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진성시,
타는 듯한 노을이 지천에 넘치는가 싶더니 어느 덧 그 열기도 식고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거리의 곳곳에 여기저기서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사막의 밤을 밝히는 불빛들,
그것에는 이국적인 낭만과 끈적끈적한 유혹이 실려 있었다.
밤이 되자 화진성시는 낮보다 한층 더 생기가 돌았다.
사막의 낮은 너무 뜨거웠다.
그 때문에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생기를 되찾는 것이었다
. "호호호……!" "까르르……"
곳곳의 주루와 기루에서는 요염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음악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수 많은 기루와 주루, 그들은 주로 서역과 중원을 오가는 대상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오랜 여행에 지친 나그네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밤의 꽃들……
돈만 있다면 화진성시에서는 천하 모든 종족의 여인들을 모두 즐길 수 있었다.
검은 피부를 지닌 열대의 흑녀(黑女)부터 시작하여 서역과 대식국의 금발미녀까지 황금만 있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화진성시였다.
이경(二更) 무렵, 화진성시의 밤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화진하변에 자리한 하나의 공터에는 유달리 많은 군중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으로 울타리가 쳐진 광장의 중앙에서는 지금 그곳에서는 희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 이번 물건은 월지국(月支國)에서 왔습니다.
원래 월지국왕의 질녀인데 못된 하인에 의해 유괴되어 본 매인상단(賣人商團)의 물건이 되었습지요!"
능글맞게 생긴 한 명의 중년인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중인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 자의 옆에는 하나의 높직한 좌대가 놓여 있었다.
그 좌대 위,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나이 십 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타는 듯 붉은 적발(赤髮)에 비취빚 눈을 지닌 색목소녀였다.
마치 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소녀,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기품있어 보였다.
그로 미루어 소녀가 고귀한 혈통을 지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소녀의 교구에는 비록 낡았으나 본래는 화려했을 듯싶은 비단옷이 걸쳐져 있었다.
노예상인…… 그렇다.
지금 광장에서는 일단의 노예상인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팔고 있었다.
좌대의 좌측에는 아주 비대한 체격을 지닌 한 명의 사내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키보다 허리 둘레가 더 커보이는 색목인, 그 자가 바로 노예상인단의 우두머리였다.
인육대야(人肉大爺)! 이것이 그 자의 이름이었다.
그 비대한 몸집과 본업인 노예매매 때문에 붙은 별호였다.
인육대야는 신강과 서역 일대에서 아주 유명한 노예상인이었다.
그 자는 여노예를 주로 취급하는데 최상의 상품만 취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의 말로는 돈을 주고 사온 여인들이라 하나 그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인육대야의 휘하에는 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있었다.
그 자들이 여노예를 강제로 납치해 오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지금 좌대 위에 서 있는 소녀도 아마 그렇게 끌려왔을 것이다.
주르르……!
중인들의 시선을 받은 월지국의 공녀의 두 눈에서 문득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향해 구경꾼들 중 누군가가 짓궂게 외쳤다.
"헤헷! 얼굴만 보고 알 수가 있나. 어디 속살도 좀 봅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호응소리가 터져나왔다.
"벗겨 보시오! 눈요기좀 합시다!"
"헤헷! 누가 또 아나?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말라 비틀어진 수수깡인지……!"
야유와 음담패설로 장내는 삽시에 시끌벅적하게 소란해졌다.
그리고, 군중들의 음탕한 눈길은 일제히 월지국의 소녀에게 집중되었다.
좌대 앞에 선 거간꾼은 중인들의 요구에 교활하게 웃어 보였다.
"헤헤! 여러분께서 원하신다면 보여 드려야지요!"
이어 그 자는 월지국의 소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손님들께서 원하신다. 벗어라!"
"……!"
거간꾼의 거침없는 말에 월지국 소녀는 교구를 파르르 경련했다.
그녀는 치욕이 가득한 눈으로 거간꾼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거간꾼은 음험한 눈길로 소녀를 쏘아보았다.
"흐흐……! 나를 화나게 하면 어찌 되는지 잘 알지?"
그 자는 히죽 웃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순간 그 자의 말에 소녀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의 봉목은 삽시에 공포로 물들었다.
한 가지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열흘 전이었던가?
소녀는 다른 백여 명의 노예들과 함께 화진하를 향해 끌려오던 중이었다.
그때 한 명의 위굴족의 여인이 야음을 틈타 달아났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는 인육대야의 수하들에게 사로잡혀 왔다.
그 위굴여인에게 가해진 형벌은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먼저 그녀는 다른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에게 무참하게 능욕당했다.
처절한 비명과 애원, 선혈로 뒤범벅된 하체……
하지만 정작 잔혹한 형벌이 가해진 것은 그 후였다.
여인은 십여 명의 흉한들에게 능욕당한 뒤 산채로 인육대야가 기르는 맹견들에게 던져졌던 것이다.
다른 여인들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을 보고 말았다.
맹견들은 아직 살아있는 가엾은 희생물을 무자비하게 포식을 한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맹견들의 먹이가 되어가던 위글여인의 모습은 전율스러운 기억으로 뭇 여인들의 뇌리에 각인 되어있었다.
탈출을 기도했던 위굴족의 여인에게 가해진 그 끔찍한 형벌이 있은
후로는 누구도 감히 탈출을 할 엄두도 못내게 된 것이다.
"흐흣! 결정은…… 네 스스로 해라!"
거간꾼은 색목소녀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자의 말에 소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어, 그녀는 반사적으로 옷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사락! 떨리는 섬섬옥수에 의해 그녀의 저고리 고름이 풀어졌다.
다음 순간,
"오……!"
"야! 우물(尤物)이다!"
군중 속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왔다.
소녀의 발치 아래로 흘러내리는 의복, 눈부신 달빛 아래 조물주의 걸작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서역여인들은 확실히 성장이 빠른 것일까?
소녀는 이제 겨우 십 오륙 세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속살은 이미 완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수밀도같이 희고 탱탱한 유방, 양지유를 바른 듯 매끄러운 하복부, 미끈하게 뻗어내린 두 다리……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소녀의 몸매는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이 나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나이어린 소녀의 흔적이 남은 곳은 허벅지 사이의 구릉이었다
. 그녀의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에는 머리카락처럼 붉은 색을 띤 방초가 살풋 자라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흔적만 보일 정도로 어린 방초들이었다.
솜털이라 표현함이 옳을 정도의 방초들이 소녀의 봉긋한 구릉을 덮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아래쪽으로 깊숙이 파인 홈이 그대로 들여다 보였다.
성숙한 여인과 어린 소녀의 몸을 동시에 지닌 월지국의 소녀,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을 보며 군중들은 침을 질질 흘렸다.
그자들의 눈은 하나같이 탐욕으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예외의 인물도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다니……!)
검미를 찌푸리며 싸늘하게 장내를 쏘아보는 인물,
그는 다소 마른 듯이 보이는 청면(靑面)의 소년이었다.
좌초백-! 바로 좌초백이었다.
그는 지금껏 화신성시를 배회하며 대막여왕 철옥정의 종적을 탐색해 왔던 것이다.
다륜부를 떠날 때 좌초백은 나유향에게 철옥정의 용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화진성시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좌초백이 마지막으로 온 곳이 이곳 노예시장이었다.
본래, 다른 장사도 마찬가지지만 좋은 물건은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법이었다.
인육대야는 백 명이 넘는 노예들을 이끌고 왔으나 그 중 구 할 이상이 모두 팔려나갔다
. 이제 남은 여노예들은 월지국의 소녀를 비롯한 십여 명 뿐이었다.
월지국 소녀가 선 좌대 뒤에는 한 채의 천막이 서 있었다.
아직 팔리지 않은 노예들은 그 천막 속에 있었다.
천막의 주위에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한 겹의 장막이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백 년 가까운 수위의 내공을 지닌 좌초백의 눈에 그 장막은 별로 방해가 되지 못했다.
좌초백은 검미를 모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만일 이곳에도 없다면 이제 찾아볼 곳은 사창가 뿐이다.)
이어 그는 시력을 모아 천막 안쪽을 주시했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 대막여왕 철옥정이 있을 것만 같았다.
(열 명이군!)
좌초백은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장막을 꿰뚫은 그의 시야로 천막의 안쪽에 모두 십여 명의 여노예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좌초백은 차근차근 여노예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십 인의 여노예,
그녀들은 과연 노예상인들이 가장 늦게 내놓을 만한 절세미녀들이었다.
여노예들은 각기 지닌 개성이 뚜렷할 뿐 아니라 출신종족도 모두 달랐다.
서역 대식국의 여인이 한 명, 천축과 강족의 여인이 각 한 명씩,
놀라운 것은 저 머나먼 동영(東瀛)의 여인도 끼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동해를 횡행하는 왜구들에 의해 팔려온 여인인 듯했다.
문득, "……!"
차근차근 여노예들을 살펴가던 좌초백의 시선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천막의 가장 안쪽에 앉아있는 여인에게 닿았다.
그 여노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뭇여노예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안목있는 자라면 그녀야말로 군계일학(群鷄一鶴)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여인은 풍만한 몸을 수수한 백의로 휘감고 있었다.
또한, 무엇 때문인지 얼굴도 두터운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회회교(回回敎:이슬람교)의 여인이 아닌가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좌초백은 그녀가 결코 회회교도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또한, 여인에게서는 감히 범접키 힘든 기품과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은 한껏 자신의 그런 기도를 숨기려 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천생으로 타고난 것이라 어떻게든 숨길 수가 없었다.
(바로…… 저 여인이다!)
좌초백은 숨을 죽이며 면사여인의 가슴을 주시했다.
그의 뇌리에 다륜부를 떠나올 때 나유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 분과 함께 목욕을 하다보니 젖가슴 사이에 나비 모양의 큰 점이 있었어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인!)
좌초백은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심 중얼거렸다.
면사를 쓴 여왕의 기품을 지닌 여노예,
좌초백은 그녀의 젖가슴 부위에 나비 모양의 점이 있음을 흐릿하게나마 꿰뚫어볼 수 있었다.
대막여왕(大漠女王) 철옥정(鐵玉鼎)-!
면사를 쓴 회회교도 복장의 여인이야말로 바로 그녀였다.
저 위대한 정복자 성길사한의 마지막 후예,
그 고귀한 혈통을 지닌 여인이 시세에 쫓겨 여노예로 화해 있는 것이었다.
좌초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재녀(才女)다운 발상이다.
저 분은 자신이 포극찰의 천라지망에 갇힌 것을 알자 스스로 노예상인들에게 몸을 판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간 자와 자연스럽게 이곳 화진성시를 빠져나가려고……!)
그는 염두를 굴리며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았다.
언뜻, 그의 눈에 군중들 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포…… 극찰!)
좌초백은 형형하게 눈을 번뜩였다.
그렇다. 군중들 틈에는 저 오이랍부의 효웅 포극찰과 신강오패천의 막내 뇌전마도가 끼어 있었다.
한데, 포극찰 역시 시력을 집중하여 천막 안쪽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좌초백은 가슴이 덜컹했다.
(좋지 않다! 빨리 여왕을 저기서 빼내야만 한다!)
그의 머리는 영민하게 돌아갔다.
그때, "자! 만 오천 냥이 나왔습니다!
더 쓰실 분은 없습니까?"
장내에는 한창 월지국 공주의 경매가 행해지고 있었다.
완숙한 몸매에 소녀의 청순함을 함께 지닌 월지국의 공주인지라 이번 거래는 꽤 경합이 치열했다.
은자 삼천 냥으로 시작한 경매는 어느덧 만 오천 냥까지 폭등해 있었다.
"……!"
좌초백의 눈은 월지국의 공주와 거간꾼을 차례로 살펴보다 이어 인육대야쪽을 향했다.
그 자는 자신의 상품값이 치솟는 것이 흐뭇한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문득, (그…… 래! 그러면 되겠군!)
츠읏!
인육대야를 바라보던 좌초백의 눈에 번득 득의의 광채가 스쳤다.
(저 돼지의 재물은 어차피 가장 더러운 수법으로 모은 것이다.
놈의 재물로 여왕을 도와줘도 괜찮겠지!)
그는 히죽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몰영노야! 어르신네의 손재주좀 빌려야겠습니다!)
다음 순간, 스스스……!
좌초백의 모습은 유령같이 군중들 틈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월지국 공주의 알몸을 훑어보기 바빠서 누구도 좌초백을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월지국 공주의 경매는 한창 상승세로 치닫고 있었다.
문득, "오만냥!"
군중들 중 한 명이 기세등등한 음성으로 외쳤다.
일신에 화려한 금포를 걸친 아주 추괴한 용모의 인물이었다.
"오…… 오만냥!"
"누란대목장의 주인은 과연 통이 다르군!"
순간 군중들 틈에서 놀라움의 경탄성이 터져나왔다.
누란대목장(樓蘭大牧場)---- 그것은 화진하 동쪽의 옛 누란왕국의 폐허에 자리한 목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신강성 내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방대한 규모의 목장,
금포를 걸친 추괴한 노인은 바로 누란대목장의 주인인 목야염이라는 자였다.
그 자는 아주 호색한이었다.
그것도 어린 소녀를 범하는 것이 그 자의 취미였다.
목야염이 숱한 소녀들을 망쳤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누란의 색충(色蟲)이 나섰으니 포기해야겠군!"
"빌어먹을…… 계집 하나 사는데 은자 오만 냥이라니……"
목야염의 경쟁자들은 투덜거리며 장내에서 물러섰다.
(흐흐……! 귀여운 것, 이제 너는 본 노야의 것이다!)
목야염은 득의의 표정으로 좌대 위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
게슴츠레한 목야염의 시선을 받은 월지국의 공주는 순간 교구를 바르르 경련했다.
그 자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자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헤헤! 목야대장께서 오만 냥을 부르셨습니다.
다른 분은 안 계십니까?"
신바람이 난 거간꾼은 큰소리로 외쳤다.
목야염은 그 소리를 들으며 내심 득의함을 금치못했다.
(흐흐…… 감히 노부보다 더 쓰겠다는 놈이 있을라구……)
그 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눈 앞에 이국소녀를 즐길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십만 냥……!"
천만뜻밖에도 군중들 중에서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외쳤다.
순간, "십…… 십만 냥?"
"아이쿠……!"
중인들은 아연실색하며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십만 냥을 외친 인물을 돌아보았다.
(어떤 미친 놈이……!)
그와함께 목야염도 얼굴을 추악하게 이지러뜨리며 반사적으로 음성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중인들 앞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머리에 보석으로 장식된 비단 두건을 두른 인물,
회회교도의 복장을 한 그 인물은 전신을 푸른색의 피풍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도 피풍과 같은 색의 천으로 된 면사를 쓰고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몽면 사이로 보이는 한쌍의 서늘한 시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시에 돌연 나타난 청의신비인에게 쏠렸다.
"……!" 그때 월지국의 공주 역시 푸른 눈을 크게 치뜨며 청의인을 주시했다.
(차라리 저 사람에게 팔려가는 게 낫겠어!)
훤칠한 체격의 청의인을 본 월지국의 소녀는 두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면사 사이로 내비치는 청의인의 눈빛에는 왠지 소녀의 방심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한 마력이 실려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월지국의 소녀와는 달리 목야염은 썩은 돼지간 씹은 표정을 지었다.
(염병할 놈! 다된 죽에 코를 빠뜨린다더니……!)
그 자의 추괴한 얼굴이 분노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 돌연 그 자는 발작하듯 외쳤다.
"십 일만 냥! 일만 냥 더!"
순간, "아……"
목야염의 말에 중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갑자기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
중인들은 과연 청의인이 어찌 나올지 기대에 찬 눈으로 일제히 청의신비인을 주시했다.
어느 덧, 청의신비인과 목야염 사이에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있었다.
그때, "귀하는……
본좌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소!"
청의인이 음울한 음성으로 말하며 목야염을 주시했다.
"본인이 말한 십만 냥은…… 은자가 아니라 황금으로요!"
순간, "무…… 무어라고?"
목야염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 자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청의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장내의 모든 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금(金) 한 냥은 통상 은자 열 냥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즉, 청의인은 은자로 백만 냥을 부른 것이다.
그것은 목야염이 지닌 전재산의 오 할 가까운 거금이었다.
그러니 목야염이 아연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미…… 미친 놈이로군!"
목야염은 악을 쓰듯 말하며 청의인을 노려보았다.
"에잇! 재수 옴붙었군. 돌아가자!"
그 자는 수하들과 함께 허둥지둥 장내를 떠났다.
하지만 그 자의 낭패한 모습에도 웃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청의인이 월지국 소녀를 사기 위해 제시한 금액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허허! 축하하오, 귀인(貴人)!"
인육대야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좌초백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자가 움직일 때마다 축 늘어진 뱃가죽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자는 얼른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좌초백의 앞으로 다가와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흐흐…… 어디서 온 덜떨어진 놈인지는 모르나 본좌에게 돈벼락을 내리는군!)
인육대야는 손바닥을 비비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때, 청의인이 그런 인육대야를 주시하며 음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귀공이 늘 최상품만 취급한다는 소문은 본좌의 주인께서도 들어 알고 계시오.
그래서 본좌가 서역으로부터 이 먼곳까지 찾아온 것이오!"
그 말에 인육대야는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귀공께도 주인이 있으시단 말씀입니까?
그 분이 누구신지……?"
그 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청의인은 주위를 돌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티……무르(帖木兒)라는 존귀한 이름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순간,
"티……무르!"
인육대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티무르(帖木兒)----!
후일 천축으로부터 저 멀리 대식국까지 지배했던 광대한 판도의 제국을 건설했던 전설적인 서역(西域)의 패왕,
그가 세운 광대한 제국을 티무르 제국이라 하거니와 그는 자신을 저 징키스칸의 후예라고 자처했었다.
비록 후일 영락제를 치기 위해 동정(東征)하다 병사하기는 했으나,
그 이름은 징키스칸의 부활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이미 티무르는 그 강맹한 군세를 신강의 서방에서 천산일대까지도 뻗히고 있었다.
그 같은 티무르인지라 인육대야의 놀라움의 공포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군께서는 곤륜 이서(以西)에 이궁(離宮)을 짓고 계시오.
본인은 그 곤륜이궁(崑崙離宮)의 할램을 채울 미인을 구하러 온 것이오!"
청의인은 여전히 내심을 알 수 없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헤헤! 서역제왕님의 후궁을 제공하게 되다니……
금생의 영광입니다!"
인육대야는 연신 허리를 굽신굽신하며 아첨의 웃음을 흘렸다.
청의인은 오연하게 턱으로 좌대 뒤의 천막을 가리켰다.
"저 안에 몇 명이나 더 있소?"
"예! 모두 열 명이 더 있습지요. 괜히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그 계집들은 하나같이 인간 중의 우물(尤物)들이지요,
헤헤!" 인육대야는 비굴하게 웃으며 청의인의 눈치를 살폈다.
청의인은 오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야가 그렇게 말하니 보지 않아도 알겠소.
좋소이다!
나머지 열 명도 모두 본좌가 인수 하겠소.
가격은 저 계집과 같은 금액으로!"
순간,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육대야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찢어져라 벌렸다.
그 자는 감격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그 자는 빠르게 머리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월지국소녀까지 합치면 모두 열 한 명,
그녀들을 각기 황금 십만 냥씩에 팔면 모두 백 십만 냥,
그것은 인육대야 자신이 평생 노예를 팔아모은 전재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흐흐! 물주를 제대로 만나 이십 년은 모아야할 재산을 한 번에 벌게 되었구나.)
그 자는 내심 춤이라도 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때, "계산은 이것으로 치루겠소!"
청의인이 품 속에서 하나의 비단 주머니를 꺼내 인육대야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주머니끈을 풀어보던 인육대야,
그자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오오……"그 자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비단주머니 속, 열 한 알의 거위알만한 금강석(:다이아몬드)이 들어있지 않은가?
그것 하나의 가치는 능히 황금 십만 냥 이상이었다.
거위알만한 금강석을 본 인육대야는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였다.
(세상에! 본좌가 천신만고 끝에 수집한 금강석만한 것들이 열 한 개씩이나 더 있다니!)
그 자는 금강석을 들여다보며 황홀한 눈빛을 지었다.
인육대야는 늘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보관하기 쉽게 갖가지 보석으로 바꾸어 가지고 다녔다.
그런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열 두 알의 금강석이었다.
항아십이월루(嫦娥十二月淚)라 불리는 그 금강석들은 한 알로 한 개의 성(城)을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한데 그 항아십이월루 못지 않은 금강석이 한꺼번에 열 한 개씩이나 인육대야의 손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 자는 너무 황홀한 너머지 그 금강석들이 자신의 항아십이월루와 크기와 색상이 똑같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마차 한 대 정도의 편의는 봐주실 수 있겠지요?"
청의인이 황홀경에 빠진 인육대야를 보며 말했다.
그제서야 인육대야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비단 주머니를 급히 품 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 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간살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헤헤! 물론입지요. 저것을 쓰십시오!"
그 자는 행여 청의인의 마음이 바뀔까봐 얼른 한쪽에 세워놓은 화려한 마차를 가리켰다.
여덟 필의 천마가 끄는 마차,
그것은 차라리 굴러다니는 궁전이라 할만큼 화려했다.
바로 인육대야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마차였다.
그 내부는 열 명이 충분히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온갖 편의시설이 다 되어 있었다.
인육대야는 그것을 선뜻 청의인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청의인은 인육대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맙소! 주군께 대야의 호의를 꼭 전해드리겠소!"
그는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어, 그는 월지국의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의복을 집어 소녀의 알몸을 가러주었다. "……!"
순간 월지국의 공주는 두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청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총총히 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라탔다.
이어 청의인의 지시에 따라 천막 안에 있던 열 명의 여인들도 차례로 마차에 올랐다.
면사를 쓴 대막여왕 철옥정 역시 중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여노예들과 섞여 급히 마차에 올랐다.
"다시…… 봅시다!"
여인들이 다 타자 청의인은 인육대야를 향해 손을 들어보이며 훌쩍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그와 함께,
두두두……
여덟 필의 말에 끌려 마차는 서서히 광장을 떠났다.
마차가 떠나자 중인들도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포극찰과 뇌전마도,
그 자들도 멍청히 서 있다가 별 수 없이 중인들과 함께 광장에서 사라졌다.
* * * * *
(흐흐…… 간밤에 내가 죽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길몽(吉夢)이었어. 이런 횡재를 하다니……!)
인육대야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광장의 뒤에 있는 한 채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화려하고 널찍한 천막 안은 제왕의 침실이 무색할만큼 화려무비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발목까지 파묻히는 융단이 깔려 있었고 드넓은 상아침상이 천막 내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상 옆에는 여러 개의 상자가 쌓여 있었다.
쇠사슬과 무거운 열쇠로 엄중하게 잠겨 있는 철제의 상자들,
그것들이야말로 인육대야의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인육대야가 인간사냥으로 벌어들인 온갖 재보가 가득 들어 있었다.
"헤헤! 이제 항아십이월루가 상아이십삼월루로 되겠구나!"
인육대야는 희열에 가득 찬 표정으로 급히 상자로 다가갔다.
그 상자 안에 바로 인육대야의 자랑거리인 항아십이월루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너무 기쁨에 들뜬 탓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천막의 문 안쪽, 어둠 속에 한쌍의 새파란 안광이 번뜩이고 있음을……
장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새까만 천으로 휘감은 한 명의 괴인이 어둠 속에 동화된 채 유령같이 서 있었다.
흑의인은 얼굴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어 한쌍의 스산한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인물의 허리에는 길이 다섯 자 가까운 반월(半月)형의 만도(蠻刀)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흑의인의 몸을 가린 검은 피풍자락에는 선연한 은빛 초생달이 수놓아져 있었다.
신비의 흑의괴인이 자신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줄 알리없는 인육대야,
그는 급히 무쇠금고의 뚜껑을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허억!"
인육대야의 입에서 둔기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둔탁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한껏 부릅떠진 그자의 눈은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쇠금고 안에 있어야할 인육대야의 생명과도 같은 항아십이월루가 붉은 주단 위에 그저 단 한 알 뿐이지 않은가?
대체 이것이 어찌된 변괴란 말인가?
"이…… 이럴 수가……?"
인육대야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어, 그는 급히 품 속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내들었다.
투투둑……! 주머니 속에 든 열 한 알의 금강석이 휘황한 빛을 뿌리며 주단 위로 떨어졌다.
그것들은 남아 있는 한 알의 금강석과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인육대야는 깨달았다.
자신이 열 한 명의 절세미녀의 대금으로 받은 금강석들이 다름아닌 자신의 항아십이월루였음을.
인육대야의 항아십이월루로 열 한 명의 미인을 사간 청의인은 물론 좌초백이었다.
좌초백은 천하 모든 도둑의 괴수였던 몰영자(沒影子)의 전인이 아니던가?
그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항아십이월루를 훔쳐내어 대막여왕 철옥정 등 십 일 명의 여노예를 사간 것이었다
. "이…… 이런 찢어죽일 놈!
감히 나에게 사기를 쳐?"
인육대야, 그 자는 두 손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치를 떨었다.
"내 이놈을 당장 육시를 해버리리라!"
그는 격심한 분노로 으르렁거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네놈…… 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한소리 싸늘한 냉갈이 인육대야의 귓전을 울렸다.
스악! 그와 함께 한 자루 시퍼런 만도(蠻刀)가 그 자의 목에 선듯 대어졌다.
"으…… 헉!"
인육대야는 질겁하며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제서야 그는 알아차렸다.
이 천막 안에 자신 외에 또 한 명이 있었음을.
"신…… 월동맹(新月同盟)!"
두 눈을 껌벅이며 암습자를 바라보던 인육대야의 입에서 공포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부릅떠진 두 눈은 흑의괴인의 피풍에 새겨진 은빛 초생달(新月)을 보고 있었다.
검은 피풍에 새겨진 은빛의 초생달,
그것은 서역일대를 주름잡는 하나의 무서운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第 16 章 新月騎士團, 第三의 勢力
신월동맹(新月同盟)----! 달리 신월기사단(新月騎士團)이라 불리는 비밀결사,
그들은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에서 횡행하는 도적의 무리들로부터 암중에서 상인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이 있기에 대상들은 천산남북로를 통해 서역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이 만발했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신월동맹이 저 월지국(月支國)의 비밀시위들이라는 설이었다.
월지국은 바로 중원과 서역 사이 대상로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월지국은 대상들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자연히 월지국에서는 서역과 중원 사이의 교역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대상들을 보호할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신월동맹이라는 것이었다.
신월동맹은 월지국 귀족들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뛰어난 근골에 갖가지 이역무공을 연마하여 하나같이 초절정의 고수들이라고 한다.
대상들에게 있어 신월동맹은 가히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면, 도적들과 악인들에게는 공포적 존재로 통했다.
한데, 그 신월동맹의 기사 복장을 한 인물이 인육대야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본좌가 왜 네놈 앞에 나타났는지 잘 알겠지?"
신월(新月)의 기사는 칼날을 인육대야의 목에 댄 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 "으…… 신월기사단이 월지국의 비밀시위들이라는 말이 사…… 실이었군!"
인육대야는 공포의 표정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자의 아랫도리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끼며 애원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단지 그 분 공주님을 돈으로 샀을 뿐……"
"닥쳐랏!"
신월기사의 서릿발 같은 냉갈이 인육대야의 말을 막았다.
"그 분 월아(月娥) 공주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
그는 이를 부득 갈며 다그쳐 물었다.
인육대야는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 분은 자칭 티무르의 사자라는 사기꾼에게 이미 팔렸…… 케엑!"
말을 하다 말고 그 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스---- 읏!
예리한 만도의 칼날이 그 자의 목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것이었다.
한껏 부릅떠진 인육대야의 두 눈은 여전히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투---- 욱! 푸하악!
다음순간 신월기사가 칼날의 끝을 선듯 돌리자 인육대야의 목이 그대로 잘라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머리가 잘려진 인육대야의 목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쿠---- 웅!
잠시 비틀거리며 서 있던 인육대야의 목없는 동체도 그대로 앞으로 고구라졌다.
"대월지(大月支)의 고귀한 분에게 손을 댄 놈은……
모두 이같이 되리라!"
인육대야의 목을 벤 신월기사,
그는 싸늘하게 냉갈하며 칼을 칼집에 꽂았다.
그때,
"단주(團主)! 청소를 완료했습니다!"
스스스……!
한 줄기 싸늘한 음성과 함께 사 인(四人)이 유령같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 자들 역시 신월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의복의 여기저기에 선혈이 묻어있었다.
아마도 인육대야의 백여 명 수하들이 모두 그들에게 도살당한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사패룡(四覇龍)!"
단주라 불린 인물은 말과 함께 무쇠 금고 속에서 항아십이월루를 모아 비단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으로 월아공주님의 그 동안 고초를 조금이나마 위안해 드려야겠다.)
이어, 그는 비단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품 속에 집어넣었다.
"공주님은 티무르의 사자를 자칭한 자의 손에 떨어졌다!
각기 화진성시의 사방을 수색하여 보고하라!"
기사단주는 사 인의 수하를 향해 침중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순간, "존…… 명!"
스스스……
신월사패룡(新月四覇龍)이라 불린 네 기사는 칼을 들어보인 뒤 질풍같이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나자 신월단주는 면사 속에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월아공주님을 찾기 전에는…… 결코 월지(月支)로 돌아가지 않겠다! 결코……)
다음 순간,
스---- 읏!
그의 신형 역시 유령같이 천막 안에서 사라졌다.
* * * * *
화진성시에서 남방으로 삼십여 리 떨어진 곳, 화르르르……!
휘도는 화진하변으로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일 장 가까이나 되는 갈대의 숲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한데 그 갈대밭의 중간에는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다.
여덟 필의 말이 끄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마차, 그것은 바로 인육대야가 타고 다니던 마차였다. "……!"
"……!"
마차 안에는 월지국의 소녀 등 십 일 명의 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차와 조금 떨어진 둔덕 위,
"……!"
푸른색의 피풍을 두른 좌초백이 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은 듯 초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십 리 사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다.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
절정의 내공을 지닌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탐지법이 아닌가?
좌초백의 모든 신경은 지금 귀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득, (이상하군!)
좌초백의 검미가 살짝 찌푸러졌다.
(두 부류의 무리가 나를 찾고있지 않은가?
한쪽은 포극찰의 수하들이라 해도 하른 한쪽은 누구란 말인가?)
그의 안색이 아주 침중하게 변했다.
그의 귀에는 포극찰의 수하들이 사방을 미친 듯이 뒤지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한데 그 자들과는 별도로 몇 명의 인물이 아주 은밀히 화진성시 주위를 수색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도의 추적술을 발휘하는 바람에 좌초백도 자칫 그 자들을 탐지하지 못할 뻔했다.
(신강오패천이라는 자들 이상가는 고수들이다.
도대체 어디서 온 자들이지?)
좌초백은 검미를 모으며 소리없이 신음했다.
신월기사단----! 그렇다.
좌초백을 추적하고 있는 또 한 부류의 인물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를 수호하는 그 비밀결사가 자신을 추종하고 있는 중임을 좌초백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는군……!)
스읏!
문득 좌초백의 두 눈이 번득 이채를 발했다.
쉬---- 하악! 화진성시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자는 벼락이 흐르는 듯한 속도로 질주해 오면서도 좌초백과 마찬가지로 천시지청술을 펼치고 있었다.
(저 자로군……!)
좌초백은 눈을 빛내며 날아오는 자를 주시했다.
풍(風)! 그 자는 바로 신강오패천 중 풍(風)자가 가슴에 새겨진 자였다.
한데, 그 자는 실로 기이한 모습으로 경공술을 펼치고 있었다.
보통의 경공술은 꼿꼿하게 선 채 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데, 그 자는 몸을 수평으로 누운 채 질풍같이 쏘아오거 있지 않은가?
좌초백의 눈가에 일순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저것은…… 마교(魔敎)의 비천경공의 하나인 섬전비마보(閃電飛魔步)다!)
풍 자(字)의 괴인을 보며 그는 문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신강무림의 지배자라는 신강오패천,
그 자들 역시 오래 전에 마교가 신강에 심어놓은 간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좌초백이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이상…… 하지 않은가?"
화라락!
질풍같이 날아온 풍자괴인이 좌초백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흠, 분명 그놈이 탄 마차가 이 주위에서 사라졌는데……!"
그 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갈대밭 옆은 대로(大路)였다.
그 때문에 수 많은 마차의 바퀴자국들이 나 있었다.
풍 자 괴인은 정확히 좌초백의 종적을 추종해온 것이었다.
한데, 정작 기아한 것은 그 자의 태도였다.
십일 명의 미인이 탄 화려한 마차는 그 자로부터 불과 십여 장 밖의 갈대숲에 서 있었다.
비록 갈대가 무성하나 마차를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인은 전혀 마차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괴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좌초백은 풍 자 괴인이 마차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둔형기문(遁形奇門)의 술(術)! 제법 쓸만하군!)
-둔형기문(遁形奇門).
그것은 바로 좌초백이 천앙마녀에게 배운 배교의 사술(邪術) 중 하나였다.
일종의 기문진세(奇門陣勢)에 섭혼사술을 가미한 절정의 은둔술이다.
이 둔형기문의 비술은 비단 감추려는 대상이나 형체 뿐 아니라 소리까지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내공소모가 심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것은 섭혼사술(攝魂邪術)과 함께 시전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공이 월등한 자의 이목은 완전히 속여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신강오패천은 좌초백보다 별로 내공이 강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자들이 좌초백 일행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좌초백이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질풍령주(疾風令主)님! 왜 이곳에 계십니까?"
화라락! 스스스……!
수십 명의 흉한들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마도추혼대(魔刀追魂隊), 바로 그 자들이었다.
다륜부를 피로 씻은 오이랍부의 정예들,
그 자들 역시 좌초백을 지척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질풍령주라 불리운 풍 자 괴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놈은 이쪽으로 오지 않은 모양이다!"
스---- 읏!
이어 그 자는 몸을 돌려 다시 화진성시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내심 미심쩍은 점이 있기는 했으나 차마 수하들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슷! 화라락!
서로 마주보던 마도추혼대의 흉한들은 이내 질풍령주가 날아간 곳을 향해 분분히 몸을 날렸다.
삽시에 그 자들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나자,
"휴우……!"
좌초백은 나직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마차쪽으로 다가갔다. "……!"
"……!"
열 한 명의 미녀들은 불안함과 의아함이 실린 눈으로 다가오는 좌초백을 주시했다.
마차의 문 앞에 이른 좌초백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포권했다.
"폐하! 이제는 당분간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
"……?"
그런 좌초백의 모습에 여인들은 어리둥절함을 금치못했다.
그것도 잠시, 열 명의 미녀들은 일제히 면사를 쓴 대막여왕 철옥정을 돌아보았다.
그녀들 역시 대막여왕 철옥정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품과 위엄을 느끼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좌초백은 그런 여인들의 태도에 내심 감탄을 금치못했다.
(역시다! 타고난 제왕(帝王)의 풍도는 억지로 숨겨지지 못하는구나!)
그때,
"……!"
대막여왕 철옥정, 그녀는 마차의 중앙에 단정히 앉은 자세로 좌초백을 바라보았다.
다른 여인들의 눈빛에 불안감이 서린데 비해 그녀의 눈빛은 지극히 차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좌초백은 그녀가 틀림없는 징키스칸의 후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公)은…… 뉘신가요?"
대막여왕 철옥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하고 듣기좋은 음성이나 절제된 위엄이 내재된 음성이었다.
좌초백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나유향이란 분의 부탁을 받고……
폐하를 달단왕부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순간, "향언니가……!"
철옥정의 봉목이 잠깐 흔들렸다.
안도감과 죄스러움이 실린 눈이었다.
그녀는 한 차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쉴 뿐 다륜족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다륜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였다.
철옥정은 여전히 기품이 실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귀공의 수고에는 무어라 치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는 달단왕부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저주…… 마역이란 곳에 꼭 가셔야겠습니까?"
좌초백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에 철옥정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위대한 대몽고(大蒙古)의 혼은 이미 황권이나 부족의 충성심만으로 지켜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꼭 저주마역(咀呪魔域)에 가야하는 거예요!"
그녀는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문득, 좌초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 교 때문입니까?"
그 말에 철옥정의 봉목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귀공은 …… 모르시는 것이 없군요!"
그녀의 봉목이 다시 우울한 근심으로 물들었다.
대막여왕 철옥정----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암중 감시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비밀스러운 감시의 눈길은 북원황실(北元皇室)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철옥정도 감시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일 년 전 그녀는 아버지 막북황야 철무엽이 군영에서 독살당한 후 비로소 어둠 속의 감시자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마교(魔敎)!>
감시자의 정체는 바로 그들이었다.
마교의 무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북원황실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그 자들의 행사는 지극히 은밀한 데다가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인지라 대막여왕 철옥정의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들이 없었던 막북황야 철무엽은 대막여왕 철옥정이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제왕학(帝王學)을 가르쳤다.
그 결과 철옥정은 백성을 통치하고
, 대군(大軍)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등의 능력에 있어 발군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무공은 실로 보잘것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북원황실 내의 고수자들도 이미 은밀히 마교의 무리에게 제거당한 상태였다.
이제 그녀의 능력으로서는 북원황실에 스며든 마교의 무리를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북원(北元) 제국은 그대로 마교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대막여왕 철옥정은 이 같은 실정을 파악하고 절망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이제 북원황실 내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철옥정은 한 가지 절세기연(絶世奇緣)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녀는 연례행사인 징키스칸의 능묘에 참배하기 위해 징기스칸의 묘가 있는 대영반(大營盤)으로 나갔다.
한데, 대영반에 자리한 징키스칸의 능묘에 참배하던 철옥정은
그곳에서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한 칸의 비밀석실을 발견했다.
그 석실에는 징키스칸이 남긴 막대한 양의 보물들이 비장되어 있었다.
그 보물들은 바로 징키스칸이 사해팔황을 정복하여 얻은 전리품들이었다.
그 중에는 갖가지 신병이기(神兵異器)와 광고절금의 신공절기가 수록된 비급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뭇 보물들 중 철옥정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하나의 반지였다.
-지옥마환(地獄魔環).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한 가지 무서운 전설을 지닌 마물(魔物)이었다.
즉, 신강(新疆) 어딘가에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저주받은 땅이 있다고 한다.
그곳을 저주마역(詛呪魔域)이라 하거니와,
만일 누군가 저주마역을 찾아낸다면 인세(人世)의 패왕(覇王)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저주마역…… 인세지옥이라 불리는 그곳에 아주 신비한 네 부류의 인간들이 산다고도 했다.
그들 네 부류의 무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처절한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어떤 악조건도 견디어내는 강인함과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지옥사패겁(地獄四覇劫).
그들은 이렇게 불렸다.
저주마역을 찾아내는 자는 곧 그들 지옥사패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은 수백 년 간 신강일대를 떠돌았다.
지옥마환(地獄魔環)----
그것은 바로 그 저주마역을 찾을 수 있는 열쇠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백여 년 전 징키스칸의 대원정행 때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것을 철옥정이 이백 년 만에 찾아낸 것이었다.
대막여왕 철옥정도 지옥마환의 전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만일 지옥마환의 비밀을 풀어 지옥사패겁을 수하로 거둘 수 있다면
아무리 마교라 해도 능히 북원의 강역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날부터 철옥정은 지옥마환의 비밀을 풀기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보름 전, 철옥정은 아주 우연히 지옥마환이 비밀을 풀어냈다.
뛸 듯이 기뻐한 철옥정은 그 즉시 충성스러운 일천 기의 시위를 선발하여 저주마역을 향해 달단왕부를 출발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철옥정이 지옥마환을 얻은 사실은 철저한 비밀에 붙였건만 어찌된 일인지 마교에서 이를 감지한 것이었다.
결국, 철옥정은 포극찰이 이끄는 오이랍부와 마교의 흉사들에게 피습당해 다륜부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녀가 피신한 다륜부마저 참극을 면치 못한 것이었다.
좌초백은 대막여왕 철옥정의 완강한 태도에 내심 당혹함을 금치못했다.
(난감하게 되었군.
나부인에게 이 분을 보호해 드린다고 약속을 했지만 결코 고집을 꺾을 분이 아니니……!)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저주마역을 찾아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포극찰을 비롯한 마교의 무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철옥정이 지옥사패겁(地獄四覇劫)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들 것이었다.
더군다나 포극찰의 말로는 저 십대천마(十大天魔)의 일 인인 천수존자(千手尊者)까지 신강에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선의 방법은 철옥정을 아직은 그래도 안전한 달단족의 왕부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좌초백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철옥정, 그녀는 한 번 결심한 것을 결코 번복하지 않을 성격임을.
좌초백은 별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소생이 저주마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철옥정은 그윽한 눈길로 좌초백을 바라보았다.
"공자께서 수행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녀는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든든해졌다.
그것은 좌초백에게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믿음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늘 암살의 위험 속에 살아온 철옥정에게 이런 경험은 실로 난생 처음이었다.
그때, 좌초백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시간 이후 저주마역에 닿을 때까지 소생의 말에 전적으로 따라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철옥정은 아직도 대명제국과 자웅을 견할만한 대제국 북원(北元)의 여제(女帝)인 것이다.
만일 그녀가 끝내 권위를 내세운다면 좌초백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뜻밖에도 철옥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하지요. 선제(先帝)의 원한을 갚고 부족의 영화를 재건할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어요!"
이어, 그녀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어쨌든 공자는 황금 십만 냥씩에 우리를 산 공식적인 주인이 아닌가요?"
"……!"
"……!"
철옥정의 말에 열 명의 여인들의 옥용이 화들짝 붉어졌다.
그녀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좌초백의 노예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아주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인간 중에서 가장 비천한 것이 노예라지만 눈 앞의 신비소년의 노예가 되었다는 점은 별로 기분 나쁘지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월지국 공주라는 색목소녀의 마음은 더욱 각별했다.
그녀는 자칫 늙은 색마의 노리개로 전락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를 좌초백이 아주 비싼 금액으로 사들여 구제해준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녀의 방심에는 어느덧 좌초백의 모습이 지울 수 없는 깊이로 새겨진 상태였다.
좌초백은 철옥정의 말에 몸둘 바를 몰랐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소생이 어찌 감히 폐하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곤혹한 눈빛이 되어 말을 더듬거렸다.
"이 모두 폐하를 빼내기 위해 꾸민 짓이니 관여치 마십시오.
열 분도 일단 안전한 곳에 모신 뒤 각자 고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철옥정은 그윽한 눈빛으로 좌초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그만 떠나요.
저주마역으로 가는 경로에 아직은 믿을만한 부족이 몇 개 있으니 그곳에 아이들을 맡기면 되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좌초백은 공손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그는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으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막 마부석에 올라가려는 순간, 스---- 악!
돌연 한 가닥 서릿발 같은 경기가 좌초백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헛!) 좌초백은 질겁했다.
스---- 읏!
하지만 그는 벼락치듯 신형을 휘돌리며 짓쳐드는 경기를 따라 좌측으로 폭사해 나갔다.
몰영환마보의 이체환영(移體幻影)의 보법,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기민한 보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퍼---- 억!
한 가닥 화끈한 통증과 함께 좌초백의 옆구리로 맹렬한 도세(刀勢)가 작렬했다.
(크윽!)
좌초백은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주르르 물러섰다.
비록 현철마강(玄鐵魔 ) 덕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강렬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만큼 그의 허리를 가격한 도세에는 강맹한 역도가 실려있는 것이었다.
"누…… 구냐?"
좌초백은 비틀거리는 신형을 세우며 사납게 폭갈했다.
그런 그의 앞, 언제였던가?
"……!"
화라락!
한 명의 흑의괴인이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산악같이 우뚝 서 있었다.
다섯 자 가까이나 되는 긴 반월도(半月刀)를 기이한 자세로 안고 서 있는 인물,
그 자의 몸을 감싼 피풍에는 찬연한 은빛 초생달이 새겨져 있었다.
좌초백은 한 눈에 그 인물이 자신을 추격하던 또 한 부류의 무리 중 일 인임을 알아차렸다.
"신월(新月)의 이름으로 너를 베겠다! 대
월지(大月支)의 천금께 죄를 범한 대가로……!"
흑의인이 모든 감정이 절제된 냉오한 음성으로 말했다.
신월기사(新月騎士)-! 그렇다.
그 장한은 바로 전 신월동맹 기사(騎士)의 일 인이었다.
신월사패룡! 이렇게 불리던 사 인의 기사 중 일 인이었던 것이다.
좌초백은 안색이 굳어졌다.
(강한 자다! 신강오패천 이상인데……!)
그는 내심 아연긴장했다.
눈 앞의 신월기사(新月騎士)가 자신이 출도 후 만나는 최초의 강적임을 느낀 탓이었다.
"각오하랏!"
그때 신월기사가 사납게 일갈하며 질풍같이 좌초백을 향해 덮쳐들었다.
마치 질풍과도 같은 신법이었다.
쉬---- 하악! 파츠츠……!
그와함께 신월기사의 반월도는 벼락치듯 좌초백을 향해 그어졌다.
절정의 쾌도(快刀), 눈깜짝할 사이 신월기사는 삼십 육 번의 칼질을 해댔다.
보통사람이라면 신월기사의 초식을 알아보는 것은 고사하고 일순 당황하여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좌초백의 신안(神眼)은 순간적으로 신월기사가 펼치는 삼십 육 변의 도세를 읽어냈다.
스스슷!
그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전력으로 신법을 시전하여 도세를 피해내려 했다.
그러나 삼십 오 변의 도세까지는 신법으로 어떻게 벗어났지만 마지막 삼십 육 변만은 미처 보법으로 피할 여유가 없었다.
따당----!
다음순간 양인 사이에 요란한 금속성이 터져올랐다.
놀랍게도 신월기사의 칼을 좌초백이 맨손으로 받아낸 것이었다.
현철마강을 연마한 좌초백의 두 손은 만년한철보다 오히려 단단했다.
그 때문에, 신월기사의 칼이 부딪혀 금속성이 터진 것이었다.
"우웃!"
"……!"
스슥! 화라라락!
양인은 훌쩍 좌우로 떨어졌다.
순간 신월기사의 두 눈이 면사 사이로 경악에 물들었다.
(맨손으로 나의 보도(寶刀)를 받아내다니……!)
하지만 이내 그 자는 이를 부득 갈았다.
"흥! 어디서 철수공(鐵手功) 따위를 좀 배운 모양인데 어디 한 번 본좌의 월영비폭도결(月影飛暴刀訣)을 받아봐라!"
그는 사납게 외치며 수중의 반월도를 쳐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그만두어라, 자룡(紫龍)! 너의 패배다."
돌연 두사람의 측면에서 한소리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 주님!"
"……!"
이 인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스스스……
마차의 좌측, 여린 갈대의 끝을 밟고 한 명의 흑의인이 유령같이 표표히 서 있었다.
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위에 서 있건만
그 인물의 신형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신월단주(新月團主)-!
그 인물은 바로 인육대야를 살해했던 그 자였다.
좌초백과 대결중인 신월기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피풍의 끝자락에 한 줄의 금테가 둘러져 있는 것만이 달랐다.
좌초백은 그 인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신월단주는 그만큼 강자인 것이다.
그는 저 무저마계의 사계마왕(四界魔王)과 비교해도 그다지 뒤지지 않을 초고수자로 보였다.
좌초백은 검미를 모았다.
(이런 초고수자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보아하니 마교의 무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찬바람을 들이키며 신월단주를 주시했다.
그때, 신월단주도 좌초백을 주시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비수 같은 눈빛, 그것은 좌초백의 가슴을 꿰뚫을 듯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문득, "본좌는 신월동맹 삼대맹주(三大盟主)의 일 인 흑월백작(黑月白爵)이라 하네.
자네가 월아공주(月娥公主)님을 돌보아준점 감사하네!"
흑의인은 갈대 위에 선 채 한 손을 들어보였다.
흑월백작(黑月白爵)-!
이것이 그 인물의 별호였다.
본래, 신월동맹은 삼 개의 기사단으로 이루어졌다.
흑(黑), 백(白), 혈(血)!
이것이 그들 삼 개 기사단의 상징색이며 그들이 걸치는 피풍색으로 그 소속을 구분하게 된다.
흑월백작, 좌초백의 앞에 나타난 그 인물은 바로 신월동맹의 삼 개 기사단 중 흑월기사단(黑月騎士團)의 총수인 것이다.
좌초백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이 인물……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로 나와 여왕 사이의 대화를 모두 들었군!)
그가 자칫 방심하여 둔형기문술이 약화된 사이에 신월기사단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그때, "흑월아저씨!"
마차의 문이 발칵 열리며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흑월백작에게로 달려드는 소녀,
그녀는 바로 월지국의 공주 월아(月娥)라는 소녀였다.
"흐윽……!" 그녀는 지면에 내려선 흑월백작의 틈에 와락 안기며 오열을 터뜨렸다.
"공주님, 이제 안심하십시오!
소신이 왔으니……!" 흑월백작은 오열하는 월아공주를 감싸안으며 따스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좌초백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한시름 덜게 되었군!)
신월기사단이 월지국의 소녀를 찾아서 자신을 추종한 것을 안 그는 실로 다행함을 금치못했다.
어느덧, 밤은 깊이 삼경이 지나고 있었다
. * * * * *
광활한 사막, 스으으……
핏빛 노을이 메마른 땅을 적시며 짙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노을 속으로 한쌍의 낙타가 긴 그림자를 끌고 움직이고 있었다.
두 마리의 낙타 위에는 일남일녀가 타고 있었다.
각기 두터운 피풍으로 몸을 가린 남녀,
그들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도 두터운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좌초백과 대막여왕 철옥정, 바로 그들이었다.
"……!"
철옥정은 면사 사이로 봉목을 빛내며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좌초백의 눈은 어느 곳도 보고있지 않은 듯했다.
그렇건만 그는 끊임없이 천시지청술을 펼쳐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 리 사방 어디에도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신월기사단이 제대로 포극찰을 유인해간 모양이군!)
좌초백은 내심 중얼거리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진하변에서 신월기사단과 해어졌다.
흑월백작은 좌초백을 위해 포극찰과 마교의 이목을 속여주기로 했었다.
즉, 흑월백작 자신이 좌초백으로 변장하여 인육대야의 향차를 몰고간 것이었다.
포극찰은 철옥정이 여전히 그 마차를 타고있는 줄 알고 추적해갔을 것이다.
하지만, 좌초백이 보았듯이 흑월백작은 세상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초강자였다.
포극찰이든 신강오패든 섣불리 흑월백작을 건드렸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임이 분명했다.
(신월기사단 덕분에 금쪽같은 시간을 벌었다.)
좌초백은 내심 염두를 굴리며 철옥정의 뒷모습을 흘깃 바라보았다.
철옥정은 지금 그녀답지 않게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목적으로 하던 저주마역에 거의 다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푸르르……!
문득 두 마리의 낙타가 한 차례 두레질을 하며 앞쪽을 주시했다.
사구(沙丘), 높직한 사구가 두남녀의 앞에 나타났다.
낙타들은 그 사구를 바라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것은 낙타들이 물냄새를 맡았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윽고, "다 왔어요!"
대막여왕 철옥정이 흥분된 음성으로 말했다.
두두두……! 이어 그녀는 급히 낙타를 몰아 높직한 사구 위로 올라갔다.
좌초백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다음 순간, "아……!"
"……!"
사구 위로 올라서던 두 남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의 앞에는 실로 보기드문 광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고오오…… 콰르르……!
흑선풍(黑旋風)! 흔히 용권풍(龍拳風)이라 불리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양인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었다.
거리는 대략 십여 리 밖, 거대한 돌개바람은 그곳에 허공 수천 장까지 휘몰아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천, 수백…… 실로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엄청난 수의 용권풍이 맹렬한 기세로 휘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 많은 흑룡(黑龍)들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 듯한 광경이었다.
지평선이 온통 용권풍으로 뒤덮인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 불현듯 사막 한가운데서 솟구친 것처럼 보였다.
대자연이 이루어낸 놀라운 신비……
한데, 기이한 것은 그 용권풍의 무리들이 한 곳에서 휘돌 뿐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용권풍의 무리들을 가두어놓고 있는 듯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어요.
저 흑룡대강풍역(黑龍大 風域) 안쪽이 바로 저주마역이예요."
대막여왕 철옥정이 흥분하여 외치며 전면을 가리켰다
.
흑룡대강풍역(黑龍大 風域)----!
이것이 용권풍에 휩싸인 부근의 이름이었다.
신강제일의 금역(禁域), 하나도 아닌 수천 개의 거대한 용권풍,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흑룡대강풍역 부근으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데…… 신강의 전설적 마역인 저주마역이 바로 그 흑룡대강풍역 안쪽에 있다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첫댓글 감사ㅡ
즐감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즐감이요!!!
매우 잘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중입니다.
감사합니다!! ㅋㅋ
즐독,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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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하였습니다.
재밋게 즐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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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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