가 하면 당락의 결정적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습작하는 초보자일수록 제목을 먼저 정하고서 지향하는 주제에 벗어나지 않도록 작품을 써내려 가면 통일성을 잃지 않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쓴 다음에 제목을 부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가급적 초보자는 삼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제목 자체도 작품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학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처음 창작을 하는 경우엔 사물의 이름이나 단아한 이미지의 제목을 내세우는 예가 빈번하겠지만 수준이 향상 될수록 제목도 창작이여야 한다. 그렇다 해서 기존의 멋진 제목을 표절하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금물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아무리 보기 좋은 멋진 것이라 할지라도 남이 먼저 입은 것을 똑 같이 흉내 낸 것이라면 꼴불견 일 수밖에 없다.
필자 생각으론 주제의식이 강하고 작품 흐름이 빠른 경우엔 단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제목을, 반면 관조적이면서 배경화면이 서정성을 띠고 있으면 제목 자체도 그에 상응한 회화성을 가미한다면 훨씬 멋스러움과 작가적 운치를 더하지 않을까 싶다.
긴 밤이 깊을수록 꿈도 깊은 창가에서
아슴한 기억들을 풀벌레가 꿰는 이 밤
얼비친 이승 한 켠을 달빛 보듯 하는가
〈한춘자 ․ 가을 밤에〉
9. 창작과 퇴고
한 편의 작품을 빚는데 있어 평소 마음속에 품었던 구상을 의도적으로 작품화하는 경우와 즉흥적 감흥에 의해서 작품화하는 두 유형을 누구나 경험했으리라 본다. 전자의 경우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자료수집으로 탄탄한 작품이 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다소 작품 질은 떨어지긴 하나 군데군데 반짝이는 싯구, 자연스러움 등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집에서의 글쓰기와 백일장에서 글쓰기의 차이점과도 흡사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품다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퇴고(추고)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 승패의 여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필자의 경험을 한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삼십 년 전쯤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나도 그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무지개를 어떠하면 시조작품에 앉힐까 싶어 많이도 고뇌하며 속을 다렸다.
예1)
돌 사이를 요리조리 상처 없이 빠져나와
사슴과 토끼의 목 말갛게 씻어 주고
잎 끝에 앙증맞게 맺혀 먼 바다를 내다본다
예2)
돌 틈을 빠져나와 노래하며 흐르다가
사슴 눈 귀를 씻고
잎새 위에 앉은 아가
동녘의 푸른 바다를 내다보는 맑은 눈
예3)
돌 틈을 빠져나와 사슴 눈 귀를 씻는
아가야,
잎새 끝에 맺힌 앙심 보이느냐
동녘의 푸른 바다가
아우성이다
아우성.
<강경주 ․ 물방울〉
예1)은 초고다. 어둡고 비좁은 바위틈을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와 뭇 사람들의 목을 축이는 약수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으나, 사슴이나 토끼 등의 목을 축여주고 시내를 이루고 강이 되어 마침내 먼 바다에 이르는 물의 속성을 표현하려 했다. 시적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상처 없이’ 라는 싯구만 다소 시적 표현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시조의 자수율만은 잘 지킨 듯하다.
예2)는 중간 과정의 작품이다. 예1)보다는 시적 표현이 다소 보인다. ‘사슴 눈 귀를 씻는’이 그것이고, ‘동녘의 푸른 바다를 내다보는’이 그것이고, ‘잎새 위애 앉은 아가’가 그러하다 할 수 있다.
예)3이 완성된 작품이다. 중장이 다소 파격적인 듯하다. 자수율만 본다면 맞는 것 같지만 ‘아가야’ 하고 호명하는 첫구는 중장에는 잘 씌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조가락에 어울리게 읽으려고 한다면, ‘아가야, 잎새 끝에’를 너무 띄우지 말고 적당히 붙여 읽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읽어보아도 크게 어색하진 않다. 그러나 어색한가, 그렇지 아니한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겠다. 그것이 보편적 입장에서의 ‘시간의 등장성’이지만 독자마다 다를 수 있어 애매한 부분이다. ‘푸른 바다가 아우성이다’라고 하여 바다가 오히려 물방울 아기를 기다리는 절박감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바다의 쉴 새 없이 출렁이는 모습을 상기하여 그쪽으로 상상해 본 것으로서 물방울에서 바다로 갑자기 비약함으로써 긴장감을 더하였다. 시행의 배열은 아주 자유스럽게 하여 시조의 경직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위와 같이 어떤 계기로 작품을 빚기 시작했을 때 초고에서 퇴고 완료까지는 엄청난 시련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런 산고의 연후에서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창작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다. 초고가 그대로 완성작이 될 때도 많다. 그러한 작품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좋은 작품일 때가 많다. 그럴 때일수록 시인의 행복감은 더욱 충족된다.
10. 단수와 연작 ①
정형시인 시조에 있어 단수(短首)와 연작(連作, 또는 연시조)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단수란 말은 단형(短型) 시조 한 수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연작(연시조)은 시조 단수, 즉 시조 한 수 이상이 한 작품 안에 시형의 틀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제목의 작품 안에 단수가 2개 놓이면 두수 연작, 3개 놓이면 세수 연작, 5개 놓이면 오수 연작이라 말한다.
보기 1)
긴가민가하다가 꽃묘를 뽑고 말았다
서러운 햇살들이 아르르 몰려오고
영혼이 붉은 아가야 울음소리 들린다.
〈강경주 ․ 환청幻聽〉
보기 2)
녹이 슨 배경 하나 비스듬히 버려졌고
그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앉는
바다는 4악장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 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유재영 ․ 월포리 산조〉
보기 3)
내 유백의 살을 풀어 돌덩이에 옮겨보면
멍이 든 아픔도 다 네게서 삭아지고
어느새 한 점 혈육의 영혼이 눈을 뜬다.
사무치는 비원도 유품에 새긴 옛님
몇 생을 돌려놓은 이승은 못담으랴
창호에 묵이 스미듯 손을 꿰어 넣는다.
때로는 사는 일이 풀 한포기 거두는 일
하던 일 밀어두고 강가에 나 앉으면
낯설고 희미한 손금 내 슬픔의 강물이여. 〈최길하· 손〉
보기 1)은 단형시조 한 수인 단수다. 보기 2)는 단수 둘을 합친 두수 연작시조이고, 보기 3)은 단수를 3번 앉힌 세수 연작이다. 이렇듯 단수를 여러 번 중첩함으로써 5수 연작 또는 한 작품 안에 한 수 한 수를 앉히는 수 만큼 12수 연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11. 단수와 연작 ②
“뭐니뭐니 해도 시조는 단수다.”라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시조의 묘미가 단수에 있음을 단적으로 대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수, 즉 평시조 한 수 안에 놓인 글자 수를 세어보면 어느 작품이건 45자 안팎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초, 중, 종장에 앉힌 한자 한자의 글자 수를 모두 합쳐보면 보편적으로 44. 45. 46자 정도라는 것이다. 이 45자 내외의 글자 속에 창자(創者)가 지향하는 모든 세계관을 일궈내야 하는 것이 단수가 갖는 특징이다.
혹자는 45자 내외로 된 그릇이 너무 적어 한편의 작품을 담아내기란 역부족이라고 염려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잎 틔우고 꽃피우는 냉이의 하찮은 듯한 한 톨 풀씨의 삶에서부터, 삼라만상 온 우주를 다 담아 낼 수 있는 절대의 그릇이 삼장 육구 십이절로 형성된 시조 단수인 것이다. 이러한 비법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탁마와 퇴고에 있다고 하겠다. 비견한 예로 우리의 고시조에는 연작이라는 것이 없다. 더구나 그 작품을 예견하는 시제 또한 따로 붙이지 않았었다.
단수에 비해 연작은 한 작품 안에 창자가 의도한 시상을 다 펼칠 수 없을 때 연작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득이 연작을 빚어야 했을 때 외형적 무게감을 주는 듯한 시형만 늘린다 해서 연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네 수 연작을 빚었다고 했을 때 어느 한 수를 떼어놓아도 독립성을 갖는 작품으로 빚어 단단히 구워져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단편적인 소재로 작품을 빚고자 했을 땐 단수를, 오늘날과 같이 극도로 문명화된 현대적 삶을 노래하고자 했을 땐 연작을 쓰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이 때 여럿 소재의 설정을 차분하게 앉혀 가면 창자(創者)가 원하는 만큼의 질량도 따를 것이다. 특히 연작에 있어 주의할 점은 작품의 내면적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조는 절제와 긴장감을 놓치게 되면 작품 전체를 잃게 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2. 시형 앉히기의 여러 형태
굳이 시조에서의 시형(詩形)을 말한다면 3장(三章)이 기본이다. 이는 즉 초장, 중장, 종장을 뜻한다. 자유시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3행시(三行詩)인 셈이다. 시조하면 3행으로 쓰는 것이 기본 틀이긴 하나 오늘날 시조 형식은 자유시 못지 않는 여러 형태를 구사하는 것도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에 적절한 변화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각도의 행(行)이 만들어 낸 연(聯)은 시각적 효과 뿐 아니라, 읽히는 맛과 작품의 이해를 넓히는 데도 적잖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1)
어찌할 수 없이 뜨거운 너의 숨소리
돌아누워 봐도 피할 수 없는 너의 입맞춤
온몸이 잠에서 깨어 붉은 우주를 보듬다.
〈강경주· 일출〉
예2)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 개화〉
예3)
아픈가,
그러면
아프게 살면 되지
죽고 싶은가,
그러면
죽도록 살면 되지
사랑을 알려고 말고
사랑하면 되는 거지
〈강경주· 풀잎이슬 59〉
예1)은 시의 이미지가 물 흐르 듯 유연성을 띄는 3행, 즉 3장으로 구성된 전통적 평시조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예2)는 구(句)로 이뤄진 6행시 인데, 알맞은 시귀로 끊어준 결과가 마치 겹겹의 꽃잎이 벌어져 한 장 한 장의 하늘이 조심스럽게 열려옴을 시각적 미학으로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예3)은 한 음보 혹은 두 음보를 행으로 구분 지음으로서 마디(節)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시조에서 한 장이 행이 되고 연작 시조 중 한 수 한 수가 연에 해당 되겠지만 3장 6구 12절로 형성된 단수 하나만으로도 시귀를 어떻게 앉히느냐에 따라서 행과 연이 달라지고 시각적 효과와 읽히는 맛이 또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시조에서의 시형 앉히기란 창자의 의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구분 짓기 어려울 만큼 천차만별이지만 초보자는 가급적 위 예시와 같은 시형에서부터 조금씩 발전해간다면 시조만이 지닐 수 있는 단아한 멋을 잃지 않을 것이다.
13. 현대시(시조) 무엇을 쓸 것인가
모든 향유의 유혹을 뿌리치고 왜 글을 쓰는가? 혹은 왜 시(시조)를 쓸 수밖에 없는가? 하는 황당한 물음에 대하여 창자(創者)로부터 여럿 답변이 사뭇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멋 부리기의 취미쯤으로, 그냥 글을 쓰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분출 시키고 싶어서, 쏴아- 변기에 물 내려가 듯 생활의 스트레스를 배설하고 싶어서 등등. 어찌보면 이는 삶의 한 부분과도 같은 정신적 사치라 하고 일축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추리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린다는 창작의 고통 속엔 분명 사명의식이 수반 되어야 한다.
『권세가 인간을 교만으로 이끌어 갈 때 시(詩)는 그에게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라고 말한 美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명언이 시인의 사명의식을 단적으로 암시하듯 필을 쥔 창자의 역할이란 당대의 등대지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보며, 누구랑 부딪히고 있는가. 말 그대로 고뇌하는 지적 감각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진찰하고 어디가 어째서 아픈지를 읽어내어 처방전을 쓸 수 있어야만 명의와도 같은 현대 시인이란 칭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좀더 포괄적 의미로 우주의 생성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대라는 괴리감과 병폐된 사회현실 속에서 시간의 포충망에 걸려든 문제들을 극명하면서도 함축적인 강한 메시지를 타전했을 때 비로소 현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적어도 한 시대를 대변한 시인의 역할을 했다 할 것이다. 오늘날 시조쓰기란 영탄적 정서나 음풍영월적인 소재는 자제하고, 보다 삶의 본질을 노래한 개성적인 표현과 감각적인 언어로 쓰여졌을 때 빛나는 작품으로 어필될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 시조의 멋스런 운율을 이입시킨다면 더없는 현대시조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움, 그 끝에 가면
이젠 너도 그 때의 내 나이가 되었겠다
우리가 그 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살갗이 무엇 때문에 흙빛을 닮아 가는지
혼자 먹는 밥상을 놓고 생각이 깊어지겠다
쉬어 가는 바람소리, 집 뒤란을 돌아가고
이슥한 저녁 한 끼쯤 그리움으로 때우겠다
네게 왔던 모든 것들이 왜 먼 길을 떠나는지
그리움의 끝에 가면 왜 그가 없는 건지
눈빛에 이슬 맺히면 또 헛기침을 하겠다
새벽에 일어나면 이젠 알게 되리라
너마저 떠나고 없는 너의 몸을 보리라
그리움 그 끝에 가면 왜 네가 없는지
〈강경주〉
낙화落花
삶도 죽음도 다
내 것이 아닌데
죽음조차 소유하고 있던
삶이 참 무거웠네
삶이 곧 수행이었네
꽃이었네
아니네
어둠도 어디엔가
빛을 숨기고 있었네
완벽한 광명 또한 어디에도 없었네
깜깜한 소실점 하나
꽃씨인 듯
여무네
〈강경주〉
둥글어지기 전
말한 적 있었던가
나는 무기고였단 거
너를 향한 창들이
내게 가득했단 거
뒤집힌 허파 한 쪽엔
비수도 꽂혔었단 거
네 말을 토막 낼 혀
밤마다 갈았다는 거
자물통 채워놓고
퍼렇게 갈았다는 거
내 몸이 둥글어지기 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강현덕〉
출처: 함시 복수초 원문보기 글쓴이: 김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