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백범광장에 있는 백범 김구의 동상. 1949년 암살 후에도 이곳에 김구 동상을 세우려는 논의가 있었다. |
오래간만에 찾은 서울 남산 백범광장은 확 달라져 있었다. 칙칙한 포석(鋪石)은 걷히고 푸른
잔디가 깔렸다. 도로로 단절되었던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옛 어린이회관)·안중근의사기념관 쪽하고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남산성곽도 일부지만
복원되었다. 2011~12년 ‘남산르네상스 회현자락 복원사업’의 결과다.
옛날에는 광장에 비둘기들이 날아오고 벤치에서 쉬는
노인, 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평일 오후이기 때문인지, 날이 더운 탓인지, 잔디밭을 돌보는 인부들을 제외하면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곳은 ‘역사의 역전(逆轉)’의 현장이다. 멀리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동네였다. 박지원(朴趾源)의
‘허생(許生)’도 남산자락에 살고 있었다. 이 동네에 살던 가난하지만 깐깐한 선비들을 일러 ‘딸각발이 선비’라고 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신궁이 있던 곳
아마데라스오오카미와 메이지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은 천황이 제사를 올리는 ‘관폐대사’였다. |
이 남산골에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이 있던 왜성대(倭城臺)에는 일본공사관이 들어섰다. 나중에 일본공사관은 통감부, 통감관저,
총독관저로 바뀌었다. 남산 아래 충무로와 명동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가 됐다.
일본인이 사는 곳에는 신사(神社)가 있기
마련이다. 노기신사, 경성신사 등에 이어 1920년 조선신사가 들어섰다. 조선신사는 1925년에 조선신궁(神宮)으로 승격했다. 면적은
12만7900여 평에 달했다. 지금의 백범광장에서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가 조선신궁 경내였다.
‘800만의 신(神)’이 사는 일본에서는 신령을 분양(?)하기도 한다. 조선신궁은 일본 최고의 신사인 이세(伊勢)신궁에서 일본의
시조신(始祖神)인 아마데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의 신령을 분양받아다 모셨다. 일본인들이 ‘대제(大帝)’라고 숭앙하던 메이지(明治)천황도 신이 되어
아마데라스오오카미와 함께 모셔졌다. 일본 천황이 제물을 바치는 관폐대사(官幣大社)였으니, 일본 전체로 보아서도 상당히 격이 높은 신궁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 조선신궁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스키장이 들어섰다.
이승만 80회 생일 기념해 동상 건립
1956년 광복절에 제막식을 한 이승만 동상. ‘세계굴지’의 규모를 자랑했다. |
1956년 8월 15일,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섰다. 이승만 동상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축하위원회(위원장 이기붕)’의 발의로 세워졌다.
그해 개천절인 10월 3일에 기공해서 이듬해 광복절에 맞춰 완공한 것이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동상의 높이는 81척이었는데, ‘80회 탄신을 기준으로 갱진일보(更進一步)하는 재출발의 첫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상 기공식을 알리는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세계굴지의 이 동상은’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동상이 당시 ‘동양최대’니 ‘세계최대’니 하는 얘기를 들었다.
대지면적은 3000평, 좌대는 270평이었고, 8각의 좌대에는 각 면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조각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니까, 아마 지금의 김구 동상과 비슷한 포즈가 아니었을까 싶다. 건립비용은 2억656만 환이 들었는데,
극장연합회에서 갹출했다. 동상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이었다. 일제의 조선신궁이 있던 곳에, 개천절에 기공식을 해서 광복절이자 대통령
취임일에 완공한 것이며, 이승만 대통령을 전통적인 두루마기 차림으로 형상화한 것은 나름 치밀하게 정치적 상징조작를 노린 것이었다.
동상 제막식에서 이기붕 국회의장은 “자주독립의 권화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를
맹세하자”고 말했다.
비슷한 무렵 야당 민주당의 김영삼(金泳三) 국회의원은 U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의 거대한
동상 2개와 최소 1개의 기념비가 건립되었는데, 이에 소요된 비용은 40만 불 이상에 달한다. 동 금액은 적어도 2만명 이상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1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면서 “이 대통령이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 의원은 “이
대통령은 서울시의 명칭을 그의 호를 따라 우남시(雩南市)로 변경하려 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25일자).
“이 박사가 오신다”
4·19 이후 철거된 남산 이승만 동상의 두상과 파고다공원에 있는 동상의 몸통. 서울 명륜동의 주택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2008년 발견됐다. 사진=조선일보DB |
남산뿐 아니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도 이승만 동상이 들어섰다.
서울에는 우남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우남송덕관(뚝섬), 우남정(남산 팔각정 자리) 등이 만들어졌다. 부산에는 우남공원(지금의
용두산공원)이 있었다. 지폐와 동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들어갔다. 모두가 낯 뜨거운 아부의 산물이었다. 이런 우상화를 방관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말년에 총기를 잃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1960년 4·19 당시 성난 시위군중은 파고다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쓰러트려 새끼줄을 목에 묶어 끌고 다녔다. 남산에 있던 동상도 그해 8월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승만 정권 시절
야당지였던 《동아일보》는 ‘독재의 상징과도 같이 남산에 우뚝 솟아 있는 이승만 동상이 22일부터 헐어 뜯기우기 시작’이라고 보도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일시 폐간되었던 《경향신문》은 ‘독재자 이승만씨의 동상도 독재자의 말로 못지않을 정도인 산산조각으로 철거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동상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동상의 머리 부분은 살아남았다. 서울 명륜동에 사는 홍모씨 덕분이었다. 그는 1963년 6월
해체된 이승만 동상이 용광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종암동에 있는 서울시 창고로 가 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동상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던 홍씨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가족들은 “죄가 밉지 사람이 밉지는 않으니 동상을 가져오자”고 했다. 홍씨는 50만 환을 마련, 동상
머리를 불하(拂下)받았다.
그는 동상을 가져오면서 동네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동네사람들은 “이
박사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 50여 명이 마중을 나왔다. 홍씨 가족들은 해마다 이승만 박사의 생일 때면 예(禮)를 올렸고, 이 집을 찾는
수금원이나 행상들은 경건하게 절을 하곤 했다(《경향신문》 1964년 5월29일자). 이 두상이 몇 년 전 명륜동 가정집 마당에 방치되어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이승만 동상 파편이다.
원래 김구 동상 세우려던
곳
김구 동상 왼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박 대통령은 금일봉을 보내는 등 동상 건립에 관심을 기울였다. |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단군의 동상을 세우자느니, 4·19의거 학생들을 기리는 의거기념탑을 세우자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상 자리가 원래
1949년 김구가 암살된 후 백범김구선생동상봉립추진위원회에서 김구 동상을 건립하려던 자리라는 사실이다. 《경향신문》 1949년 8월 18일자는,
위원회는 건립 장소를 ‘남산 전 조선신궁 본전 앞 광장으로 정하고 당국과 교섭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 자리에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동상이
들어섰다가, 20년 후에 결국은 김구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김구 동상 건립은 일종의 국가적 사업이었다.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곽상훈)가 김구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금일봉을 내놓았고, 쌍용그룹 사주이자
공화당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씨도 500만원을 내놓았다. 각계에서 모금된 성금은 모두 2100만원에 달했다.
동상 제막식은
1969년 8월 23일에 있었는데, 이날은 김구의 93회 생일이었다. 좌대와 높이가 각각 6.2m였다. 조각은 조각가 김경승과 민복진이 맡았고,
건립문은 소설가 박종화, 약전(略傳)은 이은상이 지었다.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모두 당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었다.
제막식에 참석한 김구의 아들 김신 당시 주중(駐中)대사는 “온 겨레의 성원으로 선친의 동상이 서게 되어 감개가 벅차 오른다”며
울먹였다. 이석제 총무처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서 참석했고, 자유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쑨커(孫科) 전 행정원장(총리)을 특사로
보냈다. 장 총통은 좌대에 새겨질 휘호도 보냈다. 장 총통의 휘호는 동상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가 새겨져 있다.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 한글전용을 강조하던 시대분위기가 느껴진다. 동상 제막과 함께 동상 앞 광장의 이름도
백범광장이 됐다.
동상 옆에는 백범김구선생기념협회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 ‘1948년 4월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무슨 생각, 무슨 근거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 운운하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이시영의 동상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동상. |
김구 동상의 왼쪽에는 초대(初代)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의
동상이 있다. 이시영은 구한말 외부(外部) 교섭국장, 평안관찰사, 한성재판소장 등을 지낸 조선의 유신(儒臣)이다. 형 이회영 등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총장·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같은 임정 계열인 김구와는 달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실정(失政)을 규탄하면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평생 김구와 가까웠고, 말년에는 이승만에 맞섰던 그가 이승만의 동상이 있던 자리 근처에, 김구의 동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1988년에 세운 이시영의 동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어서 김구의 동상보다 왜소한 느낌을
준다. 조각가 최기원이 만들었고,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양쪽에는 호랑이상이 서 있는데, 위엄 있다기보다는 사나운 모습이다. 문관(文官)이었던
이시영의 동상에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다. 성재이시영선생동상건립위원회가 세운 안내판에는 그가 ‘외교부 교섭국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구한말에 외교를 담당하던 부처의 명칭은 ‘외교부’가 아니라 ‘외부’였다.
옛 어린이회관에는 육영수 이름 새겨진 초석 있어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광장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휘호석. |
김구 동상 위쪽으로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이 있다. 돔형 지붕을 가진
흰색 건물은 내 세대에게는 어린이회관 건물로 기억되고 있다. 1970년 어린이회관으로 개관했다가, 어린이회관이 서울 능동의 현재 위치로 이전한
후에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이라는 간판 아래에는 ‘머릿돌 1970.5.5. 육영수’라는 초석(礎石)이 아직 남아
있다.
2010년에 새로 지은 안중근의사기념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