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황의소녀(黃衣少女)
그러한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자 황보자안은 문득 머리속이 복잡하게
엉켜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곳의 점쟁이는 진짜 점쟁이
가 아니고 바로 조금 전에 나타났던 이 대한이야말로 진짜 점쟁이였던 것이
니, 진짜와 가짜가 이미 뒤바뀌어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천하의 혈접 모
용릉파도 한 순간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모용릉파는 이미 점쟁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주의하
지 않고 오직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쓰다가 당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진짜 점재이로 분장한 여인은 비단 그 변장술이 기막힐
정도로 놀라울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두뇌가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황보자안조차도 그 대한이 진짜 표국의 건달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연인은 어떤 사람일까?)
황보자안의 의문은 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그의 생각은 일순간에 일어난 것으로서, 즉시 그의 관심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참한 형편의 모용릉파에게 모아지고 있었다. 그
녀는 원래 악명을 날리고 있는 상태인데다가 지금 이렇게 패하여 사로잡히
게 된다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 다시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다.
모용릉파의 신형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듯했으나
한 순간 마치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쌍장으로 붉은 기운을 대한을 향
해 휘몰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대한은 다소 놀란 듯했으며, 다음 순간 그의 쌍장에서는 흡사 노
을빛과 같은 광채가 빠르게 뻗어나와 이에 대항해 갔다.
꽈꽈꽈꽝----!
일시 눈앞에서 거대한 벽력탄이 폭발한 것처럼 강렬한 섬광이 일더니 엄청
난 압력과 바람이 일어 주위를 온통 암흑처럼 뒤흔들어 놓는 것이 아닌가!
황보자안의 신형은 그 바람에 공중으로 떠올ㄹ서 뒤로 이 장이나 날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니 주루의 천정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사방의 흑벽도 터져나간 채 먼지가 수북하게 내리 쌓이고
있었다. 장내에 놓여 있던 탁자나 의자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사방으로 날려
간 뒤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평이 엉금엉금 기어나오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내공은 그리 강하지 못해서 황보자안보다도 더욱 멀리 날려가
벽에 부딪쳤고, 이어 의자 등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
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것을 보고 다소 안심을 한 뒤에 뭐니뭐니 해도 최대의 관심사
인 모용릉파를 찾기 위해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지금 장내에는 그 대
한으로 변장한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모용릉파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용릉파는 한순간에 벼락같이
기습을 펼쳐서 그 여력을 이용해 달아난 것일까?
출진자와 현황자, 그리고 점쟁이로 분장한 사람 역시 압력에 밀려서 뒤로
물러나 있었는데, 황보자안과 같지는 않았고 하나같이 크게 경악한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때 아평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황보자안에게 달려와서 반갑게 안겼다.
"나으리! 나으리, 그 동안 심하게 고생하지는 않았나요? 저는…… 저는 너
무나도 걱정이 되어서 그만 죽어 버릴 뻔했어요."
황보자안은 아평의 그러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아
니, 기실은 아평은 원래는 황보자안을 만나자마자 와락 울음부터 터뜨릴 생
각이었는데 아까 처음 만나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격한
감정이 많이 수그러져서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숙녀검을 줍지도 않고 정신없이 달려와서 그의 품속에 안기는 것을 보
면 그녀의 황보자안을 향한 정성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보자안은 비록 아평을 만나서 매우 기쁘고 그녀가 사랑스럽기는
해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고 주위에 두 분의 사형이 있기 때문에 웃
으며 그녀를 품속에서 떼어내었다.
"나는 이제 괜찮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이에 일시 흥분한 아평도 금새 진정이 되는 듯 새빨개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소 물러났다. 그러다가 이윽고 다시 한쪽으로 번쩍 신형을 날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심언니! 심언니! 그녀는 대체 어찌됐죠? 달아났나요?"
"……"
아평이 심언니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대한으로 변장한 예의
인물이었다. 그녀의 성이 아무래도 심(沈)가인 모양으로, 아평이 질문을 하
며 다가서는 데도 그녀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묵묵히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심언니, 그 혈접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평이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묻자 긎서야 그 대한은 음, 하고 깊은 생각
에서 깨어나 그녀를 쳐다보고 되묻는 것이었다.
"아평, 뭐라고 했지?"
아평은 이것을 보고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
다.
"아이, 언니두! 그래, 그 혈접은 대체 어찌된 일이냐구요."
황보자안은 이때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평이 느닷없이 그 대한을 향
해 언니라고 친근하게 대한 것을 보고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아
평이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인 것 같지는 않고 요 근래 들어 새롭게 친해진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대한은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녀는 가 버렸지."
아평은 왠지 대한의 어조가 기이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가 버리다니? 그 혈접은 달아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대한은 고개를 거의 건성으로 끄덕였다.
"음, 겉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
이어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황보자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
아평은 다소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대한의 시선이
황보자안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웃으며 두 사람의 사이로 다가왔다.
"나으리! 그녀는…… 그녀는 바로……"
아평이 대한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자, 문
득 대한은 그 자리에서 한 차례 빙글 맴을 돌더니 어느덧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심황(沈凰), 심황이라고 해요."
황보자안은 앞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일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의소녀(黃衣少女). 지금 그의 앞에는 건장한 용모의 대한이 아니라 아
름다운 구름같은 머리를 기르고 체형이 섬세하며 아름다운 담황색의 장삼을
걸친 이십세 정도의 소녀가 서 있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일시 그 거칠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쳐 말하던 대한이 이와
같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묘령의 소녀로 변신하는 것을 일시 믿을 수가 없
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세상에 이처럼 완벽하고 빠르게 변신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을 오
늘 처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황의소녀의 키는 아평보다도 다소 큰 것 같았으나, 허리가 거의 한 줌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게다가 그 용모는 더욱 아름다워 마치 용을 그릴 때
마지막의 중요한 부분을 그린 것처럼 절세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황보자안은 이미 모용릉파의 빙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용모를 보고 매우 감
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황의소녀의 미모는 비단 모용릉파의 용모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완숙하고도 온화한 아름다움에 있어서
는 모용릉파를 능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용릉파를 설원에 한파를 이기고 피어난 매화(梅花)라고
한다면, 이 황의소녀는그 고고하고도 완숙한 자태를 자랑하는 빼어난 아름
다움의 난초(蘭草)라고나 할까?
이 한 송이의 매화와 한 그루의 수려한 난초는 각기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
고 있었고, 실로 그러한 미모는 결코 인세에서 두 번 다시 보기가 어려운
것들이었다. 만일 천하의 신장이 옥을 깎아서 정교하게 조각해 내거나, 아
니면 천상의 신녀가 이슬이나 꽃잎만 먹고 산다면 이와 같은 환상적인 미모
를 지니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실로 아까 대한의 그 거칠은 행동과 음성 뒤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용모와
섬세한 기질,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이 숨어 있었을
줄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황보자안은 워낙에 어려서부터 부유하고 화려한 환경 속에서 자
라나서 이와 같은 미모를 본 순간에 감탄하는 마음은 절로 일었으나, 그다
지 넋이 달아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에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황
의소녀 심황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다소 희미한 것이어서 비교적 기억력이 훌륭한 황보자안으로서도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으나, 그의 기억에
는 이 황의소녀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같은 느낌이 있었다.
황보자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자신이 초면에 너무 실례를 범하고
있다고 자각하고는 얼른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이거 제가 너무 생각에만 빠져 있었군요. 저의 이름은 황보자안입니다."
황의소녀 심황은 조용한 시선으로 황보자안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다가 문득
웃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대는 저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것은 묻지 않나
요?"
황보자안은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그녀의 말을 듣자 일순 저도
모르게 얼굴색이 붉어졌으나 할 수 없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하하,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리지 않으려고 했으
나, 심낭자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혹
시 그대와 나는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심황은 아름다운 옥용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도리어 되물었
다.
"제가 낯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제가 전생에 공자와 알게 되었었나요? 그
것도 아니면 혹시 몰래 저를 훔쳐보신 것이 아닌가요?"
황보자안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일년 전에 장강의 나룻배에서 혹시 낭자를 본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비록 용모도 크게 다르고 또한 옷차
림 등이 모두 달랐지만 그 일이 지나고 나서 저는 많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심황은 그 말에 자신의 구름같은 머리결을 쓰다듬어 올리면서 한 차례 흐드
러지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결국 공자께서 그 일을 아시게 되셨군요. 그래요, 제가 바로 그
나룻배에서 무뢰한들에게 욕을 당할 뻔했던 그 촌스러운 소녀였어요. 공자
의 총명하신 점은 제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황보자안은 즉시 포권하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나중에 낭자께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스스
로 분수도 모르고 일에 끼어들었던 것이 얼마나 낯뜨거웠었는지 모릅니다."
심황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당시 모종의 사건으로 다소 의기소침하여 번뇌를 느끼고
있었는데, 공자님의 그와 같은 대장부다운 의협심(義俠心)에 내심 얼마나
감동이 되었었는지 몰라요. 그 뒤로 저는 매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용기있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방면에 있어서 많은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죠. 저는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
황보자안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을 극도로 칭찬하고 또한 몇 푼
정도의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얼굴색이 붉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평이 웃으며 끼어들어 황보자안에게 말
했다.
"이분 심언니는 그 뒤로 나으리를 한 번 더 보신 적이 있는데, 나으리, 그
일은 기억나지 않으세요?"
황보자안은 그 말에 일시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럼 그 난주성의 용문주루 이층에 앉아 있던 늙은……늙은 거지도
바로 이 심낭자께서 변장하신 모습이었다는 말이오?"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총명함은 저의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저는 저의 정신적인 스승이라
고 할 수가 있는 공자께서 요 근래에 강호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서 다만 몇 푼이나마 암중으로 도움을 드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
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남들의 시선을 가장 덜 받는 거지로 분장하는 것
이었어요."
그렇다. 심황의 이 말은 실로 대다수의 인간의 심리의 맹점을 찌르는 것이
라고 할 수가 있었다. 겉으로보기에 이 더러운 거지는 사람들의 눈길을 가
장 끄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단순히 처음의 몇
번에 그칠 뿐으로, 누가 세상에 그처럼 더러운 거지의 용모를 일일이 조사
하려고 생각이나 하겠으며, 더군다나 냄새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나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처음에 대강 살펴보고 내심 아는 듯이 생
각하게 되는 것이나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정곡을 찌르는 문제
인 것이다.
황보자안은 당시 그 늙은 거지가 느닷없이 빠르게 사라졌으며 그 때문에 기
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처럼 더러고 냄새나던 거지가 바로 이
아름답고 향기가 넘치는 소녀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일순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개 여자들은 더러운 것은 피하고 냄새나는 것 역시 피하기 마련인
데 그런 변장을 부담없이 해치울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심황이라는 낭
자의 용기에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평은 이어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이분 심언니께서는 사실 귀수성심(鬼手聖心)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시고,
강호에서 은밀히 활동해 오셨는데, 무공은 그 혈접에 비해 서로 비슷하신
정도라고 할 수가 있지요. 게다가 변장술은 이분 언니의 특기 중의 하나로,
나으리께서 납치를 당하신 후 어느날 이분 언니께서 저희를 찾아와서는 나
으리를 구해드릴 일을 논의하게 되었어요. 그 뒤에 나으리를 이렇게 구출하
게 된 것은 모두 이분 심언니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황보자안은 이 심황이 말로는 무공이 혈접보다 못하다고 겸손해 했을 것인
데도 아평이 일부러 올려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실
황보자안이 보기에도 이 심황이라는 낭자의무공은 혈접에 비해 결코 뒤지
지 않는 것 같았고, 게다가 여러 가지의 재주와 슬기가 넘치는 여인이기 때
문에 정말로 혈접과 겨룬다면 서로 막상막하의 국면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아평의 말에 심황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것을 듣고 문득 그
녀가 자신과 모용릉파가 서로 옷을 벗고 있었던 광경을 본 것이 아닌가 하
여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정중하게 심황을 향해 재차 포권하며 감사의 말을 했다.
"심낭자께서 불초를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정말로 고맙기 이를 데가 없습
니다. 만약에 제가 사례를 드릴 것이 있다면 좋겠으나, 원래가 심낭자와 같
은 분은 고고하여……"
헌데 심황은 문득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저의 성품은 그다지 고고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요. 저는 역시 다른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대소변을 보는 그런 인간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심황과 같은 아름다운 여자가 대소변의 얘기를 하자, 다른 아름다
운 여자들이 그 얘기를 했더라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렸을 것이나, 이상하
게도 그녀가 말하는 지금의 대소변은 마치 황금덩어리처럼 더럽거나 냄새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실로 사람에 따라서 혹은 환경에 따라서 미추의 견해가 이렇게 달
라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절로 기이한 표정을 했다.
심황은 황보자안을 바라보며 말을 계혹했다.
"저는 원래 공자님께 어떤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이와 같은 도
움을 드린 것이었으나, 기실 공자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수긍이 가지 않
는 도움을 받은 셈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남을 의술로써 치료할 때에도 그
렇지만, 만일 상대에게 어떤 능력이있을 경우는 본인의 부담을 줄이기 위
해 어떤 대가를 받곤 하지요."
"……"
"그래서 이번에도 저로서는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었지만 공자님께 한 가지
의 보답을 받고자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황보자안은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말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편해졌다.
기실 천하에서 곤란한 것들 가운데의 하나는 이런 절세미인의 후의를 아무
런 대가도 없이 받는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만일 거기에서 시원스런
매듭이 지어지거나 합당한 대가가 치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도움을 받은 사
람은 거의 매일 그 절세미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피곤하지 않겠
는가!
황보자안은 이러한 심리를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웃으며 물
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낭자께서 원하신다면 저의 황보가문의 재산
을 절반이라도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황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원래 황보가문의 재산이 얼마
나 되는 것인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녀만은 알고 있는 것일
까?
"저는 겨우 약소한 힘을 보탰을 뿐인데, 그런 엄청난 대가를 받을 수는 없
는 일이지요. 저는 다만 이것을 저의 손가락에 끼울 수가 있는 것으로 만족
해요."
말과 함께 심황은 품속에서 노을빛 서광이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를 꺼냈는
데, 그것은 바로 아까 그녀가 점쟁이로 분장했을 당시 황보자안이 복채로
주었던 용봉쌍지환 가운데의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진 용환(龍環)이었다. 기
실 이 용봉쌍지환은 천하에 으뜸가는 최고의 재질로 만들어진 최고의 상서
로운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황보자안도 당시 그것을 복채로 준 것이 아니라 점쟁이의 화술에 져서 그냥
주었던 것인데, 심황은 그것을 인정하고 지금 정식으로 도움의 대가로 받으
려는 것이었다. 아까 이 심황의 무공을 보니 노을빛의 색깔을 띠고 있어서
그녀가 유독 이 노을빛의 용환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황보자안은 물론 기왕에 주었던 물건인지라 흔쾌하게 즉석에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심낭자께서 그런 약소한 보답으로 만족을 하시겠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그럼 이제부터 그것은 심낭자의 것으로
하십시다."
심황은 이에 정중하게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고마워요."
이어 그녀는 즉시 자신의 손으로 용지환을 왼손의 무명지에 끼우는 것이었
다.
그 무명지는 일명 약지라고도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청춘남녀들이 혼인
식을 올리고 나서 교환하는 예물반지를 끼우는 곳인데, 지금 그녀가 자신의
반지를 받고 그곳에 끼우는 것이 어떤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황보
자안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심황은 표정에 전혀 어색한 심정이 보이지 않았고, 노을빛
의 용지환을 손가락에 낀 그녀의 용모는 이 순간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황보자안은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일시 다소 넋나간 듯한 표정으
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놀랍게도 아직 두 분의 사형께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크게 놀라고 안색이 변하여 즉시 그쪽으로 고개
를 돌리며 공손히 절을 했다.
"두 분 사형, 이 어린 사제가 잠시 한눈을 팔다 보니 두 분 사형께 인사를
올리지ㅣ 못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때 출진자와 현황자, 그리고 점쟁이로 분장했다가 이제는 본모습을 되찾
은 삼십육천강의 한 사람은 각기 황보자안과 심황의 대화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황보자안이 문득 고개를 돌려 엄숙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그와 같
이 말하자 일시 표정이 봄눈 녹듯이 풀렸다.
현황자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저 당초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너를 구하려고 노력한 것
일 뿐이니라. 그래, 자네가 그간 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서 매우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황보자안은 물었다.
"혹시 저로 인해서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현황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혈접은 다행히도 우리들이 내려올 행로를 따라서 왔기 때문에 그리 날짜가
지연되지는 않았네. 앞으로 우리는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이곳 양양성 내의
한 객점에서 쉬도록 하고 다음날 무창성에 도달하여 배를 타면 제날짜에 도
착하게 될 것이네."
현황자가 말한 제날짜라고 하는 것은 물론 환우천하영우대회에 맞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황보자안은 현황자의 말 가운데 무창의 얘기가 나오자 아까 심황이 천연덕
스럽게도 평통표국의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금 그녀를 슬쩍 돌아
보았다.
심황은 이때 황보자안과의 거래도 끝났고 하여 다소 겸연쩍은 듯한 태도로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이때 문득 주루의 터진 안쪽에서 두어 명의 곤륜파의 제자들이 걸어나오며
현황자를 향해 공손히 읍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곳의 배상 문제는 주인과 완전하게 협의되었고, 모두 출발할 준비가 완
료되었습니다."
현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너희들 가운데 몇몇이 양양성 내로 들어가서 좋은 객점의 별채
하나를 예약해 놓도록 하여라. 우리는 오늘 그곳에서 묵어가야 하겠다."
"알겠습니다."
그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아평은 비로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숙녀검을 수습하고 나서 떠날 준
비를 차리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난 듯 황보자안의 곁에 와서 이렇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참, 나으리, 저기 있는 심언니는 그야말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온갖 재
주에 능통하고, 무공이 대단히 고강하여 우리가 만일 그녀와 앞으로 동행하
게 된다면 온갖 무림인들의 습격을 막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혈접이
다시 공격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나으리께서 그
녀에게 동행을 하자고 권유해 보시는것이 어떻겠어요?"
첫댓글 제대로 엮이는군요. ㅎㅎㅎ
다이야몬드수저를 물고태어난 넘 부럽다!!!!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