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인 동기가 들어와서 몇 동기가 만났는데, 동기 장인상이 있어 함께 조문을 했어요. 그 후에 엔제리너스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가 이루어졌거든요. 몇몇 교회 얘기가 오고갔어요. 목사와 목사 간, 목사와 장로 간에 생긴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얘기가 오갔지요. 자살을 하면 그 이유가 부각되어 자신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이의 악행이 드러나지 않을까라고 고민한 목사, 목회 중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다가 사임하고 조기 사망한 얘기가 있었어요. 물론 목사로 인해 같은 경우에 처하는 성도도 있을 거예요.
왜 이럴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인 교회가. 정말 마음 아프지만 사람이 모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부하고 넘기면 될까요?
초대 교회도 몇 지역 교회에 문제가 있었지요. 그때도 위에서 얘기한 상황이 펼쳐졌을까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시점의 복음의 확장을 생각하면 그런 유추가 가능하다고 여겨져요. 이 유추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그 시점엔 그런 상황까지 치닫지 않도록 통제가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져요.
그렇다면 통제가 됐고 안 되고의 차이는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요? 이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은 이 고민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나름대로 찾아볼 생각이에요. 좀 무거운 주제일 수 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요. 함께 해보아요.
제가 여러분께 세 문항의 질문을 드릴게요.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것에 손을 들어주세요. 첫 번째는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나는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세 번째는 거듭나지 않은 것 같다. 부담 갖지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표해 주시면 됩니다. 첫 번째,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예, 감사합니다. 두 번째, 나는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예, 감사해요. 세 번째, 거듭나지 않은 것 같다. 예, 감사합니다. 세 질문에 대해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다 있네요.
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질문인데, 이렇게 각기 다른 답이 나올까요? 성경의 가르침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그럴 수 있어요. 또는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한데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럴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일까요? 찾아가 봐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인 거듭남이란 뭘까요? 하늘로부터 나는 거예요. 부모를 통하여 어머니에 태속에서 자라고 태어난 것과는 다른 새로운 출생이죠. 그 출생은 어머니의 태속에서 280일 간 있다가 태어나는 것과 달리 성령님의 역사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거죠. 혹시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안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3장 3절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거든요.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해요. 요한복음 1장 12절이에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의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곧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이죠.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거예요.
원래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죠.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죽음이라고 해요. 새로운 출생이 있어야 해요. 거듭나는 거예요. 거듭나야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할 수 있어요. 거듭나야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요.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아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다 곧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허물과 죄로 죽은 자 곧 죄인으로 인정하고 그 삶에서 돌이키는 거예요. 회개죠. 거듭나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어요. 회개하지 않아요. 거듭나야 회개해요. 그렇다면 거듭남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회개하고 믿기 이전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요.
여기에서의 회개를 좀 더 설명하면요. 스스로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죄인임을 인정하고요. 그 단절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허물과 죄에 대한 대가를 십자가에서 지불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진심으로요.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뭘까요? 구원의 복음이 들려질 때에 사람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예요. 사도행전 16장 14절이에요. 자주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들었을 때에 있었던 역사죠.
복음이 들려질 때에 성령님께서 당사자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면 그 사람이 믿어요. 그 역사가 없으면 누구도 믿을 수 없죠.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에만 믿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지요. 그것이 거듭남이에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인 사람이 있어요. 그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탄의 종이에요. 신에 대한 독립선언을 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삼고 살아가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해요.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거든요.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이에요. 그에게 복음을 들려져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고요. 그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해요. 곧 믿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죠. 새로운 출생이에요.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역사예요. 그 역사로 인해 당사자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원자로 영접해요.
다시 질문할께요. 나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원자로 영접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진심으로 영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도요. 마지막으로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나는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요.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과 많은 차이가 있네요.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이 모호하거나 여러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임도 알 수 있네요.
거듭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요. 이때에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에 접붙여지지요. 교회와 신자 모두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 성전이에요. 전자는 고린도전서 3장 16에, 후자는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돼요. 구원을 얻은 거예요. 허물과 죄로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그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구원이에요. 신자에게 이 일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죠. 구원을 얻은 거예요. 복음이 들려질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것이거든요. 그 당사자의 어떤 행위로 인한 게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예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죠. 당사자의 행위가 없기에 자랑할 거리가 없어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9절 말씀과 같죠. 여기에서 은혜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예요. 믿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원자로 영접하는 거고요. 구원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바뀌어 교제할 수 있도록 회복되는 거예요. 과거에 이루어졌기에 과거형이에요. 자신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거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관계를 회복시킬 만한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에요.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디도서 3장 5절도 같아요. “하셨나니.” 과거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6장 39절요.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에요. 유대인들은 그 시점에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이었어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인 거예요. 산 자예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새 언약의 완성자, 약속된 기름부음 받은 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어요. 유대인들은 그분을 영접하여야 해요. 유대인들은 그 시점에서에 언약의 관점에서는 산 자인데, 순종하지 않음으로 죽은 자와 같아요. 예수님에 의해 주어질 완성된 새 언약의 관점에서 죽은 자예요. 그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완성된 새 언약 안에서 산 자가 되요. 다시 사는 거예요. 다시 산다는 것은 처음 사는 것과는 달라요. 이전에 살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그 말씀을 하는 시점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에 관한 거예요. 예수님은 유대인들 중에서 살리고자 하시는 이들을 하나님께 받았고 그 일을 성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여기에서 마지막 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막 날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날이에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 그것이 끝나는 날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언약 관계를 완전히 끝내시는 날이지요. 이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불신 국가일 뿐이에요.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원자로 영접하여야 하는 한 불신자일 뿐이고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인 거죠. 이 설명이 생소하여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계실텐데 지금 더 상세하게 얘기하기는 시간 상 어려움이 있네요.
그 역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의문이 생겨요.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지?”그에 대한 답이 선택과 예정이에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존재로 택하셨고 그 생애 가운데 한 번은 반드시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다는 거예요. 선택과 예정은 신자가 아닌 이 땅의 누군가에게 적용할 수 없는 개념이에요. 그 반대말이 유기인데, 이 또한 마찬가지예요.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다가 죽었다면 유기된 사람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 역사는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하시고 교제하고자 정하신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어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사도행전 13장 48절의 말씀과 같아요. 여기에서 영생은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에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이죠. 안다는 표현은 체험적인 앎이에요. 부부의 성적 연합이 어원이에요. 사랑의 합일이에요. 영생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 영생이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서 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아니죠. 이 땅에서도 연합이 이루어지거든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곧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에요. 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어요. 선택되고 예정된 사람은 다 믿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심으로.
선택과 예정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단절된 관계가 회복돼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해요. 여기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뜻해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이라는 거예요. 곧 그의 전 생애 가운데 한 번은 반드시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아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태중에서든지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의 어떤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서든지.
불가항력적인 은혜 곧 불가항력적인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이 은혜에 놀라워하고 감격하시나요? 매일의 생활에서 이 사실을 되새기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하시는가요? 그렇다면 설교자로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놀람과 감사와 감격의 회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에 따른 차이가 있겠지만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그 상황에서 낙심하거나 낙망할 수도 있겠죠. 그래요. 다만 그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인 효력 있는 부르심을 한 번 되새겨보시기를 바래요. 그것의 놀라움과 감사와 감격을 마음에서 끄집어내어 보세요. 그것이 내게 힘이 되어 낙심과 낙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거나 평범한 일상이거나 이 놀람과 감사와 감격이 항상 삶의 바탕에 깔려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았으면 이 땅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삶이 펼쳐져요. 여러분 생각에는 어떠세요? 모태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과 30세에 부르심을 받은 것 그리고 죽기 직전에 부르심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좋은 것일까요?
그 교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핵심인데요.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어요. 로마서 14장 17절이에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사는 기간이 길면 좋을까요? 짧으면 좋을까요? 길면 좋죠. 그렇기에 앞의 경우에서 첫 번째 곧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간을 길게 가지게 된 것이니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고요? 감사합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의 핵심이에요. 잊지 마시고 꼭 기억하시기를 바래요.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되지요? 바울 사도는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 말했어요. 천국에 들어가요. 바울 사도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했네요. 그럼 질문할게요. 이 구원이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인 구원과 같은 개념일까요? 다른 개념일까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인가요? 아니죠. 당연히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는 달라요. 관계 회복인 구원과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이 구원은 성경에서 별도로 영원한 구원이라고 표현돼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는 히브리서 5장 8절에서 9절 말씀에서 확인돼요.
다시 질문을 할게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관계 회복의 구원을 얻은 신자는 이 땅에서 삶과 관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본인의 생각을 따라 손을 들어 표해주세요. 첫 번째 얻는다고 생각하시는 분. 예, 감사해요. 두 번째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예, 감사해요. 거듭남에 관한 질문에서와 같이 나뉘었네요. 역시 성경이 그렇게 나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어요. 한 번 함께 찾아봐요.
참고로 저는 첫 번째가 좋아요. 제 생각으로는 첫 번째가 좋아요. 절대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요. 다만 제 생각에 좋은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이 일치한다면 최상이겠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참 싫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라고 생각하고 계신 분들은 어떠세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이 어떠하든지 지금의 생각을 고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지금의 생각을 고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성경의 가르침이 어떠한가를 찾을 필요가 없겠죠.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주권인데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신다고요? 예. 감사합니다. 그렇죠.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라야지요.
신자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들어가는 천국 곧 영원한 구원에 관한 대표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이지요. 조금 전에 언급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히브리서의 진술도 같은 맥락이에요.
만약에 효력 있는 부르심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면 거듭난 신자라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어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면요. 그렇지 않나요? 신자가 된 이후에도 신자는 계속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관한 말씀을 듣는데, 그것도 복음이거든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신다면 당연히 신자는 복음에 순종하게 되겠죠. 그 역사 안에서 바울 사도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게 될 거예요.
자 그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의 사람이 신자가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신자가 된 이후에 그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는 같을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같지 않아요. 달라요. 시체와 같은 상태의 사람을 살리는 것과 산 사람이 된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차이가 있어요. 산 사람에겐 산 사람에 맞는 방식의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말씀과 같이요. 신자는 성령의 전이에요.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서 일하세요.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요. 우리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기를 원하시고 누릴 수 있도록 일하시는 거예요. 그 역사는 그대로 신자에게 열매를 맺는가? 그렇다면 정말 좋겠는데, 아니에요. 신자는 그 역사를 거스를 수 있어요. 육체의 소욕 곧 욕심으로 성령의 그 역사를 거스를 수 있는 거예요. 이는 반드시 거스른다는 말은 아니에요. 거스르지 않을 수도 있고 거스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거스르지 않으면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으면 불순종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각자 여러분의 삶에서 확인하시는 바이기도 해요. 그렇지 않나요? 예,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아요.
바울 사도는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육체의 일이라고 하거든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까지에서요.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래요. 이어서 결론적으로 자기의 육체의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요. 여기에서 영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인 영생과는 달라요. 이 영생은 이 땅에서 삶이 끝난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서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거예요. 썩어질 것은 영생과는 반대 개념이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제가 질문을 해볼까요? 첫 번째는 바울 사도의 진술이 한 신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가능성을 얘기한 것이다. 두 번째는 아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두 부류의 사람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라고 생각되시는 분, 손을 들어주실래요? 두 번째라고 생각되시는 분, 손을 들어주세요. 우리에게 있는 상식적인 사고에 의하면 첫 번째가 맞아요. 두 부류의 사람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한 신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가능성에 관한 거예요. 이는 너무나도 명백해요. 달리 말할 것이 없지요.
신자는 성경에서 여러 상징으로 설명하거든요. 앞에서 얘기한 하나님의 자녀, 성전이 있어요. 주님과의 관계에선 종이라고 해요. 결혼 관계를 비유해서는 신부라고 하고요.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연속되는 세 비유가 나와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 관한 얘기인 열 처녀 비유, 우리가 달란트 비유라고 말하는 주인과 세 종들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이에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다 기름이 든 등을 가지고 있었어요. 세 종들은 모두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어요. 달란트는 금의 중량을 나타내는 단위인데, 사업 자금이랄 수 있겠죠. 하나님 나라의 비유임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에요. 제가 고려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에 원장님이셨던 허순길 교수가 그렇게 해석하셨는데, 저는 동의해요. 양과 염소 모두 임금을 주라고 불러요. 임금은 그 부름을 거부하지 않으세요. 이 사실은 뭘 말할까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성경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다 성령으로 된 일이라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세 비유에서 같은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아주 분명하지요. 우리가 앞에서 길게 살펴본 바와 같아요. 그들이 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차이가 있죠.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안 했느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곧 각기 비중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맡겨졌는데, 주어진 만큼 남겼느냐 아니냐. 이는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했느냐 저버렸느냐의 문제예요. 임금이 변복을 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영접하였느냐 영접하지 않았느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달란트를 남긴 이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영접한 이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되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신랑에게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듣고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이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영접하지 않은 이들은 임금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요. 앞에서 언급한 바울 사도의 진술 곧 성령을 위하여 심었느냐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었느냐에 따른 두 경우는 이 예수님을 말씀의 다른 버전이었던 거예요.
“에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러한 진술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와는 정반대의 내용들이 성경에 많아요.”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이 드실 거예요. 저는 그런 생각에 대해 이해를 해요. 분명히 그렇게 말할 만한 내용이 성경에 있으니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8절이에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이에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장 8절이지요. 이런 내용의 성구는 더 많은데,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져요. 이 성구들만으로 충분하죠.
“그럼 이 성구들은 뭔가? 거짓말이거나 잘못된 것인가?” 아니에요. 똑같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내용들인데, 어떻게 잘못되거나 거짓말일 수 있겠어요? “그럼 성경은 정반대의 내용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좀 곤란해요. 그럴 수밖에 없으면 그래야 하는데, 왠지 꺼림직해요. 이 생각은 성경이 내용적으로 모순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정반대의 내용이 동시적이라면 그것은 모순이거든요. 한쪽에서는 거듭난 신자가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기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거듭난 신자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모순이죠. 분명한 모순이에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야죠. 그리고 각자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따를 수밖에요.” 여전히 꺼림직해요. 다른 길은 없을까요? 제가 한 번 찾아볼게요. 수긍하든지 안 하든지 선택은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인데, 한 번 들어는 봐주세요.
먼저 요한복음 10장 28절 말씀이에요. 앞의 27절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듣고 알고 따른다가 모두 현재형이에요. 계속적인 진행인 거죠.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계속적으로 예수님과 사랑하며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거예요. 그 후에 28절이 주어졌어요. 28절은 27절을 전제로 주어진 거예요. 27절을 전제하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는 마태복음 7장 21절과 같은 진술이라는 거예요.
다음으로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인데요. 그 성구는 8장 1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결론이거든요. 그런데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기록이 있어요. 여기에서 너희는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로마서 1장 6절이에요. 39절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분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가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관하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요? 당연히 교제가 이루어져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거죠.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거예요. 바울 사도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신자가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했어요. 반드시요.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6장 8절과 같은 진술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고린도전서 1장 8절이에요.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는 진술이 이어져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뒤따른 거죠.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 곧 예수님을 믿은 신자가 그분이 삶에서 주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믿음이에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구원, 영생 등이 표현은 같지만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던 것과 같이 믿음도 그래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전제되어서 그분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은 다 이 경우에 관한 거예요. 신자는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느냐 곧 그분을 주님으로 의지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며 살아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면 그분의 뜻에 순종해요. 현재의 삶에서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면 육체의 욕심으로 성령을 거스르지 않아요. 성령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거예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요. 곧 순종이에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것인 믿음은 순종과 동전의 양면이에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인 믿음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물이었기에요. 반면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것인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자기 육체의 욕심 사이에서 스스로가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선택과 결부되어 있어요. 행위과 연결되어 있지요. 순종인 행위예요. 행위는 순종인 행위와 불순종인 행위로 구분되는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믿음은 순종인 행위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세요.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요. 신자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거죠. 그 역사 안에 있으면 곧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이나 마태복음 25장은 은혜를 바르게 받은 결과와 헛되이 받은 결과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요. 요한복음 10장 28절이나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8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에 관한 진술이에요.
지금까지의 설명이 어땠는지요? 수긍이 되는 분들도 계시고 수긍이 안 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수긍하고 싶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고요. 최종적인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에요. 한 번 고민해볼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성도의 견인론은 장로교인들이 신천지에 특히 잘 빠져들어가는 한 이유예요.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로 제시되는데 통용되는 거예요. 바른 말씀에 대한 열정이 강할 수록 더 잘 빠져들어가지요. 이 또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거리라고 생각해요.
자, 처음에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볼께요. 초대 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똑같이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에게서는 다양한 문제가 나타나요. 그런데 지금의 교회 양상과 달리 그때엔 통제가 된 것으로 여겨져요.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회로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통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유는 뭘까요? 이제까지의 제 설명엔 그 이유가 담겨 있어요.
고린도교회엔 분파주의와 같은 형제들을 대상으로 불의를 행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바울 사도가 경고해요. 분파주의에서 돌이키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분파주의에서 분파가 일어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앞세워 찢는 거예요. 각 파를 따른 각각의 교회가 생겨나는 거죠. 바울 사도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라고 선언했어요. 고린도전서 3장 17절이에요. 형제들을 대상으로 불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라고 선언했고요. 고린도전서 6장 8절에서 9절에서요.
이 선언을 앞에 두고서 거듭난 신자라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이와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의 반응은 어떨까요? 같을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다르죠.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그 선언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와닿아요. “하나님께서 멸하시더라도 괜찮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선언은 너무나도 실제적이에요. 분파주의에서 돌이키지 않고 분파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나 형제에게 지속적으로 불의를 행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에 강력한 제동이 되는 거죠. 거듭난 신자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신자도 나름대로 제동이 되긴 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강력하진 않아요. “내 삶과 무관하게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또는 “내 삶과 무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셔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요.
요한계시록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관한 내용이 있어요. 마지막이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최악이에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함에 대해 하나님은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세요.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요. 이 말씀 앞에서 토하여 버림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신자와 궁극적으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그 선언이 몸에 와닿음에 있어서 차이가 있어요. 좀 심하게 말하면 천양지차라고 할 수도 있어요. 초대교회는 전자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얼마나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강력하게 와닿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초대교회는 나쁜 상태를 지속하거나 더 나쁜 상태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통제가 이루어졌어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토하여 버리신다고 생각하니요. 정말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통제가 안 되겠죠. 물론 부분적이긴 해요. 어떤 신자들에게 그렇죠. 후자의 생각이지만 통제가 되는 신자가 있는 반면에 통제가 안 되는 신자가 있다는 거예요. 전자의 생각이라고 해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에요.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선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 경외. 신자의 삶에 기본이지요. 경외는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것이거든요. 여기에서 거듭난 신자라도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게는 두려움은 말 그대로예요. 매일, 매 시간, 매 순간 성령의 역사를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르면 안 되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지요. 그렇기에 요구되는 깨어 있음이 실제적이에요. 나의 인간적인 각성이나 수고나 노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민감함이에요. 그 민감함이 신자의 삶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해요. 육신의 일을 이루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게 되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해요.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죠. 이는 다 은혜예요. 나의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맺는 열매이죠. 은혜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이 은혜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도 은혜인 거죠. 전자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데 반해 후자의 은혜는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를 수 있는 가항력적인 은혜이기에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하는 차이가 있어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가항력적인 은혜인데,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선택을 토대로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해 성경은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영원한 구원이 은혜이면서 동시에 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편의 역사에 방점을 두면 은혜, 오직 은혜이고요.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신자의 순종에 방점을 두면 상이 되는 거죠. 성경에서 상 또는 상급은 영원한 구원, 영생에 더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 영생의 다른 표현이에요. 보는 측면에 따른 차이인 거죠. 은혜의 결과물임에도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신자의 모습을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히 넓으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은 모두 형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랑하는 지체라고 생각해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이 오늘 제 설교를 듣고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해 좀 깊이 고민해보시기를 바래요. 성령의 조명을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기를 바래요.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혹시라도 제가 앞에서 언급한 그런 상황을 맞을 때에 다른 지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래요. 그렇게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게 되기를 바래요. 물론 아예 그와는 무관하게 지금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기를 바라고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시기를 바래요. 그 삶이 토대가 되어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요.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셨기에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마시고요. 그냥 매일 매시간 매순간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고 그 역사를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 행위를 따른 하나님의 판단이 이루어지고 영원한 구원, 영생을 얻게 될 거예요. 이 복이 여러분의 삶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사족
구원론의 다른 세 주제에 있어서 저는 부분적 부패가 아닌 전적 부패, 조건적 선택이 아닌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가 아닌 보편적 속죄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이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은 <닫힌 성경 열기>(등과빛 출판사, 박창진)에 있어요. 읽으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