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11]

... -손목을 잡혀 방 한구석으로 끌려온다. 그의 까슬까슬한 턱과 내 턱이 맞닿아 부벼짐에 따가움 을 느끼지만, 곧 그의 거칠게 헤집고 들어오는 혀에 난 아린 턱을 무시한 채 스르르 눈을 감는 다...- 잠에서 깨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꿈의 주인공이 무였음을 자각한 난 나의 불순한 사상을 애써 외면하려 이불을 뒤집어쓴다. "으으-. 도대체 왜." 벌컥. 방문이 열리고 케이와 디가 얼굴만 쑥 내밀고 외친다. "수업 갔다 올게!" 난 4학년이라 수업이 별로 없다. 디 역시 4학년이지만 국방의 의무를 지켜내느라 막 2학년이 된 케이덕에 이것저것 듣고 또 듣고 하며 아침, 점심, 저녁 나절 그의 옆에 꼭 붙어 다니기 바쁘다. 대충 욕실안에서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머리를 헹궈낸 후, TOEIC학원을 알아보기위해 <101호> 를 나서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곳은, 무의 집 앞. "무우-." '내가 왜 여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는데 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 다시 한 번 멈칫한다. "왜." 왜냐니. 그래, 원래 멋없었으니까. 그를향해 돌아서서 갓 일어난듯 말간 그와 대면하자, 얼굴은 붉어지는듯 했지만 아닌듯 대꾸한 다. "그냥, 들리나 안들리나 불러봤어. 들리는구나." 피식-. "들어와서 기다려. 나 좀 씻고." "너 씻는데 내가 기다려서 뭐해." "같이 나가려고. 너도 그럴 생각으로 온 것 같은데, 빨리 들어와 나 몰골이 좀 챙피하거든." 문닫고 뒤따라 들어오려 양쪽 벽을 짚는 그의 몸이 마치 나를 뒤에서 감싸는듯한 포즈가 되자 괜히 놀라 앞으로 두어발짝 빠르게 뛴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자신의 집안에선 항상 하얀 슬리브리스에 트레이닝바지 차림인 무는 황급히 자신에게서 몸을 피 하는 나를 건조하게 훑어보며 한마디 하고있다. "아니, 뭐-." 딴청을 피우며 난 큰 방 한켠에 자리하고 앉는다. 잠시 날 쳐다보던 무는 이내 욕실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오랜만에 들른 그의 집엔 여전히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만 나는 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욕실 쪽의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가 있는 방 쪽으로 걸어간다. 아직까지 초록색 바닥 군데군데 약간은 지저분한 내 발자국이 남아있고, 문지방 한 켠에 화려한 무늬의 슬리퍼 한켤레가 놓여있다. 그 발자국들에 어색했던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살짝 지어지는 미소를 그냥 방치한다. 그리고는 곧 엊그제의 취한 무를 겹쳐 떠올린다. '이상한 감정이 생긴다.' 정말 그날은 전혀 기억에 없는걸까. 저렇듯 아무일 없던듯이 행동하는걸 보면 실력있는 연기자가 아닌이상은. "괜히 생각만 많아지게 만들잖아. 정작 자기는 얄미울만큼 태연하고 말이지." "누구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음, 그-." 어느새 내 한 쪽 어깨위로 얼굴을 들이밀고있는 그에게 대답할뻔 한 난 진정으로 놀라 외친다. "놀랐잖아!" "바로 옆에있는 문소리를 못들어, 귓구멍도 크면서." 내가 병원에서 그에게 핀잔줄 때 써먹었던 말을 되돌려주며 아까의 복장에 트레이닝 상의만을 더해입는 그를 가만히 지켜본다. 검은 눈빛. 묘한 매력을 뿜는 얼굴. 적당히 남자다운 몸. 전혀 지루하지 않은 적은 말수. '예쁘긴... 예쁘구나.' 그의 입술은 처음 그를 접했을 때의 내가 느꼈던 변함없는 첫인상 -무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듯한 눈과는 다르게 굳게 다물어져있는 입술- 의 매력을 여전히 발산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절 대 수다스럽지 않을듯한 입술에 시선이 머무르자 한 번 저 입술을 열어 마음껏 속얘기를 들어보 고 싶다, 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이면에, 내 가슴속 혹은 머릿속에서 어제의 꿈이 어렴풋 내 몸 이곳저곳을 맴돌고 있 음을 외면할 수 없다. 다시-. 그를 취하도록 만들고 싶다. 알 수 없는 저 남자의 속마음을. "뭘... 그렇게 보는거야."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고있던 내게 한쪽 손을 내밀고있는 무. 난 정신을 차린다. "응?" "너말야,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의 두 얼굴에 의해, 생각은 깊어져가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자 괜히 두눈을 치켜뜨고 그의 면상을 노려본다. 심술이 솟는것이... 사실이다. "너, 앞으로는 내앞에서 취하지마." 그의 동공이 커진다. '대체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묻는듯이. "너 진짜 재수없어. 정말 싫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뭐가 그렇게까지 너를 당당할 수 있도 록 만든건진 잘 모르겠지만, 그러는거, 아니야." "내 행동이 왜. 내가 보기엔 네 행동하고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그의 생각지못한 뜻밖의 발언에 내 눈은 더욱 동그래진다. 마치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듯한 그의 발언. "내가 뭘 어떻게 너처럼 행동했단거야." 그가 사뭇 차분해졌음을 느낀다. "너. 나 구경했잖아." ... "내가... 조금씩 너한테 물들어가는거, 모른척하면서 구경하고있잖아 너." 그리곤 덧붙이는 그. "지금. 나처럼." 이렇듯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얘기가 오고가고 있음에, 지금 나의 손발은 차갑게 식고있다.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다. 그를... 구경했음을, 그렇게 막말로하자면 부정할 길이 없는 터. 또한 자신이 내게 물들어가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내앞에서 인정하고있는 검은 그. 그리고 또한. 내가 자신에게 어느새 물들어가고 있음을, 벌써 눈치채고 나름대로의 앙갚음을 하고 있었노라 살며시 고백하고있는 그.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없이 어째튼 지금은 모든것들을 구경하고야 마는것이 내 후천적 습성임 을, 어서 그에게 어필해야한다. 너만을 구경한게 아니라고. 널... 진정 재미만을 얻으려 구경하고 있던건 아니라고.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기전에... 그렇게 해도 되는지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기전까지의 과정일뿐이라고, 말해야한다. 넌 너를 주축에 두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절대 너만을 두고 그 랬던것이 아니었다고. 저남자때문에 처음으로... 가슴이 아리다. "신중한게... 죄는 아니잖아." 말을 터뜨리자 눈물이 함께 터져나오는 인체의 신비함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울먹이며 꾸역꾸역 애써 할말을 뱉어내려는 나. "나처럼... 구경만 할것이지... 괜히 왜 이... 상한 소리는 엉엉... 헷갈리잖아... 너 때문에 엉... 키잖아... 엉엉... 난 아무말없이 구경만했지, 너처럼 이상한 소리해서 두갈래 세갈래길 만들진 않았어 적어도!" "..." "엉엉..."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