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쉰셋…그에게 삶은 꿈이었을까 | |
입적한 ‘한국 불교의 희망’ 남양주 봉인사 전 선원장 지산 스님 | |
조현 기자 | |
세계불교 3대 흐름 회통시키려 경기도 남양주 봉인사 전 선원장 지산(사진) 스님이 입적한 사실이 알려져 불교계가 안타까워하고 있다. 세수 53살이다. 봉인사 주지 적경 스님은 “지산 스님이 100일간 무문관 수행을 하고 나온 직후 평소 지인인 전주의 한 거사집에 머물던 지난 18일 새벽 심장바비로 열반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말을 잊지못했다. 이에 따라 지난 24일 봉인사에서 지낸 49구재 중 초재(7일마다 7번 지내는 제사 중 첫번째)엔 뒤늦게 지산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송광사 문도들과 도반들이 달려와 충격적인 아픔을 함께 했다. 도반들은 “여전히 십대같은 순수함과 청정한 마음으로 오직 수행만 해 이제 일을 시작할 시점에 이렇게 떠나가 한국 불교의 한 희망이 무너졌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구도회회장을 지낸 지산 스님은 1988년 순천 송광사 법흥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 년간 국내선방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다 간화선과 남방의 위파사나, 티베트불교 등 세계 불교 3대 흐름을 모두 수행해 하나로 회통시키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안고 한국을 떠나 새로운 수행에 나섰다. 고인은 미얀마 파욱선원 등에서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을 4년간 했고, 인도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는 닝마파의 타시종 사찰에서 수행한데 이어 카규파의 수장 카르마파를 찾아 티베트불교 수행을 했다. 지난해 귀국 뒤 서울 상도선원(주지·미산 스님) 등에서 수행을 지도해오다 무문관인 계룡산 대자암 분원에 들었다. 고인은 사방이 막힌 방안에서 식사와 용변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무무관에서 100일간의 정진을 끝냈다. 미얀마를 다녀온 뒤 봉인사 선원장을 맡은 스님은 자애관과 위파사나를 지도하면서 지난 2005년 <붓다의 길 위파사나의 길>을 출간했다. 이에 앞서 그가 출가 직전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속명인 ‘이호준’ 이름으로 번역해 펴낸 <나는 누구인가>는 영성과 수행서의 고전으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지난해 인도에서 귀국해 경기도 안성 도피안사에 머물며 정리해 최근 발간된 <어머니, 스님들의 어머니>(도피안사 펴냄)는 그의 유작이 됐다. 이 책은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고산 스님을 비롯한 19명의 필자의 공저인데 고인은 티베트 불교의 고승 미라레파의 어머니와 달라이라마의 어머니 부분을 썼다. 고인은 지난 25일로 예정됐던 봉정식에 대표필자로서 불전에 이 책을 올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산 스님의 갑작스런 열반으로 송광사 문도이자 오랜 도반인 봉인사 주지 적경 스님이 고인의 영정을 들고 대신 봉정했다. 이 책에 쓰인 그의 글은 ‘미라레파의 어머니’와는 관계가 없어보이는 ‘삶은 꿈이다’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된다. 이어 고인은 ‘중생들의 삶이란 탐·진·치가 빚어내는 꿈이요 환’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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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가 김병채(60·창원대 유아교육과) 교수에게 도움을 얻기로 했다. 25일 오후 경남 창원시 북면 신촌리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마음 속 근원을 찾으면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고된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금욕적인 생활을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마음 속에 '순수의식'을 찾으면 된다. 방법도 어렵지 않다.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자각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말은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해 잠시 걸어오르자 하얀빛의 3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지난 5월 개관한 '슈리 라마나프라사담'이라는 이름의 복합건물이다. 마당에는 둥글고 널찍한 돌탁자가 놓여있고, 건물 옆에는 사람 하나 간신히 누울 정도의 아담한 황토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삿상, 진리와의 교제
어둠이 짙게 깔리자 인도식 식사를 마친 20여명이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공개 '삿상'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삿상은 현인과 대화를 통해 고민을 해결하고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도와주는 방편을 일컫는 인도어이다. 일상의 소박한 질문부터 진리와 깨달음에 관한 물음까지 어떠한 주제라도 상관 없다. 김 교수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여기 꽃을 보세요.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 내면 속의 순수의식이 표현된 것이 자의식입니다. 마음과 성스러움은 모두 순수의식에서 나옵니다. 순수의식을 통해 몸도 이타적 행위와 유익한 행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0대 여성이 김 교수 앞으로 나섰다. "저는 앞으로 어떤 미술작품을 만들면 좋을까요?" "순수의식이 만든 작품과 '에고'(ego·자아)가 만든 작품이 다릅니다. 순수의식은 생각의 재료이고 에고는 순수의식의 파동입니다. 어떤 것도 괜찮습니다. 순수의식에서 나오는 작품은 높고 낮음이 없고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순수의식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다른 40대 여성이 나섰다. "참나를 찾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 경험을 다시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머릿 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고 괴롭기만 합니다" "왜 잡아야 하죠? 파도가 바다를 잡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는 번번히 실패합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자 여성은 한참을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삿상은 1시간 30분쯤 이어졌다. 삿상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를 만났는 지가 중요해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만남을 가지면 그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죠. 대화에는 정해진 법이 없어요. 그냥 묻고 답하고. 그 과정이 다른 어떤 수행보다도 낫습니다."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은 1998년 국내 최초의 아쉬람(수행공동체)으로 문을 열었다. 벌써 10년째니 다녀간 이들도 수만명을 헤아린다. 처음부터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다. 그저 상담을 해주고, 텃밭이나 가꿀 요량의 작은 전원주택이었다. 하지만 찾는 이들이 늘어났고, 명상을 위한 황토방을 짓고 상담장소도 만들다보니 지금은 꽤 규모가 커졌다. "건축비나 운영비가 만만찮을 것 같은데요?" "보통일이 아니죠. 건축비는 전부 융자 받은 거예요. 제가 원하거나 계획을 한 게 아니고요. 어쩌다보니 커진 거예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쉬람은 종교입니까?" "아닙니다. 수행하는 곳도 아니고 누구나 와서 평화롭게 쉬었다 가는 곳입니다. 어떤 종교의 누가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게 전혀 없으니까요. 신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인도에서 길(道)을 묻다
인간의 행복과 자유는 그의 오랜 화두였다.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내면의 행복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석사 과정 중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5년 간 일을 하면서도 내면의 허전함은 달랠 길이 없었다. "고민 끝에 사람의 목적은 행복이니, 행복을 찾아보자고 결심했어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뒀다. 어디로 가야할 지, 어디서 진리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재능의 부족을 느꼈고,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지혜는 찾을 수 있었지만 정신의 행복을 찾지는 못 했죠." 전국을 떠돌았다. 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암자를 떠돌았다. 하지만 승려가 아닌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하기에는 벽이 높았다. 그의 방랑을 전해들은 은사가 그를 대학으로 불러들였다.
박사 과정을 하며 요가와 명상에 큰 흥미를 느낀 그는 1988년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개월 간의 여행. 인도는 너무나 새로운 세계였다. 옷을 입든 벗든, 신발을 신든 벗든, 인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버스 시간도 제멋대로였고, 시간에 대한 강박도 없었다.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캄 다운(calm down·진정하라)였어요. 마치 인도는 영원의 시간을 가진 것 같았죠. 신과 훨씬 가까웠어요." 그는 '살아있는 성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인도 전역을 돌며 오쇼 라즈니쉬와 테레사 수녀, 달라이 라마 등을 만났다. 너무나 평화롭고 깊은 내면의 성자들이 건네준 메시지는 한결 같았다. '너는 굉장한 존재이며 행복은 네 속에 있다. 당신 자체가 행복이다'. 그는 사원을 찾아다니며 '당신 스승은 누구냐'를 만트라(주문·진언)처럼 되뇌였다. "귀국할 때가 되어 생각해보니 그 많은 사람 중에 스승이라 부를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혹시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수첩을 샅샅이 뒤졌죠."
수첩 한귀퉁이에서 발견한 편지 한장. 슈리 푼자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그는 슈리 푼자를 찾아갔다. "저는 피곤합니다.' 그가 스승 슈리 푼자 앞에서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러면 목욕을 하고 쉬어라." "몸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합니다." "마음이 피곤하다니, 너는 마음이 아니다. 너는 몸도 마음도, 감정도, 지성도 아니다. 너는 그 너머에 있는 순수의식이다." 인도 경전의 핵심. 스승의 말을 들은 그의 머릿속에 순간 천둥이 쳤다. 피곤함은 싹 사라지고 미소가 떠올랐다. 스승이 말했다. "그 미소가 바로 깨달음의 얼굴이다."
◆참나를 찾아서
-선생님은 깨달으셨나요?
"감사하게도 스승님(슈리 푼자)은 저를 두고 깨달았다고 그래요. 저는 그걸 존중하고요. 다만 저는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조금 더 알고 있구나.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얘기해줄 것이 있구나'하는 정도로 알고 있어요. 사실 깨달았다는 것도 생각입니다.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돼요. 오쇼 라즈니쉬는 제게 '당신이 부처'라고 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깨달음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오히려 깨닫지 못 하게 만들어요. 누가 깨달았다고 하면 존중을 해야죠."
-'참나' 혹은 '순수의식'이라는 게 뭡니까?
"생각과 감정, 마음을 넘어서는, 내면에 있는 순수한 그 의식 자체입니다. 어떤 이는 '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신'이라고 합니다. 그 자체는 이름이 없지만 무수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도는 바다의 출렁거림입니다. 파도의 본질은 바다죠. 생각과 마음은 순수의식의 파동입니다. 순수의식이 변해서 마음이 됩니다. 순수의식이 없으면 파동도 없습니다."
-대화를 통해 순수의식을 자각한다는 것이 쉬우면서도 애매하게 들리는데요. 수행이 필요한 건 아닌가요?
"수행은 오히려 사람을 고통에 빠뜨립니다. 행복이 수행을 통해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꽃도 수행을 해서 피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존재의 꽃이 수행으로 나온다면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하늘의 구름은 마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구름을 보고 '나'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구름은 없어질 수 있지만 하늘은 없을 수가 없어요. 바로 그 하늘이 순수의식입니다. 구름을 보지 마세요. 구름은 마음입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행복의 하늘을 보세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행복을 끄집어내면 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릴 필요가 없는 건가요?
"자연스럽게 노력해서 오는 것은 좋은 겁니다. 왜 그걸 버려야 됩니까. 끊겠다는 것도 마음입니다. 물욕을 갖거나 버리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않아야 합니다. 그 너머로 갈 때 행복이 오는 겁니다.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혼자 사는 사람은 다 깨달음을 얻어야죠.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길이죠. 자신을 학대할 필요없이 자연스레 사는 거예요."
-사람들은 왜 고통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갈까요?
"괴로움을 수용하는 방법을 몰라요. 고통을 고통이라 정의내리지 않으면 고통이 아닙니다. 그저 현상일 뿐인데 고통이라 말하니 고통스러워져요. 세상은 어려움과 어렵지 않음이 함께 돌아가고 있어요. 달이 차고 기울고, 잎이 나고 떨어지듯이 세상에서 좋지 않은 것을 피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고통을 수용하려 하지 않아요. 행복을 수용하듯이 고통도 수용해야됩니다. 좋은 것도 좋고, 나쁜 것도 좋은 겁니다. 행복과 불행을 초연하게 바라볼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자기 본성을 찾아야죠. 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계획은?
"아쉬람이라는 형태가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와서 쉬고 대화하고 웃고 우는 게 정말 매력적이에요. 아쉬람을 통해 종교 간에 교류하는 공동의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인도에는 국내에 소개가 안 된 보물같은 경전이 참 많아요. 그런 경전을 계속 번역하고 싶어요."
어떠한 질문에도 주저하지 않던 그가 망설인 유일한 질문은 '행복이란 무엇인가'였다. 한참을 주저한 그는 세상에서 잠시 떠난 "평화로움과 고요함, 초연함"이라고 표현했다. "행복과 불행을 모두 바라보며 수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이라 할까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www.krishnadass.com 055)299-6379.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김병채는?=1948년생. 창원대 유아교육과 교수. 1988년 12월 인도로 건너가 요겐 드라지, 오쇼 라즈니쉬, 테레사 수녀, 달라이 라마, 나나가루 등을 만났다. 인도 여행 중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인 슈리 푼자와 삿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으로부터 슈리 크리슈나다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998년 경남 창원시 북면에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을 열고 삿상을 통해 '참 나'를 찾는 길로 인도하고 있다.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슈리'는 인도어로 성(聖)의 의미. '크리슈나'는 우주의 창조·파괴·유지를 관장하는 '비슈누'신의 8번째 화신이다. '다스'는 종, 또는 헌신하는이라는 뜻이다. 아쉬람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공동체를 의미한다.
★삿상(satsang)=진리를 주제로 한 대화. 제자가 질문하고 스승이 대답하는 형식을 띤다.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1879~1950)='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명상의 방편으로 제시한 인도의 성자.
★슈리 푼자(1919~1997)=남인도에서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이.
★오쇼 라즈니쉬(1931~1990)=인도의 명상가이자 철학자. 전 세계에 명상 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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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559&yy=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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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마하리쉬 일생 : http://www.krishnadass.com/body/sub2/sub2.htm
첫댓글 마하리쉬에게는 자칭 깨달은 자만이 알수 있는 그것만이 실재이고
나머지는 다 환이다
깨달음은 업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어
과거에 많은 선업을 지어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자칭 깨달음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흐름에 의한 것이어서
뭔가 미묘한 파동에너지가 전해져야 한다
즉 선업에 의해 미묘한 에너지를 받는 자만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촛점없는 눈으로 열심히 응시해 준다
마하리쉬에게 몸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라 마음없는 몸이 따로 존재한다
그는 이 몸(명색)과 경계(육입)을 환이라고 하고
몸과 경계에 토대하지 않은 순수의식을 참나라고 한다
몽땅 어리석음이지만, 그 중에서도
실재하지 않는 것을 거머잡았으니
욕계(감각적 욕망), 색계(존재), 무색계(비존재)의 존재에 대한 갈애 중
무색계에 대한 갈애를 있는 그대로 살피지 못해서
일어난 어리석은 견해에 대한 취착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하리쉬가 하는 말은 몽땅 잠꼬대이다
[라마나 마하리쉬]
물론이다. 육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인지는 육체가 존재하게 된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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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적인 시각으로써 자신의 이야기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정신과 육신을 구분할 수 없음에도 육신에 대한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시초부터 수행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면 수행도 할 수 없다고 해야 하며, 또한 자유도 없다고 해야 합니다.
1. "정신과 육신을 구분할 수 없음에도"를 "정신과 육신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음에도"로 고치셔야 합니다
정신과 육신을 구분할 수 없으면 사념처가 성립하지 않지요
2. 그의 법의 보편타당성이 문제입니다. 그의 법을 신뢰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그의 법을 통해 현실에서 실재로 나의 "고"가 소멸되는지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합니다
물론 바르고 보편타당한 법을 배워도 자기식으로 합리화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잘못이 아닙니다
3. 지혜로운 자에게 법은 갈애와 취착에 묶이지 않는 자유를 주지만
어리석은 자에게 법은 오히려 원하는 갈애와 취착을 장애하는 족쇄가 됩니다
참고자료 : cafe.daum.net/realbuddhism/4Rmc/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