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일
설악산 용대 자연휴양림 옆에 있는 이조은 캠핑장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였다. 울산에서 출발한 시각이 12시 50분쯤이었으니 꼬박 6시간이 걸린 셈이다. 제법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캠핑장은 금세 어둠이 내렸다. 비지땀을 흘리며 서둘러 사이트를 구축하고 밥을 지어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개수대에서 설거지와 간단한 세수를 했다. 집사람과 딸아이는 잠자리가 마련된 부속텐트로 들어가고 나는 거실이 마련된 메인 텐트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한참을 앉아 있으니 축축하고 서늘한 냉기가 몰려온다. 이렇게 한기가 느껴질 때는 술로 몸을 데우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안주가 없다. 이럴 때 집사람을 깨우는 것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직접 계란 프라이를 해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마주앉아 대작(對酌)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혼자 병째 홀짝거리는 술이 훨씬 더 달고 맛있게 느껴진다. 위장으로 흡수되는 알콜의 그 짜르르한 느낌을 즐기며 책속에 빠져들었다. 졸음을 못 이겨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든 시각이 새벽 1시 40분. 150페이지 정도의 진도가 나갔다.
2009년 8월 4일
다음날 아침 수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오전 8시 30분. 평소 같으면 이 정도의 수면시간으로는 피로가 덜 풀려 온 몸이 천근만근일 터이지만, 전기장판의 온기에다 숲속의 맑은 공기까지 더해졌기 때문인지 가볍게 몸이 일으켜진다. 카레로 아침을 해결하고 장비를 챙겨 11시 30분쯤 캠핑장을 나섰다.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양구로 향했다. 그러나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당초 예상보다 2시간 정도는 늦게 첫 번째 목적지인 양구군 해안면의 일명 ‘펀치볼’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에 영어식 지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거니와 필시 그 지형이 독특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과연 이름은 헛것을 전하지 않았다. 강원도 골짜기에도 이런 땅이 있을까 싶을 만큼 펀치볼은 넓고 오목한 분지였다. 게다가 펀치볼에는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라는 훌륭한 안보관광지도 있었다.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를 가려면 먼저 통일관과 양구전쟁기념관을 들리도록 되어있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관람에 앞서 겁부터 주고 보는 통일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구전쟁기념관은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피아(彼我)의 중요한 교두보로서 서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4땅굴은 그 이름에서 보듯 가장 최근 발견된 곳이라 하는데 남쪽이 탐지용으로 파들어 간 땅굴은 드릴 같은 기계로 뚫은 듯 깔끔하고 폭이 넓은 데 비해 북쪽이 10년에 걸쳐 파내려온 땅굴은 폭이 좁고 표면이 거칠었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관람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을지전망대는 제4땅굴에서 지그재그로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올라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지의 휴전선 남방한계선 위의 한 점이었다. 넓은 사발모양의 펀치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휴전선 너머 북한 초소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남방한계선의 철책과 계단은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평화를 포장하더라도 분단은 숨길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임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문득 동부전선에서 철책초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입은 부실한 방한복을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와 야간근무 때 허기를 메우기 위해 먹은 라면으로 쓰렸을 위장과 미끄럽고 가파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느라 닳아졌을 무릎연골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가 공짜가 아님을 너무 쉽게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을지전망대를 내려오니 벌써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평화의 댐과 파로호를 거쳐 저녁에는 고성 바닷가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일정이다. 수정이 불가피했다. 하기야 먹고 자는데 쓰일 모든 물품이 차 뒤의 트렁크에 실려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으랴. 가다가 괜찮은 곳이 나오면 사이트 구축해서 밥해먹고 잠자면 되는 것을.
집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잘 곳과 머물 곳을 미리 예약하고 움직이자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일정과 시간을 거기에 맞추어 움직여야하는 불편이 따른다. 낯선 곳의 사정은 잘 모르는 것이 보통이고 또 모든 일정과 시간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 아닌가. 결국 “제대로 된 여행(旅行)은 사정(事情)에 따른 임시방편(臨時方便)과 형편(形便)에 즉응(卽應)하는 변통(變通)에 달려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태의 여행이야말로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순간순간 즉각적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이 요구되고 과도한 지력이 소모되기 때문이 더 힘이 드는 데도 불구하고 집사람과 딸아이는 조금만 자신들의 구미(口味)에 맞지 않아도 투덜거리기 일쑤다.
길이 인제를 벗어나고 부터는 곳곳이 군부대다. 강줄기를 따라 듬성듬성 흩어진 민간부락의 숫자보다 군부대의 숫자가 오히려 더 많은 듯싶다. 또 길목의 요소요소마다 통행차단용 옹벽이 설치되어 있고 산과 산 사이를 휘감고 돌아나가는 넓고 깨끗한 강변은 텅 비어있다. 울산 같았으면 피서객들로 넘쳐날 것이 분명하다. 모두가 이곳이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임을 나타내는 징표들이리라.
아침을 먹고 난 이후로 펀치볼로 오다가 막히는 도로 위에서 간식으로 산 곰취 찐빵과 감자 송편 이외에는 먹은 것이 없어 오후 4시 반이 넘어서자 배가 몹시 고팠다. 결국 평화의 댐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만난 ‘송현(松峴)’이라는 마을에서 중국집으로 들어가 자장면과 짬뽕으로 허기를 달랬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보니 마을 한 가운데로 제법 넓은 강이 흐르고 강가의 넓은 공터에는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더욱 좋은 것은 야영장에 야영객들이 얼마 없어 널널하고 한산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했다. 잘 정돈된 제방 위에 사이트를 구축하고 어둠이 내리는 강물에 뛰어들어 땀을 씻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림과 동시에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올랐다. 집사람과 딸아이는 텐트 안의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뒹굴고 나는 깨끗이 씻은 몸으로 텐트 밖 잔디밭에 맨발로 앉아 책을 펴드니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아늑하고 쾌적한 기분이 온 몸을 감싼다. 비로소 지금 내가 일을 떠나 쉬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통닭을 배달시켜 또 한 병의 소주를 비웠다. 배가 불러 잠이 오지 않아 새벽 1시 10분쯤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책은 100페이지 정도 진도가 나갔다.
2009년 8월 5일
텐트 속으로 스며드는 강렬한 햇빛과 열기로 잠이 깨니 아침 7시 50분이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장비를 챙겨 캠핑장을 나선 시각이 오전 10시 40분. 출발한지 10분도 못되어 방산자기박물관이 나왔다. 예부터 여기 양구에서는 양질의 고령토가 출토되어 도자기 가마가 발달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의 백성들은 부역(賦役)으로 고령토를 채취해 경기도 광주에 있던 관요(官窯)의 수요에 대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즘은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자신들의 특산품을 과거 임금님에게 올린 진상품이라며 자랑스레 홍보하고 있지만, 당시의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특산품이야말로 관으로부터의 대표적인 수탈품목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역사의 빛과 그림자. 경제적 토대와 그 상부구조 사이의 엄청난 괴리와 모순은 양의 동서와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류가 짊어진 숙명일까. 이 모순과 괴리는 내가 아직 이해와 해석의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대표적인 숙제의 하나로 남아있다.
방산자기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정오 무렵에 평화의 댐에 도착하였다. 평화의 댐은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를 호도하기 위한 위기국면 조성을 위해 북한이 금강산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대한 대응댐 건설이 필요하다고 선전하면서 전 국민적인 성금모금운동을 벌여 1987년 2월에 착공하여 1988년 5월에 1단계 공사가 완료되고, 그 후 실제 북한의 금강산댐이 붕괴될 위험이 나타나자 2002년 9월부터 2006년 6월까지 2단계 공사가 진행된 댐이다.
1단계 공사가 착공될 당시의 그 시끌벅적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당시 정권의 앵무새 노릇을 했던 방송들이 이제 와서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행태를 보면 누구라도 돈만 찔러주면 가랑이를 벌리는 창녀(娼女)같은 지조 없음과 매스꺼움이 느껴진다. 댐 안쪽 비목공원에 외롭게 서있는 녹슨 철모를 눌러쓴 비목(碑木)에는 역사와 권력의 횡포 앞에 힘없이 스러져간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의 울분과 비애가 새겨져 있었다.
파로호(破虜湖)는 화천댐의 다른 이름으로, 원래는 일제시대인 1944년경에 수력발전용으로 건설된 북한강 수계 최초의 댐이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중국군과 북한군을 격파하여 수장시킨 전승지가 되어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파로호는 잔잔한 푸른 물결이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허리의 부드러운 선과 대비되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으나 그 수면 아래로 떠돌고 있을 수천 원혼들의 아우성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한 느낌이었다. 전망대에서 안보전시관으로 내려오는 오솔길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줏빛 칡꽃들이 한낮의 열기와 함께 몽롱하고 아련한 내 유년의 향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파로호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2시였으므로 시간이 넉넉하여 고성으로 넘어가기 전에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 들렀다가기로 했다. 박수근미술관은 그 안에 전시된 그림보다 미술관 건물 그 자체가 더 훌륭한 예술품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전통적 건축의 하나인 성곽 이미지를 살린 듯 건물 전체가 돌로 축조되었고 곡선과 직선이 빗어내는 조화가 일품이었다. 거기다 건물이 앉은 터 역시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분지 속으로 흘러내린 한 자락 산줄기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 대단한 혈처(穴處)가 아닌가 싶었다.
몇 년 전에 들렀을 때에는 본관 건물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 제2전시관 건물이 신축되었고 거기에는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현대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수근미술관을 나와 인제를 거쳐 진부령 길과 미시령 길이 갈라지는 용대 삼거리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었다. 고가도로 다리 밑에서 라면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평소 같았으면 궁상맞았을 식사가 피서철 유원지라는 배경에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진부령 길을 버리고 미시령 길을 택했다. 예전 같았으면 길고 험한 고갯길이었을 미시령이 터널이 새로 생겨 금세 속초에 도착하였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송지호로 올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예약제로 운영되는 송지호 오토캠핑장은 만원이었고 입구에서부터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봉수대 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시설이 조금 허름하긴 하지만 야영객들이 많지 않아 널널한 느낌이었다.
어둠속에서 서둘러 사이트를 구축하고 가족들과 함께 백사장을 산책했다. 둥근달이 뜬 바다가 일품이었다. 저녁 10시쯤 가진항에 들러 오징어 회를 떠와 또 한 병의 소주를 비웠다. 여행이 길어지고 피로가 누적되면서 책을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50페이지쯤 진도를 나가고 새벽 1시 조금 넘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2009년 8월 6일
야영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니 아침 8시 30분.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11시 10분쯤 길을 나섰다. 간성과 거진을 지나 통일전망대 매표소인 안보교육관에 도착하니 11시 50분이었다. 표를 끊으니 안보교육을 받으라고 해서 교육관에 들어가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교육을 받지 말고 바로 전망대로 출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갑자기 성질이 났다. 적지 않은 돈까지 내고 전망대 관람하는데 안보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거니와, 교육을 시킬 요량이면 제대로 시켜야지 수십 명의 사람들을 10분 이상 기다리게 해놓고 자기네들 점심시간이라고 교육도 시키지 않고 들어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말이다. 이 모두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어두운 관행이고 개념 없는 공무원들이 연출하는 후진적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랴.
통일전망대는 예전에 두 번 정도 와본 곳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날씨가 좋아 해금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보였지만, 금강산 관광이 대중화되고 철책선을 통과하여 도로와 철도까지 개통되어 있는 마당에 신기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었다.
캠핑장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화진포에 들렀다. 화진포는 국내 최대의 석호라고 하는데 경관이 뛰어나 주위에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있다고 했다. 가지고 있던 현금이 바닥을 드러내고 은행을 찾기도 쉽지 않아 해양박물관만 관람했다. 열대어 수족관은 그런대로 볼만했다.
간성 읍내로 들어가 은행에서 돈을 찾고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보충했다. 내려오는 도중에 길가의 한 식당에 들어가 막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처음 먹어본 강원도 음식인데 냉면과 비슷하면서도 냉면보다는 맛이 못했다.
캠핑장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바다물에 뛰어들었다. 물이 차가워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해수욕객보다 안전요원들이 더 많을 정도로 백사장이 한산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딸아이는 잘만 놀았다. 봉수대 해수욕장이 시설은 낡았어도 다른 곳에 비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온수가 나오는 싸워장이다. 그 싸워장에서 온수로 언 몸을 녹이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개운했다. 저녁에는 숯불을 피우고 목살을 구워 소주 두병을 비웠다. 피로가 누적된 데다 저녁 11시가 넘어서자 빗 방물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다른 날보다 이른 1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책은 30페이지 정도의 진도밖에 나가지 못했다.
2009년 8월 7일
다음날 아침 8시 30분에 눈을 떠니 여전히 빗방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렸는지 텐트 안의 구석진 곳에는 빗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젖은 장비를 챙기는 일이 난감했다. 우선 텐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챙기고 텐트 안에서 아침을 지어 먹었다. 다행히 아침을 먹고 나자 비는 그쳤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었다. 바람에 말린 텐트와 장비를 트렁크에 챙겨 넣고 오후 12시 30분쯤 캠핑장을 나섰다.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주문진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6번 국도로 갈아탔다. 6번 국도를 타고 얼마쯤 달라다보니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해 가을 연하고질을 따라 산행을 한 노인봉과 소금강계곡이 떠올랐다. “아 이 길이 그 길이었구나.” 내친 김에 소금강 오토캠핑장에 들러 집사람과 딸아이에게 잘 조성된 오토캠핑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깨끗한 화장실과 개수대는 기본이고 싸워장까지 딸린 오토캠핑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집사람은 올 가을쯤에 다시 한번 와보자고 했다.
소금강 캠핑장을 돌아 나와 얼마쯤 달리다 송천약수터에 들렀다. 약수라는 것을 처음 마셔본 딸아이가 쇳물을 마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방태산에서 맛본 약숫물보다는 역겨움이 덜한 것 같았다.
진고개로 올라가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짙은 안개에 싸여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진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길가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그 꽃들이 피워내는 광채는 천상의 화원이 저런 곳이 아닐까 싶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길가의 팻말을 보고서야 이곳이 한돌님이 말씀하신 안개자니 계곡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만큼 깊은 오지(奧地)는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한돌님이 그 동안 우리에게 소개해준 강원도 골짜기는 모두가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뛰어난 원시의 비경을 간직한 곳임을 알겠다. 강원도 구석구석을 훑고 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안목이리라.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솔밭에서 라면을 끓이고 어제 저녁 미처 다 먹지 못한 돼지목살을 구워 늦은 점심을 먹고 월정사로 들어갔다. 월정사에는 고려시대 유물로 알려진 팔각 구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당우(堂宇)들은 전부가 최근에 복원되거나 신축된 것이어서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1킬로미터 남짓한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 관람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리라.
숲길의 위치를 미리 알지 못해 차를 타고 바로 천왕문 입구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나올 때는 집사람과 딸아이만 숲길을 걷고 나는 차를 몰고 나와야 했다. 차를 타고 미리 나와서 일주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집사람과 딸아이는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숲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평소 산에 가자고 하면 기겁을 하면서도 이럴 때는 온갖 멋은 다 부린다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월정사를 벗어나니 벌써 저녁 6시가 넘어 있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어두운 밤길을 내달렸다. 도중에 세찬 빗줄기를 만나기도 하고 두어 번 정도는 아찔한 사고의 순간을 모면하기도 하면서 울산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홀로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일 년을 기다려온 또 하나의 휴가기간이 끝나가는구나. 언제쯤이면 이 고단한 형태의 휴가를 면할 수 있을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 속으로 나를 던져버릴 수 있는 그런 휴가는 언제쯤에나 가능한 것일까.
내 나이 벌써 사십대 중반. 중년(中年)은 정녕 중년(重年)일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나저나 가족 속에서도 짙은 고독을 느끼는 가장(家長)의 이 허허로운 가슴을 집사람과 딸아이는 짐작이나 할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다던가.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불편함을 일상사로 생각하면 그리 부족한 게 없는 법”이라고.
2009년 8월 12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첫댓글 월지님 휴가는 따님을 위한 역사 스페셜이었군요. 가장의 책무에 충실한 월지 님이 우러러보입니다. 우리집에서는 나 혼자 계획하고 준비하는 편이거든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제가 끌고 다니는 꼴이지요 항상 ㅎㅎ. 술과 독서의 오묘한 조화가 멋스럽게 느껴집니다. 박수근미술관은 저도 꼭 한번 가고싶은 곳이고, 안개자니계곡의 비경은 오래오래 못잊을 것 같아요. 월지님 멋지다!!!
연하고질에서 올해 여름 휴가엔 강원도를 많이 다녀왔군요. 그 중에서 이화님이랑 월지 아우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빡세게(?) 이곳 저곳 종횡무진 강원도 땅을 누볐군요.그래도 각개전투(솔로)가 아닌 가족과 함께 한 오붓한 여행, 모두가 착한 남편, 착한 아내, 착한 아빠입니다. 하루 정도 날짜만 사전에 조율되었으면 오대산 동피골에서 극적인 상봉이 있었을텐데...그러면 또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서 얼싸안고 술 한 잔 할 수도 있었을텐데..오 통제라!
손에 잡힐듯한 친정(백암산근무)지역 일대를 다녀오셨군요.파로호와 그리고 지나는 길에 구만리발전소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 참 보기좋습니다. 여행기 마지막이 왠지 찡하네요.. 가장으로서 느끼는 심정을 그러나 남자로서 짊어지고가야 할 고단함이 뭍어납니다. 그러나 인생사 한편의 영화필름 아닌가요. ㅎㅎ 긴 여행기 짧은 글로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잘보았습니다.
휴~~! 너무 긴 여행기라서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댓글을 달아야할지 모르것네.... 평화의 댐을 보니 당시 어린아이 코 흘리게 돈까지 싹싹 끌어서 대국민 사기극을 펼친 이나라의 위정자들의 작태와 거기에 충실히 나팔수 역활한 언론 매체들이 요즘에 와서 자기들이 민주화의 투사인양 포장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구역질이 난다네...오늘은 요기까지만 감상하고 천천히 다시 읽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