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가 왜 이래?
김 희숙
요즘은 무조건 간결해야 한다. 카톡도 그렇고 문자도 그렇다. 그것도 지루한지 이모티콘 하나로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해도 통하는 세상이다.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지 못한 걸 탓하기엔 세상이 그만큼 간결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비호감을 느낄 정도로 장황한 것이 있다. 온갖 글로벌한 고급스러운 단어를 합성해서 만든 이것은 무엇일까?
2021년 9월 1일부로 한국 정부에서도 사전 입국 허가서 (K-ETA) 시스템을 도입했다. 대한민국 차원에서는 선진국형 입국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모든 제도가 처음 시행할 때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개정된 도로 표기 방식이 행정상 업데이트되지 않은 곳이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어르신들은 여행사의 도움이 필요했고 여행 업무가 폭주한 적이 있었다.
필수적으로 입력해야 할 사항 중에 체류할 곳의 주소를 입력해야 한다. 몇 년에 한 번씩 방문하시니 자식들의 주소를 외우실 리가 없다.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이상한 아파트 이름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구글의 도움을 받아 찾아보니 언어적 사생아 같은 이름이 정말 많았다. 이그제큐티브, 더 퍼스트, 프리스티지, 플레티니움 등 이런 단어는 항공 업무와 연계된 단어라 낯설진 않았다. 메르디앙, 루첸시아, 데시앙, 그라시움… 이건 유럽식 이름인 걸로 유추해 본다. 유럽식 단어와 영어가 합성된 것도 있고 이름이 얼마나 긴지 도대체 여기에 사는 주민들은 외울 수 있을까 의아해진다.
주소가 왜 이래?
오래전에 SBS에서 <장수 퀴즈 >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미 작고하신 코미디언 서 세원 씨가 진행한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테마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로였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때 묻지 않은 토크는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난다. 카메라를 마주하고 도시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장면이었다. "아무 게냐~ 엄마 SBS 방송에 나왔다 " 방송국 이름이 생소하셨는지 몇 번이나 NG를 낸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세 글자의 방송국 이름도 발음이 안 되시는데 설마 자식들의 아파트를 찾아 헤매신 건 아닐 테지요?
요즘은 아파트 이름을 외래어를 합성해서 길게 짓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외래어로 이름을 지어야 글로벌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시부모님들이 못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스개 소리이길 바라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세월의 흐름으로 봐서 예사롭게 흘릴 소리가 아닌 것 같다.
한류가 대세인 요즘 한글을 패턴으로 옷을 짓는 유명 디자이너도 있다. 각 나라의 대학에서는 한국학이 개설되고 한글을 배우러 한국으로 몰려오는 유학생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훌륭한 한글을 두고 언어 성형을 하다니 스스로 품격을 낮추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순수한 우리말로 지은 아파트 이름 속에는 정겨움이 있다.
들꽃 마을, 하늘 채, 참 누리, 어울림, 뜨란 채, 사랑으로 등 이름만 들어도 포근한 느낌이 전해오는지 않는가?
앞 산 밑에 개나리 아파트
친구의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그 친구가 살았던 아파트 이름
세월은 흘러도 있혀지질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