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지난 12차 서울답사에 처음 참석해보았던 한밤 이주석이라고 합니다.
사진을 좋아해왔는데 몇해전부터 "근대의 흔적"이라는 테마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곳까지 알게되었습니다.
이곳 카페는 방장님부터 회원들까지 워낙 이방면에 깊이가 있으셔서 어지간한 이야깃거리는 화제가 되지 못하는것 같고, 또 동호회등의 분위기는 아니라 답사후기같은것은 따로 안올라오는것 같더군요.
그래도 혹시 참석 못하신 분들이나 새로오신 분들에게 현장기록정도는 알려드리면 참고가 되실듯해, 제 블로그에 정리했던 내용을 이곳에도 올려둡니다.
원본은 http://hanbam.blog.me/50155620529 입니다.
좋은 답사길과 풍부한자료를 아낌없이 소개해주신 제자리 이순우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
이순우의 테마답사 근대역사의 흔적 - 동묘에서 청량리까지
근대문화재에 관심은 있었지만 문화재 목록이나 안내판 정도에 의지하며 가끔 돌아다니는 정도라
깊이도 얕고 기초 사료들조차 확보가 잘 안되 그야말로 그냥 바람이나 쐬는 정도에 머물러 아쉬움을 느꼈었다.
본업의 일정관리가 어려워 정규강좌나 답사모임등은 엄두를 못내는 형편인데
우연히 사료연구가 이순우 선생이 안내하는 테마답사를 접하고 마침 시간이 맞아 따라 나서 보았다.
벌써 12차. 몇 달에 한 번씩 불규칙하게 진행되던 것인데도 적쟎은 분들이 함께 해 오신듯 하다.
내용은 기대보다 훨씬 매니아 지향이라 소화가 쉽지 않다. 일정 역시 무려 6시간을 걸으며 10분간 휴식 한 번.
상세한 가이드가 배포된 답사라 세부 정리는 내 몫이 아닌 듯하고, 기억이 흩어지기 전에 이미지라도 몇 장 붙여둔다.
제목은 "청량리 전찻길따라 근대의 풍경을 걷다 : 동대문밖 동묘에서 선농단 거쳐 홍릉종점까지"
일정은 12년11월10일 12시 무렵 시작해 6시까지 이어졌다.
안내는 이순우선생이 맡았고 답사진행은 다음의 나홀로 테마여행 카페(http://cafe.daum.net/touralone)에서 준비했다.
숭인동 238번지. 동묘.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 제142호
삼국지의 그 유명한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동대문 바로 바깥에 나라에서 관리하는 이렇게 큰 사당에 고대 중국의 장수가 모셔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관우를 떠받드는 문화는 중국에서는 꽤 유래가 깊은가본데, 조선땅에는 임진왜란때 명장수가 남대문쪽에 사당을 세운것이 기원으로 얼마후 다시 동대문쪽에 2호를 세우고, 300여년이 지난 고종때 북쪽과 서쪽에도 마저 세워 서울의 네방위를 관우의 기로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도 이럴진데, 여느 무당집에 관우의 그림이 심심챦게 등장하는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닌듯 싶다.
관우의 사당 동묘. 옆면을 벽돌로 쌓는 등 우리 양식과는 다른 중국풍 건물.
동묘에는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라고 씌여진 현판이 두개 걸려있다.
고종이 직접 쓴 현판이라고 하는데, 왕으로 승격한 것에 그치지 않고 결국 300여년만에 황제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관우의 기가 쎄긴 쎈가보다.
같은 현판이 두개인 것은 대한제국의 제정이 어려워 지면서 북묘를 정리할 때 합친 것이라고.
동대문 일대의 풍물시장과 어우러져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묘 주변.
박영효 집터 (조선귀족회관, 숭인동 81번지) 현 롯데캐슬 천지인 아파트
이런 곳에서 박영효의 흔적을 만나게 될 줄이야.
철종의 부마이면서도 무슨 갑신정변의 주역이다 해서 연민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만
그 행적을 알면 알수록 쓴 맛이 배어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을지로에 있던 조선귀족회관(박영효 후작님이 회장으로 있었던)이 옮겨간 곳이 이곳이었다는 것도 알게되고.
이런 역사의 뒤안길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재야의 고수가 안내하는 현장 답사길에서 얻게되는 보람이 아닌가 싶다.
박영효 집터의 뒷편은 천도교 교단에서 사들여 상춘원이라는 이름으로 손병희의 별장을 세우고
큰 행사때마다 상경한 도인들이 서로 어울려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이 일대에 세워진 롯데캐슬 아파트에 마침 "천지인" 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알고 붙인 것인지, 그 인연이 신기하다.
청량리까지 그냥 대로로 가긴 심심하고, 답사길은 숭인동 뒷골목들과 동망봉을 돌아 다시 상춘원 터로 넘어오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서울 유형문화재 5호. 정식 문화재명은 "정업원 터" 다.
정업원구기는 비석에 세겨진 이름으로,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머물던 곳에 영조가 내린 비석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평생 단종을 그리며 한 많은 일생을 살았던 정순왕후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문화재 이름과 관련해 다소 혼란이 있는데, 처음 지정 당시에는 비석의 이름을 따라 정업원구기였으나
2008년 서울시에서 구기라는 말이 어렵기도 하고 비석과 관련된 이 일대의 역사적 가치를 따져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럼 사적이나 시도기념물이 되어야지 않겠냐는 지적이 있었는데(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319757.html)
사적은 국가 지정문화재로 승격이 필요한 일이라 바로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유형문화재의 범주가 꼭 사물만 아니라 장소도 무형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포함한다고 하니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정업원구기라는 말을 풀면 다시 정업원 옛터라는 뜻이라 단순히 비석의 이름을 한글로 푼게 아니냐는 오해의 여지가 생기고,
정작 원래의 정업원터는 이곳이 아니라 4대문 안이었는데, 영조가 정업원구기 비를 세울때
정순왕후가 도성 밖에 거쳐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이 곳에 세운 것이라 하니, 실제 물리적인 장소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래저래 이름과 문화재 분류에 관해 혼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정업원구기 비각 바로 위쪽으로 청룡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정업원 터가 이 곳이라는 설명들도 적지 않은데 그건 말이 좀 안되는 이야기이고,
근대 테마와 연결이 안 돼 당일은 그냥 지나쳤지만 유래가 고려 태조때까지 올라가는 서울시내에선 유서가 꽤 깊은 사찰이다.
청룡사를 지나 달동네 길을 더 오르면 동망봉으로 오른다.
그런데 이 외진 길 한켠에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이름은 청소원의 길. 72년이라고 씌여 있으니 꽤 오래된 것인데,
당시 이 지역 청소원들이 폐품 팔아 모은 돈으로 이 험한 언덕배기 길을 포장하고
주민들이 그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하니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사의 한 흔적임이 분명하지만 그냥 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을 찾아 세상에 다시 알려주는 수고를 해주시는 분이 새삼 고맙다.
동망봉 동쪽. 보문3구역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요즘 뉴타운 사업이 대부분 망가졌다고 하던데, 이렇게 구도심 인근에서 그래도 사업이 진행되는 곳들도 있는 모양이다.
이미 철거가 다 되었으니, 몇년 후면 앞쪽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동망봉 표지석
"정순왕후께서 단종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을 향해 단종을 그리워 하며 안녕을 빌었던 곳" 이라고 안내글이 씌여있다.
현재 동망봉 일대는 숭인근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체육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다시 동묘 건너편 쪽으로 내려와 보니 "상춘원터" 라고 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신설동 오거리 서쪽 정성약국 앞 갈림길. 아래 옛 지도의 왼쪽 동그라미 부분이다.
지금의 신설동 오거리는 예전에는 아예 없던 길(녹색)이고 사진의 왼쪽 길이 돈암동, 정릉으로 올라가던 나름대로의 역사를 간직한 길이다.
소위 신설동 로타리.
그러고 보면 예전엔 유명한 로타리 하면 이렇게 둥글게 휘어진 전면을 가진 건물들이 인상에 남았는데 이젠 이런 것도 추억거리가 되는 것 같다.
신설동 오거리 지나 다시 왼쪽으로 얼핏 골목처럼 보이는 도로가 갈라지는데 (위의 옛지도 오른쪽 동그라미)
이 길이 바로 금번 테마 답사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옛 전찻길 잔존구역이다.
오른쪽 지금의 간선도로는 1933년에 직선으로 새로 놓은 신축 도로다.
지금 이 옛 도로에는 한빛로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딱히 유래가 깊은 이름은 아닌듯 하다.
오히려 경성의 확장과 맞물려 근대사의 중요한 비중를 차지하는 전차의 존재를 떠올려 볼때
외곽의 청량리까지 처음 전찻길이 놓였던 역사가 있고, 형태도 거의 원형그대로 남아 있는 옛 길이라는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 점에서 이름도 그에 어울리는 것으로 지어주는게 좋았을 것이다.
옛 전찻길 잔존구역의 풍경들. 서울에도 이렇게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듯한 곳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도로와 신도로가 다시 합쳐지는 곳
원래 제기동 사거리에는 1939년에 개설된 경춘선의 종착역인 성동역이 있던 곳인데, 청량리 역과 이중운행 문제등으로 1970년에 폐쇄되고
1976년에 가고파백화점이 들어섰으나 바로 부도를 맞고 1978년 부터 미도파 백화점이 인수해 운영하던 곳이다.
나만해도 제기동역하면 미도파 백화점을 떠올리는 세대인데, 이미 그마저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고 지금은 새로 한솔의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다.
제기동 한솔동의보감 앞 "성동역 터" 표지석
제기동을 지나 청량리역에 이르자 해는 완전히 넘어 갔지만 거리엔 여전히 노점상들과 행인들로 붐빈다.
청량리역.
1899년 전차개통 때부터 종점으로 세워졌고, 이후 중앙선 시발점. 경춘선 종착역으로 서울 동부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 거점이 된 곳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맘모스 백화점을 기억하는 곳이고, 나 역시 빙둘러진 버스정류장에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청량리역 건너 미주상가 뒤쪽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경성제대 예과 건물이 남아 있다.
경성제대의 흔적은 그동안 어느정도 살펴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뜻밖의 곳에서 이런 큰 규모의 건물을 만나게 될 줄이야.
지금은 한림대 치과병원 부속건물로 사용중인데, 등록문화재로도 지정이 안되어 있다는게 신기하다.
시간이 너무 늦어 예정된 홍릉터까지 더 진행하지는 못하고 이곳에서 청량리역과 홍릉터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되돌아 보면 개통시점에는 상당히 외곽이라 할 수 있는 청량리까지 전차를 놓았던 것이 왕후의 묘에 참배길을 놓는다는 명분으로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혜화동을 거쳐 그 노선을 따라 여러 학교들이 이어서 들어서고 결국은 동쪽의 가장 중요한 부도심으로 급속하게 확장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끝으로 답사가이드에 있던 재밌는 자료 하나
The Independent (독립신문 영문판) 1899년 8월31일자에 윤룡주라는 사람이 청량리 홍릉종점 앞에 차린 서양 음식점 광고.
흔히 왕릉 근처에 갈비가 유명한 곳이 많은데 왕릉 제례와 관계되었다는 말들이 있단다.
그럴리가? 싶었지만 혹시 싶어 네이버에 물어보니 정말 그럴듯한 전설들이 있긴하다. 모 문화해설사의 책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하지만 홍릉의 경우라면 전후관계상 말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고, 수원 같은 경우도 원래 소시장이 유명하던 곳이라 그럴 것이고,
그 외 태릉,서오릉 등등... 얼핏 생각해 봐도 그냥 나들이 하기 좋은 곳이라 외식점들이 생긴게 아니겠는가 싶은데
그런 나들이 외식문화의 기원을 찾아 본다면
전차가 개통되고 홍릉일대가 바람쐬는 코스로 유명해지면서 자연스레 식당가가 자리잡은 것이 오히려 근대식 여가생활의 유래로 볼 만하지 싶다.
또 한 가지.
벌써 이 무렵만해도 대중 레스토랑의 광고에 커피가 소개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커피의 유래가 아관파천당시 고종에 의해서였다는 둥 이런저런 전설이 아직도 많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 2012. 11. 10
|
첫댓글 반갑습니다. 얼마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답사경로에 대한 이모저모를 잘 잡아서 정리하셨네요.. 고맙게 생각하고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또 뵙기로 하겠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제자리 드림.
다음엔 체력단련을 좀 하고서 따라나서겠습니다. 그날 집에와 탈진...^^
꼭 참석 하고 싶은곳에 못가 아쉬웠는데 ... 넘 정리 잘 해 올려 주셔서 답사를 다녀온듯 좋은 공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한 보람이 있네요 ^^
내용 잘 봤습니다. 선생님이 부마관련해서 얘기해주신게 기억나는데요. 혹시 그럼 창녕위와 동녕위도 본관(안동김씨)과 관련이 있나요?
부마도위의 작호를 짓는 방법으로 본관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녕위, 동녕위, 남녕위 등의 경우에는 본관보다는 '돌림자'식의 글자를 취해 지은 것 같습니다만, 자세한 연유가 따로 있는 것인지는 관련자료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생님, 요 며칠 조선시대 공주, 옹주, 부마 관련 자료를 죽 정리해보았는데요... 작호는 대개 본관을 따서 짓는 것이 흔한 방식(읍호(邑號)라고 하는 방식)이고요, 창녕위, 동녕위, 남녕위 처럼 외관상 돌림자 형식의 글자를 따는 경우도 간혹 보이는데, 이 경우에도 가급적 자신의 본관이 드러날 수 있는 글자를 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안동(安東)의 옛 이름은 길창(吉昌)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그러한 연유로 '동'녕위가 되고 '창'녕위가 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선 사례로 안동권씨인 권규(길창군)과 안동권씨인 권대임(길성군), 안동권씨 권대항(동창위) 등이 보이는데.. '길', '창', '동' 이런 글자가 모두 안동을 뜻하는
글자가 되는가 봅니다. 다만, 남녕위의 경우 해평윤씨 윤의선인데 해평와 '남'이라는 글자의 연관성은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시 댓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우 드림.
감사합니다. 참석은 못했지만 덕분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잘 보았습니다.
답변감사합니다. ^^ 동묘에서 관리사무소앞에 보면 당간지주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낮고 괘불대지주같은 것이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동묘경내에 있다보니 당간같은 건 아닐거 같은데요?옛날사진에도 보면 괘불대인지 당간인지 (얼핏 사진상으로는 현재 괘불대같은 지지대구조물이 있는 위치같은데)높아 솟아있는 게 보이더라구요! 이 구조물이 무슨 용도로 사용됐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일반 절처럼 행사가 있을때 괘불같은 걸 걸어놓는 대였나요? 만약 그렇다면 현재 동묘에 현재 괘불같은 동묘관련 그림이 존재하는지요? 궁금한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별도의 글을 통해 말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