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이라 칭하는 그 마음은 고락 의지해 반복되는 버릇 불과
깨달은 이의 눈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없고 일체상이 또한 없어
세상은 인연 연기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만 분별이 인과 만들어
감정이 생사부침할 뿐이니 무엇을 보고 듣든지 마음 여여해야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할 것이니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왜 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보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머무름이 없는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상에 머무름이 없다는 말까지도 없으리니 어찌 보시한다는 것을 알 것이며, 무량공덕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중생들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빠져서 한없는 고통을 느낄 때, 중생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인지라 둘이 아닌 보살의 마음으로서는 연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고통을 구하려 하는 구고(救苦)의 원을 발하시게 된 것이다.
생각하고 느끼는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버릇된 업에 불과하다. [법보신문]
그런 까닭에 고통을 느끼는 중생이 낙(樂)을 원하면 즐거운 마음을 이루어 주듯 하는 것이니, 중생이 낙을 원하면 낙을 보시하고, 배고픈 중생이 배부르기를 원하면 먹을 것을 보시하고, 병 있는 중생이 건강하기를 원하면 그에게 편안함을 보시하여, 일체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보시를 하시되, 보시한다는 상에 머무르는 바 없이 항상 그 마음이 허공과 같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보살이 이 같은 보시를 친히 행하시되, 도를 배우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법보시(法布施)를 행하시어 상에 머무르는 바 없이 항상 그 마음을 허공같이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어 일체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여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한다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일체중생에게 보시한다는 상(相)이 또 생기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어떻게 말씀하실까?
고통의 원인은 과거의 즐거움이다. 지금의 고통만큼 전생과 더불어 지난 과거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오는 고통은 없다. 과보로서 나타나는 인과의 현상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현상에만 집착한다. 고통에 대해 화를 내고 원망한다. 이런 마음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은 원인 없는 결과는 절대 없으니 말이다. 만약 인과에 의한 고통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부정하거나,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이가 있다면, 이 또한 인과현상이요, 스스로의 몫인 것이니, 그 자체로서 스스로 제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모든 모습은 있는 실상 그대로이다. 실상이란 실제로 일어나는 지금의 모습 그 자체로서, 모든 원인을 품은 결과의 모습을 말한다. 결과에 대해 이의를 단다고 하여 결과가 달라질 수는 없다. 그저 연기(緣起)하며 성주괴공(成住壞空)할 뿐이다. 있는 현상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각의 상을 덮어 씌워 버리면 나의 상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상을 만들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떤 상을 보고 듣더라도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내 마음 안에 상을 이미 만들었다는 반증이다. 환자가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다. 하지만 마음은 아프되 괴롭지는 않아야 한다. 환자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기는 하지만, 당연한 인과(因果)의 모습이므로 마음조차 괴로울 것은 없다. 이를 응무소주(應無所住)이생기심(而生起心), 즉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라 했다. 남의 업을 내가 대신 할 수 없다. 철저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대신 늙어 주거나 대신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약과 의사와 가족의 도움으로 환자의 병을 고칠 수는 있으나, 이는 환자의 업이 다시 살아나는 때가 되었을 뿐이고, 의사나 가족 개개인은 각기 도와주는 스스로의 업이 그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든 모든 현상은, 그렇게 연기로서 인과의 과보 현상이 나타날 뿐, 만약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잘못 보는 이의 업상(業相)인 것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래서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 없이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평안케 해야 한다.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요, 또한 온갖 중생이라 말씀하신 것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체 모든 상은 본래 환(幻)에 불과한 것이라서, 나의 진짜 성품 가운데는 아예 없는 것이므로 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신 바, 일체 중생도 마음에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일체 중생이 생기는 것이니, 만약 진짜 본성에 있어서 망령된 상이 없다면 중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일체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 하신 것이다.
사상을 여의지 못하면 중생계 역시 사상이 없을 수 없으므로 중생이 없을 수 없으니, 다시 중생계에는 환상이 없을 수 없을 것이요, 일체의 상을 없앨 수가 없다. 그러나 나 스스로 사상을 여의어 중생이 없으면 일체 중생이 자연히 없을지니, 일체중생이 본래 내 한마음 깨닫지 못함에서 생긴 탓이다. 내가 스스로 일체상을 여의면 중생 또한 일체상이 멸(滅)할 것이니, 일체상이 본래 나의 식심 분별에서 생긴 까닭이다. 곧 깬 눈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없으며 일체상이 없는 것이다. 왜냐? 일체상이 곧 실상이니 일체상이 없다는 것이요, 일체 중생이 곧 부처이니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이런 말씀은 이를 듣는 중생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들릴 수 있고,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요, 너무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까닭이니, 듣기에 허망한 것도 같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불러 굳건한 신념을 넣어 주시려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과 생각이 완벽하시다. 당연하고 마땅하겠으나 분별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하다는 말이다. 상대가 누구든 또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편안해야 한다. 그러려면 집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지상 최고의 완성이다. 걱정하지 않으려면 신심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부처님 말씀 중 가장 핵심은 무엇일까? 분별이다. 분별은 인과를 낳는다. 세상의 모습은 인연 연기 따라 그대로 완벽하게 돌아간다. 이를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는 것은 나의 분별심(分別心)이다. 그래서 인과는 내가 만든다. 때문에 어떤 인과의 모습도 완벽히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머무름은 분별이고 탐진치 삼독심이다. 좋고 싫고 좋은 고락의 인과만 낳을 뿐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도, 억울할 것도, 아쉬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다. 그래서 그 어떤 상도 갖지 않아야 한다. 상이 상이 아니고 그 이름만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연 연기에 대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간섭하는 즉시 인과의 고통을 받는다. 시시비비 해봐야 기분만 나빠질 뿐이다. 이러한 업을 조금이라도 멸하기 위해서는 기도 참선 보시 정진이 뒤따라야 한다.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수보리야! 여래는 참된 말만 하는 이며, 실다운 말만 하는 이며, 맞는 말만 하는 이며,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이며, 다르지 아니한 말만 하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망언을 하지 않고, 진정한 말을 하며,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 실상의 말을 하고 허황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여실한 말을 하고 속이지 않으며, 딴 소리를 하지 않는다. 자성을 스스로 깨닫고 청정한 본성을 가리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일체중생이 중생이 아니요, 일체상이 상이 아닌 여래의 본성품을 직접 말씀하시니, 과연 여여한 말씀이다. 또 일체 내외법(內外法)을 여읜 실상법(實相法)에 입각하여 말씀하시니 실다운 말씀을 하는 것이요, 말과 글자의 상이 공하며, 얻음과 증명함이 공한 진여보제(眞如菩提)에 직접 입각하여 말씀하시니, 이것이 참 말씀인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상(分別相), 즉 양변(兩邊)의 마음을 모두 놓아야 할 것인데, 이를 놓지 못하는 대중들은,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므로, 자재처(自在處)를 모르는 까닭이다. 마음을 잘 활용할 줄 알면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마음은 무엇일까? 업습(業習)이다. 버릇된 업이라고나 할까? 업이 버릇이 되어 자꾸 반복된다는 뜻이다. 또 업이란 분별심(分別心)이다. 이것을 원하면 원하지 않는 저것이 똑 같이 생긴다. 이것저것 중에 이것을 택하는 것이 분별이다. 그러나 원하는 이것을 분별할수록 원하지 않는 저것이 똑같이 분별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진짜 내 마음이 아니고 분별하는 습관을 내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가짜 마음에 속으며 살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짜 마음에 속지 않을까? 두 가지 마음을 잘 운영하면 된다. 우선 지금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한다.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감정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있는 중에도 좋고 싫은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은 얼마든지 할지라도, 좋고 싫은 감정이 붙게 되면, 다시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를 낳는다. 좋은 감정은 싫고 나쁜 과보를 낳게 된다. 또 싫고 나쁜 감정이 생기면 업식으로 저장되었다가 그 버릇이 다시 또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연기한다. 사람살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엇이 남을 것이며 무엇을 얻을 것인가. 모두가 공성이다. 세상도 우주도 사람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는 것은, 이와 같은 모습들을 보고, 좋다 싫다는 고락의 감정과, 옳다 그르다고 시비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그러나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 또한, 좋고 싫은 고락이 서로를 의지하며 상의상존(相依相存) 반복되는 버릇, 즉 인과의 수레바퀴만 거듭될 뿐이다. 따라서 좋은 감정이든 싫고 나쁜 감정이든, 이 감정만이 생사부침(生死浮沈)할 뿐이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면 된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든 연기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뿐, 얼마든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지라도 그것은 그것 대로 대하되, 진짜 속마음으로는 탐진치 삼독의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여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설사 상대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사업이 폭삭 망한다 하더라도, 몸이 망가지더라도, 마음이 머무르거나 상을 갖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일체의 마음 감정을 놓아야 한다. 고통과 괴로움도 업습의 버릇이 인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어느 순간 이를 끊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85호 / 2023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