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금지곡 모음집 | 안기영과 김현순
일제 강점기 금지곡 모음집 (일제36년 민족가요)
https://www.youtube.com/watch?v=GQs2JGwjIvs
금지곡 지정 이유 - 치안방해, 풍속괴란
00:00 뜻 - 김현순 (1931)
02:36 부세 - 이명진 (채규엽 1932)
05:33 아리랑 - 이명진 (채규엽 1932)
08:57 방아타령 - 강석연 (1932)
11:58 조선행진곡 - 김용환, 이경설 (1932)
15:10 장한가 - 윤백단 (1933)
18:06 남대문 타령 - 강석연 (1933)
20:46 종로 네거리 - 최규엽 (1934)
23:06 서울뜨기 - 강홍식, 조금자 (1934)
26:31 두 목숨의 저승길 - 최규엽 (1936)
30:03 범범타령 - 이진봉 (1936)
36:59 하느님 맙쇼 - 김정구, 장세정 (1938)
40:01 타향의 술집 - 김정구 (1938)
43:49 검쟁이 촌처녀 - 이화자 (1939)
46:19 편지와 전화 - 장세정 (1939)
뜻-김현순-1931년 [독립운동가의 노래]
주요한 작사, 안기영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61EdqgnK8n4
주요한 작사, 안기영 작곡, 김현순 노래. [ 1931 <뜻> ]
[뜻]이란, 독립운동가의 자기 희생, 그리고 조국의 해방과 광명, 후생의 번영을 소망하는 시이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당시 치안방해 혐의로 - 음반검열에 걸린 곡이었다.
세월 속에 묻힌 이 노래는
해방후 1949년 당시, 국민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림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6.25 사변이 발발하자 또 묻히고 말았다.
김현순은 1931 꽃밭,조선의 꽃:뜻 .1931 서산에 해는 넘어가고 등을 불렀다.
<뜻>나는 조그만 봉선화 씨외다까만 몸 홀로 튀어 굴러서검은 흙 속에 썩히는 뜻은봄에 고운 싹 나렴이외다나는 풀잎에 이슬 한 방울햇빛 찬란한 아침 떠나서어둔 돌 틈에 스러지는 뜻넓은 바다로 가렴이외다나는 조선의 어린이외다몸과 정성을 아낌이 없이하루 또 하루 배우는 뜻은조선을 다시* 보렴이외다
*주요한 (朱耀翰 1900~1979 이 지은 원래의 시에서는 '빛내'로 쓰여있다.
안기영(安基永)
1900(광무 4). 1. 9, 충남 청양 출생.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인 부모 사이에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5세 때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풍금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했고 당시 음악교사인 김인식·이상준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가 풀려났다. 그후 잠시 중국에 갔다가 1923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로 있으면서 이듬해 〈내 고향을 리별하고〉를 녹음했다. 1926년 미국의 엘리슨화이트음악대학에 유학한 뒤, 1928년 귀국하여 1932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성악과교수로 있으면서 성악·음악사·음악이론 등을 가르쳤다. 이때 이화여자전문학교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발표와 전국순회연주 활동을 했다.
1931년 6월과 11월에는 콜롬비아레코드사에 민요합창곡 〈안기영 작곡집 제1·2집〉을 취입했다. 그의 민요에 대한 관심과 작품 경향은 1940년대 〈콩쥐팥쥐〉·〈견우직녀〉·〈에밀레종〉 등에서 보이듯이 향토가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 전국순회공연에서 합창곡으로 편곡한 〈양산도〉·〈방아타령〉 등이 있다. 해방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성악부 위원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화여전 제자인 김현순과 바람이 나서, 1932년 임신 중인 본처 이성규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김현순과 상하이, 도쿄로 도피했다가 1936년 4년 만에 딸과 함께 돌아왔다.(...) # 당연히 세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안기영의 공주영명학교 동창인 소설가 방인근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18일 부인 김현순과 월북한 뒤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로 있다가 81세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가곡 〈그리운 강남〉·〈이별의 노래〉와 해방가요 〈해방전사의 노래〉 등이 있다.
안기영과 김현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이름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안기영의 캐리커쳐
1900년 1월 9일 ~ 1980년 8월 20일 (향년 80세)
성악가(테너)이자 작곡가.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 공주시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1919년 5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동북지방의 류하현에 있던 신흥학교와 광저우에 있는 예비군관학교에 다녔으며, 난징대학에서 고학하면서 상하이에 있는 독립신문사에서 사무원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지내다가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전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이화여전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순회연주활동을 했으며, 이화여전 교가를 작곡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 노래를 현재에도 교가로 사용 중.#[1] 중동고등학교 교가도 작곡하였다.
데뷔작으로 <그리운 강남>(1928)을 작곡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수십편의 가요와 동요를 작곡하였다. 가요 <작별>(일명 "오 내사랑 오 내사랑",1933)과 동요 <조선의 꽃>은 이 시기 그가 쓴 대표적인 곡들.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는 어린이날 노래와 곡조가 다르지만 윤극영 작곡 노래보다 1년 앞서 발표되었다.#
1931년에는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하였으며, 같은 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들여왔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민요를 바탕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은하수>(1943), <에밀레종>,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방전사의 노래> 외 수 편의 노래를 썼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자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지당했다.
1950년 월북하여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평양음악대학 성악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 사업과 창작활동을 했다. 1957년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사생활에서 간통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이화여전 제자인 김현순과 바람이 나서, 1932년 임신 중인 본처 이성규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김현순과 상하이, 도쿄로 도피했다가 1936년 4년 만에 딸과 함께 돌아왔다.(...) # 당연히 세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안기영의 공주영명학교 동창[2]인 소설가 방인근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안기영과 김현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이름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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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하술할 간통 사건 때문에 이화여전과 그 후신인 이화여대 측에서 안기영의 모든 기록을 말살해버려서 1980년대까지는 메리 영 단독 작곡으로 전해져 왔다.#
[2] 게다가 방인근도 배재고보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