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선]
공벌레 / 복효근
이 다족류는 슬픔의 유전자가 다리에 새겨져 있다
날거나 뛰어버리는 족속에게는 없는
영원한 비효율을 넘어서기 위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근면을 운명처럼 안고 간다
쥐며느리라는 가당치 않은 이름과는 상관없이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언제나 벌레로
완전히 벌레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벌레로 그 동네 그대로 산다
위기에 닥쳐서는 그 많은 다리가 소용없어
천적에게서 몸을 감추는 대신
천적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지는 대신
동그랗게 제 몸을 말아서 그 슬픔의 팔다리와 주둥이와 항문과 성기를
제 몸 안으로 우겨넣고 검은 콩알로 변신해버린다
새까만 한 알 콩,
뿌리도 싹도 틔우지 않은(못하는)콩알
육식에 길들여진 자들에게는 흥밋거리도 못되는 식물성
그러나 그 순간 진짜 콩도 아니고 더구나
조금 전 땅을 기어가던 그 놈도 아니어서
식물도 동물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어서
그 이름이 콩벌레가 아닌 공벌레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사假死에서 벗어나 접었던 제 몸에서 팔과 다리와 주둥이와 항문을
꽃의 암술과 수술처럼 피워내는 그 놈을 본 적이 있다
한 번의 죽음과 재생을 꽃으로 채현해내는 것이다
달마의 면벽 독공이 9년이나 걸린 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그 놈을 건들여만 보라
절명의 순간에 닥쳐서도 팔다리 대신 족보와 금고부터 챙기는 자들에게
그러면서 정체성 운운하는 자들에게
만유의 본질을 단박에 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공空!
- 복효근의 [공벌레](『유심』,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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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비움의 윤리 / 김태선
복효근 시인은 데뷔 초기부터 자연물에 대한 독특한 관찰을 통해 민중의 생명력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번에 함께 읽을「공벌레」에서 역시 시인은 공벌레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독특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공벌레는 쥐며느리과의 갑각류로, 백과사전에는 “사람에게 특별히 해를 주지 않으나 불쾌감을 주며, 화단에서 자주 보이지만 특별히 식물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지렁이처럼 흙 속에 공기가 잘 통하게 하고, 영양분이 잘 돌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벌레라는 이름이 붙은 생물답게, 그 겉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뿐,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것들에 해를 끼치지는 않으며, 오히려 흙의 영양분이 잘 돌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은 지저분하고 위험한 장소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이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시의 첫 행에는 “이 다족류는 슬픔의 유전자가 다리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공벌레는 다리가 많으나 날쌔게 움직이거나 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다리가 많다는 점은 오히려 “영원한 비효율”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공벌레가 제 장소에서 열심히 살아 움직여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근면을 운명처럼 안고 간다”. 공벌레는 쥐며느리와 생김이 흡사해서 때때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런 “가당치 않은 이름과는 상관 없이/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쥐며느리는 때때로 식물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DDT등의 농약으로 방역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공벌레는 앞서 언급했듯이 주변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화자에 의해 공벌레가 부단히 움직이는 모습은 “그 다리를 쉬고 있는 법이 없다”라며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공벌레는 ‘벌레’라는 이름답게 “언제나 벌레로/ 완전히 벌레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벌레로 그 동네 그대로 산다”. 벌레라는 이름의 반복으로 인해, 공벌레의 운명은 그 이름에 속박되어 존재 양태가 한 가지로 구속되어 있다.
“영원한 비효율”은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위기에 닥쳐서는 그 많은 다리가 소용”이 없다. 공벌레는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생물이 아니므로, 천적에게서 몸을 감추거나 달아나는 대신 “동그랗게 제 몸을 말아서 그 슬픔의 팔다리와 주둥이와 항문과 성기를/제 몸 안으로 우겨넣고 검은 콩알로 변신해버린다”. 콩알 같은 모습으로 인해 공벌레는 콩벌레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콩알은 “뿌리도 싹도 틔우지 않는(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육식에 길들여진 자들에게는 흥밋거리도 못되는 식물성”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위기 상황에 처한 콩벌레는 앞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존재 양태를 모두 버리고/혹은 숨기고 “식물도 동물도 산 것도 죽은 것도”아닌 상태로 자신을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화자가 그 벌레를 지칭하는 이름은 “콩벌레가 아닌 공벌레”이다.
콩처럼 새 생명을 싹틔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물처럼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던 존재의 속성을 모두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상태, 이런 상태에서 화자는 새로운 삶의 에토스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에토스는 공벌레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그 전략은 바로, ‘비움의 전략’이다. “가사에서 벗어나 접었던 제 몸에서 팔과 다리와 주둥이와 항문을/꽃의 암술과 수술처럼 피워내는 그 놈을 본 적이 있다”고 화자는 이야기한다. 공벌레가 제 몸을 둥글게 공처럼 만든 모습을 보며, 화자는 “한번의 죽음과 재생을 꽃으로 체현해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극적인 순간이 가능한 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달마의 면벽 독공이 9년이나 걸린 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며, 공벌레가 “한 번의 죽음과 재생을 꽃으로 체현”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화자는 “절명의 순간에 닥쳐서도 팔다리 대신 족보와 금고부터 챙기는 자들에게/ 그러면서 정체성 운운하는 자들에게” 공벌레가 “만유의 본질을 단박에 몸으로 보여줄 것이다”라며, 공벌레를 손끝으로 건드려보라고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 이르러「공벌레」는 단순히 공벌레에 대한 묘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이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족보와 금고”는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수 없다.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와 행동이다. 한 개인의 주체는 이름이나 사회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행한 사건을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행동이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주요한 지표이다. 공벌레 역시 자신의 생김새나 이름을 통해 누구인지를 증명하지 않고, 행동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공벌레가 제 몸으로 보여주는 “만유의 본질”은 “공空”이다. 이러한 언술로 인해 공球은 공空으로 환칭된다. 공벌레가 자신의 존재 양태를 버리고 공의 모양으로 거듭나는 모습에서 화자는 “만유의 본질”인 비어 있음을 발견한다.
복효근 시인은 그동안 작은 사물들, 특히 식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을 보여 왔다. 얼핏 사소하게 보이는 대상들에 주목하면서,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가 미처 관심을 갖지 않았던 대상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자 노력한다.「공벌레」의 후반부에 이르러 다소 직접적인 언술이 나타남으로 인해, 시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는 그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만유의 본질”을 보려함과 동시에 우리 삶의 에토스와 시의 윤리가 어느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를 살핀다. 시란 무릇 그것이 시란 이름이 붙었기에 시가 아니다. “족보와 금고”는 정체성을 확보해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정체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우리의 몸과 행동뿐이다. 마찬가지로 시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것은, 그 시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은 시인이 바라본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 [현대시](2011. 12월호)
• 김태선 : 문학평론가. 2011년『세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