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설
그곳에 아메리카는 없었다
- 조해일의 〈아메리카〉
*사진1과 설명
1.
인간은 돈이 있는 곳에 모여 경제권經濟圈을 만든다. 1950년대에 형성된 기지촌基地村은 돈이 필요한 절박한 여인들이 모여, 남루하고 난망했던 한국경제 속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생생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권이었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80달러였고 미국은 19,135달러였다. 10년 후인 1970년에는 257달러 대 25,295달러였다. 1970년 환율은 1달러에 약 316원이었고 257달러면 8만원 남짓 된다. 단순 비교는 잘못을 범할 여지가 많지만 1970년도에 짜장면 한 그릇 값이 100원이었고 현재는 7,000원 정도 하는 걸로 보아 70배가 뛴 것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그때의 8만원은 지금 가치로 치면 560만원 꼴이다. 그에 비해 미군의 급여는 매우 높았을 것이고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기지 옆에 기지촌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터이다.
조해일의 〈아메리카〉는 이런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는 중편소설로 양주군 동두천읍 보안리의 1970년 즈음 이야기로 1971년 《세대》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을 두고 ‘한국사회의 분단의 현재적 의미’, ‘미국의 식민지’ 등등의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이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군에 대해 호의적으로 묘사된 부분을 볼 수 있다.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느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해지를 선언하면 조약은 1년 뒤에 자동으로 해지된다. 한국정부가 해지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대 어느 정부도 조약 해지를 선언하지 않았다. 분단이 주한미군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한일합방 같은 강제적 형식이 아니다. 물론 미국도 언제든지 해지를 선언하고 떠날 수 있다.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 캠프 캐슬이라고 불리는 동두천 기지에는 미 제2보병사단 병력과 제210야전포병여단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평택의 험프리스 기지가 건설되면서 제2보병사단은 험프리스로 이전했고 남은 것은 제210야전포병여단과 공병대대 정도이다. 이로 인해 달러가 흥청대던 동두천 기지촌은 매우 썰렁한 동네로 변하게 된다. 뜯어내지 않은 변색된 간판만이 당시의 시대를 보여준다. 자동차도 비켜지나가고 어쩌다 그곳을 지나친다하더라도 ‘동두천외국인관광특구’라는 새로 설치한 구조물과 여느 재래시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아치형 장식들로 골목은 요란했지만 영업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문을 닫은 상가가 많아 허허로웠다.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구석구석을 헤집었으나 형편은 마찬가지였다.*사진2와 설명
2.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김효식은 군에서 제대를 했지만 돌아갈 집이 없어 동두천읍 보안리에서 ‘얄루클럽’이라고 불리는 ‘압록강홀’을 운영하는 당숙을 찾아간다. 이튿날부터 효식은 클럽의 출입을 관리하는 문지기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곳 클럽에서 ‘양공주’로 일하는 옥화를 비롯해 여러 양공주들과 동침하는 효식에게 얄루클럽은 유혹의 공간이자 장미의 나날을 선사하는 그럴듯한 직장이다. 효식은 손바닥만 한 이 읍의 실질적인 경제적 풍요가 미군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며, 자산의 반 이상이 매춘으로 얻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옥이라는 여성이 살해된다. 기옥의 장례식은 이곳 여성들의 자치조직인 씀바귀회장으로 거행된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여자들로 장의행렬은 길어지며 이들은 미군부대 앞에서 기옥의 살해 사건에 대해 항의한다. 기옥의 유해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 묻힌다. 며칠 뒤 효식은 씀바귀회 회장을 만나 자신이 이곳 여성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모색하지만 혼혈아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회장은 자신도 양공주라서 생업이 바쁘다며 시큰둥하다. 그 즈음부터 효식은 클럽 여성들을 ‘섭렵’하는 일을 그만둔다.
미군 헌병이 클럽들을 돌며 여성들의 검진 패스를 확인하는 ‘토벌’이 있던 다음날부터 미군의 클럽 출입이 일주일동안 금지되었다. 성노동자들의 성병 이완률이 지나치게 높고 그로 인해 미군들의 성병 감염률이 날로 증가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온 동네가 잠잠해졌다.
미군의 출입금지가 해제되어 마을이 다시 활기를 띨 무렵 이번에는 큰 비가 내리면서 마을을 흐르는 신천이 범람하고 보안리의 1층 높이의 집들 대부분이 모두 잠긴다. 클럽 여성인 영옥은 방구들에 숨겨둔 돈이 홍수에 쓸려나가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다. 미군들은 침수지역의 한국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보트를 동원해 출동한다. 홍수의 와중에 미라라는 여성은 실종되었다. 홍수가 그치자 효식은 당숙을 거들어 복구 작업에 여념이 없다. 클럽에서 일하는 장씨·홍씨·춘식 등도 클럽의 벽에 엉겨 붙어 있는 진흙을 거둬내며 땀을 쏟는다. 동네 뒤쪽 철둑에는, 젖은 살림살이를 말리는 여자들이 동네 길이만큼 긴 대열을 이루고, 흐트러진 매무시의 여자들이 만드는 피난 행렬 같은 대열 위로 다시 여름의 태양이 열기를 쏟아낸다.
3.
효식은 제대 후 서울에서 동두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것이다. 지금은 전철 1호선이 소요산역까지 연장되어 사람들이 전철을 타고 의정부나 서울로 나가고 들어오지만 그때는 버스밖에 없었다. 2000년대에 이 소설이 쓰였다면 효식과 옥화는 전철 1호선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효식은 마장동에서 동두천행 버스를 타고 동두천버스터미널까지 왔을 텐데, 그 터미널은 생연동 657-1번지에 있었다. 생연동 657-1번지는 동두천중앙역에서 신천 쪽으로 4백여 미터쯤 걸어서 내려오면 KT동두천지사 맞은편이다. 이곳이 당시에는 동두천의 중심이었음직하다.
1974년에 개통된 청량리-서울역 구간의 지하철 1호선이 수도권 전철 1호선으로 확장되고 2006년부터는 소요산역까지 이어졌다. 버스터미널은 동두천 초입으로 이전하여 시외버스터미널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버스가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 원래는 부산을 비롯해 전국 요지로 가는 버스들이 있었으나, 손님이 줄고 또 코로나19까지 창궐하면서 운행을 모두 중단했다. 남쪽 지방으로 가려면 의정부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대신 경기광역 G2001 버스가 신탄리역에서 도봉산역광역환승센터까지 운행하면서 동두천역과 지행역에서 동두천 시민들을 태운다. 이 버스를 타면 의정부버스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
생연동 버스터미널로부터 얄루클럽까지는 약 1.5킬로미터이다. 효식은 버스에서 말을 건넸던 옥화가 그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길 안내를 부탁했고, 두 사람은 얄루클럽을 향해 함께 걸어간다. 옥화가 “여기서부터 ㅂ리라고 일러준 거리에 접어들자 지금까지의 거리와는 판이한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길 폭이 좁아지면서 우선 곳곳에 무슨무슨 테일러니 무슨무슨 폰숍이니 무슨무슨 클럽이니 하는 영문자로 된 간판들이 도형감 있고 생생한 모습으로 내게 얘기를 걸어왔다.”
ㅂ리는 보안리를 가리킨다. 보안리라는 지명은 지금은 사라졌는데, 1981년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될 때 보안리와 걸산리 일부가 합쳐져서 동두천시 보산동이 되었다. 동두천시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미 2천 년 전 고구려인들이 남하할 때 임진강 고량포를 건너 양주군 적성면과 남면을 거쳐 중랑천 상류에 이르렀고 중랑천을 따라 몽촌토성 쪽으로 접근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도 고량포리에 있고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일합을 겨루던 호로고루도 고량포리에 있다. 뿐만 아니라 1950년 김일성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하면서 건넌 임진강도, 1968년 1월 북한의 124군 소속 김신조 등이 건넌 임진강도 고량포이니 군사적 도로로서의 양주군과 그 길목을 바라보는 동두천은 군사적 요충지여서 주한미군 제2사단이 동두천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겠다. 이곳에 있는 세 곳의 캠프는 1954년에 세워졌다.*사진3과 설명
1965년 한반도에 배치된 미 제2보병사단은 사령부를 의정부 녹양동과 가능동의 캠프 레드 클라우드에 두고 동두천 일대에 연대와 포병부대 등을 배치했다. 보산동을 먹여 살린 캠프 케이시는 그 중 하나이며 가장 큰 병영이었다. 1979년 방한한 지미 카터가 박정희를 무시하고 달려가서 아예 잠까지 잔 곳이 캠프 케이시이며, 2001년 방한한 조지 워커 부시가 방문한 곳도 캠프 케이시였다. 그러나 2016년 12월 주한미군 대부분이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면서 캠프 레드 클라우드가 해체되고 극히 일부만이 동두천에 남아 있게 돼 보산동의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캠프 캐슬은 철거 후에 경북 영주에 있는, 얼마 전 모 교수 부인 일로 떠들썩했던 동양대학교의 동두천캠퍼스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곳 학생들이 보산동에서 먹고 놀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산동 입구에 세워진 구조물에는 ‘동두천외국인관광특구’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하지만 인형방 몇 개가 불을 켜고 있을 뿐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이 닫혀있다. 물론 지금도 테일러, 폰숍, 클럽 간판을 단 업소들이 있지만 그다지 경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폰숍은 전당포이다. 월급이 많은 미군들도 급전이 필요할 때는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갔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모든 제품이 미국보다 한참 떨어질 때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는 최상의 상품이었다. 미군들은 시계와 신발, 심지어는 입던 속옷까지 맡기고 돈을 빌렸다는데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은 시장에 풀렸고 전당포 주인들에게는 쏠쏠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메이드 인 코리아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와의 차이는 없어졌고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폰숍의 경기도 이전만은 못했으나 보산동에는 아직도 문을 연 폰숍이 몇 군데 보인다. 효식이 일했던 얄루클럽 같은, 미군들이 출입하던 클럽들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과거를 지우지 못한 흔적들은 짐승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화려했던 황성옛터의 유물이 되어 군데군데 남아있다. *사진4와 설명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드물다. 저 외국인관광특구라는 간판을 언제 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서울 종각역에서 전철로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이곳 보산동까지 무슨 구경을 하고 무슨 쇼핑을 하려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올 것인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놀 거리도, 뭐 하나 특별하지도 않은 이곳으로 말이다.
〈아메리카〉에는 사실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한다. 먼저 효식의 부모와 두 누이동생은 아파트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는 1970년 4월 8일에 일어난 서울 창전동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로 아파트 입주민 서른네 명이 사망했다. 효식이 제대를 두 달 앞둔 때였다. 다만 후술할 성노동자 한기옥의 죽음이 196X년 8월이므로 조해일은 와우아파트 붕괴를 앞으로 끌어당긴 셈이 된다. 실제로 1964년에는 김옥희라는 성노동자가 목을 졸려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가해자는 한 달에 5달러를 주고 동거했던 미군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큰 비가 와서 신천이 범람해 보안리 일대가 물에 잠긴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도 소설에 등장한다.
효식은 얄루클럽에 온 다음날부터 문지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검진패스를 확인해 입장시킬 수 없는 여자를 가려내는 것, 잡상인을 차단하는 것, 구걸하러 온 사람들을 막는 것이 문지기의 역할이었다. “여자들은 성병의 유무를 판별받기 위해서 주 2회씩 받게 되어 있는 검진을 대체로 충실히 받고 그 결과에 잘 순응하는 것 같았고” “다섯 시에 일과가 끝나는 미군들이 각양의 복장으로 쏟아져 나와 여자들과 어울려서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효식이 일하면서 발견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ㄷ의 중심부는 읍내가 아니라 미군 부대가 가까이 있는 이곳 ㅂ리라는 것, 내가 몸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류와 규모의 클럽 10여 개가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는 것”, “ㄷ읍의 경제권은 거의 ㅂ리에 사는 사람들의 손에서 움직인다는 것, 아니 ㄷ읍을 먹여 살리고 부지扶持케 하는 자산의 대부분이 ㅂ리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ㅂ리의 자산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주로 미군들의 호주머니로부터 떨어진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 자산의 반 이상은 경제 활동으로서는 최저의 수단에 속하는 매춘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그러나 그 주 종사자들인 이곳의 여자들은 뜻밖에도 윤리적 열등감 같은 건 조금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그 생활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쯤해서, 나는 기지촌의 성노동자들이 왜 윤리적 열등감을 반드시 느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욱이 효식은 이곳에 온 지 닷새 만에 옥화의 방을 찾았고, 그날 이후에는 얄루클럽을 출입하는, “반반하다고 느껴지는 여자들의 방은 거의 빼놓지 않고 방문하였다.”
4.
성노동자 한기옥이 ‘검둥이’ 미군에게 살해당한 때는 효식이 보안리에 온 지 한 달이 좀 넘어서였다. 기옥은 클럽에서 거의 나체로 쇼를 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벌어서 빚을 갚아야 했다. 기옥에게 반한 검둥이 미군은 그녀에게 200달러를 주면서 자기와 살림을 차리고 쇼는 하지 말라고 했다. 전술했듯이 1970년 한국인의 국민소득은 256달러였고 200달러면 꽤 큰돈이었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기옥은 번번이 약속을 어겼고 화가 난 미군 병사는 기옥을 목 졸라 죽였다. “깜둥이의 옆에는 이발소에서 쓰는 면도칼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건 사용하지 않았는지 여자애의 몸엔 상처 하나 없더라는군요.” 그 병사는 ‘어젯밤’ 효식이 장 씨와 신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그 병사였다. 그 병사는 무척 흥분한 채로 한 손에는 면도칼을 들고 신천으로 가서 기옥의 머리채를 낚아 쥔 채 끌고 기옥의 방으로 가 사고를 낸 것이었다.
한기옥의 장례식은 사흘 뒤 여자들의 자치 조직인 ‘씀바귀회’장으로 거행됐다. 상여 뒤로 소복을 한 서른 명 남짓의 여자들이 울긋불긋한 만장을 치켜든 채 따랐고 사람들은 기옥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니가 가는 곳은 천당! 우리가 남는 곳은 지옥!”
상여가 미군부대 정문께에 이르렀을 때 효식은 장 씨에게 장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장지는 토산이라구 저 정문 앞에서 꾸부러져서 저기 보이는 다리를 건너 다시 한참 올라가야 하는 벌거숭이 산이랍니다.”
상여행렬은 미군부대 정문 앞에 멈춰 섰고 씀바귀회 회장은 ‘한기옥의 죽음을 보상하라’고 외쳤다. 여자들은 상여를 메고 사령부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미군 헌병들은 그것을 막느라 뒤엉켰으며 여자들이 던진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참모장인 윌리엄 바커 대령이 나와서 정중하게 사과했고 부의금으로 2만원을 전달했다. 성노동자가 미군의 폭력으로 죽었을 때 실제로 미군 지휘부가 이런 사과를 했는지 알아보지 않았으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미군 장교는 참으로 스마트하고 센스가 있다.
상여행렬이 있었던 곳은 캠프 케이시 정문으로 추측된다. 보산동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부대 정문은 캠프 케이시 정문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고 그 옆으로는 주차장이 있으며 방문객들을 맞는 건물과 함께 미군 병사들이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다. 병사들은 그 문으로 나와서 보산동 클럽을 출입했고 그곳에서 만난 여성들과 원 나이트 스탠드를 치렀으며 마음이 맞거나 반하면 동거도 했고 그러다가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참모장의 사과로 격앙됐던 여자들의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위로금 2만원이 너무 작다는 불만도 있었으나 참모장이 사과한 것에 마음을 풀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상여는 장지를 향했다. 상여가 다리께로 굽어들자 거기서부터 후미의 여자들이 뒤따르는 구경꾼들을 막았다. 이후의 장례는 모두 여자들끼리 진행한다고 했다. 상여가 건너간 다리는 상패교로 짐작된다. 그때의 다리는 없어지고 지금 있는 상패교는 2003년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준공되었다. 이 다리에서는 보산동 마을과 전철 1호선 보산역이 한눈에 보인다. 상패교는 차도와 인도가 나뉘어져 있고 양쪽 인도 옆에는 따로 공간을 두어 여러 개의 조형물들을 설치했다. 과거와 현재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형물로 만들어 시민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사계절 꽃과 새와 눈과 바람이 시민과 함께 하는 곳으로 암울했던 당시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은 한쪽에 세워진 시비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사진5와 설명
5.
이곳 시비에는 ‘상패교’라는 시가 적혀있다. “40여 년 전 어느 여름 날 무기력한 우리를 덮이던 수마의 위력” “삐걱대던 정겨운 나무다리도 성난 물살에 자취를 감추고” “애환이 서린 반세기를 이방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사람들” 등의 구절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동두천의 시인으로 알려진 이미라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동두천에 터를 마련했으니 그도 이방인이다. 기실 1950년대부터 동두천에 둥지를 튼 많은 여인들도 이방인들이었다. 꿈을 잃어버린 채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들은 동두천을 찾았다.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의 삶을 꿈꾸며 동두천으로 스며들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옥의 장례를 치른 며칠 뒤, 효식은 ‘씀바귀회’ 회장을 만나러 갔다. 그곳에서 미성년자로 보이는 두 명의 앳된 소녀가 클럽에 출입하게 해달라고 회장에게 조르다가 거절을 당하는 걸 보게 되었다. 회장은 효식에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사 난리통에 굶지 못해 우찌우찌 이리 됐다 하지마는 요즘 아이들은 머한다고 자꾸 이런 곳에 찾아오는지 모리겠는기라요.” 1970년이면 한국이 경공업의 도약을 이루면서 구로공단을 위시한 많은 공장 등에 여성들이 취업할 수 있었다. 공장에 취업하는 것과 성노동자가 되는 것 중 어느 쪽이 소득이 더 높은지는 여러 가지를 따져봐야 알겠지만, 이 대목만보더라도 기지촌의 성매매가 강제로 납치되어 감금되다시피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자발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장은 회원이 1,314명인데 병들어 죽은 회원, 자살하는 회원, 연탄가스 맡고 죽은 회원, 사고로 죽은 회원 등 죽은 사람 수로 따지면 회원 수가 많이 줄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고 했다. 그런데 미군들 숫자는 날로 준다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두 달에 한 명꼴로 나오는데 ‘씀바귀회’에서 사정을 미리 알아 자살까진 가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씀바귀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장례식 정도 지내 주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효식이 말하는데 회장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벨…… 순진한 청년 다 있구마. ……그만 두소. 크라부 일이나 잘 보소.” 기지촌의 현실을 인식하고 기옥의 죽음을 계기로 효식은 무언가 뜻있는 일을 찾아 나서지만 그곳에서 청춘을 바친 회장은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효식은 회장의 방에서 나와 토산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무렇게나 묻어 버린 무덤들이 있었다. 번둣한 묘비들 사이에 ‘꽃다운 청춘을 두고’, ‘다음 세상엔 좋은 팔자 타고나기를’, ‘묻힌 데가 고향’, ‘꺾인 꽃도 꽃이랍니다’ 같은 글귀가 나무로 만든 묘비에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기옥의 묘비도 있었다. ‘한기옥의 새 집, 196X년 8월 28일 이 새 집으로 이사 오다’*사진6과 설명
무덤들이 있는 곳은 동두천 시민회관 건너편 상패로 65번길에 붙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1960년대부터 형성된 이 일대는 당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북쪽에 동두천경찰서가 있고 남쪽으로는 시민회관이 동쪽으로는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산 밑으로 무덤들이 보이는데 멀리서 본 무덤에는 흰 팻말들이 점점이 붙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곳에 상패근린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묘지를 이장해야 한다는 공고문도 붙어 있었다. 묘비가 있는 무덤도 드물게 있으나 대부분은 없었다. 초입에 눈에 띄는 묘비에는 ‘김춘ㅇ, 1975년 사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략 1,000기가 넘는 무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성노동자들이 모두 이곳에 묻혔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묻혔을 테지만 연고자를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하기사 인간은 죽으면 그만인 존재이지만 반 평 땅에 봉분도 무너진 채 방치된 모습들이 못내 안쓰러웠다. 조해일은 어느 해인가 이곳 공동묘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 사진이 ‘제3세대 한국문학’ 16권 조해일 편에 실려 있는데 언제쯤 찍은 사진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나도 그가 서 있었던 그 자리쯤에 서서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겨 보았다.*사진7과 설명
6.
헌병들이 클럽에 들이닥쳤다. ‘토벌’이라고 불리는, 여자들의 검진 패스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검진 패스 불소지자 3명과 검사를 받지 않은 4명이 클럽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거기에는 옥화도 포함돼 있었다.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미군들은 클럽에 출입하지 않았다. “‘토벌’이 있은 그 다음날 저녁부터 미군이라곤 한 명도 영외로 나오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ㄷ에 사는 위안부들의 성병 이환율이 지나치게 높고 그로 인한 미군들의 성병 감염률이 날로 증가해 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토벌’에서 체크된 각 클럽의 검진 불합격자들은 바로 그 이튿날로, 여자들 간에 통상 ‘수용소’라 불리며 경원의 대상이 되는 ‘성병 집단 치료소’로 강제 수용되었고, 검진패스 불소지자와 불합격자들의 입장을 허가한 클럽들에게는 일주일간 미군들의 영외 출입이 금지될 것이라는 미군 당국으로부터의 통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통고의 대상에서 제외된 클럽은 한 군데도 없었다.” 미군 헌병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에 들어와 한국 정부가 발행한 검진패스를 확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용인되는 시절이었다. 먹고 살아야 했고 그들로부터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언급된 동두천의 ‘성병 집단 치료소’는 소요산역 앞 소요산국민관광지 초입에 있다. 음식점들로 가려져 있어 ‘그곳’이라고 알고 찾아가기 전에는 알 수 없을 만큼 세상과는 분리된 도심 속 섬이라 해도 좋을 곳이었다. 폐가가 된 2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 입구에는 언제 버려졌는지 모를 오래된 소파 하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고 깨진 유리조각과 삭아빠진 신문쪼가리들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허물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2층을 둘러보았다. 창마다 철창이 쳐져 있고 방으로 짐작되는 여러 개의 공간이 있었으며 방 하나에 10여명쯤 수용한 흔적이 보였다. 그런 방이 2층에 8개 정도, 또 1층에도 그 정도였는데, 대략 100명까지는 수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고 세면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성병을 가진 양공주’들을 수용하는 시설이기는 하나 1960년대 치고는 무척 정성을 들여 지은 건물이었다. 창문이 걸렸음직한 곳마다 철창을 달았는데, 어떤 곳은 그 흔적만 남았다. 수용된 여성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리라. 창살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퇴소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여성들을 보면서, 그 집을 ‘몽키 하우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는 것은 그가 누구든 존중받을 언행은 아니다.
1950년대부터 우리는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두고 ‘튀기’라며 놀렸다. 그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유명 가수가 되고 운동선수도 되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욱 험난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들의 노래와 이야기에 담고 있다.*사진8과 설명
미군들의 출입이 금지됐을 때 효식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의 바른 자리와 분명한 의미를 알아보려고 애썼다. “대학의 경제학과를 2년밖에 다니지 못한 내 어설픈 지식으로 사태를 판단해 보려고 할 때,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 내지는 소외 관계라는 도식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망쳐졌으며 내가 한국인이라는 종족 감정으로 사태를 바라볼 경우 모멸감과 수치감 같은 구제할 길 없는 혼란된 감정이 끓어올라 판단을 어둡게 함으로써 망쳐지고 말았다.” 그런 커다란 담론을 개인이 풀기에는 불가능하며 또한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하나가 풀리면서 또 다른 하나가 터지는 법이다. 지금의 보산동이 말해주듯이 미군부대가 사라지면 기지촌도 사라지는 법이다. 정부가 나서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권장한다고 번창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것도 시장경제의 일환인지 모른다. 다만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슬픔만이 배가될 뿐이다.
7.
가뭄 끝에 풍만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찬 빗줄기만이, 그리고 범람하는 흙탕물만이 골목의 주인인 듯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렸고 결국 개울이 넘쳤다. 제방이 원체 얕았다. 물이 제방을 넘었고 동네가 물에 잠겼다. 동두천 시가지를 끼고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개울의 이름은 신천이다. 한국의 개천은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신천은 드물게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신천은 양주의 백석읍, 덕계저수지, 점미산, 효촌저수지, 신암저수지, 봉암저수지, 동두천의 왕방계곡과 쇠목계곡 등에서 발원해 북상하여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동두천 쪽에서 발원한 물은 보산역을 지나 동보초등학교 부근에서 양주 쪽으로부터 발원한 물과 합치는데 물이 불어나면 양주 쪽에서 오는 물이 미처 빠지지 못해 보안리 일대를 휩쓸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제방은 부실했고 보안리는 다른 지역보다 지대가 낮았으니 물이 제방을 넘으면 보안리 1층 건물들은 잠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큰 일이 닥치면 언제든 단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금도 모으고 아이들의 돼지저금통도 기꺼이 가른다. 더욱이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을 함께 한다. 효식은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여자들을 2층으로 피신시켰고 2층에 방이 있는 여자들은 자신의 방을 개방해 사람들이 피할 수 있게 배려했다. 미군들도 발 벗고 나섰다. 인명 구조용 고무보트를 타고 나타나 병자와 어린아이들을 부대로 옮겼다. 큰비를 겪으면서 효식은 당숙의 말을 실감했다. “사람이란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더욱 끈질기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동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모습이 동두천 보안리 기지촌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구들장 밑에 돈을 숨겼던 영옥은 많은 돈을 잃어버렸다. 한쪽 눈이 없는 그녀가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홀대를 받으면서 억척스럽게 모은 돈이었다. 그 돈들을 영옥은 대부분 잃어버렸다.
비가 그치고 물이 빠졌다. 며칠 전 서울에서 온 미라가 실종됐다. 생사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살기 위해 나섰다. “동네의 뒤쪽 철둑가에는 젖은 살림살이를 말리는 여자들로 동네의 길이만큼 긴 대열이 이루어졌다. 침대 매트리스나 이부자리 젖은 의자나 소파, 캐비닛, 찬장, 겨울용 의복들, 가방, 신발들 그 밖의 많은 잡동사니들과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매무새의 여자들이 만드는 그 피난 행렬 같은 긴 대열 위로는 그리고 높이 솟아오른 여름의 태양이 이미 훅훅 열기를 내리끼치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과는 다른 1970년대 동두천 기지촌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신천의 범람도 없고 보산동의 ‘양공주’도 없다. 신천은 아무려나 조용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흘러가며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