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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1구간과 봉화
(2016. 9. 29∼9. 30)
瓦也 정유순
가락국(駕洛國, 또는 고령가야)동쪽으로 흘러 이름 붙여진 낙동강(洛東江)은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산을 뚫은 구문소(求門沼)에 용의 전설을 만들어 봉화(奉化)로 넘어와 안동, 예천, 상주, 구미, 왜관, 대구 그리고 삼량진에서 진주남강을 끌어안고 부산 포구까지 1,300여리 영남지역을 적시며 유유히 흐른다.
<태백의 구문소>
그리고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 나오다가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굽어질 때, 태백산 남쪽줄기 구봉산(九峰山)에서 시작하여 백병산,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 금정산으로 이어져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芸臺)에 이르는 산줄기로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 실학자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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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지도>
그래서 봉화는 낙동강의 물이 영남으로 흘러 들어오는 첫 관문이고, 백두산(白頭山)의 정기(精氣)가 호랑이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골반에 해당되어 모든 힘이 응집되는 중요한 곳으로, 동북방향으로는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며, 서남방향으로는 비스듬히 얕아지는 지세를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의 중심 표지석>
그 골반에 해당되는 곳이 ‘낙동정맥 봉화1구간’ 같다. 이 1구간의 입구인 석계재에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임도(林道)는 나있었지만 숲을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일반인의 통행이 허용된 구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낙동정맥 구간길이 만들어지면서 최근에 개방되었나 보다.
<낙동정맥봉화1구간 석계재 입구>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천남성(天南星)이 반긴다. 언젠가 같이 길을 걷던 여성도반에게 “혹시 천남성을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얼굴을 붉히며 “이미 첫 남성을 잊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웃은 적도 있는 이 천남성은 장희빈의 사약(賜藥)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아주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다는 약초이다.
<천남성>
조금 더 길목으로 깊게 들어가니 우거진 숲 사이로 앵두 같은 열매가 또 고개를 내민다. 무슨 “철모르는 앵두”가 열렸나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서니 “단풍이 들어 잎은 떨어져도 열매는 서리가 와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낙상홍(落霜紅) 빨간 열매가 새들의 겨우살이를 준비했으며, 황국(黃菊)이라고도 불리며 말려서 국화차로 많이 사용하는 감국(甘菊)도 짙은 향으로 쑥부쟁이, 구절초와 함께 가을이 이미 와 있음을 또 알린다.
<낙상홍>
<감국>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길옆의 초목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함께 벗을 하니 발걸음은 다소 늦어지지만 힘은 덜 들고 걷는 재미는 솔솔 하다. 깊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잠든 영혼을 조용히 깨우는 것 같다. 계곡의 고요함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가 현세에 강림하신다면 꼭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모든 근심을 생각했으리라. 나도 성자(聖者)가 된 기분이다.
<낙동정맥봉화1구간의 길>
흥에 스스로 도취되어 오는 줄 모르고 도착한 곳이 ‘샘터마을’이다. 산기슭 작은 웅덩이에서 차가운 물이 사시사철 솟아나고 물맛이 아주 좋아 마을사람들이 공동우물로 사용하여 ‘샘터’라는 이름이 붙었고, 비가와도 가물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은 수량과 수온을 유지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이런 평화스러운 마을에 1968년에 일어난 삼척·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공비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소탕 된 아픈 역사도 함께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샘터마을의 유래>
서울에서 새벽부터 서둘러 온 곳이라 벌써 오전이 지나친다. 마을에 사신다는 내외분께서 닭백숙으로 정성껏 만들어주신 점심으로 포식을 한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고는 하지만 사랑과 정성을 들인 음식은 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피로도 씻어 주고 마음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닭백숙>
다시 재촉하여 길을 나선다. 샘터교를 지나자 기관지염과 위장병에 좋다는 마가목(馬牙木)도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가지에 매단다. 멕시코가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많이 재배하는 다알리아(dahlia)도 가을 색을 더하고, 가지와 고추를 교배하여 생긴 가지고추도 가지색으로 익어간다. 하나 따서 풋고추 먹듯 먹어보니 고추처럼 맵지 않고 달척지근 하다.
<마가목>
<다알리아>
<가지고추>
반야마을까지 이어지는 길목 밭에는 오미자와 수수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오미자(五味子)는 단맛, 신맛, 매운맛, 쓴맛, 짠맛의 다섯 가지의 맛을 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그중 신맛이 강하다. 수수는 고량(高粱)으로도 불리는데 우리나라 어느 땅에서도 잘 자라고 식용하기도 한다. 사과밭에는 꿀 사과가 수확을 기다리고, 고랭지 채소밭에는 두 부부가 마지막 배추손질에 바쁘다.
<오미자>
<수수>
<사과>
<고랭지채소>
반야마을의 반야가 ‘불교의 근본교리 중의 하나인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가 아닌가 하여 은근히 궁금해 했는데, 지형이 ‘소반 같이 넓은 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반야(盤野) 또는 ‘너래들’로 불린다고 한다. 예로부터 반야마을은 “들이 넓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고, 언제나 깨끗한 물이 흘러 전염병이 돌지 않으며, 사방에 높은 산이 둘러쳐 있어 전란(戰亂)의 피해가 없어서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땅”이었다고 한다. 해방 전에는 6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0여 세대가 고랭지채소 등을 재배하고 일부는 펜션도 운영한다.
<반야마을 경로당>
금강소나무가 도열하듯 석포리천을 따라 구비 진 언덕에 올라와서 바쁘게 분천역으로 이동한다. 당초계획은 V트레인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철도노조원들의 파업으로 운행을 안 한단다. 분천역은 2013년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하면서 산타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V-train 분천>
마을광장에 들어서자 유럽풍의 풍차가 큰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산타와 순록의 형상도 보인다. 역사(驛舍)의 주변이 온통 산타와 관련된 조형물들이다. 춘양목 벌채사업과 석탄산업이 왕성하던 때는 열차의 통행량도, 모여드는 인구도 지금의 10배는 더 되었는데, 이들 산업의 쇠퇴로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한다.
<풍차, 이글루, 눈사람>
<산타와 썰매>
<분천역 산타>
분천역 앞에는 호랑이를 닮은 거대한 바위산이 있었는데,1991년 지나가던 점쟁이가 이를 보며 “저 산 모양이 호랑이를 닮아 사람들이 무서워서 오지를 않는구나. 저 산을 깎아 내리면 이곳에 천호가 들어설 것이다”라고 하였다는데, 때마침 자갈공장이 들어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자 호랑이 형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이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20여년이 지난 2013년에는 V트레인과 O트레인 협곡열차가 개통되었고, 2014년에는 산타마을과 산타열차가 생겨 전국의 유명관광지가 되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분천역대합실의 백호>
그러나 마을구경을 하며 주민 한 분에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웬걸 반대로 말씀 하신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했었으나 열차의 도착과 출발시간이 밥 때와 서로 다르고, 머무는 시간이 짧아 마을경제에 도움이 안 됨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머물면서 동네가 시끄럽고 쓰레기만 늘어나 쓸데없는 비용만 증가한다”고 푸념 하신다.
<마을 벽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울안에 있는 대추나무에서 토실토실한 대추를 한 주먹 따 주신다. 아직도 풋풋한 시골인심이 살아 있어 반가웠고, 갑자기 옛날 고향생각이 난다. 분천역 앞에서 능이버섯 전골로 저녁을 하고 춘양면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캠프파이어로 하루를 마감하고 곤한 잠속으로 빠져든다.
<모닥불>
아침부터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날이 밝아 숙소 주변을 살펴보니 폐교가 된 자리에 펜션이 들어선 것 같다. 운동장에는 잔디가 깔끔하고 교실이었던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는지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먼 산의 골짜기에는 흰 구름이 안개처럼 걸쳐 있다.
<숙소전경>
<안개구름>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이동하는데 비가 주적주적 내리다가 도착지에 당도하면 잠시 그친다. 넓은 골짜기를 배경으로 들어선 위용이 대단하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총면적 5,179ha로, 산림청에서 총사업비 3,215억원을 투입하여 2015년 12월에 완공하여 2016년 하반기에 임시 개원했고, 2017년에 정식 개원할 예정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주요시설로는 종자은행, 종자저장시설, 연구시설, 기후변화지표식물원 그리고 전시 공간 등이 설치되었다. 미리 예약을 했으면 전기자동차를 이용하여 수목원 관내를 돌아볼 수 있는데, 예약이 안 되어 자유로이 관람할 수 있는 약용식물원 까지만 둘러본다. 생태탐방지구는 금강소나무를 대표수종으로 자연환경을 조성하여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550년 철쭉군락지와 꼬리진달래군락지가 조성된다고 한다. 중점조성지구는 연구·교육·체험이 함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조성 된다. 특히 호랑이 숲을 조성하여 백두대간의 상징인 호랑이가 서식하는 공간을 재현할 예정이란다.
<수목원 종합안내도>
<약용식물원 표지판>
그리고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가 죽은 호랑이를 박제(剝製)하여 전시해 놓았고, 같은 호랑이의 유골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게 전시해 놓았다. 다만 병사한 호랑이라 호랑이다운 기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또 해설원의 안내와 해설도 훌륭하여 이해가 잘 되어 기분 좋았다. 다음은 봉화목재문화체험장으로 이동한다.
<호랑이 박제>
<박제호랑이 골격>
봉화목재문화체험장은 춘양에서 봉화읍으로 가는 봉성면에 위치해 있다. 나무의 진에서 나오는 향기가 코끝을 향기롭게 자극한다. 들어가는 입구 문부터 무지개 모양으로 눈길을 끌더니 건물은 온통 목조건물로 장식했다. 내부 전시장에는 목조건물과 십이지신상 등 여러 목각 조형물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봉화목재문화체험장>
<목각조형물>
목재문화체험장에 들러 미리 준비된 보석함 재료를 밑그림에 맞춰가며 조립하는 재미도 여간 아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창평산림욕장을 따라 금강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간다. 한발로 디디기 힘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전망대도 올라가 보고 숲이 제공하는 피톤치드도 몸으로 만끽한 후 봉화읍으로 이동한다.
<손수 조립한 보석함>
<창평산림욕장>
마침 봉화에서는 오늘(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송이축제’가 열린다. 송이버섯은 금강소나무 잔뿌리에서 균근(菌根)을 형성하며 자라는 버섯으로 갓의 윗면은 흑갈색이고 아랫면에는 많은 주름살이 있다. 주로 동해안 백두대간에 자생하는 금강소나무 숲에 많이 자란다고 한다.
<내성천 송이축제장>
봉화에서 송이요리를 제일 잘한다는 식당에서 송이돌솟비빔밥으로 맛을 보고 축제가 열리는 내성천변 행사장으로 나들이 간다. 행사장 무대에서는 새로 ‘봉화아리랑’을 발굴했다며 민요를 하시는 분들이 열심히 노래 부르고, 사회자는 채집된 가사를 설명하는데 “(전략) 시어머니 빨리 가시라고 백일기도 올렸는데 친정어머니 부고가 먼저 오네∼♩∼♪(하략)”라며 옛날 고된 시집살이를 소개한다.
<봉화읍 시가지>
<송이축제 축하공연>
내성천에는 물기둥이 높이 솟고 한지로 만든 농악모형과 실제 농악이 조화를 이룬다. 시장 가게에는 송이점포와 기타 점포로 나누어 늘어섰는데, 다른 점포에는 진도 울금 등 다른 지역 특산품이 같이 진열되어 있다. 송이점포에는 향이 상큼한 송이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자연산 송이>
<내성천 물기둥>
<내성천 수상조형물>
축제장을 빠져나와 석천정사(石泉精舍)로 향한다. 석천의 물살은 경쾌하게 합창을 한다. 물이 맑아 다슬기가 지천인 내를 거슬러 조금 올라가니 수직바위에 靑霞洞天(청하동천)이란 붉은 각자가 새겨져 있다. 청하동천은 ‘하늘 위에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충재 권벌선생의 5대손인 권두응(1656∼1732)의 글씨이다.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는 도깨비들이 많아 서생들이 괴로움을 당하자, 권두응 명필이 글자를 새기고 주사칠을 하여 도깨비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청하동천-권두응 글씨>
조금 더 닭실마을 쪽으로 가는 석천계곡에는 충재의 큰아들이 지었다는 석천정사가 나타난다. 너무 좋아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은 자물통으로 잠겨 있다. 석천정사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계곡물을 벗 삼아 시를 짓고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면 좋을 듯하다. 금강소나무 숲길을 지나 작은 내를 건너면 누렇게 벼가 익는 들 건너에는 유곡리(酉谷里, 닭실마을)가 있다.
<석천정사>
안동권씨 집성촌인 ‘닭실마을’은 낮은 산들이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세로 포근한 어머니 품 같다. 이 마을은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으로 물러난 뒤 이곳 내성현(柰城縣) 유곡에 들어와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유곡리 닭실마을 전경>
충재는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충절로 이름이 났고 시호는 충정(忠定)으로 불천위(不遷位)를 받았다. 후손들이 뜻을 기리고자 지은 충재박물관에는 과거시험답안지, 각급 교지(敎旨) 등 보물로 지정된 많은 유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불천위(不遷位)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神主)는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충재박물관>
<충재의 과거시험 답안지>
<한성판윤 교지>
충재의 기상이 서린 청암정(靑巖亭)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주변에 연못을 파서 장대석으로 돌다리를 놓았다. 바위를 자연 모습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 길이로 조정하여 정자의 지붕을 올려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으로 정자에는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허목(許穆)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 쓴 편액(扁額)이 눈길을 끈다.
<청암정>
<청암정 편액>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편액을 청암정 중앙 들보에 걸려 있는 이유는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정권에서 소외되는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南人)의 영수 허목의 글씨를 앞 세워 “남인의 정신을 기리고 다음 정권을 잡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충재의 18대 종손 부부가 다식(茶食)을 제공해 주며 설명해 준다. 그리고 조상의 얼을 계승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야기한다.
<청암수석 편액>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고 닭실마을 앞을 지날 때는 요즘 보기 드문 ‘솟을대문’이 우뚝하고, 담벼락 밑 맨드라미도 다음에 다시 오라고 인사한다. 일박이일간의 봉화여행은 가끔 나를 잊게 해주기도 하고, 또 나를 뒤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묘한 감정을 안겨준다.
<솟을대문>
<여주열매>
<맨드라미>
특히 ‘춘양목’으로 더 유명한 금강소나무가 숲의 주를 이루고 있는 봉화가 꿈꾸는 세상은 ‘파인토피아 봉화’이다. 파인토피아(pine topia)는 파인트리(pine tree 소나무)와 유토피아(utopia 이상향)의 합성어로 ‘금강소나무의 이상향’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다.
<파인토피아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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