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김찬호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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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
장기간의 격리가 초래하는 것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 외로이 살아가네
1950년대에 유행했던 가수 권혜경의 노래 〈산장의 여인〉의 노랫말이다. 이 가사는 반야월 선생이 마산의 결핵 요양소에 위문 공연을 갔다가, 어느 여성 환자가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위생이 매우 열악했던 시절의 서정을 담은 노래로, 당시 한국의 대중가요 가운데 질병을 소재로 삼은 유일한 곡이다.
전염병은 그 자체로 신체의 고통을 일으킬 뿐 아니라 사회적인 격리에서 오는 고립감을 수반한다. 코로나19의 경우 전자보다 후자의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 질환은 전 지구적으로 위세를 떨쳐 사뭇 공포스러웠지만, 인명 피해로만 보면 과거의 전염병에 비해서 규모가 작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는 전 세계적으로 약 700만 명이고 한국은 3만 명인데, 인구 비율로 보면 0.1%가 안 된다. 하지만 사회적인 관계 및 활동 측면에서의 피해는 엄청났다. 격리, 폐쇄, 휴교, 휴업, 출입국 제한 등 여러 조치가 3년 동안 엄격하게 시행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단절된 일상을 장기간 영위하다 보면 대인(對人)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특히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의 사회성에 문제가 생긴다.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생들의 정신 연령이 2-3년씩 늦어진 느낌이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성인들도 장기간의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마음의 이변을 겪는 이들이 많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가 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진 경우가 적지 않고, 특히 20-30대 청년들은 취업난과 맞물려 더욱 단절감에 시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버젓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연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상적 왕래가 드물어진 상황이 쓸쓸함을 가중시킨 것이다.
사람이 격리 상태에 들어가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이에 관한 실험 연구로서 2020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발표한 논문이 주목을 받았다. 그 실험에서는 성인 40명이 독방에서 아무런 미디어도 없이 10시간을 보낸 후에, 여러 사람이 즐겁게 어울려 노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면서 MRI로 뇌의 움직임을 촬영했다. 그리고 며칠 후 동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10시간 동안 단식을 하도록 한 다음, 맛있는 음식들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를 촬영했다. 그 결과 이전과 같은 부위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외로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갈망이 굶주린 상황에서 일어나는 식욕과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이 실험은 피험자들을 잠시 격리시킨 다음에 관찰한 것으로, 고립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뇌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와 관련된 연구가 미국의 마운트시나이 의과대학에서 이뤄졌다. 우선 나이 어린 쥐들을 무리에서 격리시켜 2주 동안 홀로 지내게 했는데, 이는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몇 년에 맞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고립된 채 지내게 한 다음, 무리 속에서 정상적으로 지내온 쥐 한 마리가 있는 공간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정상적인 쥐는 곧바로 냄새를 맡으며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홀로 지내던 쥐는 부동의 자세를 취하면서 아예 반응하지 않았고, 상대편 쥐가 다가오자 도망쳐 버렸다.
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쾌락을 감지하는 뇌의 보상 회로에 변화가 포착되었다. 정상적인 쥐는 낯선 쥐를 처음 마주치는 순간 그 부위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격리되어 있던 쥐의 보상 회로는 별로 활성화되지 않는다. 즉 다른 쥐와 어울리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니라 몇 년 동안 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게 된 결과, 사회성과 관련된 두뇌 부위가 고장나버렸다고 할 수 있다.
쥐든 사람이든 낯선 상대를 만날 때는 긴장과 불안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상 회로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그 부정적 감정을 상쇄시켜 준다. 그런데 장기간 고립되어 그 부위가 쇠퇴하면 긍정적 감정이 충분히 생성되지 않아서 불안의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 뿐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관계를 아예 차단하고 외톨이가 되어버린다.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가 관계에 대한 기피 증상을 불러일으킨 메커니즘은 위와 같이 설명된다.
혐오와 적대 감정이 만연하는 까닭
고립은 스스로 사회적 단절을 자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노리나 허츠(Noreena Hertz)의 『고립의 시대』에 소개된 흥미로운 실험 하나가 있다. 생쥐를 폐쇄된 공간에 가두어 놓고 행동 변화를 관찰했는데, 혼자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공격적으로 변했다. 외로운 마음은 오로지 자기 보존에만 몰두하면서 고통받는 타인에 둔감하게 하고 혹시 모를 위협 요소를 찾아 주변을 탐색하게만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저자는 바로 그러한 메커니즘이 외로운 군중이 난폭해지면서 엉뚱한 대상에 적대감을 쏟아내는 현상을 설명해준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에 있고,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분석을 인용한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에서 수많은 백인 노동자 남성들이 트럼프라는 우파 포퓰리스트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까닭도 사회적 지위가 낮아졌다고 느끼면서 자긍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특정 인간 부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는 세력, 그러한 선동에 휩쓸리는 군중들이 공론장을 왜곡시키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진영 논리에 따른 맹목적인 추종과 무조건적인 반대가 교차하면서 토론과 합의 형성이 어려워진다. 증오심으로 추동되는 응집력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사유와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왜 그런 집단 감정에 쏠리는가.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자아의 존재감을 확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개심을 통해 쉽게 접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열패감을 타자에 대한 모욕으로 치환하면서 모종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집단행동에 편승해야 비로소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내면이 허약하고 빈곤하다고 할 수 있다. 거친 언사로 표출되는 공격성 이면에는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다.
외로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에 따르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을 남과 공유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속뜻을 풀어보자.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일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으면서 경쟁을 유발하기에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매개하기 어렵다. 반면에 취미, 배움,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 같은 가치는 서로를 인격적으로 이어주면서 공동체적인 결속을 촉진한다.
한국은 후자보다 전자에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는 사회에 속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다 그렇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자본주의 체제라 하더라도 스펙트럼이 넓다. 예를 들어 “돈이 성공의 최고 척도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한국은 중국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한다. 자본주의가 더 발달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그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낮다. 한국의 경우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물질적인 추구가 맹렬해졌고, IMF 금융위기 이후 비정규직의 급증 등 노동 조건이 가혹해지면서 더욱 돈에 매달리는 풍조가 만연해졌다.
인생의 가치를 소유와 권력에 둘수록 타인과 접촉할 수 있는 면적은 비좁아진다. 또한 생존이 각박해질수록 자신의 안위에 매몰되기 쉽다. 이렇게 분절화된 삶은 신자유주의 체제와 맞물려 악순환된다. 인간관계가 박약해지면 돈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확장된 시장은 사람들을 더욱 파편화한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게 마련이고, 그러한 자괴감은 저마다의 음습한 밀실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정반대로 그러한 무력감을 집단적 증오로 조직화하는 정치 세력에 휩쓸리게 만든다.
마음의 속도와 경청
아침이 밝았어요 / 밤새 / 무슨 일 없었는지 / 잘 잤는지 // 가족들이 / 거실에 모여 // 각자의 / 스마트폰을 켜요-임지나의 시 〈안부〉
현대인의 고립을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디어이다. 우선 스마트폰을 보자. 우리는 종일 그 기기를 손에 쥐고 여러 사람과 수시로 메시지를 교환하지만, 공허함과 쓸쓸함을 자주 느낀다. 왜 그럴까. 정보의 양이 늘어날수록 감정의 통로는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잔뜩 밀려 있는 카톡 메시지와 인스타그램 등에 답을 달고 ‘좋아요’ 버튼 누르기를 분주하게 하다 보면 일종의 업무 처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영혼 없이’ 하트와 느낌표 버튼을 기계적으로 누르기 일쑤인 것이다. 두뇌에 정보의 과부하가 걸리면 정서의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더구나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기에 감정의 스위치도 꺼놓게 된다.
감정의 둔화는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2배속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워낙 봐야 할 작품이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 익숙해진 습관이리라. 장편 드라마는 아예 줄거리를 요약해놓은 유튜브의 짧은 영상, 소위 ‘짤’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내용을 파악해두면 대화 중에 그 영화나 드라마가 언급될 때 맞장구를 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작품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훑어본 것뿐이다. 그러한 스캐닝에서 놓치는 것은 디테일이다. 영상의 구도에 담긴 의미나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사의 미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호흡도 대사의 일부다.” 박찬욱 감독의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시간의 예술인데, 마음의 속도를 거기에 맞추지 않는다면 작품의 섬세한 결을 감지할 수 없다. 음악을 두 배 속도로 듣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흡사하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말과 말 사이에 잠깐 흐르는 침묵에도 중요한 메시지가 담길 수 있다. 언표되지 않은 뉘앙스를 포착하려면 마음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만일 상대방이 어떤 사람과의 갈등 상황을 더듬더듬 토로하는데, 성급하게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 사람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하고 다그친다면 대화는 중단되기 쉽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한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미묘하다. 우리의 감정은 스스로도 헷갈릴 정도로 모순 투성이다. 그 모습 그대로를 수용해주어야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에 절실한 것은 바로 깊은 ‘경청’이다.
프로파일러 권일용 씨는 소위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여러 명을 심층 인터뷰한 경험이 있다. 단지 상대방이 자기를 쳐다보았다고 또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에 화가 나서 공격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는 프로파일링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를 항상 질문한다고 한다. 그때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한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가 이렇게 오래 들어준 것도 처음이다.” 그 마지막 말이 그들의 고립된 심리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2 자신의 말을 누군가가 경청하는 관계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탱하는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 말 듣고 있니?” 이 말을 영어로는 “Are you with me?”라고 표현한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지만, 의미는 사뭇 깊다. 경청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주의(total attention)를 기울이면서 그 존재에 자신을 포개는 것이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서로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는 몸짓이다. 그런 자리에서 마음은 이어지고 자라난다.
공통의 감각과 언어를 회복하자
OECD가 2011년부터 발표해온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한국은 매년 ‘공동체’ 부문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잡기식의 압축 성장에 전력투구한 결과 외형적으로는 선진국에 들어섰지만, 그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파괴되어 버린 사회적 자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고립은 더욱 심화되고 관계가 완전히 절연된 사람들도 많아졌다. 인간적 유대와 신뢰를 복구 내지 생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친교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 더불어 행복한 삶의 자리가 열릴 수 있을까.
특효약은 없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외로움을 담당하는 부서를 정부 조직에 신설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서울시가 고독사를 줄이기 위해 벌여온 여러 가지 조치도 다른 지자체가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정책은 커다란 테두리와 토대를 세울 뿐이다. 가난이나 실직, 질병 등은 예산을 투입하여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지만, 고독의 문제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만큼 연결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통로를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권력이나 돈으로 매개되지 않는 관계를 확대해야 한다. 돌봄과 환대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공간을 곳곳에서 실험해야 한다. 마을이나 회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존재감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들 사이에 말문이 트이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조직에서 팀워크가 형성되면 업무의 성과도 높아진다. 그런 변화가 가능하려면 생존 경쟁의 압박이 줄어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불평등한 분배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가꾸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관계는 최소한의 시간적·물질적 잉여 위에서 원만하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상에서 공통 감각과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습관에 젖어 있으면 너와 나를 이어주는 코드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다. 스크린에 빨려드는 시선을 잠시 거두어 타인을 지긋이 응시하며 그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마다의 삶을 이야기로 빚어내고 그것을 공동체의 경험으로 승화하며 의미를 확장하는 어법을 익혀야 한다. 인플루언서나 셀럽에게 주눅들지 말고 우리 안의 창의성과 잠재력을 서로 일깨우고 북돋아주자. 그러한 문화 속에서는 스스로를 아끼면서도 상대방의 존엄을 세워줄 수 있다.
그것은 더 크고 드높은 나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운동이다. 겸허함과 너그러움으로 형제와 이웃을 보듬으면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체험할 수 있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삶이 생동할 수 있다.
주(註)
1 Livia Tomova 외, “Acute social isolation evokes midbrain craving responses similar to hunger,” Nature Neuroscience volume 23 (2020): 1597-1605.
2 권일용, “고립된 자의 마지막 말,” 「한겨레」, 2020년 8월 20일.
김찬호|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대면·비대면·외면』, 『유머니즘: 웃음과 공감의 마음사회학』, 『돈의 인문학』, 역서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이 있다. 대학(한양대, 성공회대)에서는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교육학을 주로 강의해 왔고, 대학 바깥에서는 부모의 성장, 교사의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를 대중 강연으로 다루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