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풀이의 속내- 1. 고풀이의 대강 고풀이는 남도의 씻김굿에서 연행되는 후반부 거리 중 하나다. ‘고’를 푼다는 일종의 의례와 연극 행위는 마치 산수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문제를 푼다는 맥락에서 고안된 의례이자 노래이며 연극적으로 보면 퍼포먼스다. 세상의 모든 의례에는 기본적으로 풀이와 막이가 있다. 풀이는 살풀이를 중심으로, 막이는 대신맥이를 중심으로 다음 차에 풀어 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혀두었지만 수십 개가 넘는 키워드 중에서 일부를 골라내는 것이므로 매 연재의 주제에 적지 않은 의미를 둘 수밖에 없다. 지난 연재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전남일보) 중 두 꼭지의 기사를 불러와 설명한다. 2019년 1월 17일자와 2022년 11월 25일자이다. 전자는 고풀이의 어의와 속내를 풀어 설명한 글이고 후자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사랑한 그림 즉 매듭을 푸는 성모마리아 그림을 비교한 글이다. 일부는 보완하고 일부는 생략하며 또 일부는 새로 고쳐, 또 하나의 이론을 덧붙인다. 고풀이는 각각 세월호와 이태원 사건을 염두에 두고 고안했던 글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칼럼에서 나는 고 곽의진을 소환했다. 맹골도를 바라보는 본섬 해안에 흙집 짓고 살던 소설가 곽의진은 세월호의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뜰 일을 하다 쓰러졌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죽음이 세월호의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나와 나누었던 카톡에 절절했던 교신 내용이 남아 있다. 우리의 의무와 책임, 풀어야 할 과제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오늘 얘기하는 고풀이가 사실은 이런 문제 풀이다. 주어진 숙제를 푸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풀어내는 작업 말이다. 에라 만수 에라 대신/ 천여리냐 환열이냐 환열 청청/ 새경각씨 대왕연으로/ 설설이 풀립소사 불쌍하신 망자씨가/ 어느 고에가 맺히셨오 저승고에가 맺히셨오/ 산신고에가 맺히셨오 저승고에 맺혀시고/ 신신고에 맺히시면 가실 극락 못하시고/ 집안으로 감돌아서/ 자손에 근심을 연답니다 원한고에가 맺히시고/ 해원고에가 맺히시면 가실 생황을 못가시고/ 집안으로 감돌아서/ 자손에 우환을 연답니다 천고만고 맺힌 고를/ 금일 금시로 풀으시고 가사에 걱정근심/ 우환잡작 희살여물 일체 소멸 시키시고/ 새왕극락으로 가옵소사 천열이야 환열이야/ 대왈련으로 설서리 풀렸다네 1992년에 진도군에서 펴낸 『진도군의 문화예술』(진도문화원) 수록 고풀이 사설이다. 구비전승물이라 이해되지 않는 용어가 난무하지만 컨텍스트를 미루어 해석하면 큰 무리없이 읽힌다. 지춘상, 이보형, 황루시 등이 작성한 무형문화재 보고 관련 내용을 전재한 책으로 무가 사설은 박주언이 채록했다. 주지하듯이 씻김굿은 신에게 아뢰는 거리(굿판을 시작한다는 신고식의 성격) ‘조왕반’을 시작으로 망자의 옷가지와 굿판에서 활용되었던 오브제들을 태우는 ‘종천맥이’까지 십수 가지의 ‘거리’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는 연극의 ‘막’과 유사하다. 지난 칼럼에서 ‘꿔다가 하는 지랄론’을 소개하며 상례 전반을 한 편의 연극(사회극, 전통극)으로 풀이했다. 의도치 않은 죽음이라는 사회적 손실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서사가 있는 이야기 만들기 즉 연극 형태의 메커니즘을 통해 달성한다는 맥락이었다. 이야기 만들기, 아니 이야기 짓기의 맥락은 상례의 사례를 넘어 우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일종의 원리이자 원형이라는 측면에서 지난 칼럼이 작성되었고, 더 풀어 설명할 부분은 장차 여러 차례로 나누어 소개해 나간다. 이 총체극에는 십수 가지의 큰 막과 작은 막들이 있다. 이를 통상 ‘거리’라는 용어로 호명하는 것은 설명의 편리를 위해서일 뿐이다. 현지나 현장에서 굳이 ‘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작은 단위의 거리가 큰 단위의 거리에 포함되기도 하고, 작은 단위의 거리인 듯보이지만 사실은 독립적 의미를 가진 단위로 연행되기도 한다. 이는 당골 별로 각 거리에 대한 의미부여가 다른 데 있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변하거나 재구성된 측면이 강하다. 상례 전반이 매우 오리지널한 맥락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시대적 변화에 매우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의례라는 점 체크해 둔다. 진행의 대강은 조왕굿-안당-초가망석(신맞이)-지신풀이-제석(초앞-제석차림-제석춤-앉은 조달-지경닫이-집짓기/입춘붙이기-벼슬궁 돋우기-노적 청하기-업 청하기-궁웅놀이-액맥이-조상)-고풀이...왕풀이/넋풀이/동갑풀이-영돈말이(씻김/이슬털기)-넋올리기-희설-길닦음/배띄우기-종천맥이 등이다. 각각의 순서나 큰거리 작은거리가 당골별로 일정하지 않다. 고풀이를 하는 대목에서 장삼 고깔을 입고 진행하는 경우라면, 고풀이가 제석굿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삼과 고깔을 착용하는 것은 제석신의 하강과 공수에 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씻김굿 자체가 어떤 시점부터 장삼 고깔을 모두 착용하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었기 때문에, 의례복의 착용만으로 거리의 성격을 나누기 어렵게 되었다. 고풀이에 이어서 길닦음거리로 이어지기도 하고 씻김(영돈말이/이슬털기) 이전에 고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고를 푼다는 본래적 의미는-순서가 뒤바뀌어도-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각 거리를 호명하는 이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은 근자의 일이다. 예컨대 박미경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번역 출판했던 『한국의 무속과 음악-진도씻김굿연구-』(세종출판사, 1996)만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씻금굿’으로 표기되고 있다. 진도 현지에서는 통상 ‘씨끔’으로 표현했다. ‘씻금’과 ‘씻김’은 무엇인가를 씻는다는 의미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수동과 능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사뭇 다르다. 씻김 의례를 하는 주체와 씻김을 받는 객체의 의미를 포괄하게 되면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전 진도문화원장 박병훈은 한때 ‘식힘굿’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불이나 열을 식힌다는 의미이므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물로 씻는다는 것과 거리가 있다. 불교의 지옥불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호명법이다. 우리가 통칭하여 씻김굿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장별 구성 중의 하나인 ‘씻김거리’에 있음을 지난 칼럼을 통해 누누이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 작명 이전에 이미 ‘이슬털이(이슬털기)’, ‘영돈마리(영돗말이)’, ‘식힘’ 등의 이름으로 ‘씻김거리’를 호명했음을 주목한다. 물로 씻는다는 행위 이전에 불덩이를 식힌다든가 넋을 돗자리에 말아 세운다든가 참이슬을 털어 받아낸다 등의 의미가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거리의 핵심은 불탑 노반(露盤)의 이슬 받기와 초경이나 출산 때의 ‘이슬 비침’ 곧 참이슬의 행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점도 지속적으로 강조해두었다. 이것이 용언형(用言形) 말 짓기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 나아가 우리 문학의 핵심이라는 점을 들어 차차 해명한다. 위 사설에서 고풀이의 ‘고’는 저승고, 산신고, 원한고, 해원고 등으로 나타난다. 이외에도 각양의 사설을 보면 ‘고’에 붙이는 접두어가 무수히 많다. 현지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네들이 풀어야 할 숙제 전반에 이러한 이름짓기와 의례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풀어내야 비로소 ‘설서리 풀리’는 것이고 이 풀어냄을 통해서 ‘이슬털이’에 들거나 ‘길닦기’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풀로 가자 풀로 가자 / 산신님아 산고를 풀으시고 (가)신님아 집고를 풀으실 적 / 고 풀어 만고 풀자 심중에가 맺힌 고를 포부에 풀으시고/ 포부에가 맺힌 마음 왼 정으로 다 풀어서 억천만물 뒤에도 굴과 고통이 다이 없이 / 대신 고애가 풀렸소~(중략) 초제왕에가 맺힌 고는 이제왕이 풀고 가고 / 이제왕에가 맺힌 고는 삼제왕(이) 풀으시고 삼제왕에가 맺힌 고는 오제왕으로 풀고 가고~(하략) 또 다른 고풀이의 한 대목, 고 이완순이 잘 불렀던 가사다. 위 가사의 흐름을 보면 오제왕에 맺힌 고는 당연히 육제왕, 칠제왕으로 이어진다. 실제 십제왕까지 노래된다. 사제왕이 없는 까닭은 4자를 기피하는 습속과 관련된다. 여기서의 고풀이는 따로 노래되는 ‘왕풀이’ 혹은 ‘시왕풀이’이와 맥을 같이 한다. 당골에 따라 고풀이에 시왕풀이의 내력을 삽입하기도 하고 따로 떼어 노래하기도 한다. 시왕(十王)의 내력을 말하고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줄 것을 축원하는 내용인데 이를 열 개의 ‘고’로 상정하고 열 번의 절차를 거쳐 풀어낸다. 시왕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이다. 진광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왕, 도시대왕, 오도 전륜대왕이 그것이다. 죽은 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백일(百日), 소상(小祥, 1주기), 대상(大祥, 2주기, 두돌, 脫喪, 解喪) 때에 차례로 이들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니 불교 49재의 의미를 고풀이에 적용한 예라 할 수 있다. 2. ‘고’와 ‘길’의 기표와 기의 고풀이는 하얀 질베(길베)에 매듭을 여러 개 만들어두었다가 풀면서 연행하는 무가를 말한다. ‘질베’는 ‘길+베’의 구개음화된 발음이다. ‘길’을 ‘질’로 발음하는 남도 지역의 호명 방식 때문이다. 물론 길은 망자가 가는 저승길이다. ‘고’는 이와 다른 호명 방식이지만 오브제로서의 질베는 동일하다. 길을 상징하는 의례를 한다는 뜻으로 ‘질베’로 호명한다. 본래 한 필의 무명베일 뿐이다. 나는 지난 칼럼을 통해 이것이 ‘도(道)닦음’과 다르지 않다고 풀이했고 그래서 단순히 저승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가고 오는’ 제망매가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고풀이의 ‘고’는 ‘매듭’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왔다. 망자가 이승에서 못다 푼 한과 절망, 산자들과의 관계, 혹은 이승에서의 아쉬움들을 풀어내는 의례라는 뜻이다. 맺힌 매듭을 푼다는 뜻이니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결실을 맺는다는 뜻의 ‘매듭짓기’와는 전혀 다른 쓰임새다. 매듭짓기의 ‘고’가 더욱 단단히 매서 일정한 결론을 맺는 방식이라면 고풀이의 ‘고’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는 방식이다. ‘길’을 상징하는 것도 무명베이고 ‘고’를 상징하는 것도 무명베인 까닭은 의례의 수월성을 감안한 선택이겠지만, 보다 깊은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묶인 매듭 즉 ‘고’를 풀어야 비로소 그 베가 질닦음의 길이 된다. 따라서 고풀이 거리와 질닦음 거리는 서로 연동되어 있다. 설령 고풀이를 이슬털이 거리 앞쪽에 배치할지라도 고풀이의 목적은 저승길에 가기 위한 문제 풀이라는 질베의 은유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질베가 ‘길’과 ‘고’를 달리하며 연출되니, 마치 한 사람의 생애가 숱한 고난을 거쳐 어떤 길에 이르는 형국이 된다. 이전 칼럼으로 돌아가 말하면 ‘고’는 서사가 있는 이야기 만들기‘ 즉 갈등 만들기이고 ‘길’은 갈등 해소하기이다. 씻김굿이 큰 단위의 이야기 만들기라면 고풀이와 질닦음은 작은 단위의 이야기 만들기이다. 더 큰 단위는 상례 전체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다. 갈등 만들기는 서사 구성의 필요요소이기 때문에 상례 전반에 걸쳐 이행되는데, 씻김굿 내에서도 여러 장치들을 통해서 이를 구현하는 것이다. ‘고’를 만들어 ‘길’을 풀어내는 것이 그중 하나다. ‘고’는 문제 내기이고 ‘고풀이’는 그 문제를 풀기이며, 질닦음은 풀어 얻은 해답을 적용하기이다. ‘고’를 ‘매듭’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기호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전남방언사전을 참고해보면, 완도에서는 올가미를 ‘고’라고 하고 구례에서는 방앗공이를 ‘고’라고 한다. 올가미나 방앗공이는 ‘고리’의 다른 표현이다. 국어사전에는 “쇠붙이나 끈 따위를 구부려서 두 끝을 맞붙여 만든 물건”을 ‘고리’라고 한다. 둥근 모양을 이룬다. ‘문고리’ ‘저고리’ 등의 용례가 있다. 또는 “여러 가지가 서로 연관되어있는 사물 현상 중 하나하나의 부분”으로 해석한다. ‘중심 고리’, ‘연결 고리’ 등의 용례가 있다. 고풀이는 다섯 매 혹은 일곱 매, 열 매 등으로 묶어 둔 질베를 푸는 의례다. 매는 숫자에 따라 오행, 칠석, 시왕(十王) 등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문고리 같은 둥근 고리를 푸는 행위고, 연결 고리를 푸는 행위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이므로 당연히 나쁜 것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이승에서 엮인 나쁜 것들과의 ‘매듭’을 풀어내는 노래요 의례다. ‘고’와 ‘길’을 상징하는 무명베는 일종의 기호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눌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의미 정도로 이해된다. 겉으로 보이는 매듭은 기호이자 인생의 고통이라는 기의이다. 겉으로 보이는 무명베는 길의 기호이자 저승길 혹은 도(道)닦음의 기의이다. 저승으로 가기 위해 꼬이고 뒤틀린 문제를 푼다는 것, 더럽혀진 길을 깨끗이 닦는다는 것은 표면으로 드러나기에 기호에 가깝다. 산자와 죽은자의 엮인 문제를 더불어 푼다는 것, 단순히 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것 곧 다시 태어난다는 것 등이 숨겨져 안보이기 때문에 기의라 할 수 있다. 왕생(往生)의 의미 자체가 이승의 목숨이 다하여 저승 혹은 정토(淨土) 등의 다른 세계-나는 또 다른 이승이라고 보는데-에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질베를 묶어 고리를 만드니 그것이 맺힌 매듭 즉, 마디이다. 일반적으로 마디를 매듭이라 한다. 여천에서는 ‘매두’, 광양에서는 ‘매디’로 부른다. 남도 전역에서 ‘매듭’ 보다는 ‘메듭’형의 호명이 일반적인 듯하다. 전자는 단음이고 후자는 장음 정도로 이해된다. 방언사전을 참고해보면, 영광, 함평, 무안, 신안, 승주에서는 ‘메두’, 나주, 영암, 장흥, 완도에서는 ‘메둑’, 나주, 화순, 진도, 강진에서는 ‘메듭’, 장성, 곡성, 보성에서는 ‘메디’라 한다. 진도에서는 ‘메듭’과 ‘메디’를 혼용한다. 담양, 보성, 순천, 여수에서는 ‘메두’, 함평에서는 ‘메둑’, 무안에서는 ‘메둡’이라 한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모두 ‘마디’를 뜻하는 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는 매듭의 여러 뜻 중에서 순조롭지 못하게 맺히거나 막힌 부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전라도 전역의 씻김굿 또한 각편들의 차이는 있으나 총체적인 굿거리의 맥락은 같다. 공통점은 질베를 사용한다는 것, 특히 이 질베를 ‘고’라는 이름으로 꼬고 비틀어서 풀어내는 고풀이와 평평하게 펴서 길을 닦는 질닦음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남도 씻김굿에서 질베를 주요 오브제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각편 굿거리는 고풀이와 질닦음이다. 기본적으로는 ‘고(한, 원망, 고통 등)’는 풀어내는 의례로 해석한다. 질닦음에서는 구불구불하게 묶고 뒤틀리게 장치해놨던 베를 펴서, 평평한 길을 닦는 연행을 한다. ‘고’의 발음과 유사한 의미들을 추적해보니 이 골에서 저 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포착된다. 고개는 ‘고’와 ‘개’의 합성어다. 우리말 어원사전을 참고해보면, 골이 골, 고을(谷, 洞, 邑, 州)의 뜻을 지니지만 본래의 뜻(原義)은 땅의 종류(土地類)를 말한다. 곧(處), 고장(里)의 어근 ‘곧, 곶(곧)’과 동원어(同源語, 혹은 同根語)가 되고 토지류의 원의를 지닌다. 길(路)도 동원어가 된다. 개는 ‘가이’가 준말이고 갇>갈>갈이>가이>개의 변화로서 ‘골’과 동원어가 된다. 방언사전을 참고하면, 전남 전역에서 ‘고개’는 ‘고게’로 발음 된다. ‘고개’보다는 약간 장음으로 발음한다는 뜻이다. 이 골짜기를 이승이요 저 골짜기를 저승이라고 비유할 때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간다는 맥락에서 ‘고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의례 전반의 형상을 볼 때, 배를 타고 물을 건너가는 이미지가 훨씬 크게 드러난다. 하지만 고개를 건너거나 다리를 건너는 맥락도 비중이 적은 것은 아니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고’의 발음이 ‘고개’와 친연성이 있다 하더라도 의미가 전적으로 내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썼는데, 이번에 다시 수정한다. ‘고’는 매듭이지만 ‘고개’의 ‘고’와 친연성이 높고 그래서 고개를 의미한다. 그 단서가 해탈의 다른 이름 피안(彼岸)이다. 피안(彼岸)은 본래 불교적으로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일, 또는 그런 경지라는 의미다. 이것이 씻김굿에서의 ‘저 언덕 너머’ 혹은 ‘저 다리 건너’로 표상되고 민요에서는 굽이굽이 건너가야 하는 고난의 길 그 표상인 ‘아리랑고개’로 그려진다. 나는 이를 씻김굿 ‘갈무리조(한 거리를 마무리하는 음악이라는 뜻)’ 가사 중 “잔도 잔도 새로 속잎이 났네”를 고쳐 풀이하는 것으로 해명했다. “잔등 잔등 새로 속잎이 났네”로 풀이한 대목이 그것이다. 현재 모든 씻김굿 사설에서 ‘잔도 잔도 새로 속잎이 났네’로 사용하고 있지만, 해석이 불가하다. 진도 출신 신영희 국창의 남도민요 사설집에는 이 대목이 ‘잔등 잔등’으로 나온다. 잔등은 언덕의 남도 말이다. 곧 저 언덕 너머라는 뜻이다. 이를 남도민요의 대표격인 진도아리랑에 대입해서 풀어낸 이유는 인생의 고비로서의 고개를 읊은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관련 정보는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에 아리랑과 씻김굿 사설 관련으로 몇 차례 풀어두었다. 해야 할 얘기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갈음하고 따로 항목을 정하여 설명한다. 3. 교황 프란치스코가 사랑한 그림, 매듭을 푸는 성모마리아 교황의 바티칸 집무실에는 성화 ‘매듭을 푸는 성모 마리아’가 걸려있다. 흔히 기적의 성화라고 한다. 1612년에 독일의 귀족 볼프강 란젠 만텔이 소피아 임호프와 결혼한다. 혼인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위기에 부딪힌다. 예수회 사제 자콥 렘을 만나 기도를 요청한다. 1615년, 자콥 렘 신부가 기도와 예식을 행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리본 매듭이 풀린 것이다. 이 때문에 위기의 부부는 문제해결의 은총을 받았고 이혼을 피하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혼인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리본을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다. 리본과 열쇠고리 등은 연인이나 혼인 등의 사랑 증표로서 종교적, 문화적 쓰임새가 전 세계적이다. 차후 보완한다. 예컨대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주렁주렁 열쇠고리를 난간에 묶는 풍경들을 연상하면 관련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배 중에 서로 포옹하고 난 후에 이 리본을 묶는 것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는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감사의 표시로 1700년경 화가 요한 멜키올 슈미트너에게 의뢰해서 성화를 완성하게 된다. 바이에른의 작은 성당에 모셔진 이 성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이내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까지 알게 되었는데, 그가 나중에 교황이 되는 프란치스코다. 교황에 취임하자마자 교황청 특별 알현 접견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고 청원 기도를 드리게 된 내력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 다양한 행사, 다양한 형태로 이른바 ‘매듭을 푸는 성모 마리아’ 그림이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러 그림이나 조각에서 재현되는 이미지를 보면 마치 우리의 씻김굿 고풀이와 닮아있다. 어떤 문제를 풀어낸다는 의미로 확장되어 매우 광범위한 상징으로 그려지거나 연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차후 산고(産苦)풀이와 탯줄의 이미저리로 해석한다. 꼬이고 뒤틀린 창자에 오버랩되는 탯줄의 이미저리다. 고려 이후 낙가산 보문사에서 시작하였던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연결된다. 송자관음을 한편으로 마리아 관음이라고도 한다는 점에서 이 친연성을 말할 수 있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해석도 중첩한다. 이 부분도 할 얘기가 많고 탯줄을 따로 떼어 설명할 예정이기에 다음 차를 기약한다. 언제이던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복 입은 성모상을 보고 마돈나 코리아나! 곧 한국의 성모님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프란치스코의 마인드가 씻김굿을 하던 우리네 어머니네들과 맞닿아 있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프란치스코가 남도 씻김굿의 고풀이를 본다면 어떨까? 나는 그가 분명히 환호할 것이라고 본다. 차제에 씻김굿 고풀이를 로마 교황청에서 연행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내가 한번 기획해볼 요량이다. 교황이 사랑한 성화를 지금 여기 소환하는 이유가 단지 고풀이의 해석에 한하지 않는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의 기도’라고 소개된 기도문은 고풀이의 노랫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기도문의 매듭풀이와 고풀이는 종교와 나라와 문화화 문명의 거리가 있을 뿐, 본래적 의미가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 베르나르의 기도를 씻김굿 고풀이에 덧입혀 노래해보면 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매듭을 푸시는 마리아여/ 풀리지 않는 수많은 매듭에/ 어찌 귀 기울이시지 않으랴/ 매듭을 푸시는 마리아여/ 매듭을 푸는 손길이 있다는 것/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매듭을 푸시는 마리아/ 여기 이 미로를 보소서/ 저는 이것을 풀 수 없으니/ 도와주소서, 거룩한 분이여/ 매듭을 푸시는 마리아/ 저는 끝까지 헝클어진 미로이오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4. 고를 풀어야 돌아갈 수 있는 길 풀렸구나 풀렸구나 풀은 고에 맺힌 망제 원한고를 풀렸구나 원한에 맺힌 망제 원한고를 풀렸구나 풀렸네 풀렸네 지옥고에 맺힌 망제 어느 때나 풀려날고 의탁없이 지나다가 금일에 풀렸으니 풀렸구나 풀렸구나 풀렸소 금일에 금일망제 원한고에 맺혔다가 풀렸구나 풀렸소 산고에 맺히시고 옥중고에게 맺혔다가 풀렸네 풀렸구나 옥중고에 매친 망제 어느 때나 풀려날고 의탁없이 자니다가 금일로 풀으실적 임술년 정월상달 스무아흐렛날 계명자축 새복날로 풀렸으니 다시 출세길을 놓아서 깊은 물에는 다리를 놓고 수양산에는 길을 놓고 십계양산에 길을 놓아 왕생극락을 가네 씻김굿을 ‘씻금’으로 호명하던 사례, 박미경의 『한국의 무속과 음악-진도씻김굿연구-』(세종출판사, 1996)에 나오는 고풀이 사설이다. 이중 후렴 “계활년으로 설설이나 풀리소서”를 생략하고 메김소리만 몇 줄 옮겨두었다. 노래에서 언급하는 산고(産苦)는 출산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고, 옥중고는 감옥 같은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산고의 고통은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옥중고는 고난을 다하고 얻은 거듭남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고를 풀어 길닦음에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출세길도 닦고 현세의 욕망도 닦아 노래한다. 고풀이의 문제 풀이가 저승에 이르는 문제뿐 아니라 현세의 모든 문제를 푸는 풀이인 까닭이다. 이렇게 고를 풀고 나면 비로소 반야용선을 타고 흰 질베에 오른다. (후렴 생략) 가노라 가시난데 일망세계 다리를 놓아서/ 여래 염불로 길이나 닦세/ 넋이라도 오셨으니 넋반에다가 고이 모셔/ 반야용선 무어타고 극락가고 세왕 가세/(후략) 진도씻김굿 중 고 김대례의 질닦음 진양조 부분이다. 이 길은 ‘다리를 놓아’, 망자가 ‘넋반’과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길이다. 넋반과 반야용선(般若龍船)은 ‘배(船舶)’를 말한다. 불교 전래 이후 무속에 영향을 준 탓일 것이다. 반야(般若)는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반야용선 타고 이르는 길은 죽음의 끝이 아니라 해탈 후의 새로운 세상이다. 고풀이뿐 아니라 씻김굿 전반에 걸쳐 노래 되는 ‘왕생(往生)’이나 ‘새왕’ 등의 지향이 다르지 않다.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강이나 바다, 계곡을 함의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요단강 건너가’는 길이다. 예컨대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저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님이 건너간 ‘강’이자 <공무도하가>에서 결국 물을 건너간 임이다. 고풀이와 질닦음으로 풀어보면 강이든 길이든 일반적인 이해는 저승에 이르는 도로(道路)를 닦는 것에 한정된 듯 보인다. 하지만 지난 제망매가의 재해석에서 다루었듯이 그 범주는 무한히 확장된다. 물길, 다리 건너, 저 언덕 너머 곧 피안(彼岸)의 공간이다. 질베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길’일뿐 그것이 내포한 기의는 우리의 상상을 훌쩍 넘어선다. 이 의례를 공유해왔던 사람들은 저승에 가는 길을 물길로 이해하기도 하고 잔등(언덕)너머로 이해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은 희설 등 여러 가지 굿거리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사공 불러 한뜸 한뜸 쉬어가며 저승에 이르는 길을 노래한다. “사공아 닻 내려라 여기 잠깐 쉬어가자” 등의 사설들이 이를 말해준다. 고풀이에서의 ‘고’도 ‘고리’로 형상화된 표면적인 기표 외에 숨어 있는 기의들이 천차만별이다. 몸의 문제로 비유하거나 나라의 문제 국가의 문제로 은유하는 것도 이런 해석의 일환이다. 남도 씻김굿 고풀이는 ‘고리’를 풀어내는 모의행위를 통해 꼬아지고 비틀린 매듭들을 푸는 노래요 의식이다. 창자가 뒤틀리고 꼬인 것이 환장(換腸)이다. 환심장(換心腸)을 줄인 말이다. 이에 의미를 더하여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달라지는 상태’를 말하는 용어가 되었다.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정신을 못차리는 지경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풀이는 이 환장할 지경을 풀어내는 의례다. 따라서 ‘고’는 비단 망자의 내세와 현세의 ‘엉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마디의 이름’ 즉 명절(名節)에 행하는 의례들은 십중팔구 이런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고를 풀어 길을 낸다는 것, 막힌 장애를 뚫어 새로운 세계로 확장한다는 의미들이 마치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죽이고 살리는 구성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이 구성이 거세된 것이 아니다. 은닉되고 변용되었을 뿐이다. 총체적인 굿거리는 한 사람의 일생을 한 주기 삼아 연행되지만 여기에는 전생과 현생과 후생이 모두 소환된다. 전생과 현생과 후생이 각각의 장치들에 의해 오버랩 되어 ‘생애’라는 이름의 일대기를 묘사해낸다. 사설 중에 조상이 등장하거나 미래의 후손들을 예지하는 노래들이 그것이다. 풀어낸다는 것은 회복이며 갱생이요 재생이며 부활이다. 재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죽음이 필요하다. 아주 단순한 원칙이고 원리다. 씻김굿의 각편 중 하나인 ‘영돈마리’의 기호가 ‘망자’를 상징하지만 그 내면에 투사된 것은 산자들의 욕망이기도 하다. 망자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연정이 불러낸 것은 좋은 곳으로 편하게 가시라는 것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재생과 부활에 초점이 있다. 기표를 넘어 기의 즉 보이지 않는 행간과 여백에 주목해야 보이는 것들이다. 고풀이의 풀어냄이나 질닦음의 닦아내는 행위는 이런 죽임의 의례와 살림의 의례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구성한다. 이것이 어디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에 국한되겠는가. 어느 사람이라고 어느 시대라고 막히고 꼬인 것이 없을까만, 특별히 우리 시대는 더한층 꼬이고 뒤틀려 보인다. 세대와 세대 간의 갈등과 불화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소통이 안 되고 막히고 꼬였으니 이것이 ‘고’다.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 개별화되고 주변화되어 겉돈다. 이 주체들의 꼬이고 뒤틀림을 바로 잡는 것이 고풀이다. 주체(主體)는 무엇인가?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심신의 주인이라 함은 무엇인가?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계층과 계층 간의 갈등이 더할 수 없이 깊어져 간다. 빈부격차가 심해진다기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진다.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해 죽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 빈곤감으로 메말라 죽는다. OECD 자살율, 고독사율 최고, 혹은 상위를 달린 지 십수 년이다. 몸의 문제로 다시 치환해 얘기하면, 꼬아지고 뒤틀린 장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나 민족은 어떠한가? 선대의 꼬인 역사가 있고, 현재의 질곡이 있으며, 풀어내야 할 미래가 예비 된다. 뒤틀리고 꼬인 ‘고리’들은 과거와 현재의 은유다. 마치 창자가 꼬인 것처럼 형용된다. 고풀이의 이미저리가 그것이다. 고풀이의 ‘고’가 은유하는 본질이 이것이다. 나는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고’와 ‘길’의 은유를 남한과 북한을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 DMZ로 보고 있다. 고풀이를 통해 분단의 시대를 비유하고 묵상한다. 단순히 씻김굿의 의미를 톺아보거나 천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이 시대야말로 고풀이가 필요한 시대다. 엉킨 고리들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얽힌 문제를 풀고 새로운 질닦음의 길을 내는 의례가 필요하다. 개인과 사회와 나라와 이 민족이 갱생하고 부활하는 길이다.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