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본문 : 이사야 43장 1- 8절
『강남 성모 병원의 암전문의로 유명한 최일봉 박사님이 쓴 책에서 ‘암환자가 암으로 죽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암환자는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냐? 두려움 때문이지요. 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암세포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절망입니다. 암환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암은 넉넉히 극복할 수 있다.” 이 말 역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입맛을 잃어버리고, 밥을 먹지 못하기에 제대로 암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암 환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 두려움은 사람들에게서 모든 자신감을 빼앗아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열정을 식게 하고, 두려움은 자꾸 나쁜 것만 보게 하고, 두려움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하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생기고, 정신병으로 발전하고, 심지어 암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나라가 없어졌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고된 노동과 학대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으니 정신적인 슬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과연 죽기 전에 고국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두 번씩 말씀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신가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몸이 아픈 것 때문에, 먹고 사는 것 때문에, 환경 때문에, 앞날 걱정에 두려워하는 여러분 손을 하나님께서 꼭 붙잡으시고 “두려워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지난 수요일에 전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성도들에게 전했으면 좋겠다’는 소리가 있어 리메이크하여 준비하였습니다. 하여 오늘 주시는 말씀 가운데 큰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1.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을 지낸 박선규 의원은 가난한 농촌 이장 아들로 태어났고,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31살이었던 어머니에게 6살, 5살, 3살, 태어난 지 백일 된 아기, 이렇게 4남매가 남겨졌습니다. 31살의 젊은 새댁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장이었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보증을 서 농사용품을 구입해 주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빚을 어머니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빚 독촉에 어머니는 남편 죽음을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집과 논밭을 팔아 빚을 청산하니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곳에 살 수 없어 서울로 상경하여 신길동 달동네에 정착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터로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힘겨운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또 스며드는 연탄가스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네 명의 자녀들이 다 훌륭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박선규 의원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니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우리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31세의 젊은 새댁이 어떻게 어린 네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속하였다’는 말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게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또 ‘지명하였다’는 말은 ‘콕 찍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쁜 여학생이 있으면 남학생들끼리 모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쟤는 내꺼야. 내가 찍었으니까, 아무도 건들이지 마! 알았지?” 바로 ‘내 것이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콕 찍어 “재는 내꺼야. 내가 재를 찍었으니, 아무도 건들지 마! 알았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고, 또한 지명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것이다’ 말은 ‘내가 보호한다, 내가 책임진다’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아빠가 아이와 길을 가는데, 누가 자기 아이를 때린다면 그 아빠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단 한 명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자녀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 보십시오. 2절에 어떤 말씀이 나오나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여기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 또는 오늘 우리’를 말하고 있으며, ‘나’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가 어떤 상태입니까? ‘물 가운데로 지날 때’입니다. 또한 ‘강을 건너고, 불 가운데로 지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과 불’은 ‘위험과 환난’을 의미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노라면 수많은 어려움과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환란과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교회를 다니는데도,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릴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불속에 들어간 것처럼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숨도 쉬지 못할 때가 있고, 불 가운데 있는 것처럼, 죽고만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생겨요?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물과 강과 불 가운데서 안전하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란 복음성가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함께 불러볼까요?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 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그늘, 즉 방패막이 되셔서 낮의 뜨거운 태양같이 험한 일을 막아주시고, 밤과 같이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련도 막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없도록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환난과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힘들고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왜 나의 삶이 이렇게 고달플까?” 낙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힘드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힘들 때마다 함께 해 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즈음,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여 어떤 물과 불을 만날지라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힘을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에선 더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나의 귀염둥이요.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내가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너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 여기서 ‘너’가 누굴까요? ‘여러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신다고요? ‘하나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롭다고 하셨습니다. ‘보배롭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카르’라고 하는데, ‘보석과 같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너는 내게 보석 같은 존재야’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보석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또한 옆에 있는 사람 역시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옆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보석이라구요. 뿐만 아닙니다. 존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석이라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다이어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실수를 하여 반지가 빠져 하수도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하수구에는 각종 음식찌꺼기를 비롯 누가 토했는지 구톳물도 있었습니다. 더러운 하수구에 다이어 반지가 빠졌다고, 반지의 가치가 떨어질까요? 가짜가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더러운 하수구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반지는 진짜 다이어 반지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귀함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이어 반지처럼 보석과 같이 존귀한 사람인데도, “나는 하수구 인생과 같아.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좌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편에게 “어이구 어쩌다 내가 저 인간을 만났을까?” 무시를 합니다. 또 자녀에겐 “지 애비하고 꼭 닮은 놈, 내가 어쩌다 저걸 낳아 가지고…”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떤 자라고 했어요? ‘보석과 같은 존귀한 자’입니다. 여러분이 다이아 반지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때요? 잠시 더러운 것이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 더러움을 닦아 내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모습에 절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소중한 사람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셨겠습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세상 그 무엇을 준다고 할지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실감이 안 드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유괴범에게 납치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천만 원을 송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할 때에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당장 먹을 끼니도 없는데, 어디서 천만 원을 구하느냐?’ 자녀를 포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부모가 어디서 구하든지, 천만 원을 구하여 자식을 구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수억 원을 들어서라도 자녀를 구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슴 저미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소개하는 곳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인데, 함께 읽어 볼까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기서 보면,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거예요.’ 누구를 보고 이렇게 기뻐하실까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고, 하는 일도 안돼,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또 여러분의 남편이나 자녀가 한심스러워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하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자 여러분! 저를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보석과 같은 사람이다.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 할렐루야! 이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데, 무엇이 두렵고 걱정이 되겠습니까? 하여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존재를 홀대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계엄령으로 혼란한 틈을 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자세하게 말을 하면 정치 이야기하는 것 같아 생략하고, 저는 오늘 ‘장태완 소장’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당시 서울을 책임지는 수도경비 사령관이었습니다. 별 두 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전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도경비 사령관으로 군을 지휘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어요? 장군이 아니라, 이등병이 되어 군을 떠났어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는데, 장군이 이등병이 된다는 것은 수치요, 모욕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아마도 장태완 장군 심정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이등병에서 다시 장군으로 복귀가 되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진상을 조사하였는데, 그에게 잘못이 없었음이 드러나 다시 장군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장태완 소장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회복’에 대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복’의 뜻이 뭐에요? ‘원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땅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어디에 있어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저들이 어떻게 살아요? 뿔뿔히 흩어져 노예로 살고 있으니, 앞에서 말한 장태완 소장과 같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복일까요? 첫째는 ‘육체의 회복’입니다. 5절에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말하고 있으며, 6절에 “남쪽에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리라.”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사방으로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의 신분으로 회복되고, 육체가 회복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육체가 회복되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자. ‘회복’의 뜻이 뭐라고 했어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왕현 집사님의 몸이 예전의 건강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육체의 회복입니다. 또한 전계남 집사님의 몸도 원래대로 깨끗하게 회복될 줄 믿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가 회복되는 축복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는 ‘물질의 회복’입니다. 6절에 보면,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 놓으라” 말하는 것을 봅니다. ‘내 놓으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재물을 얻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빈손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재물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실제 에스라서 1장 4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왕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설명을 하지만 이런 말입니다. 어느 날 바사 왕이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시켜 줄 테니, 고국으로 돌아가라”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은 보화를 내어주고, 저들이 성전을 짓는다고 하니, 필요한 것들을 다 내어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포로를 풀어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도 감사한데, 물질까지 준다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집이 없어졌습니까? 물질이 없어졌나요? 하나님께서 금년에 물질의 회복을 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능치 못하실 것이 없을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영적인 회복’입니다. 7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그동안 저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장태완 장군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사람이 가장 크게 낙심했던 것은 이등병이 된 것입니다. 장군이란 군인으로써의 자존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등병이 되었다는 말은 ‘군인으로써의 자존심이 짓밟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군으로 회복되었을 때, 가장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는 저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신 것이 바로 ‘영적 회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성도로써의 자존심이 짓밟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성도인데도 불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고, 기도는 물론이요, 교회생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육체가 회복되길, 또는 물질이 회복되기 만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가장 중요한 영이 회복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자. 여러분! 정리를 하면,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에게 ‘육체의 회복’과 ‘물질의 회복’과 ‘영적인 회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영적 회복이라 생각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고, 기도가 회복되어야 하고, 말씀이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식었던 첫사랑이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되게 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육체의 회복과 물질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금년에 우리 모두 영과 혼과 육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회복을 넘어 여러분의 가정이 창대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라 하셨고, 둘째는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 우리도 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알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를 지켜주겠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회복시켜주겠’고 말씀하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이끌어 내라’는 것입니다. 하여 더 이상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이끌어 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