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위스 월드컵
1) 아시아 독립국가로서 월드컵 첫 출전한 한국 축구
<마법의 팀>과 첫대면하다
: 제5회 월드컵은 54년 6월 16일부터 7월 14일까지 스위스의 베른,
취리히,제네바,로잔느 등 6개 도시에서 거행되었다.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열린 이 대회는 열대처럼 강렬한 일기의 변화,
몰아치는 소나기 등 격정적인 컨디션 아리 전개되었으며, 풍성한 경기
내용과 그에 따른 파란 역시 어느 대회 못지 않았다.
특히 이번 대회에선 아시아 독립국가로서 월드컵 첫 출전한 한국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아시아 지역에서 첫 출전팀은 38년 프랑스 월드컵
에 출전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현 인도네시아). 식민지인 그 팀을
제외하고 독립국가로선 한국이 첫 나들이였다. 또한 강호 헝가리와 맞
선 것은 한국축구사에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대회는 4개 조로 나뉘어 리그전을 치르지 않고 각조마다 상위 두팀을
서로 맞붙지 않도록 한 후 약팀을 탈락시켜 모두 8개팀이 준준결승전에
진출하도록 하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패권을 가려냈다.
<마법의 팀> 이란 헝가리는 1950년대 초반을 휩쓸었으며, 3년 동안 32
전 무패의 신화적인 기록을 남긴 천하무적의 팀이었다. 주장 푸스카스
를 중심으로 보스치크, 코시스, 히데구티 등 공격수들이 펼치는 현란한
묘기는 문자 그대로 마법사들의 진기였다.
헝가리는 52년 헬싱키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53년 홈
그라운드에서 백 년동안 진 역사가 없다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6-3으로 눌러 이겨 <웸블리의 하늘 무너지다>라는 신문
제목을 마련해주었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5회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두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맞붙었
지만 7-1이란 엄청난 스코어차로 물러서야 할만큼 헝가리의 위력을 대
단탖다. 헝가리 팀의 위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헝가리 대표팀의 주전 선수 모두 헝가리 명문 FC 킨베드 혼베드 소속의
선수들이었다. 혼베드 소속의 선수들은 새로운 비밀 병기를 몸에 익혔
다. 바로 그들의 소속팀에서 쓰는 혼베드 전법, 일명 "WW 전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MM 또는 WM 전법과 유사한 이 전법은 헝가리 대
표팀 코치이며 체육부 차관인 구스타브 세베스씨로부터 개발되었으며,
WW전법 이라고 부른다. 이 전법에서 미드필드와 방어선수들의 배열은
시스템 전법과 같으나 포드진은 반대로 배열되었다. 시스템 전법과 달
리 앞쪽 포드의 역활을 강화하기 위해 하프윙 뒤쪽으로 다른 윙과 센터
포워드(모두 3명)을 배치시켰다. 이와같이 혼베드팀은 코시스 선수와
푸스카스 선수를 제일 전방에 내세웠고 부다이와 지보르 선수등의 윙들
이 센터포워드와 같이 뒤로 세웠다. 히데쿠티 를 전열의 뒤에 감추어져
방어선수로 하여금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경기를 펼쳤다. 바로 그전
법이 바로 <마법의 팀>을 만들어내었고 <세계최강> 잉글랜드를 대파한
것이었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때마침 스위스에서는 한국 전쟁에 참천한 UN 16
개국 회의가 열리고 있던 참이어서 한국은 외무장관 변영태 씨 등 대표
단 5명이 미리 가있었다. 변 장관 일행은 한국팀이 2조에 소속, 강적
헝가리와 대전하게 된 것을 미리 알고 이미 현지에서 연일 연습게임
을 벌이고 있는 헝가리 팀을 면밀히 관찰했다. 과연 헝가리 팀은 무적
이었다. 스위스의 1부리그 팀과 맞붙어 10-0 이란 스코어를 내고 매일
연전연승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대회는 1조에 브라질, 유고, 프랑스, 멕시코. 2조에는 헝가리, 서독
, 한국, 터키. 3조에 우루과이, 오스트리아, 체코, 스코틀랜드. 4조에
잉글랜드,이탈리아,스위스,벨기에 등 16개팀이 16일부터 일제히 예선에
들어감으로써 막을 올렸다.
브라질은 예상대로 1조에서 두각을 나타내 유고와함께 준준결승에 올랐
으며 2조에서는 헝가리와 서독, 3조에서는 우루과이와 오스트리아, 4조
에서는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가 각각 8강 대열에 끼어들었다.
2) 헝가리와 대전한 한국. 결과는 자랑스런 9-0 패배
: 우승후보 헝가리와 예선 첫 경기에 격돌한 것은 아시아 대표 한국이었
다. 헝가리는 벌써 오래전에 스위스에 도착해서 제네바, 로잔느, 루가
노 를 순회하면서 연습 게임을 치르는 여유 마저 보이고 있었지만 한국
은 64시간 장거리 비행을 강행한 끝에 대회 개막일 오후 늦게서야 허둥
지둥 스위스 땅을 밟았고,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헝가리 와의 월드컵 데뷔전을 준비해야 했다.
스위스 1부리그 명문 그래스호퍼 취리히 의 홈구장 그래스호퍼 스타디
움에 헝가리와 한국선수들이 도열해 섰다. 경기전 행사 때문에 센터서
클 한가운데 서 있던 김용식 코치는 감개무량해 했다. 18년을 더 거슬
러 올라가는 이야기이지만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도 돌아가던 길에 이
곳에 들러 친선경기를 가진 일본 축구대표팀에 끼여 있었던 단 한사람
의 조선인 축구선수가 바로 그였다. 그때의 경기장도 바로 이 그래스호
퍼 스타디움. 그때 친선경기에서 일본 대표팀이 16-0으로 대패했지만
김용식으로서는 난생 처음 해본 나이터 경기여서 그래서호퍼는 더욱 감
회 깊은 곳이었다.
경기시작 1분 전. 한국의 베스트 11을 모아놓고 몇마디 작전지시를 내
린 뒤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을 김 코치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
었다. 연습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떠나온데다 무엇보다도 푸더 28형
에어 프랑스기의 심한 진동 속에 이틀밤을 견딘 피로가 선수들의 표정
속에 짙게 깔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GK 홍덕영을 비롯한 박규정, 박재승, 강창기, 민병대, 주영광,
정남식, 성낙운, 최정민, 우상권, 박일갑 등 11명의 선수가 선발로 나
갔고 헝가리 역시 첫 경기였던 만큼 푸스카스,코시스,지보르,보스치크
등 베스트를 그대로 출전시켰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스위스 관중은 약팀 한국에 일방적인 응원
을 보냈다. 초반 한국은 수비를 강화하면서 헝가리 게임메이커 인 푸
스카스를 강창기가 확실하게 봉쇄하면서 역습의 기회를 노렸다. 밀고
밀리는 시소의 균형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전반 7분 헝가리의 공격을
차단한 민병대가 백패스한 볼을 박재승이 롱킹, 최전방의 최정민에게
연결했다. 헝가리 수비진은 모두 공격에 가담하느라고 로란트 혼자서
자기 진영 중간을 지키고 있었다. 최정민과 로란트의 단독 대결.
공이 빠지는 순간 어느 틈엔지 골키퍼 그로치가 달려나와 공을 차내버
렸다. 한국팀으로서는 이것이 가장 아쉬운 기회였다. 불의의 역습을
당한 헝가리는 약팀 한국에 고전하자 이내 초조해 지기 시작했는지 자
기 편끼리 성난 목소리로 떠들어대면서 난폭한 플레이로 나왔다.
한국 진영 오른쪽에서 측면돌하려던 푸스카스가 강창기의 태클에 넘어
지자 일어나서 험상궂은 얼굴로 강창기에게 달려들었다. 강창기 선수
는 뒷걸음질로 요리조리 도망쳤고 푸스카스는 그를 뒤쫓는 촌극을 벌
였으나 관중들은 일대 폭소, 한국을 응원하는 이들은 "푸스카스! 푸스
카스!"를 외치면서 이 세계 제일의 선수에게 야유를 보냈다.
주심 벵상티시의 제지로 경기는 속개되었고 한국은 계속되는 위기에도
잘 벗어나 역습도 때때로 시도했다. 전반 16분 왼쪽 날개 박일갑 선수
가 쏜살같이 치고 들어가 찬스가 오는 듯 싶었으나 센터링한 볼이 대시
해들어가던 정남식의 키를 넘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전반 20분까지
한국은 민병대를 중심으로 페널티 에어리어 중앙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헝가리의 기동력을 약화시켰다. 탐색전을 마친 양팀은 차차 활기찬 공
방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23분 주영광의 태클을 뿌리친 코시스가 크
로스패스, 이를 받은 팔로타스가 대시해 들어가면서 한국 수비진을 교
란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왼쪽으로 급속히 달려들어가면서 강슛, 아차
하는 한국 골네트에 볼이 쳐박혔다. 치보르의 선제골이었다. 팽팽하던
전세가 황금의 선제골로 차차 기울기 시작했다. 천하무적이라는 헝가
리는 초반에 고전한것이 부끄러웠다는듯이 최선을 다해 한국을 괴롭히
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벤치에 앉아서 관전하던 김용식 코치의 눈에 헝가리의 공격 방법을 유
심히 쫓고 있었다. 그것은 미드필드를 완전히 장악하는 새로운 체제,
바로 <혼베드 전법>이었다. 헝가리 팀은 혼베드 전법과 4-2-4 전법을
융합한 전법을 쓰고 있었고 한국은 이 전략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피로에 피로가 몇겹으로 압박하고 있었던지 주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28분경, 그래스호퍼 스타디움은 또 한번의 환성이 메아리쳤다. 코시스
가 두번째 득점을 한 것이었다.
한국의 열세는 이 득점으로 인해 뚜렷해졌다. 한국 선수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녀 땀투성이가 되어버렸지만 헝가리의 눈부신 패싱을 막을수가
없었다. 한국은 전반 32분 마술같은 오베헤드킥에 얼어붙어버렸다.
페널티 에어리에를 향해 전력 질주하던 코시스가 별언간 돌아누으면서
마이너스킥, 그대로 골네트에 걸리고 만다.
한국은 그뒤 무려 9개의 득점을 허용했지만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리송
할 뿐 정신없이 공만 쫓아다녔다. 헝가리는 지칠 대로 지친 한국팀 위
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화려한 개인기와 더할 나위없는 무서운 스태미
너, 그리고 엄청난 킥력으로 한국을 다그쳤다.
한국은 전반에 우상권 선수가 단 두 개 슛팅을 날렸을 뿐, 후반엔 단
한개의 슛팅도 때려보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헝가리의 엄청난 슛팅
을 막아내기 위해 <동양의 진주> 최정민 까지 수비에 합류했기 때문이
었다. GK 홍덕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헝가리의 슛팅은 대포알 같았고, 푸스카스나 지보르, 코시스가 때린
것은 공이 안보일정도였다, 특히 골포스트나 바에 맞으면 마치 천둥이
치는듯 했다"
한국 선수들은 거의 기진맥진해했고 설상가상으로 거의 대부분 선수들
이 발에 쥐가 나 운동장에 쓰러졌다. 남은 5분동안 연달아 세골을 허용
해 스코어는 9-0, 월드컵 데뷔전을 9골이나 내주고 한국이 패배했다.
한국의 패인은 무엇보다도 피로 때문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도 제
대로 싸우기 힘든 헝가리를 피곤한 몸으로 싸운 자체가 한국이 대패할
것을 암시했지만 서독이 8점이나 실점한 것을 볼때 피로한 상태의 한국
이 9점밖에 내주지 않은 것을 볼때 선전이었다.
시합이 끝난뒤 헝가리 코치 구스타프 세베스 는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
감했다" 고 칭찬했다.
닷새 뒤 한국은 제네바에서 터키와 2차전을 가졌으나 1차전의 대패와
부상 등으로 7-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은 2전 2패 16실점
을 하며 한국의 월드컵 데뷔를 아픈 상처로 남기게 되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한국은 아시아 축구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 계기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