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기원 어하라와 비류왕 수도 부여성
1. 백제의 기원 어하라bc42~bc19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기묘년 3월(bc42년)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辰番)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즉,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어하라 책봉후 13년 임인(-19)에 소서노가 죽었다.
소서노의 어하라 책봉은 bc31년경으로서 유리왕의 즉위해인 bc19년보다 13년 전이었던 것이다.
소서노가 건너온 패수는 뒤에 구하(句河)가 된 지금의 요하 상류다.
낙랑군의 패수이며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으로 죽은 평양성 패수다.
어하라의 북쪽 경계가 된 대수(帶水)는 뒤에 살수가 된 심양시 혼하다.
소서노 어하라의 중심은 어니하가 지나는 대석교시 진미산이었다.
뒤에 구대가 대방왕이 된 곳이며, 위나라 대방군의 기리영이 생겨난 곳이다.
공손탁 요동국이 설치한 대방군은 의무려산 동쪽으로서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 서로 다르다.
훗날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가 나당전쟁에 패배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고나서 다시 대방도독부가 대석교시 남쪽 개주시 웅악현에 설치되기도 했다.
발해 때 개모성에 진주(辰州)를 두었는데 이 개모성 사람들이 거란에 밀려나 요하를 건너 이주해 들어온 곳이 개주시다. 그래서 뒤에 진번(辰番) 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본래 진주 개모성은 단군시대 소밀랑 수도 부근이므로 발해가 진주(辰州)라고 불렀던 것이다.
<북사>에서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 )라고 불렀다. 고대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지금의 영구시와 대석교시 사이를 지나는 물이며 해성시(海城)시에서 나온다.
대석교시 진미산에서는 낭랑묘가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을 숭배한다. 즉 초기에 소서노의 행적과 관련되는 것이다.
또한 대석교시 서북 교외에는 악주(岳州)고성이 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성이다.
이는 요나라 요주성(耀州城)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지만, 성의 모습이 요나라 평지성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형(方形)이 아니다.
이는 소서노 어하라의 어주성(於州城)이 어원인 것이다. 중국식 한자 발음도 어 於yu와 악岳yue은 서로 비슷하나 요耀yao는 비슷하지 않다.
북쪽에 있는 해성시 팔리진의 영성자산성도 여자가 지었다고 한다. 어하라의 북쪽 방어성이다.
진미산 동남쪽에는 백채향(百寨鄕)과 백자구(百子溝) 등이 있는데 모두 백제의 이름이 남은 것이다.
2. 비류백제의 수도 부여성
소서노가 어하라로 즉위하여서 수도로 삼은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서남단의 복주(復州)인데 부여성이라고 불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346년 모용황이 정벌하여 부여왕 여현 등 5만명을 끌어간 곳이 부여성이다.
<수서> 등에 백제 수도는 오방제도五方制度인데 중방을 고사성이라고 하고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다.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복주 부여성에도 바로 오방성이 있다. 중방은 고사타자성이고, 동방은 득리진의 용담산성이고 북방은 웅악진의 웅악성이다. 남방은 구지하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말로 구슬산 밑이라는 뜻이다. 즉 금주시 옥산 아래 용왕묘에 해당한다. 서방은 고대에 설립 근거가 없는 백사주(百沙洲)가 기록으로 전해오는 곳으로서 백제 서주일 수도 있고 백제주일 수도 있다. 지금은 고려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비류백제 수도 위치인 복주 시 동쪽에 동명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대백라가 있다. 동명산은 명나라 때에도 동명왕의 전설이 내려왔다. 즉 비류 백제가 동명왕묘를 세운 곳이다.
지금은 명산이라고 옛 기록 상의 동명산으로 둘러싸인 대백라는 사진과 같다.
동방의 득안성은 득리사가 들어서 득리영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전해왔다.
북방의 웅진성은 지금 웅악현의 구룡지다.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서 698년에 대방주도독부를 두었던 곳이다.
남방의 구시하성은 옥산 남쪽 용왕묘다.
중요한 곳으로 보란점시 북쪽에 화얼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임예승인(臨穢丞印)이 발견된 곳이다.
임예현은 중국 기록에 없다. 백제의 임예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현재 화얼산은 산을 다 파내어 깍아 버렸다. 예穢의 중국 발음이 후이인데 화얼산으로 변한 것이다.
어하라가 진번지간이라고 했는데 이곳 보란점이 본래는 불한, 즉 새로운 번한(番韓)이 있던 곳이다. 보란점시의 뒷산 이름이 발발산이다. 아마도 탁발산, 탁의 발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위만에게 번한을 빼앗긴 기준왕의 장수였던 대장군 탁이 무리를 이끌고 육로로 이주해 들어온 탁의 고향 월지국 마한은 바로 이곳으로 고려되며 중마한(中馬韓)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마한에 들어와서도 불한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었던 것이 된다. 기준은 목지국 마한으로 이주하여 대동강에 있었다. 그런데 후한시대에는 목지국마한이 마한 56국의 중심으로서 가장 번성했고 위나라 시대에는 월지국마한이 번성했다. 그 이유는 목지국마한이 백제에 망해 버렸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마한을 정복한 백제왕이 위나라 시대에 월지국, 즉 대방고지 백제에 옮겨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중국 공략을 도왔던 마한은 바로 이 보란점의 월지국마한이다. 물론 예맥도 함께 하였었는데 121년 예맥거수가 중국인 요동태수 채풍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많은 예인들이 백제 땅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보란점시 서쪽에는 중국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다. 사실은 당나라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그 횡산이다.
보란점시 남쪽에는 석하가 있는데 백제 고이왕의 석천이며 그곳에 석현성(石峴城)이 있었다. 역시 설인귀가 쳐들어온 석성이며 온사문이 있던 곳이라서 지금은 온가구(溫家溝)라고 부르는 성이다. 한반도에서 찾기 어려운 온조왕의 온씨가 이 요동반도 남단에 집중되어 있다.
요동반도 남단의 주요 강인 벽류강은 본래가 비류강이었을 것이다. 비류나 벽류나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같다.
비류백제 강역도는 아래와 같다.
온조가 떠나고 비류가 죽은 뒤에 비류의 부여 후손은 부여성을 떠나서
1) 백제 미추홀로 가거나
2) 파저강(압록강)의 비류소국으로 옮겨가서 부이르강을 남기고,
3) 또 일부는 함흥 서남쪽에 살면서 비류강을 남겼다.
비류의 부여성은 본래 살던 월지국마한에 복속되었고, 그들은 본래 불한, 또는 낙랑이라고도 하였다.
[신찬성씨록]에 백제에 부여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出自百?? 扶餘地 卓斤?主 施比王也
위 가록에서 백제에 부여지가 있었고 거기에 본래 탁근국이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근국이 월지국 마한을 처음 세운 대장군 탁에 의해 비롯된 것도 확인된다.
온조왕 한산 시대(재위bc18~ad28)
<한단고기>의 백제 건국기록은 아래와 같다.
bc19년 태자 비류가 (어하라로)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평안남도 평원군에 남아있는 미두산성이 미추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龍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부아악은 자모산성이다. 성 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려, 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위례성.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沸流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를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3) 6세기 공주 무령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황해도 웅진(토산 북포)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성왕 때에 충청남도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전실고분이 한강 유역을 거치지 않고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고분으로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악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는 낙랑의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이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장무이는 고향이 어양漁陽이라고 했는데 그 어양이 예성강의 지명이다. 평산군과 토산군 사이에 있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번째 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백제가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웅진성은 임진강臨津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이 제2의 위례성(慰禮城)이고 위라천에서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이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또한 문주왕의 웅진강은 임진강이었고 임진강 중류에 고마성이 있었다. 임진강의 상류는 고미탄이라고 한다. 고미탄이 웅진강이다.
당시 웅진성의 호위성이었던 평산군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병술년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漢城 下 後部小兄...
고구려 한성은 백제 북한성에 해당한다. 백제 북한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었다.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령왕 때이다.
10) 고구려 문자왕이 (507) 겨울 10월에 장수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칠 것을 꾀하여, 횡악(橫岳) 밑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므로 물러났다. 이 횡악이 바로 평양 서쪽 용강군의 오석산 황룡산성이다. 백제 다루왕 때에 횡악에 다섯 개의 돌이 떨어졌다. 그래서 오석산성인 것이다. 또한 백제 속국회의를 하러 들어온 점재현장의 신사비에서 보듯이 풍년이 들게하고 해상 출입이 안전하게 해달라는 비가 오석산에 있다. 전통적으로 백제가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 횡악이기 때문이다.
11)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고구려 한성漢城으로 나와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12)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 니현)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 안장왕이 다시 백제로 쳐내려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 지금의 서흥이었다.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이 이미 평양 이북을 수복했었던 것이다.
13)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 성왕과 왕자 여창이 평양平壤을 쳐서 한성 등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백제 고지라고 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다.
14) [삼국사기/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의 평양, 즉 남평양이며 본래는 고구려 한성이다.
15)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앞 지도 참조)의 주인이 되았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6)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가, 이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7)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에 남아있다. 이는 뒤에 자세하다.
18)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19) [신당서/백제전]에 백제가 멸망하고 그 땅을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가졌다고 하였다. 武後又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為新羅、渤海靺鞨所分,百濟遂絕。발해는 한강 이남에 내려온 적이 없으므로 백제는 망국 때까지도 황해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20) 현재 한강은 북한강 수계로 살펴볼 때에 금강산의 회양(淮陽)도호부에서 흘러내려서 광주의 옛이름인 회안(淮安)을 지나서 경기도 통진군에 있던 평회압성(平淮押城)을 지나 바다로 나갔다. 이는 북한강으로부터 시작된 한강의 이름이 백제 시대에 회수(淮水)였다는 증거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임회태수장이라는 도장이 발견되었기도 하다. 즉 백제 임회군(臨淮郡) 태수 도장이다.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국사는 결코 진실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새끼 무덤이라 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국사기>의 편년으로 온조대왕 시대를 살펴본다.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실제 동명왕은 서기전 19년에 유리왕에게 타도당하여 졸본성으로 옮겨갔으나 죽은 것으로 알려졌을 수가 있다.
한반도에서 동명왕 전설이 있는 곳은 평양 남쪽 정릉사와 평양 동북쪽 성천 홀골산성이다.
성천성은 온조 원년에 세운 위례성이며 동명왕 사당도 처음에는 홀골산 강선루 부근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정릉사의 동명왕묘는 불교가 전해진 후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되며, 근초고왕 때에 세워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을음(乙音)은 이름이 아니라 을지문덕의 을지와 같은 두 글자의 족성(族姓)으로 고려된다.
태조대왕 때에 환인현에 있던 파저강의 비류소국을 치고나서 주나(朱那)를 쳐서 그곳의 왕인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임명하였다.
태조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환인현 파저강은 초기부터 백제 영역이었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 둘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한사군의 낙랑(樂浪)은 고두막한과 고주몽의 등극으로 인해서 이미 요동(금주시 부근)으로 밀려났다.
요동군 대양하(大梁河)라고 부르던 지금의 요양하(繞陽河)는 바로 밀려난 낙랑의 낙양하(樂陽河)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낙樂의 또다른 발음이 요繞다.
백제 초기의 낙랑은 한사군이 아니라 [비류 백제]로 고려된다. 비류와 온조는 형제지만 이제 서로 다른 나라의 왕이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록神鹿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중국도 같은 기록이 있다. 永始四年七月辛未晦,日有食之。나사의 추산으로 양력 8월31일에 일어났다. Aug 31 00:25 A 83 0.747 0.931 55.4N 165.2W 41 386 06m25s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부현은 평양 서쪽 부산(斧山)으로 고려된다. 평양 북쪽 30리, 월봉산 남쪽에 있다. 한 용감한 장수(온조왕)가 이곳에서 도끼로 적을 무찔렀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부산사(斧山祠)라고 하는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며 제사 이름은 압병제(押兵祭)이다.
마수성은 뒤에 <광개토왕 비문>에서 모수성이라고 했던 의주의 백마산성으로 고려된다.
병산책은 병천동이라고 하던 대령강의 박천읍 동쪽 마을과 관련하여 박천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는 당시에 요동성 부근으로 물러난 낙랑태수가 아니라 역시 낙랑왕을 자처하던 비류왕으로 고려된다.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청목산은 청색(靑塞)이라고 했던 청천강의 희천시로 고려된다. 뒤에 진사왕 대에 관방을 샇았는데 그 동쪽 경계였다. 곤미천은 지금의 고면천으로 고려되며 이는 압록강의 지류인 충만강의 지류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구천책은 평안남도 개천시에 세운 것이다. 독산책은 독로강(禿魯江)변으로 추정되며 지금 압록강의 강계읍이 독산책이 있던 곳이 된다.
주나를 정복한 고구려 환나우태 설유(薛儒)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설렬한령(薛列罕嶺)이 남아 있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동쪽 말갈과 북쪽 낙랑이 동쪽 낙랑과 북쪽 말갈로 서로 바뀌었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온조왕의 새 수도는 니현의 한성이다. 제령산 아래에 있다. 제령산 서남줄기가 용산이고 동명왕사가 있다.
<삼국유사>에서 근초고왕이 천도한 곳은 북포산(北浦山)이며, 지금의 안학궁인데 태화궁이라고도 불렀다.
근초고왕의 연호가 태화였던 것이 칠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평양시 낙랑토성이 북포에 대응하는 남포(南浦)였을 것이다.
개로왕 때에 장수왕의 고구려군에 의하여 북성과 남성 공격이 7일 간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남성은 지금의 니현(泥峴) 한성 위치다.
내성은 대원리(大園里)라고도 한다.
성왕 때인 550년에 평양과 한성 등 6군을 수복했다가 버렸다.
이 온조 한성은 훗날 668년에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에서 고구려로 올라갈 때에 대곡(황해도 평산)과 대동강 평양 사이에 위치해서 북진해 올라가는 당나라 유인원에게 항복했던 한성이다.
또한 670년 후고구려를 일으키려던 안승의 한성이다. 이에 대해 문무왕기 14년조에는 신라왕이 고구려 부흥군을 받아들여서 백제 옛땅 한성에서 반란하게 도우니 고종이 화를 냈다고 하였다.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550년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갔는데 신라의 우두방, 또는 니미방(今 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이라고 하였다. 니미(尼彌)는 진흙산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동강의 니현이며 백제 한성이다. 우두牛頭는 소머리이니 사비성과 같은 말이고. 크다는 의미의 우리말로 한성이다.
니현의 한성 동쪽에는 가수리 관음산 남쪽에 가수굴이 있다. 일본에서 개로왕을 가수리왕이라고 하였다.
동명왕릉이 있던 용산사(지금의 정릉사)는 백제 한성이 바로 가까이 있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저기 멀리 떨어진 평양성에서 동명왕릉을 이곳까지 멀리 세울 이유가 없다. 오로지 백제 한성에 온조왕이 동명왕릉을 세운 것으로만 그 위치가 설명이 가능하다.
한성의 궁터는 두 군데 보이는데 남쪽 것이 온조시대 한성으로 고려된다. 북쪽은 개로왕이 벽돌(蒸土)로 만들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한성의 서북쪽을 보면 북벽은 이중으로 성벽이 보인다. 서벽에서 흙산(泥山)인 것을 알 수 있다.
한성의 북벽은 산으로 이루어졌는데 도증산(道證山)이라고도 하였다. 도증이 토증(土蒸)에서 비롯된 말이면 개로왕의 증토축성(烝土築城)에서 유래한 말이 된다.
서북 궁성 입구에 성루 다락이나 종고루 등을 세웠던 궁성 토대의 흔적들이 보인다. 이곳의 현재 지명이 니현(泥峴)이다.
한편 남한산 위치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남경이라고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에는 상리, 하리, 내리 등이 있었다. 이는 안악3호고분 책계왕묘에 나타나는 상리일 수 있다. .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패하는 요양시 태자하를 말한다. 주양은 우수주에 있었고 질암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오대산 진고개 아래로 고려된다. 남쪽 경계 웅천은 임진강이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한산 아래에 새로 만들어진 니현의 한성이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당시 백제의 한강 서북쪽에 새로 쌓은 성이 지금의 평양성이 된다. 북한성이라고 한다.
특히 온조왕의 천도 당시에는 황해도의 구월산 금마 마한을 병합하기 전이다.
17년(서기전 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아직은 비류왕의 낙랑 세력이 온조왕을 능가했던 것으로 고려된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한편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도모왕都慕王이 백제 시조로 되어있다. 같은 책에서 주몽왕은 추모(鄒牟)왕이라고 하였다.
도모왕은 우리말 대모산, 대모성(大母城)과 관련이 있고 평안북도의 자모산성, 황해도의 자모산성과 관련된다.
즉 대모, 자모 소서노를 백제 건국왕으로 추증한 것이다.
평양 서쪽 강서군 초성리에 있던 대구향(大垢鄕)으로 추정된다. 강서대묘(삼묘리)가 있는 곳이데, 대후묘가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구향 가까운 곳에 각묘향(角墓鄕)이 있았는데 지금 수산리벽화고분에 해당한다. 온조왕릉일 수도 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칠중하는 경기도 적성으로 알려졌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구곡은 <광개토왕 비문>에서 구모로성이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단동시 구련성이다. 낙랑 우두산성은 단동시 서쪽 수암현의 낭랑성으로 고려된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고목성은 평안남도 성천군 동쪽이며 원산의 서북쪽인 고원군(高原郡) 서쪽 지방으로 추정된다. 태백산맥에 있다.
석두성은 황해도 토산군 북쪽 학봉산 석두사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이 당시 웅천책은 예성강(禮成江)으로 고려된다. 마한이 고립되어 말라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마(辰馬)를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진마(辰馬)는 마한에 들어온 진한(辰韓)을 의미하며 기준왕 준의 후예이다. 금마(金馬) 마한, 진마(辰馬)라고도 한다.
황해도 구월산 북록에 있는 천험의 요새에 있었다. 현재 은율, 장연, 안악에 걸쳐 있는 구월산 북쪽의 천연의 요새가 있다. 구월산은 본래 궐산(闕山)이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청주 한씨의 [마한세가]에 의하면 당시 금마마한왕은 계왕(稽王)으로서 기원전 32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16년 온조왕에게 땅을 뺏기고 서기 9년에 원산, 금현이 항복하여 완전히 망했다고 하였다.
원산성은 구월산 동남쪽 신천군의 원산역과 모한정 등의 지명으로 고려하여 당시 원산성으로 고려된다.
본래 금현성은 황해도 옹진군에 있던 웅현일 수도 있다.
온조왕에 의해 옮긴 금현성은 평양 금수산(錦繡山) 아래 평양 북성(北城)으로 고려된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용강군 황룡산 아래에 백사포 건너서 대두산이 있다. 현재 남포시 배경이 되는 산성이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다루왕 29년(서기 56) 봄 2월에 왕이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33년에 동부를 설치하고 일어난 반란이다. 우곡성은 함흥 서쪽 우봉석성 부근으로 추정된다. 우수주를 두었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대두성은 용강군 남쪽 대두산성이고, 탕정성은 용강군 서쪽 지금의 온천군 온정읍이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본래의 원산성과 금현성을 의미한다. 황해도 구월산 신천과 옹진반도로 고려한다.
고사부리성은 중화군으로 고려한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서기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주양(走壤)은 신라 수약주(춘천)에 있었다. 질암(迭巖)이라고도 했는데 오대산 진고개 동쪽으로 고려된다. 진고개를 니현(尼峴)이라고 하였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술천은 고구려 한산주에 있던 지명인데 성지매라고도 하였다. 처음 위례성을 세웠던 성천 부근으로 고려된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처음 위례성이 한수(대동강)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평안남도 성천이다.
우보가 된 해루가 본래 부여인인데, 요동반도 복주 부여성의 부여인이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평양 서쪽의 해압산(海鴨山)으로 고려된다. 현재 강원도 평강군의 옛지명인 부양은 이들이 광개토왕 침공 이후에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薨.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 설화는 아래와 같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다루왕(재위28~77)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28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서기 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2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3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4년(서기 31)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에 왕이 횡악(橫岳) 아래에서 사냥하였는데 한 쌍의 사슴을 연달아 맞히니 여러 사람들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횡악은 507년 고구려 군대가 백제 성왕의 한성을 공격하던 곳이다.
또한 기도처이다.
뒤에 기루왕 17년(서기 93) 가을 8월에 횡악(橫岳)에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따라서 용강군 오석산성이 바로 그 어원이다.
고구려 황룡산성이라는 이름이 전해왔는데 본래 백제 횡악성이 어원이 된다. 소위 점재현 신사비가 발굴된 곳인데, 백제 속국의 현장들이 들어와 회의를 하였고 비를 세웠다. 그 대표인 점재현장이 산천에 기도한 내용은 비가 잘 오고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이 있었다.
6년(서기 33) 봄 정월에 맏아들 기루(己婁)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나라 남쪽의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
이전에도 벼농사는 있었으나 밭에서 키웠다.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동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겨울 10월에 또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였다.
10년(서기 37) 겨울 10월에 우보 흘우를 좌보(左輔)로 삼고, 북부의 진회(眞會)를 우보로 삼았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11년(서기 38) 가을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에 동부(東部)·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순행하며 위무하고, 가난해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두 섬을 주었다.
21년(서기 48) 봄 2월에 궁중의 큰 홰나무槐樹가 저절로 말랐다. 3월에 좌보 흘우(屹于)가 죽으니 왕이 슬피 곡하였다.
28년(서기 55)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죄수를 살펴 사형할 죄도 사면하였다.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29년(서기 56) 봄 2월에 왕이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우곡성은 함흥의 우수주다. 함주군 북쪽 상조양면 탑동리에 있다.
36년(서기 63)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렀다.
매성(妹城)이라고 했던 문천군이다. 문주왕(文洲王)의 출신성 문주(文洲)이기도 하다.
낭자곡의 낭자가 배우자를 의미하는 매성으로 바뀐 것이다.
속고대왕이 함흥 우수주 남쪽 정평 수시리성으로부터 일본에 가서 스사노오신이 되었다. 그의 궁터가 출운대사이다.
그 스사노오신의 부인은 즐옥명희라고 하였는데 문천군에 절명루(節明樓)가 있다. 또 문천군 서쪽의 배지이천도 그 이름이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옮겨갔다.
곧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동해안에 성을 세웠기 때문에 백제왕은 신라왕을 부른 것이다.
37년(서기 64)에 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켜 맞아 쳐서 패주시켰다.
와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이고, 구양성은 충청북도 괴산군이다.
39년(서기 66)에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00명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43년(서기 70)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46년(서기 73) 여름 5월 그믐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7월 23일이다. 0073 Jul 23 09:28 T 66 0.654 1.041 58.8N 60.6E 49 182 02m51s
47년(서기 74)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48년(서기 75) 겨울 10월에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서기 76) 가을 9월에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50년(서기 77)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기루왕(재위77~128)
기루왕(己婁王)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루왕이 재위 제6년에 태자로 삼았고, 50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9년(서기 85) 봄 정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客星)이 자미(紫微) 별자리로 들어갔다.
11년(서기 87) 가을 8월 그믐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10월 15일이다. 0087 Oct 15 08:38 A 64 0.952 0.913 52.5N 94.8E 17 1059 07m43s
13년(서기 89) 여름 6월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민가를 함몰시키니 죽은 사람이 많았다.
14년(서기 90) 봄 3월에 크게 가물어 보리 수확이 없었다. 여름 6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6년(서기 92)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7월 23일이다. 0092 Jul 23 03:42 A 76 -0.032 0.987 19.1N 124.7E 88 46 01m26s
17년(서기 93) 가을 8월에 횡악(橫岳)에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횡악은 용강군 오석산 황룡산성이다.
21년(서기 97) 여름 4월에 두 마리의 용(龍)이 한강에 나타났다.
백제 한강이 서울의 한강으로 고려된다. 서울 한강에 백제가 진출한 것으로 고려된다.
23년(서기 99)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우박이 내렸다.
27년(103)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29년(105)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31년(107)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32년(108)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말갈이 우곡(牛谷: 함흥)에 들어와서 백성民口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
35년(111) 봄 3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7년(113)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40년(116) 여름 4월에 황새가 도성의 문 위에 집을 지었다.
6월에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한강의 물이 넘쳐 민가를 떠내려가게 하고 허물어뜨렸다. 가을 7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
49년(125)에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글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말갈이 백제의 함흥, 원산을 동시에 쳤을 수도 있다.
52년(128)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개루왕(재위128~166)
개루왕(蓋婁王)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성품이 공순하고 행실이 올발랐다. 기루가 재위 52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4년(131) 여름 4월에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5년(132) 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평양의 대성산성을 쌓은 것이다. 안학궁은 근초고왕 대에 만들어졌다.
10년(137) 가을 8월 경자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28년(155) 봄 정월 그믐 병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는 양력 2월 19일이다. 0155 Feb 19 08:43 Pe 52 1.541 0.007 70.8N 0.1W 0 /
겨울 10월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나 도망해 왔다.
신라 왕아달라 이사금이 글을 보내 그를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 왕이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으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니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39년(166)에 왕이 죽었다.
4. 초고왕과 구수왕의 일본진출
초고왕(재위166~214)
초고왕(肖古王)<또는 소고(素古)라고도 하였다.>은 개루왕(蓋婁王)의 아들이다. 개루가 재위 3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초고왕은 즉위 전에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스사노오신으로 불리워진다.
백제 개루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 아래 정평군에 쇠를 다스리는 수시리성을 두어 초고왕자가 지켰다.
초고왕은 소고왕이라고도 하여고 일본에서는 속고대왕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근초고왕을 속고왕速古王, 또는 속고대왕速古大王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백제 속고대왕速古大王의 후손으로서 여러 씨족 가문인 금부련錦部連, 삼선숙녜三善宿니등 직계 후예를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고대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남아있다. 위 책에서 속고대왕 손자에 비류왕이 기록되어 있다.
함흥 지방은 고대에 소시모리라고 하였고 온조왕 때에 우곡성이라 하였다.
뒤에는 우수주(牛首州; 삼국사기)라고도 하였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서쪽 가지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이 우리말 "뿌리"의 음차로 고려된다. 오근내의 근根이 뿌리이고 일본의 속고왕이 일본에 새운 곳이 시마네현(島根縣)이고 한반도로 돌아간 곳이 역시 근국(根國)이었다.
오근내烏根乃와 관련하여 함주군 북쪽 상조양면 위에 오악봉(烏岳峰)이 있다. 그 남쪽에는 한당 고성이 있고 그 남쪽에는 우봉석성(牛峰石城)이 있다. 따라서 오악봉과 우봉 사이에 백제 우수주가 있었다.
우수주에는 횡천현橫川縣이 있었는데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이고 우수주에 또한 자현磁縣이 있었는데 이는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자모성은 백제 주성의 북쪽 호위성이다.
정평군은 수시리고성, 수곡성, 장곡성이 있던 곳이다.
수곡성과 장곡성은 금이강을 사이로 마주보며 수시리고성은 동쪽이었다. 수시리고성은 백제 사성(蛇城)이다.
수시리고성은 속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가 구수대왕을 만나 결혼한 곳이다.
정평군 아래 문천군은 본래 이름이 낭자곡성으로서 서기 63년부터 백제 영역이었다. 문주왕이 백제왕이 되기 전에 있던 곳이 문천의 문주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 지리 이름을 보면 우수주가 초고왕이 처음 개척한 함경남도 함흥이다.
[삼국사기/백제기]에서는 우곡성이다.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 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경남도 함흥에 비정하여서 잃어버린 고구려, 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흑말강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근평군斤平郡은 병평(幷平)이라고도 했고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평주진 고성으로 고려된다.
심천현은 영흥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신포시 양화만(陽化灣)이다. 대양산(大陽山) 아래에 있다.
저족현猪足縣은 신포시 동쪽 신창읍(新昌邑)의 저석봉(砥石峰)과 관련된다. 신창읍에 숙신고도 성터가 있다.
저족현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오사회는 신포시 압해산(壓海山)을 가리킨다. 압(押)을 일본에서는 오사라고 읽는다.
압해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사회烏斯廻가 압해산이 된 것이다. 진사왕이 고구려를 친 도압산都押城일 수도 있다.
왕기현王岐縣은 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했는데 차호읍(遮湖邑)의 궁산(宮山)을 가리킨다. 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했는데 북청군의 북쪽 덕성군 삼산(三山)으로 고려된다. 즉 덕성읍이 삼현현이다.
덕성군의 북쪽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성천군(犬生-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된다. 시리군이라고도 하였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부령군 동쪽에 있는 부거폐현(富居廢縣) 성터로 추정된다.
부거폐현은 백제 무령왕이 살던 곳으로 고려된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 古斯麻縣이 있었다.
고 사마현은 바로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고, 청진 북쪽 부령군(富寧郡), 부거현(富居縣)이 모두 무령왕에서 비롯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경성도호부의 18역(驛) 이름중에도 무녕역(撫寧驛)이 있었다.
부령군 석막면(石幕面)이 무령왕의 사마현이 변한 이름으로서 고사마현의 위치다. 석막면에 옥련성터가 있다.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릉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무령산이었을 수도 있다.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명천군 성명봉聖明峰은 무령왕의 아들 백제 성명왕聖明王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은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대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安班德山(1830m)이 역시 무령대왕 동생인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산성, 소파온고성, 산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매곡현買谷縣은 청진시淸津市 수성천 동쪽이 고말산高抹山으로 추정된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犬生)川縣이 있었다.
수성천현은 청진시 수성천(輸城川) 서남쪽으로 고려된다.
수성천의 최상류는 부령군에 있다. 그런데 이 수성천의 원류를 회령군 여이현(餘伊峴) 남쪽에서 발원하여 나온다고도 하였다.
지금 부령군이 된 여이현의 여이(餘伊)는 백제 왕족 이름일 것이다. 무령왕의 즉위전 아명일 수도 있다.
급벌산군은 경성시鏡城市로 추정된다.
이벌지현은 경성시 주을읍으로 추정되는데 보로천(甫老川)이 지난다. 보로(甫老)가 벌(伐)의 연음일 것이다.
문현현(文峴縣) 다른말로 근시파혜(斤尸波兮)는 어랑읍으로 고려된다. 본래 회문(會文)이라고 했고 주북천(朱北川)이 흐른다.
모성군母城郡, 또는 야차홀(也次忽)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이 흐르는 어랑군漁郞郡의 어대진(漁大津)이다.
동사홀(冬斯忽)은 동생을 의미하는 어랑면 아우동(阿隅洞)으로 고려된다.
수입현(水入縣)은 어랑천과 명간천의 사이인 수암동(壽巖洞)으로 고려된다.
객련군客連郡, 또는 가혜아(加兮牙)는 명천읍(明川邑)으로 추정된다. 상아동(象牙洞)이 있다. 백록산도 있는데 이 모두가 중국인 기자의 후예와 관련된다. 기자조선이 처음 생겨났던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의 지명들이 옮겨온 것이다.
적목현(赤木縣), 또는 사비근을(沙非斤乙)은 길주군 서북 목성리(木城里)로 고려된다.
관술현(管述縣)은 학성군(鶴城郡)으로 추정된다.
저란현현(猪蘭峴縣), 또는 조생파의(鳥生波衣), 또는 저수(猪守)는 단천(端川)으로 추정된다. 저란은 절節의 연음인데 단천에 직절리가 있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안변읍(安邊邑)이다.
경곡현(~谷縣) 또는 수을탄현(首乙呑縣)은 안변군 서곡면(瑞谷面)이다.
청달현(菁達縣) 또는 석달현(昔達縣)은 석왕사면(釋王寺面)으로 추정된다.
살한현薩寒縣은 통천군 흡곡면이다.
가지달현(加支達縣)은 안변부 남 30리라고 하였다. 현재 안변군 신아면 문곡리다.
어지탄현(於支呑縣) 또는 익곡현(翼谷縣)은 안변 남 65리라고 하였다. 통천군 학면으로 고려된다.
매시달현(買尸達縣)은 원산시(元山市) 무달사(武達寺)로 추정한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부사달현(夫斯達縣)은 덕원면(德源面)으로 추정한다.
동허현(東墟縣)은 원산시로 추정한다.
내생군(奈生郡)은 고원군(高原郡)으로 고려된다.
을아차현(乙阿次縣)은 천내군으로 고려된다.
우오현(于烏縣) 또는 욱오현(郁烏縣)은 문천시 구읍내 옥평리로 고려된다.
주연현(酒淵縣)은 통천 구읍으로 고려된다.
위 기록에서 천성군 비열홀이던 안변군이 가장 남쪽인데 현 이름들은 대개 현재 국사학계 통설과 일치한다. 천정군도 역시 일치한다.
그러나 천북군 이북의 우수주 9개군을 국사학계는 춘천 방향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함흥 방향으로 맞추어야 옳다.
발해의 신라 공격 때에 함흥의 신라 우수주가 춘천으로 피난나왔을 수도 있다.
서기 160년 초고왕자는 함흥 정평에서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에 건너가서 일본 전역을 굴복시키고 일본 아마테라쓰(천조대신) 히미코卑彌呼, (즉 연오랑 세오녀 중의 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야에가끼(팔중성)에 가두고 8명의 자손을 낳았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규슈(구주)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니니기(알알이)이며, 알알이가 구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이 일본의 건국신인 스사노오須佐之男이니 일본 최초 천황으로 모신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의 증조부다.
백제의 동해안 진출은 마한을 병합한 온조대왕 때 서기 16년 함흥 우곡성 진출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56년에 다루왕이 우곡성을 쌓았다. 우곡성이 함흥의 우수주성이다.
그후 63년에 다루왕이 문천시의 낭자곡성까지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에서 108년에 강원도 삼척三陟이 신라 파사왕婆娑王의 신라 영토로 통합되었다.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대왕己婁大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초고대왕이 백제 지방왕으로서 함흥에 거처할 때에 원산시元山市 북쪽 문천시文川市에 속고봉速高峰, 속고산速高山(722m, = 신증동국여지승람 ; 所依達山, 즉 쇠달산)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생겨났다. 즉 개루대왕 생전에 초고대왕인 속고왕은 원산-함흥 지역에 봉토를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후 214년 신라가 사현성沙峴城을 수복했는데, 이는 함경남도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개로대왕의 참살 때에 문주대왕은 문천시의 문주로부터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어올 수 있었다.
함흥 동쪽 퇴조만의 퇴조고성退朝古城(석축 4917척)은 발해 고성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서쪽에 초고대령草高臺嶺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峰山이 있다. 초고대령은 초고대왕령이었을 것이다. 초막산 북쪽에 가장 높은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토성인데, 1147척이다. 함흥의 동쪽 호위성이다.
함흥 서쪽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부도성인 우수주성으로 유력하다.
그 위치는 함흥시와 백운산석성의 중간인 상조양면의 탑동리이다. 북쪽에는 자고성慈姑城이 있는데 이는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한당고성은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의 내성이었다..동남쪽에 우봉석성(牛峰石城)이 있다.
백제 개루대왕蓋婁大王 시대에 개루대왕의 왕자 초고왕자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바다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에 진출하였고, 160년에 일본의 여왕 히미코(~247)를 정복하였다. 이는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女師弟인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가 초고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해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효고현兵庫縣 서궁시西宮市 증암정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越木岩神社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였던 스사노오須佐之男는 일본에서 建速須佐男, 速佐男, 素佐能雄, 素盞嗚, 素佐能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건속建速은 속速을 건국했다는 뜻이니, 일본에 속고국速古國을 처음으로 세운 분이라는 뜻이다. 시마네현嶋根縣에 처음 팔중궁을 세웠던 수가須賀라는 곳이 바로 일본의 속고국 땅이고 초고대왕의 땅이다.
여기서 스사노오須佐之男의 뜻은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당시 발음은 지남之男, 능웅能雄(n-ung)이니 우리말 “놈”의 발음에 해당한다. 고대의 “男”에 대한 발음에서 유래되는데, 고대에는 “남”이 작위에 해당하는 높인 말이었고, 대개 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거의 비칭卑稱으로 전락하였다.
[삼국사기]<백제기>의 소고(素古)왕이나 초고왕(肖古王)이나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速古大王)이나 다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코"의 우리말 고어가 "고"이다. 따라서 쇠코왕이다.
[일본서기]에서 소산오素盞嗚라고도 표기하는데 스사노, 소산오의 뒤부분 산오, 또는 사노 sano가 바로 코를 의미한다. 이는 아프로아시아 언어Afroasiatic etymology 에서 코를 의미하여 남아 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 여러 언어에 남아있다.
현생 인류가 6만년전에 아프리카 아담Y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의 출생은 이자나기의 코에서 탄생한다. 사노가 코를 의미하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앞의 소가 지금 우리말 소이다. 이는 어찌해서 알 수 있는가?
656년에 세워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원에 그 의미가 있다.
야사카 신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社伝によれば、斉明天皇2年(656年)、高句麗より来日した調進副使・伊利之使主(いりしおみ)が、新羅の牛頭山に祀られる素戔嗚尊を山城国愛宕郡八坂郷に祀り、「八坂造」の姓を賜ったのに始まるという。他にも各種の記録がある。
함흥은 신라 진흥왕 이후 신라 영토이고 고구려 사자가 통과한 곳이 된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 초기에 우수주가 바로 함흥이다. 또한 소시모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야사카신사는 본래 우두천왕을 제사지냈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소사노오로 이름을 바꾸어 제사지낸다.
이후 일본은 우두천왕과 스사노오를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 사자가 백제 초고왕을 모셔왔을 가능성은 적고 본래의 소시모리, 즉 우두천왕을 모셔왔을 가능성도 높다.
백제 초고왕이 그 땅 우수주를 다스릴 때에 쇠코왕이라고 하였던 것이고, 초고왕의 신사가 신라 우수주 우두산에 남아 있었을 때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결론은 소사노오는 쇠코왕의 당시 일본말이고 백제에서는 쇠코왕, 즉 소고왕, 초고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함경남도 문천시 속고산速高山이 쇠코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대 쇠달산所依達山이므로 속速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다. 또한 쇠달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출운대사에 있는 스사노오 벽화
스사노오의 딸을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400m토성)이 남아있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쇠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쇠물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은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아들 구수대왕과)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出雲으로 왔다고 하였다.
신라국 소시모리曾尸茂梨(=蘇尸茂梨) 라는 곳도 역시 우리말 고어 발음으로 소시가 쇠를 의미하고 무리가 물을 의미하니 역시 쇠-물鐵을 뜻하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수시리고성隨時理古城(400m토성)이 신라의 소시모리 성이다. 본래 신라 땅이던 것이 백제 초고대왕의 개척 영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따라서 스사須佐,速佐,素佐,速古,素古,肖古 등은 “쇠”에 이두의 소유격 조사를 붙인 표현으로 되니 스사노오建速須佐之男(shue-nam)는 우리말 “쇠왕, 쉐왕”이 된다. 쇠왕을 당시에는 “쇳남”, “쇠사남”이라 기록한 것이다.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은 백제의 속국速國, 내지 별국別國을 일본 본토 시마네현嶋根縣에 세운 일본신 스사노오建速須佐男, 즉 쉣남, 쇠대왕이다. 초고대왕이 건너가 세운 일본 지명인 시마네현嶋根縣은 그 이름에서 일본 팔도八島의 뿌리가 되었고 일본의 뿌리인 것이다.
[고사기]에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는 일본에 도래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아나세阿那勢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이를 동생이라고 풀이했으나 일본말 “아나”는 한자로 귀貴가 되므로, 귀세貴勢가 올바른 기록이며, 이는 존귀한 분을 가리키는 중국 고어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히가와斐伊川는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斐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쿠시나다櫛名田姬다.
즉 쿠시나다가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한편 비이신사斐伊神社는 효소천황孝昭天皇 5년에 세웠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왔고 근국根國으로 돌아갔다. 근국이 오근내현이라고 하던 함흥 우수주이다.
실상은 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으로 갔고 다시 백제로 돌아가 초고대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가 이즈모에서 팔지대사八枝大蛇를 잡아 죽인 것은, 초고대왕이 일본 천조대신의 12신녀 중에서 8신녀를 잡아 팔중원八重垣에 가두고 후비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
2년(167) 가을 7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에 신라 왕이 일길찬 흥선(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들을 쳐들어 왔다. 신라 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이어 한수(漢水)까지 엄습하여 왔다.
신라군은 동해안으로 올라와 덕지강에서 금야강을 타고 요덕을 지나 대동강으로 온 것이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곧 앞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5년(170) 봄 3월 그믐 병인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나사 추산으로는 5월 3일이다. 0170 May 03 19:30 P 60 1.077 0.843 70.2N 106.1E 0
21년(186) 겨울 10월에 구름은 없이 우뢰만 쳤고,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22년(187) 여름 5월에 서울王都의 우물과 한수(漢水)가 모두 말랐다.
23년(188)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군사를 내서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전라북도 남원 동쪽 운봉으로 고려된다.
24년(189)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는 양력 5월 3일이다. 0189 May 03 05:26 A 70 0.419 0.948 39.7N 90.5E 65 211 05m42s
가을 7월에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패배하였는데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25년(190) 가을 8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의 서쪽 국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구양은 충청북도 괴산, 원산향은 경상북도 예천군, 부곡성은 군위군으로 알려졌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말탄 군사馬兵 500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우리 군사가 거짓 퇴각하자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되돌아 쳐서 크게 이겼다.
26년(191) 가을 9월에 치우기(蚩尤旗)가 각(角)과 항(亢)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199)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39년(204) 가을 7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요거성은 경상북도 문경이나 상주로 추정된다.
신라 왕 나해(奈解)가 노하여 이벌찬 이음(利音)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살별이 동정(東井) 별자리에 나타났다.
사현이 여러 성이다. 이때는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40년(205)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43년(208) 가을에 누리蝗가 생기고 가물어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다. 도적이 많이 일어나자 왕은 그들을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44년(209) 겨울 10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45년(210) 봄 2월에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東部)의 민호(民戶)들을 옮겼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질러 태우고 달아났다.
두 성은 가까운 곳으로 고려되며 목책도 세웠는데 함흥시 동쪽 40리 덕산동에 있던 덕산고성과 덕산초원고성이 적현성으로 고려되고 퇴조고성이 사도성으로 고려된다.
적현성은 덕산면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덕과 적이 잘 바뀌었다.
초고대왕령 아래 사도성은 퇴조만으로 추정된다.
46년(211) 가을 8월에 나라 남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47년(212) 여름 6월 그믐 경인에 일식이 있었다. 0212 Aug 14 06:48 T 87 0.431 1.025 39.8N 85.8E 64 96 02m12s
48년(213) 가을 7월에 서부인(西部人) 회회(茴會)가 흰 사슴을 포획하여 바쳤다. 왕이 상서롭다 하여 곡식 100섬을 주었다.
49년(214) 가을 9월에 북부(北部)의 진과(眞果)에게 명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함흥 북쪽 홍원현 남쪽 10리 해안 지역에 문암(門巖)이라는 곳이 석벽으로 문을 쌓은 것과 같아서 말갈의 석문성으로 추정된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 와서 술천(述川)까지 이르렀다.
술천은 고구려 한산주에 있던 지명인데 이는 지금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의 지류라고 보아야 한다. 성천 부근으로 고려된다.
왕이 죽었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都牟刈大刀를 규수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쯔모검은 주몽검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앞서 소서노로 고려한 도모왕은 都慕王이라고 기록하여 한자가 틀리다.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
대구大邱 평리동坪里洞과 비산동飛山洞에서 출토된 청동검과 비교된다.
대구 평리동 청동검과 대구 비산동 청동검
초고대왕의 일본 후손표
구수왕(재위214~234)
구수왕(仇首王)<혹은 귀수(貴須)라고도 하였다.>은 초고왕(肖古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요 위엄과 거동이 빼어났다.
초고대왕이 재위 49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처음에 이즈모出雲에 정도하고 그 곳에 수가須賀(=속고速古)에 야에가기八重垣궁을 짓고 살면서 백제의 여인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賣와 결혼하여 일본 팔도왕인 야시마지누미노가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오호아나무지(대기귀신大己貴神) 또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라 하였는데 바로 초고대왕의 장자 구수대왕仇首大王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쿠시나다히메가 함경남도 문천 출신이고, 백제에서 구수대왕을 낳고 일본으로 데려간 것이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貴首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의 대국주신大國主神이다.
대국주신의 일본 발음인 오호아나모지大穴牟遲(=大己貴神)는 아나穴, 己가 그 발음에서 본래 귀貴를 뜻하고 모지牟遲가 우리말 머리首를 의미하므로 귀수왕貴首王을 일본말 아나모지大穴牟遲로 풀어쓴 것이다.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기록된 장남 야시마지노미신八嶋土奴美은 일본 팔도왕八嶋牟遲을 의미하는 관직명이다. 《위서왜인전》에서 일본 지방왕을 히노모리卑奴母離라고도 했는데 이는 백수白首라는 우리말이다. 우리나라 남자 무당을 의미하는 박수무당의 박수와 어원이 같다.
고구려 《동천왕묘지문》에도 백수百殊라는 왕칭王稱이 등장한다.
백제의 첫번째 팔도왕 야시마지노미八嶋土奴美는 구수왕자였다. 대국주신의 또다른 별명인 야찌호꼬八千矛神와 같은 발음의 이름이다.
구수대왕의 무기가 광창廣槍이었으므로 야찌보코八千矛神라고 했다.
이즈모의 박물관에 남아있는 수많은 비파형 동검 중에서 가장 넓은 것이 그의 무기였다. 비파형동검의 아래 부분에 나무를 끼워서 장창으로 사용한 것이다.
초고대왕은 칸오호찌히메神大市比賣와 결혼해서 오호토시노가미大年神, 우카노미타마노가미宇迦之御魂神(=海神)을 낳았다. 함흥 지방에는 만년산萬年山이 있다. 만년과 대년이 서로 통한다.
《일본서기》에서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다시 신라 땅 소시모리, 즉 함흥으로 돌아갔다.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고려高麗로 돌아간 것이 일본의 야찌보코오호쿠니누시신사八千矛山大國主神社의 연기縁記에서 확인된다.
함흥이 당시는 백제 땅이었고, 후에는 고구려 땅, 또 신라 땅이었으므로 기록의 시점에 따라 신라, 고구려로 다르게 적혔지만 같은 곳이다.
구수대왕은 초고대왕이 먼저 함흥으로 돌아간 뒤에도 일본에 남아있다가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수시리성에 다시 와서 초고대왕을 만나고, 초고대왕의 딸이자, 구수대왕의 배다른 동생인 수세리히메須勢理毗賣와 결혼하여 정비로 삼고 일본에 다시 건너가서 일본을 다스리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 되었다.《고사기》에서 스사노오의 딸이자 대국주신의 부인이 된 수세리히메는 정평군 수시리성의 공주였던 것이다.
초고대왕은 장자인 구수왕자를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아시하라葦原의 시골놈(是奴, 葦原色許男, 葦原醜男)이라고 불렀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穴牟遲(穴=貴, 즉 귀수貴首)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가 되었다.
대국주신의 대국성大國城은 오사카 화전和田에 있었다.
大国城跡(和田) 山吹城の出城。/ 일본 대국성 위치
八千矛山大國主神社(中市): 祭神、大國主命。大國町の旧氏神、神社縁記よれば大國主命が高麗よりの帰途、この里に寄り、八千矛山に宮殿を定め、この地を大國という地名としたとある。神社の裏山を八千矛山という。;
이 신사 기록에 대국주신은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함흥으로 돌아간 것이다.
구수왕자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도또리현의 야카미八上 공주, 니이가타의 누나가와沼河 공주, 후쿠오카의 타기리多紀理 공주 등등과 결혼하였다.
타기리공주는 초고대왕이 히미코 왜여왕의 여사제에게서 낳은 공주였고, 누나가와 공주는 야시마무지신八嶋牟遲(관직명=白首의 고어로 추정)의 딸이었다. 구수대왕이 이즈모出雲에서 대화大和로 진출할 때 구수왕으로부터 이즈모의 수장으로 임명받았던 지방왕 관직 이름이 야시마무지가 된다.
누나가와 공주의 신사는 니이가타新瀉현 경성頸城군에 있다.
구수대왕은 또 백제본국의 칸야타데神屋楯 공주를 통해서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 즉, 일본의 사대주신事代主神인 효소천황孝昭天皇을 낳았다.
일본에 남겨진 구수왕의 후손은 백제 사반왕과 일본의 의덕천황, 그리고 관야조신, 안고숙녜, 미장련, 하무조신 등의 조상이다. 의덕천왕은 압신사에 모셔졌고 관야조신 등은 대국주신사에 모셔졌다.
214년에 구수왕자는 본국에 돌아와 백제대왕에 즉위하였고, 이즈모出雲의 야에가기八重宮에는 백제 사반왕인 사대주신事代主神을 보냈다.
사대주신은 일본에서 효소천황孝昭天皇이 되었고, 미시마三嶋의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와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氣余理毗賣(219~273)를 낳았는데, 이스케요리는 신무천황(194~256)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백제 사반왕인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초고대왕(재위166~214년)이 귀국한 뒤에, 166년부터 구수대왕이 오사카大阪 대국성大國城에서 일본을 다스리다가,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214년 뒤에는 구수대왕(재위 214~234년)의 아들인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가 대화를 다스리다가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에게 전사하였다.
그 뒤에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대년신大年神의 아들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이 신무천황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신무천황은 왜여왕 히미코를 통일 왜국왕으로 내세워 2인자로서 보좌하다가, 247년에 히미코 여왕이 죽으니,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재위 239~286)의 허가 없이 스스로 독립된 일본 최초 천황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무천왕이 257년에 백제 구수대왕계의 반격으로 죽고, 백제에서 돌아온 사반대왕인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과 신무천황의 아들인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이 타협하여 효소천황의 손녀 공주인 13살의 여사제 일여壹與, 즉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을 여왕으로 세워서 휴전한다.
사반대왕의 아들이자 개화천황의 부왕인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은 개화천황의 부왕으로서 역시 천황의 반열에 올려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3년(216)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 함흥 덕산)을 포위하였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퇴각하여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함흥 낙원)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4년(217) 봄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5년(218)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 경상북도 경산)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아군이 패배하였다.
7년(220) 겨울 10월에 왕성(王城) 서문에 불이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8년(221)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산 40여 곳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으로는 양력 8월 5일이다. 0221 Aug 05 05:58 T 68 0.911 1.034 68.8N 159.9E 24 278 01m58s
가을 8월에 한수(漢水)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대방고지 백제왕으로 알려진 구이왕의 북방진출과 관련된 병력 사열이었을 것이다.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에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에 서울王都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두진(牛頭鎭; 춘천)에 들어가 민호(民戶)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忠萱)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熊谷)에서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으로는 양력 1월 19일이다. 0223 Jan 19 06:10 A 83 0.520 0.923 9.5N 82.0E 59 339 10m21s
11년(224) 가을 7월에 신라의 일길찬 연진(連珍)이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봉산(烽山) 아래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14년(227)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자 왕이 동명묘(東明廟; 평양 정릉사.)에 빌었더니 곧 비가 내렸다.
16년(229) 겨울 10월에 왕이 한천(寒川; 상원군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말갈이 우곡(牛谷; 함흥이다. 우수주)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게 하였는데 적의 복병(伏兵)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18년(231)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栗만 하여 참새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21년(234)에 왕이 죽었다.
구이왕 대방 시대
구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었다.
234년 구수대왕의 사후에 만주 부여성에 있던 백제 구이대왕仇台大王이 만주 요양시遼陽市 태자하太子河 대방성帶方城에 진출하여서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구이왕은 요동반도 복주의 부여성 출신이라서 부여씨라 하였고 이는 그 아들 고이왕과 비류왕과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으로 이어진다.
[삼국유사 / 남부여]에서 고이대왕의 즉위년을 기왕에 알려진 234년이 아니라 낙초樂初 2년 기미년 239년이라 하였으므로, 구수왕의 아들인 사반대왕의 즉위년을 238년으로 보아야 하고, 구수대왕(재위 214~234) 서거 뒤에 234년에서 238년까지 다스린 백제대왕이 비게 되므로 그 자리가 구이대왕 위치가 된다.
백제가 남긴 백제대왕의 대위는 [신찬성씨록]으로 보면 도모왕인 소서노를 1세로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문주왕을 도모왕 24세손, 혜왕을 도모왕 30세손이라고 했다.
出自百濟國都慕王24世孫汶淵王也....出自百濟國都慕王30世孫惠王也
따라서 삼국유사의 대위와 비교하여 2대의 차이가 있는데 시조로서 도모왕을 추가하면 그외로 1분의 백제왕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편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6대 구수왕은 10세손이라고 했는데 대위수가 4대나 차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貴首王也 고대에 칠七과 십十을 구별하기 어렵게 썼으므로 이를 7세손이라고 교정해서 보면 그의 앞에 도모왕 소서노 한 분만 있다.
따라서 구수왕 뒤에 사라진 백제왕 한 분이 있는데 바로 8대왕인 구이왕이다.
만주 대방 고지의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후비로 들였고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서隋書]와 [북사北史]의 <백제전>에서 동명의 후예에 구이가 있어 대방고지에 백제를 세우고 공손탁의 딸을 처로 삼고 동이강국이 되었으며 처음에 백가였으므로 백제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 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한편 170년에 등장한 공손탁이 190년에 요동국을 건설하고 고구려 영토를 침탈하였다.
요동국을 치기 위해서 위나라는 진제가 된 사마선을 보내어 238년에 멸망시켰다.
이때 삼국지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중국 후한의 환제,영제 때에 한예韓濊가 강성하였다. 요동국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에 대방군을 만들고 공손모와 장창을 보내어 유민을 끌어모으고 한예를 정벌하였고 이후에 왜국과 한이 대방군에 속했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 屯有縣以南荒地爲 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공손강이 건설한 낙랑, 대방은 의무려산 동남쪽이며 지금의 요하 서쪽이다. 왜국의 신무천황이 왜여왕 히미코의 사자로 즉위전에 중국에 들어왔는데 바로 이 대방을 통해서 들어왔고 238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237년 위나라 명제는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몰래 바다건너 보내서 대방군과 낙랑군을 만들었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들이 중국관직과 관복을 받았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自服印綬衣?千有餘人.
요동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위나라 명제는 바다 건너로 한예 땅에 유흔과 선우사를 파견하여 허위로 대방군과 낙랑군을 세웠고 한예를 선무하였는데 바로 백제를 선무한 것이다. 당시에 요동국과 한예백제(복주의 부여백제)의 연결을 끊어놓고 고구려 군대까지 동원하여 위나라는 238년 요동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246년에는 고구려를 쳐서 동천왕을 패퇴시켰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할하였으므로 한국의 진한 8국을 잘라 낙랑에 속하게 하여 다스리려 하였다.
한국 신지가 격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쳤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구이왕 시대 238년에야 위나락 요동국을 멸망시켰으므로, 237년 요동반도에 들어온 대방군의 기리영은 요동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온 소규모 병력이며 고작 외교대표부 수준이었고 군사력이 아니라 뇌물로서 한예와 구이왕을 선무하였던 것이다.
구이왕은 위영지령고분이라고 부르는 요양시의 벽화 고분에서 위영지령(魏令支令)이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공손탁이 준 작호라면 위나라가 앞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영지령은 위나라가 대방태수를 통해 구이왕에게 책봉해 준 것이 되며, 영지성은 하북성 난하 동쪽인데, 당시 공손탁의 영역으로서 백제왕에게 뺏아 가지라는 의미가 있다.
구이왕 벽화고분은 데 황해도의 안악3호분과 벽화 모습이 거의 같고 다만 행렬도의 규모가 안악3호분보다 조금 작다.
특징적으로 제2부인인 공손씨 벽화가 남아 있는데, 바로 공손탁의 딸을 부인으로 받은 구이왕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구이왕묘가 있는 곳은 지금 요양시 북쪽 교외인데 이 곳에서 166m의 고대 포석대로(鋪石大路)가 발굴되었다. 이는 호사스러웠던 산성인 것이다.
이 산성은 태자하가 감싸고 또 호성하를 파서 보호했는데 "머리빗"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비사성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산성의 서쪽과 동쪽에 호성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자보다는 규모가 커서 호성하(護城河)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산성 동쪽에는 초사하(肖夾河)라는 지명이 보인다. 산성을 남쪽에서 방어하는 호성하의 시작에서 끝부분까지 직선거리, 즉 성의 장축이 4000m이다. 남북거리는 1500m이다.
산성 남쪽에는 평양 안학궁과 비슷한 평지 토성이 있는데 북변의 길이가 1120m이고 남북으로는 450m이다. 안학궁은 600m x 600m다.
이 성의 이름은 바로 대방백제 구이성(仇爾城)으로 보이는데, 구이성과 발음이 비슷한 고려성으로 요양시 고적지에 그 이름이 전해 내려왔고 지금은 상왕가(上王家)라는 곳이다.
구이왕성은 근초고왕이 세운 평양 안학궁과 비교된다. 안학궁은 600m x 600m의 정방형이다.
안학궁의 성벽은 약 10m가 넘는 토축성벽이다. 특히 남쪽 성벽은 15m가까이 된다.
요양시 구이왕성의 남쪽 토축성벽도 10m가 넘는다. 구이왕성의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심양의 봉천성 성벽도 문화혁명 때 없애버린 기록이 있다.
동남각 성벽이 특이하다. 성문앞에 특별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군사시설이거나 상인들의 시장일 것이다.
안학궁의 북쪽 성벽은 잘 남아있는데 구이왕성은 겨우 그 흔적만 보이고 확실치 않다. 성벽은 판축법으로 쌓으므로 조사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237년 한예를 대표하여 백제 부여왕 구이왕이 요양시에서 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위나라는 공손탁이 평주목사를 자칭하면서, 위나라의 작호를 요청했을 때에 목사나 자사나 태수보다 아래인 고작 영령향후를 주었다. 공손탁이 기분 나쁘다고 그 책명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현령급인 위-영지령을 받은 백제 구이왕이 당시로서 책명을 약하게 받은 것이 아니다. 근초고왕은 진나라로부터 낙랑태수 백제왕을 책명받았다.
238년 구이왕이 죽었다. 구이왕은 개루왕(재위128~166)의 아들이라 했으니, 설령 유복자라고 해도 238년이면 이미 72세다.
사비왕(재위238~239)
238년 사비왕(202~268)이 즉위했는데 사비왕은 구수왕의 아들로서 일본에서 사마네현을 다스리다가 백제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백제에서 다시 일본에 가서 일본 제 5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이 되었다.
일본에서 이름은 미마쯔히코카에시네御眞津日子詞惠志泥命이라고 하며, 효소천황의 능은 사대주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를 모시는 하압신사下鴨神社에 붙어있다.
나라현 압도하팔중사대주명신사...사대주신의 신사는 이즈모 미호신사도 있다.
하압신사下鴨神社는 야쯔미와야에코토시로누시신사鴨都味波八重事代主命神社라고도 한다. 코토시로누시를 모시는 여러 곳의 압신사鴨神社를 고려하면 코토시로누시도 역시 압신鴨神이다. 이를 카모대신鴨神이라고도 읽는다.
압신의 뜻은 압록강에서 왔다는 것으로서 고대의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다.
즉 백제 사비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하여 통치를 하던 곳도 구이왕과 마찬가지로 고대 압록강인 요양시 대방성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통치하던 곳은 팔중성八重城이니 시마네현이다.
구수왕이 서거할 때에 사비왕의 나이는 32세였다. 어리지 않았다. 초고왕 계열을 대표하여 백제왕을 구이왕계로부터 다시 이어받을 만큼 실력이 있었다. 사비왕은 백제에서 최초로 연호를 세웠는데 낙초(樂初)라고 하였다. 이는 [삼국유사/남부여]의 기록이다.
또한 사비왕은 옥저고지에 사비성을 세웠다.
심양시 동쪽 끝에 무순시와 경계가 되는 사수(泗水)가 있는데 그 서남쪽으로 고려된다.
이 사비성 지역에서 바로 북쪽에는 고구려 석대자산성이 있고 동쪽에는 발해 남해부성이 되었던 무순시 고려산성이 있다. 사비성지에서 혼하 남쪽에는 상백관 고성이 있는데, 그 부근에서 동한시대 고분이 많이 발굴되었다.
백제 사비왕은 사비성에 있다가 대방성의 고이왕에게 239년에 쿠테타를 당하여 폐위되었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인 구이왕의 아들이고, 사비왕은 개루왕의 아들인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의 아들이다.
즉 초고왕계와 구이왕계의 백제 본토 권력 싸움에서 초고왕계가 밀렸다고 할 수 있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는 구수왕 대국주신大國主神과, 칸야타데히메神屋盾比賣命의 아들이며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이다.
칸야타데히메는 일본에서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백제 여인인데 칸은 카무라고도 읽으므로 역시 압록강 출신으로 볼 수 있으니 구이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사대주신事代主神이 일본에서 돌아온 구수왕을 대신하여 이즈모出雲에 살며 일본을 통치하다가 대화大和를 거쳐 백제로 돌아가서 238년(삼국유사)에 사반대왕沙伴大王이 되었다가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에게 백제를 뺏기고 다시 일본으로 왔다.
백제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대화大和 동쪽 미시마三嶋에 살던 세야타타라勢夜陀多羅比賣를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須岐比賣命(219~273)를 낳았는데, 훗날 신무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일본은 효소천황과 사대주신을 별개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효소천황의 이름은 카에-시네(詞惠志泥, 香殖稻)라고 한다. “카에”는 우리말 “껴”에 해당하는데 그의 궁성 이름은 와키가미掖上宮이고 와키掖의 동사動詞가 “끼다.(옆에)”이다. 그러면 우리식으로 “껴시네”가 되는데 사실은 “끼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켜시네”, 즉 “혀시네”가 원어原語로서, 불을 “밝히다照昭”의 우리말 고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우리말로는 “혀시네”왕이고 한자로는 조소왕照昭王이 된다.
조소왕이 한자어로 개작되어 효소왕孝昭王이 된 것이다. 그가 묻힌 곳은 “밝다산博多山”이다.따라서 그의 우리말 이름은 “밝혀시네”왕이이다.이는 신라왕 박혁거세와 비슷한데 부여어로 고려된다. 박혁거세가 부여에서 왔다는 주장이 《한단고기》에 실려있다. 부여의 영역이었던 내몽고 서요하의 천산 지역에서는 지금도 남자 무당은 박博이라고 하며, 여자무당을 이도칸伊都干이라 부르는데 굿을 하여 구사치병駒邪治病한다.
그의 백제 시호인 사비왕은 우리말 빛, 빗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새빛성에서 즉위하여 새빛왕(사비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혀시네왕이 된 것이다.
사대주신에서 대(代)를 시로로 읽는데 이는 흰색을 의미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초고왕의 증손자인 신무천황이 구수왕의 아들들을 향해 전쟁을 시작했다.
연오랑 세오녀는 일본 오사카에서 수진국(秀眞國)을 세웠다. 그러나 초고왕 스사노오의 침략으로 연오랑은 시코쿠(四國島)로 도망하고 세오녀는 포로가 되었다. 뒤에 세오녀는 초고대왕의 아들을 낳고 초고대왕의 팔중궁에서 탈출하였는데, 야마타이국을 규슈에 세웠고 히미코 여왕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천조대신 아마테라스로도 알려졌다. 초고대왕이 히미코의 왜국 왕권을 인정하여 주몽검을 내려주었다.
초고대왕과 세오녀의 증손자가 신무천황인데 초반에는 구수대왕의 아들들에게 밀려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백제 땅을 거쳐서 중국에 사자로 다녀오고 큐슈에 있던 왜여왕의 책봉을 받아왔는데 238년의 일이다.
이전에 히미코코여왕은 초고대왕과 자신의 아들 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가 일본의 대화大和를 통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첫째 신녀의 아들 아메노호히天菩比神를 야마대국의 사자로서 백제 본토의 구수대왕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복형인 구수대왕으로부터 영지를 받고 이즈모出雲에 정착하였다.히미코여왕은 그후 다시 아메쓰쿠니다마天津國玉命(122~178)의 아들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구수대왕에게 보냈는데, 역시 구수대왕의 사위가 되어서 돌아와 큐슈에 영토를 받았다. 히미코여왕은 다시 세번째로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160~210년)을 아메노토리후메天鳥船命(149~206)와 함께 파견하였다. 이 다케미카즈끼는 206년경에, 오사카에 있던 4살박이 사대주신事代主神(202~268)을 겁주어서 힘으로 밀어냈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그보다는 백제 본토에서 사대주신 사비왕을 본토로 불러들이고 의덕천황에게 대화 통치를 맡겼던 것이 된다.
신무천황이 중국에 왜여왕의 사자로 다녀온 238년에, 신무천황은 대화大和의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초고대왕의 아들인 대년신의 아들로서 쿠니타마신大國御魂神이자 안녕천황安寧天皇이다.)와 전쟁을 벌이는데, 신무천황과 함께 대화大和 정벌에 나선 이트세五?命(184~238)가 전사한다.
결국 신무천황이 244년에 대화大和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와 싸워서 에시키를 전사시키고 승리한다.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의 아들로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友命이다.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으로 기록되었다.
이 대화 정벌 전쟁에서 244년에 마침내 승리하니, 안녕천황安寧天皇,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이 항복하였고, 그 후예는 물부련物部連이 되었다. 같은 초고대왕의 후손으로서 구수대왕계를 배반하고 협력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 신무천황은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의 딸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황후로 취한다.
그러나 244년 이때까지도 대외적인 왜여왕은 큐슈에 있던 히미코였고, 실제 통치는 증손자인 칠뜨기 신무천황이 오사카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후 247년에 히미코가 죽으니, 신무천황이 왜왕으로 즉위하면서 히미코의 능을 거대하게 꾸미고, 무려 백명의 노비를 순장하였다.
《위지왜인전》 卑彌呼以死 大作塚 逕百餘步 徇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247년 히미코 여왕 사후의 혼란은 《위지왜인전》에 간략히 기록되어있다. 다시 남왕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다시 서로 죽였다.
신무천황은 257년에 죽었는데 247년 즉위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반란으로 큐슈로 후퇴하였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때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 안녕천황, 효소천황(사반왕), 효안천황(사반왕 아들)이 모두 지방왕으로 존속한 것이고 왜여왕 일여는 겨우 257년에 13세로 즉위하였으니 10년간 극심하게 혼란했던 것이다.
다시 여왕을 세우니 비미호의 일가인 일여로서 13세에 왕이 되었고 나라가 평온해졌다.
[위지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王,國中遂定
일본사서에서 제 2세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은 이스케요리의 아들이다. 누나가와미神沼河耳命라는 이름은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이름으로 보아서 그는 대화大和로부터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로 257년에 쫓겨가서 죽은 것이 된다.
신무천황이 257년에 죽었고, 257년에 일여가 즉위했으므로 수정천황이 독자로 즉위할 수가 없다. 한 지방왕이 되어 할거한 것으로 고려된다.
제 3세 천황으로 기록된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은 시키즈히코타마데미師木津日子玉手見命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초고대왕의 손자이며 270년에 죽었다. 244년 신무천황에게 신무천황에게 항복한 니기하야히邇藝速日命를 안녕천황으로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니기하야히는 현재 天照國照彦天火明櫛甕玉饒速日尊으로서 여러 신사에서 모셔진다. 안녕천황의 치소治所였던 카타시호片監의 우키아나궁浮穴宮은 신무천황이 도읍한 가다이片居로서, 신무천황이 이 가다이를 이와레伊波禮라고 고쳤다.
제 4세 천황으로 기록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友命은 구수대왕의 아들이며 244년 전사하였다.
제 5세 천황으로 기록된 것이 효소천황, 즉 사비왕이다.
제 6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안천황(222~298)은 사비왕의 아들이며 일여가 죽은 후에 일본을 다스렸고 대물주신이라고도 하였다.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도니 효원천황(228~273)도 사비왕의 아들이며 그의 딸이 왜여왕 일여로서 제 9세천황 개화천황이기도 하다.
제 8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은 선비족에게 밀려나 일본에 왔던 부여왕 의려依慮이다.
제 9세 천황으로 기록된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 와카야토네코히코오호히히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 천황은 256년 신무천황이 죽은 뒤에, 13살에 왜여왕으로 즉위한 일여다. 사비왕의 손녀이면서 히미코의 종녀宗女라고 하였는데, 가야국 거등왕의 공주인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의 딸이다. 히미코 여왕, 즉 세오녀가 신라 땅인 포항에서 건너갔지만 본래 출신은 가야였던 것이다. [위지왜인전] 卑彌呼宗女 壹與
효소천황 사대주신은 나라를 양보한 전설이 있는데 이후 일본에서 한가로이 지낸 것으로 고려된다.
사대주신 사반왕 말년의 여유로운 모습
사반왕의 일본 후손은 효원천황, 효안천황 이외에 씨족으로 대춘일조신, 길전련, 소야조신 등이 있었다.
7.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4세기초 분서왕 시대 백제도
고이왕(재위239~286)
고이왕은 구이왕의 아들이다. 구수왕계 사비왕을 축출하고 백제왕이 되었다.
3년(236)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5년(238) 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鼓吹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6년(239) 봄 정월에 비가 오지 않다가 여름 5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7년(240)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여름 4월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가을 7월에 석천(石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한 쌍의 기러기가 냇가에서 날아오르자 왕이 쏘아 모두 맞혔다.
석천은 지금의 석하(石河)인 금주시(金州市) 남쪽으로 고려되며 온가구성이 있는데 백제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해군(海軍)의 집결지로 고려된다.
9년(242) 봄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택南澤에 논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숙부 질(質)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질(質)은 성품이 충직하고 굳세어 일을 꾀함에 실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왕이 서문으로 나가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10년(243) 봄 정월에 큰 제단大壇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13년(246) 여름에 크게 가물어 보리 수확이 없었다.
가을 8월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民口들을 돌려주었다.
중국 기록에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궁존이 영동 예국이 고구려에 속하므로 벌하였고 불내후등이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45년,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 擧邑降.
불내후는 불내예후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의무려산 동쪽이며 지금의 요하 서쪽이다.
<위지동이전> 예전에 보면 의무려산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그 동쪽의 7현은 동부도위가 다스렸는데 예맥거수를 이용하여 자치하였다.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民.後省都尉,封其渠帥?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
불내예후는 계속 중국군에 부역하였다. 247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따라서 공손씨의 연나라를 멸국시킨 위나라의 새로운 낙랑, 대방군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요서인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다.
그러나 247년에 다시 불내예후를 책명한 것으로 보아서 위나라의 낙랑, 대방군은 247년에 난하의 노룡으로 철수한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고구려> 기록에 관구검이 낙랑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의무려산 북쪽의 보통 통로가 아닌 의무려산 남쪽의 통로로 귀국한 것이다. 지금의 요양하(饒陽河) 유역이 이 당시 낙랑, 대방이었다.
낙樂과 요饒는 중구 발음이 같다. 우리말에도 요산요수는 낙으로 읽지 않고 요로 읽는다.
이는 246년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중에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쳤기 때문이다. 그 낙랑이 바로 의무려산 동쪽이다.
한편 의무려산 동쪽을 차지한 중국이 요하를 건너서 개주시 일대 진한 8국을 낙랑에 붙여서 통치하겠다고 작정하니, 한의 신지가 격노하고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여 없애 버렸다. 이때 대방태수 궁존은 전사하고 낙랑, 대방 이군은 한 땅에서 멸망하였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 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이때 대방태수 궁존, 낙랑태수 유무가 한국신지를 정벌하였으나 궁존은 전사하였으니 낙랑, 대방 2군은 진한 땅에서 멸망하였다. 역시 247년의 일이다.
14년(247) 봄 정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2월에 진충(眞忠)을 우보(右輔)로 삼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15년(248)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또 일년간의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었다.
16년(249) 봄 정월 갑오에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22년(255) 가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4년(257) 봄 정월에 크게 가물어 나무들이 모두 말랐다.
25년(258) 봄에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26년(259) 가을 9월에 청자(靑紫) 색의 구름이 왕궁 동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27년(260) 봄 정월에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었는데 왕명 출납宣納에 관한 일을 맡았다.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왕궁을 지키는宿衛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또 달솔(達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한솔(汗率)· 나솔(奈率) 및 장덕(將德)· 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紫色 옷을 입고 은꽃銀花으로 관(冠)을 장식하게 하였으며, 11품 이상은 다홍색緋色 옷을 입게 하고, 16품 이상은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였다. 3월에 왕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28년(261) 봄 정월 초하룻날初吉에 왕이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紫大袖袍와 푸른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금꽃金花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金花飾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 띠素皮帶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烏韋履을 신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보았다.
이 모습이 바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인 백제왕의 모습이다. 이는 조양시 원대자 고분에서나 같고 요양시 상왕가에 있는 구이왕묘(위영지령묘)에서나 복식이 똑같다.
더욱 특이한 것은 조양시 원대자 고분과 안악3호분은의 주인공은 거의 한 사람처럼 닮았다. 주인공이 서로 부자이거나 벽화를 그린 화공이 똑같고 볼 수 있다.
2월에 진가(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261년 7월에 낙랑외이(樂浪外夷)인 한韓과 예맥濊貊이 위나라에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불내예는 의무려산 동쪽과 요하 사이이고 한은 요하 건너 그 동쪽이다. 이 해는 고이왕이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없애고서 책명을 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과 예맥의 동행은 의무려산 동쪽 예맥이 한에 복속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백제가 261년에 의무려산 동쪽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265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이때 본격적인 백제의 외교가 있었다.
276년 2월 동이팔국 귀화 東夷八國歸化 기록을 시작으로
276년 7월 동이17국 내부東夷十七國內附
278년 3월 동이6국
278년 12월 동이9국 내부(來附)
280년 6월 동이 10국 귀화
280년 7월 동이 20국 조헌
281년 6월 동이 5국 내부 등의 기록이 있다.
282년 9월 동이 29국 귀화
286년 8월 동이 11국 내부, 마한등 11국 견사래헌(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의 기록이 있다.
고이왕 사후로는
287 8월 동이 2국 내부
287년 9월 동이7국 詣校尉 내부
289년 동이 1국 내부, 이해에 먼 곳의 동이 30여국 래헌 기록이 있다.
290 동이7국 조공
291 동이 17국 내부,
이후 동이의 진나라 조공이 없다. 대신 마한의 기록만 있다.
특히 동이국 중에서 마한의 외교만 따로 뽑혀진 것이 [진서/마한전]에 나오는데
280년,281년,286년,287년,289년에 각각 있었다. 武帝太康元年、二年,其主頻遣使入貢方物,七年、八年、十年,又頻至。
마한은 290년 이후로도 계속 외교하는데 진서의 원문에 오자가 있다.
태희(290년) 다음에 함녕(275년)은 불가능하니 오자인 것이다. 太熙元年(290),詣東夷校尉何龕上獻。咸寧三年復來(275),明年又請內附。여기서 함녕 3년은 오기이고 태녕3년의 325년으로 고려된다.
동이국 마한의 소재는 [진서]에서 본래 진한辰韓(개주시)이 대방(백제 대방 요양시)의 남쪽이고, 동서가 바다로 막혔다고 했는데, 이는 요동반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마한이 산해지간에 위치하고, 또 진한은 그 마한의 동쪽이다. 즉 마한이 진한보다 커져서 진왕을 동남쪽으로 밀어낸 것이 된다.
진한의 조공은 280년과 281년, 286년의 조공이 각각 있었다. 마한보다 횟수가 적다가 끊어진 것이다.
29년(26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무릇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贓物)의 세 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게 하였다.
33년(266)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直宣)이 힘센 군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쳐서 우리 군사를 이겼다.
36년(269) 가을 9월에 살별이 자궁(紫宮)에 나타났다.
39년(272)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45년(278)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50년(283)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53년(286) 봄 정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책계왕(재위288~300)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사성(蛇城)은 개로대왕이 사성(蛇城)의 동쪽에서 숭산까지 방죽을 쌓았었다. 평양시 북쪽 평성시의 사현(巳峴)으로 고려된다. 니성 등이 있다.
아단성은 <광개토왕비문> 순서에서 선천군 대륙산 산성으로 고려된다. 아단성은 개로왕이 죽은 곳이다. 대륙산은 백제 왕과 왕자들을 도륙한 도륙산의 전음으로 고려된다.
2년(287)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13년(298)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안악3호고분은 백제 책계왕묘료 추정된다.
안악3호분 주인공은 백제왕 복식이며 책계왕으로 해석된다.
백제왕비 복식으로 본다.
안악3호분 벽서/ 영화13년 10월 무자삭 26일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 유주요동평곽
[]향경 상리 동수 자[]안 연69훙관
5행의 도[][] 유주, 요동 평곽 글자는 위 사진에서 보듯이 도비술都鄙戌이나 도비성都鄙城으로 추정된다.
도비는 왕자 등의 거처(都鄙=古代 王侯 子弟 公卿大夫的 采邑)이다.
따라서 유주의 요동군 평곽현성에 백제 지방왕으로서 거처하면서 직함이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 현도, 대방태수였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232년경의 그의 출생지는 대방백제 도읍지(요양시)의 경상리라고 본다.
책계왕은 창려, 현도, 대방 3군 태수를 지냈는데 [수경]에서 백랑수가 동쪽으로 흘러 왜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왜인들이 옮겨와 산다고 하였다. 백랑수 본류에 들어가서는 조양시를 지난다고 하였다.
水出西北平川,东流径倭城北,盖倭地人徒之。又东南径乳楼城北,盖径戎乡,邑兼夷称也。又东南注白狼水。白狼水又东北,自鲁水注之,水导西北還山,东南注白狼水。白狼水又东北径龙山西,燕慕容皝以柳城之北
창려는 본래 백랑수의 최상류로서 지금의 수중현 북쪽 건창현인데, 후한시대 응소(應?)가 쓴 기록에 의하면 요동6국의 치소였으며
178년에 선비족 단석괴왕이 침범해 와서 왜인들 1000여가를 잡아가서 선비족 수도(산서성)에 데려다가 물질(잠수)을 시키기도 했다.
현도군은 대릉하 수계인 부신시(阜新市)에 있었다.
대방군은 의무려산 동남쪽에 있었다. 의무려산 서북쪽인 의현에는 요동군이 있었다.
당시 대릉하가 고릉하를 통해서 대요수와 만나서 안시현 서쪽으로 바다로 나갔으므로 백제의 창려군, 요동군, 현도군이 모두 대릉하 수계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발굴된 영화9년의 동리(冬利)의 묘전에서는 그가 요동, 한, 현도 태수령으로 나온다. 永和九年遼東韓玄도太守領冬利
동수는 벽화에서 성상번(聖上幡)을 세우고 출행하므로 백제왕이었으며, 당시 시대 상황과 부합하는 것은 책계왕의 서기 300년이 된다.
298년 9월에 죽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지만 삼국사기 기록은 광개토왕 비문에서 1년의 오차가 있고, 사비왕 234년의 기록은 238년의 일로서 무려 4년의 오차가 있다.
즉 280년에 고구려는 안국군 달가에게 내외병마사를 내려주고 숙신, 양맥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양맥이 신민시 류하(柳河= 고구려 마자수) 서남쪽 양산 지방이다.
따라서 그 남쪽에 있던 전한시대 대방 지방이었던 예맥의 불내후 지역과 고구려의 충돌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백제는 이 대방 진출을 기화로 대릉하를 타고 깊숙히 전진하여 조양시와 객좌현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조양시에 책계왕 고분(안악3호분)과 똑같은 벽화고분(원대자 고분)이 나오므로 조양시에도 진출한 것이 된다. 창려군이었을 것이다.
한편 의무려산(녹산) 부근에 있던 부여는 백제에 쫓겨서 서쪽으로 가서 연나라 부근에 있다가 346년 연나라에 멸망하였는데 그 위치는 유하의 상류로서 발해의 정주가 된 의려국 고지이다.
이제까지 안악3호분의 축조연대를 동진의 영화 13년인 357년으로 해석해 왔는데 간지와 날자를 맞추어보면 서기 300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백제 책계왕의 연호가 된다.
만주의 대련반도에서 요양시까지 영화 연호의 전실(벽돌) 고분이 즐비하다. 영화 연호가 가장 많다.
357년의 동진은 1월에 승평으로 개원하였다. 따라서 동진의 영화13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안악3호고분은 그 복식이 백제왕 복식이고, 책계왕이 재위 13년에 서거했으므로 서기 300년에 죽은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특히 서기 300년은 신라에 낙랑, 대방이 귀복한 해이다.
다시 말해서 부여국 의라왕이 현재의 요서에서 일본으로 가면서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사도 장군을 두었던 때이다.
의라왕은 일본에서 숭신천황이 되었다. 이때 숭신천황은 일본에서 백제 사비왕의 아들인 효안천황을 밀어내서 효안천황을 은거시켜서 대물주신으로 만들었다.
즉 책계왕을 전사시킨 한인과 맥인은 바로 부여 의라왕의 무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선비족 전연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선비족 모용외는 적봉 일대에서 동남쪽으로 281년 10월에 창려를 약탈하였다. 점거한 것은 아니다.
다시 요서(하북성 유관)를 약탈하다가 282년 요서군 비여현에서 진나라에 패퇴하였다.
285년에는 부여를 쳐서 의려왕이 자살하였다.(실제 죽지 않고 일본으로 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부여의 위치는 유하의 최상류다.
286년 진나라는 부여를 살리기 위해 의라왕을 도와서 옥저에 부여가 다시 생겨난다. 이는 녹산의 부여인데 의무려산 서쪽이다.
의현 만불당 석굴에는 북위시대에 의현이 옥려의 서쪽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옥려가 옥저이고 그 위치는 의무려산이다.
그러나 289년에 모용외는 진나라와 강화하여서 책봉을 받고 백성을 살핀다. 물론 부여를 자꾸 쳐서 부여인을 북경시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
289년에 모용외는 도하 청산으로 이주하였는데 대극성이라고 하였고 제전욱의 도읍이라고도 하였다.
전한시대 도하는 본래 바다로 강이 들어가는 곳으로서 지금의 흥성시 부근이다.
<통지씨족략>에서 치우씨 후손들이 대극성에 살았다고 한다. <전한서>에서는 도하에 당취수라는 물이 있었는데 번한의 수도인 탕지산湯地山에서 안덕향에서 당취수唐就水라는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
<전한서>의 도하현徒河縣은 수도의 물이라는 뜻의 도하都河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용외는 302년에 우문부로부터 10만 대군을 맞아 극성에서 포위당했으나 대패시켰다.
분서왕(재위300~304)
분서왕(汾西王)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거동과 풍채가 영특하고 빼어났으므로, 왕이 사랑하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2년(299)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5년(302) 여름 4월에 혜성彗星이 낮에 나타났다.
7년(304)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潛師襲取樂浪西縣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304년 분서왕이 뺏은 낙랑의 서현은 진나라와 분쟁 기록이 없다. 즉, 난하에 후퇴해 있던 진나라 낙랑군과 아무 상관이 없고, 대신 의무려산의 옥저에 옮겨와 있던 의라의 부여를 다시 북쪽으로 쫓아낸 것이다.
의라왕은 이미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낙랑서현에는 부여 유민들만 남아 있었는데, 책계왕이 의라왕에게 전사한 것에 대하여 부여 유민들에게 복수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낙랑태수의 자객이 분서왕을 죽였다.
분서왕을 암살한 낙랑태수는 분서왕의 휘하 장수인 낙랑태수로 고려되는데 바로 장통(張統)이다.
그리하여 분서왕의 낙랑 땅은 부하장수 장통이 독립하여 스스로 낙랑태수라고 하였다.
장통은 의무려산 동서를 차지하고 북으로는 유하에 이르러 고구려와 맞대고, 동쪽으로는 요하를 사이로 백제와 맞대고, 남쪽으로는 선비족 전연국과 맞대는 상황이었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은 백제 본토로부터 오리알처럼 떨어진 이 낙랑을 쳐서 빼앗았다. 314년에는 대방을 빼앗고 315년에는 현도군을 획득했다.
그러자 장통은 남서쪽의 모용외에게 도움을 청했고, 모용외의 전연국 낙랑태수가 되어서 319년 고구려 하성(河城)을 쳐서 빼앗았다.
고구려 하성은 북표시 흑성자다.
이 결과로 낙랑태수 장통의 백제 군대가 그대로 선비족 모용외에게 속해 버린 것이다.
전연국 모용외는 금주시와 의현을 싸우지 않고 얻었다.
318년에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와 우문씨, 단국부를 동원하여 극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모용외가 꾀로서 연합군을 반목하게 만들어 분리시켜서 고구려군과 단국부를 돌아가게 하고 우문씨를 쳐서 깨트리고 평주자사 최비를 치니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후에 모용외는 백제를 배반한 장수 장통을 시켜서 고구려 하성을 뺏은 것이다.
모용외는 307년에 자칭 선비대선우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같은 선비족인 소련부와 목진부가 진나라 요동군을 괴롭히니 소련부 추장과 목진부 추장을 죽이고 두 부를 연나라에 통합하였고 진나라 요동군을 다시 세워주었다. 이는 하북성 노룡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요동군인 대릉하 주위 요동군과 난하 동쪽의 진나라 요동군 사이에는 연나라가 존재해 있어서 두 요동군은 반드시 구별해야된다. 백제와 고구려 요동군의 치소는 평곽현이고 난하 동쪽 진나라의 요동군성은 양평이다. 물론 창려에 존재하는 양평도 있는데 공손탁의 요동국 수도 양평이며 이는 왕망이 창평이라고도 불렀었다.
300년에 시작된 서진의 팔왕자의 난은 영가의 난으로 이어져서 장안이 하물어지고, 316년 강남에서 사마예의 동진이 일어나면 중원은 5호 16국시대가 되는데 모용외는 동진과 손을 잡았다.
모용외는 317년에 중원에서 피난온 기양인으로 기양군을 만들고, 예주인으로 성주군을 만들고, 영구군과 당국군도 대극성과 금주시 주변에 만들었다. 이때 중원의 현자들을 많이 받아들여서 백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아들 모용인을 평곽성에 배치하여서 고구려, 백제의 진출을 막았다. 평곽성은 지금의 요하 서쪽으로서 주요한 성이다. 뒤에 고구려 건안성이 되었다,
8.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 180년을 산 것이 된다. 따라서 구이왕의 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 본다. 일본에 진출한 것으로 보아서 구수왕의 손자로 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 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 고구려의 전연 수도 대극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릉하의 양평과 요하 하구 서안의 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 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 작은아들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켜 평곽성에서 모용황과 대치하였다.
336년 모용황은 창려로부터 얼어있는 바다를 도보로 건너서 평곽성으로 진군하여 모용인을 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 치기로 하는데 매복한 곳이 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 이는 신당서 <오승체전烏承玼>에 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渝關-都山 전투라고 하였으니 바로 임유관 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 유성(산해관)에 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 모용황은 이를 막아냈고 석호에게 항복했던 연나라 장수들은 죽거나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 333년에는 모용인도 바다로 극성을 치려고 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 단부인 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 부여는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에게 침략을 받아서 연나라 근처에 왔다고 하였다. 夫餘居於鹿山,爲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모용황이 친 부여는 곧 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 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 여현은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고 여현의 아들은 여울(餘蔚)인데 부여왕자라고 칭했으며, 370년 부견이 전연국을 멸망시킬 때에 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 384년 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 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9. 걸왕의 일본 진출(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 일본을 빼앗았다. 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 대방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郎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碓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碓命(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契, 걸契과 경景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白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斯呂는 대代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계契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의 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帶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는 백제 대방 출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교토에 살았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
풍전시 경행천황 히시로궁적비
10. 근초고왕의 한산시대(346~375)(태화360~375)
근초고왕자의 일본 정벌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근초고대왕은 비류왕 시대에 일본에 가서 야마토타케루라고 하였다. 일본무존日本武尊이라는 뜻이다. 또는 왜국의 건국자로서 왜건명倭建命이라고도 했다.
근초고대왕이었던 일본무존의 빈 고분 기록에 의하면, 295년에 태어나서 333년에 일본을 떠났고, 374년까지 80세를 살았다.
일본무존의 고분은 일본무존이 백제로 떠난 뒤에 만들어진 빈 고분으로서 인덕천황기에도 확인된다.
오오사카 금탄원의 백조릉
일본 교토京都 대진시大津市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는 신사에 모시는 제신祭神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祭神四座 八姓の祖神である。
第一 今木神 〔いまき・景行天皇の子〕 日本武尊 源氏の神
第二 久度神 〔くど・日本武尊の子〕 仲哀天皇 平氏の神
第三 古開神 〔ふるあき・応神天皇の子〕 仁德天皇 高階氏の神
第四 比賣大神〔即ち〕 天照大神 大江氏の神
第五 縣(あがた)社 天穂日命 中原・淸原・菅原・秋篠の四姓の祖神
즉,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1신은 금목신이자 일본무존이고,
제2신은 구도신久度神인데 일본무존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신은 일본무존의 아들인데다가, )구도신은 같은 일본무존의 아들인 중애천황과 별개 인물이다.)
또한 구도신久度神은 백제 상고왕尙古王(=近尙古王) 즉, 근초고대왕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久度神は百濟の祖 尙古王の子仇首王(日本音くど)여기서 상고왕尙古王은 조고왕照古王, 즉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따라서 구도신, 근구수대왕을 낳은 일본무존은 당연히 백제 근초고대왕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현재 이들 히라노平野신사의 4신을 모두 백제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日本京都にある "平野神社"は倭王が先祖たちのために祭祀をあげた所だ.. 927年完成された日本古代王室文献"神名帳"を見れば李Hiranoジェントルマンに対して "平野祭神は四座であり 四時祭式には 今木神, 仇度神, 古開神, 相展の 比賣神であり 4神が皆百濟王だ" やっぱり倭國は百濟王に祭祀を執り行なうので屬國イヨッネです~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교토 경행천황의 궁터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무존의 일본 정벌에 사용했던 주몽검都牟劍(=쿠사나기쯔루기)를 신神으로 모신 아뜨다신사熱田神宮 기록에 의하면, 열전신궁의 말사인 소시모리사末社曾志茂利社에서는 거무리대신居茂利大神을 제사하는데, 이는 스사노오의 별명이라고 전한다.
단, 스사노오신, 즉 초고대왕은 그 바로 옆의 남궁신사南宮神社에서 따로 모신다. 따라서 거무리대신은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의 별명이 아닐 것이다.
히라노신사의 금목신今木神과 아뜨다신사의 거무리居茂利대신은 그 표기가 유사한 것인데, 뒷부분 목木과 무리茂利는 우리말 물, 강을 나타낸다.
앞부분 今(이제 금)과 居(있을 거)의 훈訓을 취하면 일본말 “이사”가 되고, 이는 우리말의 숫자 “하나”“一”를 의미한다.
따라서 합쳐서 “하나-물”을 우리말로 바꾸면 백제의 한수가 된다. 그래서 거무리대신과 금목신은 한산漢山으로 천도한 한성백제의 왕 근초고대왕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목木의 일본 발음 기き는 성城의 일본 발음 기이기도 하다. 즉 히라노신사의 제1신, 금목신은 백제 한성신漢城神,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그가 바로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이고 근구수대왕의 부왕인 근초고대왕이다.
히라노 신사의 제 2신 구도신은 근초고대왕의 아들로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자, 일본의 응신천황應神天皇이고, 오사카에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따로 있기도 하다.
제 3신 고개신古開神은 후루아기ふるあき라고 하는데,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침류대왕枕流大王의 “류流”의 훈訓 “흐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된다. 후루는 강降의 발음이기도 한데 흘러내려왔다는 말이다. 즉 신공황후인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통해 강신降神하였으므로 후루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제 4신 히메比賣신은 환무천황桓武天皇(737~806)의 어머니의 조상이다. 그런데 백제계 도래인 화씨和氏의 후예라고 한다.桓武天皇とその生母の高野新笠が祀っていた神樣であった。高野新笠は和氏(やまとし)出身で、この和氏が百濟系渡來氏族であった。したがってこれら神樣は桓武天皇の母系に繫がっている。
이 히메比賣신은 응신천황의 부인이 되고 침류왕을 낳았던 신공황후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의미한다.
근초고대왕(재위 346~374)은 일본무존으로서 333년에 39세로 죽었다고 금탄원琴彈原의 백조릉에 기록되었는데, 이 333년은 근초고대왕이 39세로 일본 정벌 후에 백제로 돌아간 해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일본무존은 갑자기 병이 들어 백조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였고 그래서 백조릉이란 곳이 일본의 여러 곳에 생겨났다. 물론 한반도를 바라보는 큐슈 서북 해안에도 있는데 그가 떠나간 마지막 장소에 세워진 고분이다.
근초고대왕의 일본 후비들 중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후타지노이리히메布多遅能伊理毘賣(297~363)가 있어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을 낳았다.근초고대왕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4~343)의 차자이고, 걸대왕의 부왕은 백제 분서대왕(298~304)이었다.
근초고대왕, 일본무존은 태자도 아닌 세째 왕자로서 298년 숭신천황에게 죽임을 당한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왕자가 일본 탈환 공격에 나서니 함께 참여하여 큐슈를 먼저 공략한다.
큐슈는 이미 먼저 온 경행천황이 일부 점거하고 있었지만 큐슈를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초고대왕의 형이라는 오호우스大碓命은 295년에 쌍동이로 태어나 318년에 24세로 죽었는데 숭신천황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직접 큐슈 정벌을 완성하고, 당시 재왕齋王이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야먀토히메倭比賣(277~366)를 만나서 히미코 이래로 여제사장이 보관하던 주몽검을 건네받고 큐슈 정벌에 도움을 받는다.
부여계인 숭신천황에 대항하여 가야계와 백제계가 연합했던 것이다.
근초고대왕이 일본 본토 이즈모를 공략하고 다시 나라현을 공략하고 도꾜東京를 공략할 때에 야마토히메가 준 쿠사나기쯔루기草雉儉를 사용하였다. 이후에 일본 동경은 근초고대왕의 장자인 호무야와케品夜和氣命(311~374)가 물려받았다.
일본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백제 근초고대왕과 근구수대왕, 침류대왕, 그리고 근구수대왕비 신공황후를 모시는 백제인들의 신사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구도신사久度神社는 구도久度대신과 팔번八幡대신을 모시는데 지금 구도대신의 신분을 감추었지만 역시 근구수대왕이고, 팔번대신은 그 아들 침류왕이 가장 유력하다.
근초고왕이 백제에서 일본을 통치하던 성무천황 때에 일본 땅의 분봉分封이 많았는데 성무천황도 분봉을 받은 일본의 지방왕이었을 것이다.
그의 영역은 경행천황에게 물려받은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 있던 오호쯔시大津市다.
근초고대왕의 장남인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은 도쿄東京 부분에 분봉받고,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에 분봉받은 것이 된다. 동경東京 신내천神奈川의 한천寒川에 위치한 대신총(大神塚)에는 응신천황의 형이라는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가 묻혀있다. 그는 311년에 태어나 64세로 374년에 죽었는데 근초고대왕의 장자다.
그리고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는 경행천황 때에 근초고대왕이 둔가屯家를 두어서 백제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 곳은 주길대신住吉大神 3명이 함께 관리하였던 것으로 고려된다. 관리는 근초고왕의 아들인 중애천황이 하였다.
백제가 왜국을 나누어 국군國郡에 군장君長을 두고, 현읍縣邑에 수거首渠를 두었는데, 이때 여러 백제 왕자들에게 일본 땅을 분봉하였던 것이다. 수거首渠는 마한馬韓의 제도인 읍장 거수渠帥를 뒤집은 말이다.
근초고대왕은 346년 모용황의 부여성 침략으로 5만명이 끌려간 후에 걸대왕을 폐위하고 백제 대왕으로 즉위하였다.
2년(347) 봄 정월에 천신(天神)과 지신地祇에게 제사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21년(366) 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23년(368) 봄 3월 초하루 정사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4월 4일 아침 7시 59분에 있었다. 0368 Apr 03 22:59 A 93 0.887 0.998 55.6N 147.2E 27 17 00m09s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良馬 두 필을 보냈다.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치양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쟁탈지인데 신라 장수 덕지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동해안의 패하인 금야강의 평주성으로 고려된다. 당시에는 비류수라고 불렀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이는 대동강 한수로의 천도를 준비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라, 가야에 대한 전쟁이기도 하다.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요양시 태자하가 고대의 패하다. 온조왕 때 백제의 북계였다.
370년 전연국이 전진국에게 멸망할 때 고구려 백제의 강역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고구려 평양성은 패수에 있던 구도 평양성이다.
서울都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서는 북포산(北浦山)으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북한산군이라고 하였고 고구려 평양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안학궁을 의미한다. 태화궁이라고도 했는데 근초고왕의 연호가 태화이니 태화연간(364~375)에 지어서 천도한 것이다.
27년(372) 봄 정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8년(373) 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근초고대왕은 연호를 세웠는데 태화(泰和)라고 하였다.
근초고대왕이 오사카에 두었던 아들 중애천황이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공격을 당하여 355년에 규슈로 쫓겨났다.
그러자 백제 근구수왕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362년이다.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을 살려주고 그의 후비인 신공황후를 취하여 백제로 데려왔는데 백제에서는 아이부인이라고 불렀고 그녀의 아들이 침류왕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왜왕으로 임명하면서 태화 연호가 새겨진 칠지도를 주었는데 침류왕에게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왜왕의 수호신, 혹은 임명장으로서, 백제 근초고대왕이 367년에 하사한 칠지도七枝刀가 일본에 남아있다.
칠지도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奇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칠지도의 명문이 몇월인지가 정확히 판독되지 않았는데 고대 문귀 상식으로는 가장 화기火氣가 극성한 5월 병오일이 맞다. 그러면 362년이 된다.
그러나, 태화 원년이 되는 359년은 백제가 태화로 개원할 명분이 적다. 그러나, 364년은 60년에 한번인 갑자년甲子年이라서 개원 원년의 명분이 된다. 이렇게 추정하면 367년 6월 15일이 백제 태화 4년 6월 병오일이 된다.
또한 갑자년 364년에 백제 사신이 탁순국卓淳國을 통해 왜국으로 오다가 억류되어 신라로 압송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그래서 수년 후에 백제와 왜국이 연합하여 탁순국을 비롯한 가야를 쳐서 복속시키고 새로운 교통길로 삼는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비파호 서안에 있는 시로히게신사白鬚神社大鳥居と琵琶湖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 식장천息長川은 시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滋賀縣坂田郡天野川(息長川)流域. 즉 백자국 위치는 성무천황이 있던 시가현滋賀縣이 된다.
11.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왕(재위 375~383)
신공황후를 데려온 근구수왕자(320~394)
제 14세 천황으로 기록된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근초고대왕인 일본무존의 아들이다.
중애천황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에서,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반란을 당하여 355년에 큐슈九州로 쫓겨갔다.
성무천황은 중애천황의 큐슈九州를 마저 공략하려고 하였다.
백제의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에게 차라리 신라를 치라고 권유하였으나, 성무천황은 굳이 큐슈로 향하여 여육膐宍의 공국空國을 치러 왔다. 여육의 공국은, 혈육의 나라라는 뜻이니 중애천황의 땅 큐슈다.
이 성무천황의 큐슈 공격에 성무천황 후비인 신공황후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근초고대왕을 대신하는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이 남아있어서, 중애천황의 큐슈를 지켜주었고 백제군은 신공황후를 포로로 잡았다.
뒤이어 근구수왕자의 일본 본토 공격으로 355년에 시작된 성무천황의 반란은 362년에 평정되었으며 근구수대왕이 응신천황으로 등극하였다.
성무천황이 다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한 곳도 역시 걸대왕이 물러나 있던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다.
[고사기]에서 중애천황은 362년에 죽었는데, 이 기록은 성무천황이 362년 6월에 강제로 퇴위된 것을 의미하고, 이후로 성무천황은 시가국 다카치호궁으로 물러나 370년에 죽었다. 중애천황은 355년에 큐슈로 물러나 379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새 남편으로서 근구수대왕이고, 태중에서 삼한왕이 된 신공황후의 아기는 우지노화기, 즉 백제 침류대왕이었으며, 침류대왕은 중애천황의 후사가 아니라 성무천황의 후사를 이엇다. 이 침류대왕이 경행천황과 성무천황의 시가국국 다카치호궁을 잇도록 하여 어린 침류대왕을 백자국 세자라고 근초고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에 기록하였다.
본래 응신천황은 호무다천황譽田天皇이라고도 하는데, 호무타화기品陀和氣命(320~394)로도 쓰고 본래 백제 근구수대왕이다.
응신천황應神天皇(재위 362~367)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재위 383~394)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가 두 번이나 천황을 지낸 것을 의미하고,응신천황으로서는 362년부터 367년이고, 예전천황으로서는 383년부터 394년까지다.
호무다品陀는 한전漢田, 즉 근초고대왕 이래 백제 수도 한산漢山을 의미한다.
호무다천황릉에 해당하는 오사까大阪 예전어묘산譽田御墓山에는 근구수대왕이 묻혀있다. 320년에 태어나 394년에 75세로 죽었다.
응신천황릉/ 근구수대왕릉이다.
응신천황릉/ 근구수대왕릉이다.
墳形 |
全長 |
後円部径 |
後円部高 |
前方部幅 |
前方部高 |
くびれ部幅 |
くびれ部高 |
年代 |
---|---|---|---|---|---|---|---|---|
前方後円墳 |
415 |
256 |
36 |
330 |
35 |
188 |
35 |
5世紀初頭 |
근구수왕자는 362년 성무천황을 물리치고 나서, 성무천황의 황비였던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만나 백제 본토로 데려갔다.
근구수왕자는 신공황후를 후비로 삼아서 아이부인阿爾夫人이라 부르고 성무천황의 군대를 빼앗아 신라 정벌에 동원하였다.
근구수왕자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막고, 371년 고구려 북쪽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371년 백제 근초고대왕은 지금의 평양 한산성 안학궁으로 천도하였고 374년에 붕어했다.
이후 근구수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는데,
383년에는 왜국에 건너가서 응신천황이 되었고, 대신에 원자인 침류대왕을 백제로 보내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은 394년에 74세로 왜국에서 서거하였다.
근구수대왕을 모셨던 신사로 추정되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있어서 구도신九度神과 팔번신八幡神,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을 모시는데, 팔번신은 곧 침류대왕이다. 근초고대왕을 모시는 히라노平野神社에서 근구수대왕은 구도신九度神이라 하였다.
구도신사의 기록에서 구도신을 거북이신이라고 하고 또 어주신이라고 하는데久度大神の「久度」は、「窖」の意味であり、御厨の神
이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에게 소어신(小御神=황태자)이 만들었다는 어주(御酒)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오오사까에는 백제 구수대왕의 후손이라는 3가의 신사가 있다.
오진大津신사와 가라쿠니辛國신사(엄밀하게는 진사왕의 신사다.), 국분國分신사다.
여기서 오진大津신사는 오진應神천황과 관련되니 바로 구수대왕이었다. 응신應神을 오진大津이라고 읽는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当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霊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일본의 수많은 팔번신사八幡神社는 응신천황으로 잘못 알려진 침류대왕을 기리는 곳이다. 팔기군과 비슷한 팔번군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스미요시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 스미요시 대신과와 신공황후의 사통私通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근구수대왕을 구수貴須라고 기록하였는데, 스미요시住吉 중의 뒷글자 길吉 한 글자 발음인 기사가 “貴地”와 같은 발음도 되거니와 吉을 기츠라고 읽을 수도 있다. 또 그 앞에 근(近; 큰-)을 구운炭의 의미로 적었다가 스미炭로 읽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구수대왕을 위한 신사는 스미炭궁이어야 하는데, 같은 발음으로서 스미궁隅宮이라고 기록되었다.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이 서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스미궁大隅宮은 본래 스미(炭, 隅) 요시(吉, 貴須), 즉 근구수대왕을 기린 궁이다.
근구수대왕을 모시는 주길대사. 원래는 백제 직할 일본 길비 주둔군 사령부였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부친인 오키나가노숙녜息長宿彌命(321~384)는 개화천황開化天皇, 즉 왜여왕 일여壹與의 후손이다.
오키나가노숙녜의 딸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命, 신공황후神功皇后는 혈통적으로 여제사장이 될 자격을 타고났다. 그녀의 기도에 답하고 그녀를 수호한 것이 결국 응신천황應神天皇,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신공여황 고분 내의 명문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조작된 [일본서기]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아비인 오키나가노숙녜(321~384)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라 타당하지 않고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이나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보다도 30여세나 많아서 그들의 황후가 될 수 없다. 신공황후의 조작된 연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신공황후의 숨겨진 본신本身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의 부인이 된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336~390)다. [일본서기]에서는 궁주택원宮主宅媛이라고 하였다.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이고 오키나가씨息長氏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의 히코마쓰日子坐王으로서 똑같다.
궁주宮主는 본래 후비后妃를 의미하는 고어다. 이미 왕에게 시집간 여자다. 즉, 성무천황의 후비 신공황후에 해당한다.
야가하에矢河枝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근구수대왕비 아이부인阿爾 夫人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신공황후는 남장을 하고 활팔찌를 차고 다녔는데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가 신공황후다.
응신천황이 일본에 와서 그녀를 만나고 미모를 치하하는 노래를 남겼다.
그 노래 중에 그녀의 뒷모습은 방패楯와 같다고 하였다. 後姿は 小楯ろかも
신공황후 고분의 이름이 방패楯이 들어간 “순열릉楯列陵”이다.
또한 아이부인阿爾夫人은 야가하에의 족성인 와니씨和邇氏를 의미한다. 와니씨는 우리 발음으로 와이가 된다.
362년경에, 성무천황의 황후로 간택된 26살의 오키나가타라시히메는 결혼후에 시가국으로 물러난 성무천황과 떨어져서 오사카의 본가에 돌아와 있었고, 그후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로 불린 것이다.
그녀는 성무천황의 대신이었던 타케우찌노숙녜建內宿禰(266~371)를 만나서 속죄의 방법을 물었는데, 362년에 근구수왕자近仇首王子가 일본으로 와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근구수대왕의 후손으로 백제 일본천황이 된 왕들은 아래와 같다.
근구수왕자-응신천황은 신공황후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하여 부인으로 삼았고,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비이자 침류대왕 모후로서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백제기]에 모후가 기록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온조대왕의 모후 소서노召西努와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그리고 아이부인 단 셋이다. 아이부인과 팔수부인은 일본 출신이라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는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를 만나서 따르게 된 것을 강신降神으로 기록해 놓았다.
신공황후는 성무천황이 가졌던 일본의 중심인 오사카大阪 대화大和의 영토를 다시 찾으려 하였으므로, 근구수왕자를 따라 백제로 가서 침류대왕枕流大王(363~422)을 임신하였다.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夏과 겨울冬,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후쿠오카의 우미신궁과 신궁에 걸린 신공황후도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과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宍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가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는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참조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禰가 백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男弟王은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의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367~396, 교정 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이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기록은 아래와 같다.
근구수왕(近仇首王)<또는 수(須)라고도 하였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고국원왕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쓰는 말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의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의 서북에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여 말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말발굽 같이 틈이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2년(376)에 왕의 장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겼다.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3년(377)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5년(379) 봄 3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
6년(380)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 장이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8년(382) 봄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왕이 나라의 곡식官穀을 내어 그것을 물러 주었다.
10년(384) 봄 2월에 해 무리暈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383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384년은 광개토왕비문이나 인물화상경으로 보아서 잘못된 것이다.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의 불상
12. 송나라를 세운 침류왕(재위 383)
침류왕(枕流王363~422)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爾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이부인은 신공황후다. 부왕은 일본 응신천황으로 돌아가고 침류왕은 백제왕으로 왔다. 이는 383년의 일이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83년 전진과 동진이 겨룬 비수대전에 백제군이 동진을 도와서 참전해 들어간 것이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라난타가 절을 세운 곳은 대동강 평양이다.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384년에 침류왕은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산동반도에 동청주를 세우고 요서에도 백제군을 세웠다.
삼한왕, 왜왕이던 침류왕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夏과 겨울冬,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후쿠오카의 우미신궁과 신궁에 걸린 신공황후도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과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宍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가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는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칠지도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奇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참조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
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禰가 백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男弟王은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의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367~396, 교정 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이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침류대왕 우치천황을 모시는 우치신사
여기서 우지노와케 석관에 기록된 367년에서 396년까지의 나이는 왜왕으로서의 재위 연대로 보면 맞는다.
성무천황이 천황위에서 쫓겨난 것이 362년이고, 그후 1년 뒤에 신공황후 몸에서 태어났으면 363년이 적정하다.
363년에 태어나서 367년에 칠지도를 받아서 왜왕으로 즉위하고 383년에 근구수대왕과 왜왕위를 바꾼 것이다.
또한 383년 계미년에는 즉위 16년을 맞아서 우전팔번인물화상경에서 왕16년이라고 기록했다. 즉 367년에 즉위한 것이되는데, 칠지도에서 기奇를 왜왕으로 임명한 해가 태화 4년으로서 367년이었다.
383년 이때가 침류대왕의 나이로는 20세였으니 약관弱冠의 나이를 맞아서 사마숙녜가 선물을 올린 것이다. 혹은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대왕으로 부임하게 되는 장도壯途에 오를 때에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383년에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응신천황이 되고 그 아들 왜왕기는 백제의 침류대왕이 되었다.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에 인용된 탁순왕卓淳王(=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발언이 중요하다. “갑자년 364년에 백제대왕이 탁순국왕에게 백제 사신,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등 3인을 보내어 왜국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구저한求氐韓, 막고성莫古城, 미추성彌鄒城 등의 백제 지명이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 기록의 구저, 미주, 막고 등 3인은 그 백제 삼성三城의 성주城主였을 것이며 그 위치는 현재 평양 이북이 되고, 각기 독자적인 가신家臣 군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간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대왕의 즉위전(369年) 기록 중에 고구려군을 격퇴시킨 근구수왕자의 측근 신하로서 막고해莫古解가 기록되어 있다.
탁순왕은 백제 사신 구저들을 억류하고, 신라로 압송하기까지 하였다.
신공황후의 신하 시마숙녜斯麻宿禰가 왜국으로부터 탁순국에 다다르니, 일이 그르쳐진 것을 알고, 시마숙녜는 그의 가신 니하야爾波移를 백제로 보내었고, 시마숙녜는 왜국으로 귀국하였다.
사마숙녜의 가신 니하야爾波移는 백제 근초고대왕의 선물로서 왜기왕 침류대왕자의 복식을 위한 오색 비단과 무기의 재료인 철재鐵才 40괴를 받아 돌아갔다.
한편 신라에 억류되었던 백제 사신 구저들은 다음해에 왜국에 도달하였다.
[삼국사기/신라기]에서는 364년경에 왜국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백제와 왜국은 366년경에 탁순국卓淳國(진해鎭海) 등 7국을 쳤다.
왜국장수와 백제장수 목라근자木羅斤子, 사사노궤沙沙奴跪 등은 비자호比自~(창녕昌寧),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 록국㖨國(거제도巨濟島), 안라安羅(함안咸安), 다라多羅(합천陜川), 탁순卓淳(진해鎭海), 가라加羅(고령高靈 대가야大伽倻) 등 7국을 쳐서 백제 속국으로 하였다.
이후 백제군이 전라도의 비리比利(완산完山=比斯伐), 벽중辟中(김제金堤), 포미지布彌支(보성寶城), 반고半古(반남潘南), 침미다례忱彌多禮(해남海南=침명浸溟)를 쳐서 백제 영토로 하였다. (윗 지도 참조)
탁순국卓淳國은 신라와 이웃에 붙어있었다. 탁순국은 임나연정에서 졸마국卒磨國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그 위치는 진해鎭海에 있었다.
탁卓의 고대발음이 타이여서 중모음 태로 바뀌어서 진해시의 태천만, 태동만, 왜성만으로 이름이 남았고, 현지에 태첩왜성도 남아있지만 그 북쪽 자마산 자마왜성도 탁순국의 근거지로 고려된다. 임나연정 10국에서 탁순국은 졸마국으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년 탁순국에 이른 백제인은 동해안의 함흥에서 동해 연안을 타고 배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서해안으로 일본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안라安羅는 아나(阿那; 安)가야라고 하였던 함안咸安이다. 다라多羅는 대가야大伽倻가 있던 합천이다. 남가라南加羅는 김해金海 금관가야다. 가라加羅는 불특정한 이름인데 위에서는 가야를 대표하는 고령高靈일 것이다. 록국(~國)의 록은 구록口彔으로 파자破字하여 거제도巨濟島로 추정된다. [위지왜인전]의 구사가야拘邪伽倻가 거제도인데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큐슈의 구사한국이 녹아도鹿兒島로 되었다. 그 본국인 "구사가라"는 구록국舊鹿國이 될 것인데, 앞의 구口와 뒤의 록彔을 합쳐서 록국이라고 나라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이 시대의 또다른 상황 기록으로, [일본서기]에서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중요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오년, 382년에 신라가 왜국에 조공하지 않으니, 왜국왕이 왜국 장수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치라고 했는데, 왜국 장수가 신라의 향응을 받고 가락국을 쳤다. 그러자 가락국왕이 왕자 등 가솔을 거느리고 백제로 망명하였고, 가락국의 공주는 백제로부터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사정하여, 왜왕은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다시 가락국에 파견하여 쫓겨났던 가락국왕을 복위시켰다.
백제에 속한 탁순국이 바로 금관가야 김해의 남쪽 진해이다. 금관가야는 항상 위태하였을 것이다. 진해에서 동쪽을 치면 신라 땅이 된다.
여기서 백제 장수인 목라근자를 왜국 땅에서 신하처럼 데리고 있다가 가락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왜왕은 바로 백제의 382년 당시 왜왕인 침류대왕인 것이다.
임오년은 백제 근구수대왕의 치세인데 당시 수도가 대동강 평양이라서 군대를 동원하기가 멀고, 이미 367년부터 왜국왕이던 아들 침류대왕에게 가락공주를 선물하면서 해결을 맡긴 것이고, 침류대왕은 즉시로 사지비궤를 파직하고 가야를 다시 세웠다.
383년 평양 한성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침류대왕은 중국의 북조, 전진前秦으로부터 참전을 요청받는다.
침류대왕(363~383)은 동생인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국으로 떠나는데 당시 아신대왕은 12살, 침류대왕은 21살이었다.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340~406)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현지에서는 갈성씨 고분으로 알려졌지만 아신대왕릉이다. 일본의 오카누케후타마왕이 아신대왕인 것은 계체천황이 무령대왕의 서형庶兄으로 증명되면서, 즉 개로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개로대왕의 고조할아버지이자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아신대왕이 와카누케후타마왕이 된다. 《일본서기》에서 아신왕을 아가왕阿花王이라고도 기록했다.
383년 11월에 중국의 남북조가 충돌한 역사적인 비수대전淝水大戰이 있었다.
남북통일을 노린 전진前秦의 부견황제符堅皇帝가 100만 대군으로 출병하였으나 비수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산동반도 쪽으로 상륙했던 백제군은 건절장군建節將軍 여암餘巖 형제가 인솔하였다.
비수대전 이후에 흩어지는 전진前秦의 부견황제로부터 슬며시 떨어져나와 독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려는 모용수慕容垂가 사방으로 군대를 모으니, 건절장군 여암 등이 백제 군대를 이끌고 자원하였다.
모용수는 고구려, 백제를 친 전연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며, 전연 말기에 전연을 배신하고 전진의 부견황제에게 귀의했고, 370년 전연국 수도 업성 함락으로 전연은 전진에게 몰락했다.
한편 모용수의 사위로 부여왕자 여울餘蔚이 있었는데 그는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백제를 쳐서 끌어간 부여왕 여현餘玄의 아들이다.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로 추정된다. 부여왕자 여울은 370년에 전진황제 부견에게 투항한 모용수를 도와서, 전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전연국 모용위의 수도 업성 성문을 몰래 열어서 전진국 군대를 업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전연국을 멸망시켰다.
부여왕 여현은 전연황제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었고, 그의 아들 부여왕자 여울은 후연황제 모용수의 사위가 되어서 후연의 재상이 되었다.
백제군 여암 형제는 이 부여왕자 여울을 통하여 후연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384년에 고구려 고국양대왕故國壤大王이 전연前燕이 차지했던 대릉하大凌河 하구의 요동遼東을 공략하였다.
그러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의 군대는 385년에 무읍으로부터 거병하여서 후연後燕이 차지했던 유주幽州(북경시北京市, 전연은 평주平州라고 불렀고 전연 시기에 3번째 수도였음)를 공략하여 탈취하고, 이어서 난하에 있던 영지성令支城(하북성河北省 천안遷安縣)과 전연의 2번째 수도였던 대릉하의 황룡성黃龍城(요녕성遼寧省 조양시朝陽市)를 차지한다. (윗지도 참조)
중국 사서에서 동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거해 자치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 385년 상황이다. 晉世 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385년 후연황제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農을 파견하여 백제가 빼앗은 영지성과 황룡성, 그리고 고구려가 점거했던 요동성을 수복한다.
그러나 북경은 389년에야 수복하는데, 이 4년동안 백제는 북경을 점거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와 그 아래에 13군郡 태수太守를 두었었다. 그때 유주자사를 지냈던 백제인이 바로 평양 덕흥리고분 주인공 진鎭이다.
광개토왕 시대인 408년에 평양시 덕흥리에 묻힌 유주자사幽州刺史 진묘鎭墓가 있다. 그의 고분에는 아래와 같은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군 신도현 도향경 감리 ○○郡 信都縣 都鄕敬 甘里
석가문불제자 ○○씨 진 사 釋加文佛弟子 ○○氏 鎭 仕
위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位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용양장군 요동태수 龍讓將軍 遼東太守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使 鎭
연 칠십칠 훙 언이 영락 십팔년 年 七十七 薨 焉以 永樂 十八年
태세재 무신 십이월 신유삭 太歲 在 戊申 十二月 辛酉朔
을유 성천 이옥궤 주공상지 乙酉 成遷 移玉櫃 周公相地
공자택일 문제선시--이하 생략 孔子擇日 文帝選時------下略
묘주인공 “진”이 유주자사를 지낼 때에 연군태수, 범양내사,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무명태수 등 13군태수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소재지까지 계현薊縣의 연국성燕國城(=전연국 중기 수도)으로 벽화에 기록되었고, 벽화 행렬도에는 전통적으로 유주자사 치소인 계현의 현령縣令도 등장한다.
그의 관직 기록 중 최상위에 고구려 국소대형 좌장군이 있어서 그가 말년에 고구려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유주의 관리로서 장사長史, 사마司馬 등을 임명하는 그림이 있는데, [양서梁書]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처음 장사長史를 두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진”이 죽은 408년까지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존재했어야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고구려 유주자사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광개토왕 시대 사건이라면 [광개토왕 비문]에 이 찬란한 업적이 반드시 기록되어야하는데, 고구려인이 적은 현실에는 비문에 그와 관련한 아무 기록이 없으므로 광개토왕 시대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둘째로 당시 중국의 사정을 보면 유주 북경北京에는 389년 4월 후연국의 모용성盛이 들어가 계성薊城(유주자사 치소, 한때 선비족 전연국의 수도였었으나 385년 2월 불탔다.)을 복원하고 지켰고 그후 유주는 401년경에 탁발씨의 북위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고구려와 별 인연이 없었다.
따라서 진이 유주자사를 지낸 것은 광개토왕 이전이고, 당시는 고구려인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고분 벽서에 감춰진 성은 백제 왕성인 부여씨가 된다.
그는 백제 장수였지만 말년에 대동강 평양에서 지내던 중 고구려가 백제의 평양을 함락하여 광개토호태왕의 신하가 되어 생을 마쳤다.
한편, 백제 본토에서는 384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신대왕을 폐위하고, 침류대왕의 서형庶兄인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이 즉위하였다.
침류대왕은 이 당시에 지금의 산동반도 래주萊州의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를 거쳐서, 지금의 청도시靑島市인 성양군城陽郡,
즉 당시의 동청주東淸州(훗날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로 책봉한 바가 있다.)에 진출했던 것이다.
한편 이 384년에, 중국 청주靑州에는 근본을 알기 어려운 장수 벽려혼辟閭渾이 점거하여 16년간 산동반도를 전부 지배했는데, 벽려혼 역시 백제 장수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타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처럼 크고 부유한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고도 스스로 칭제건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벽려는 “비류”와 똑같은 발음이다.
[신찬성씨록]에 백제국 벽류왕이 기록되어 있고, 出自百濟國避流王也 그 후예는 광정련廣井連인데 벽려혼의 도읍이 바로 청주 광고성廣固城이었다.
따라서 청주자사 벽려혼은 (벽려혼은 동진으로부터는 유주자사로 책봉받았다.) 침류대왕의 신하 장수였던 것이다.
399년에 후연에서 갈라진 남연南燕이 청주 광고성의 벽려혼을 물리치고 청주를 점령하여 411년까지 고작 12년간 산동반도를 지배했는데, 남연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에 들어간다.
남연에 비하여 벽려혼이 동진으로부터도 유주자사라는 책봉까지 받고, 산동반도를 완벽하게 16년간 다스렸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백제 침류대왕의 신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때 침류대왕이 당시 동청주東靑州인 산동반도 청도靑島에 백제대왕百濟大王으로서 출정나와 있었기에, 백제 본토 내부에서 진사대왕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고, 또 391년 광개토왕자가 백제 본토를 침탈하는 빌미를 주었다.
본토 진사대왕의 반란은 백제군의 분열을 가져와 침류대왕에게 엄청난 타격이 된다.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자는 만주의 백제 영토를 다 빼앗고 압록강 하구까지 육박해 내려온다.
391년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은 광개토대왕에게 패전하고, 급히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은 백제에 구원병을 보낸 대신에, 진사대왕을 잡아 일본으로 보내고, 근구수대왕의 아들 아신대왕을 다시 백제대왕으로 세운다.
[일본서기]에서 진사대왕이 왜군에게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菟宿彌,嘖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為王而歸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346~395)로 나온다.
대산수명이 곧 진사왕이라는 사실은 [고사기]에서 침류왕의 대산수명 살해장면 기록에서 나온다.
진사왕은 응신천황(=근구수대왕)이 그를 태자로 하지 않은 것에 항상 원망을 가졌고, 394년 응신천황 서거 이듬해에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을 죽이려고 준비했다가 미리 대비를 갖춘 침류대왕에게 죽는다.
침류대왕은 그와 물놀이하다가 배를 뒤집고 빠져나가서 진사대왕을 강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서 익사시킨다. 침류대왕은 일부러 대마로 된 가벼운 옷을 입었고 진사대왕은 무거운 갑옷을 숨기고 있었다.
대산수명이 죽어갈때 강에서 떠내려가며 이르른 곳이 가와라詞和羅였다. 강가에 올라갈 수 있게 제발 가라고 가라 가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가와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니 가와라로 인하여 그를 위한 가라신사辛國神社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가라신사에 진사대왕 후손의 족보가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능은 보잘 것 없이 초라하여 10m 내외의 봉분을 했으며 나라현에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침류대왕이 그를 죽인 곳이 고라考羅의 나루터였다. 여기서는 진사왕을 참수하지 못하고 익사시킨 것에 대해 한탄하는 침류대왕의 노래가 적혀있고 이때 부왕을 생각하여 같은 부왕의 자식인 진사왕을 베지 못하여 이를 재궁단梓弓檀이라는 나무에 비유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이니 역시 가라로 읽었을 것이고 가라신사辛國神社의 유래가 된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岡原連; 出自百濟國辰斯王子知宗也
진사대왕 후예의 일본 계보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귀수왕의 아들 진사왕의 아들 태아랑군의 아들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에서 3파로 갈라졌는데 모두 관야조신이 되었다.
百濟辰斯王後裔氏族の系譜
百濟貴須王→辰斯王(391년경 도래!)→太阿郎王→亥陽君→午定君より三腹に分枝
①味沙→白猪史→葛井連、宿禰→蕃良朝臣→菅野朝臣
②辰璽→船史→王後首→宮原宿禰、御船宿禰→菅野朝臣
③麻呂君→津史→津連→津宿禰、中科宿禰→菅野朝臣
이들이 모시는 신사가 하내국河内國 지기군志紀郡 후지이시藤井寺市藤井寺에 있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다.
394년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일본에서 서거하고 396년에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본토를 쳐서 백제 한산 수도가 있던 대동강 이북을 점령한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다. [만주지리풍속지] 기록에서 고구려 영락대왕이 이 396년 전쟁에서 처음 탈취한 일팔성이 압록강 북쪽 단동시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기록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이 백제로부터 뺏은 58성은 당시 백제를 알 수 있다. 이는 진사왕편에 나온다.
이때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서거한 394년부터 396년까지 일본은 3년간 천황 자리가 비어있었다.
명목상 우치천황, 즉 중국에 출정나간 침류대왕의 통치 시기다.
그는 장례식에 돌아와 우치천황으로서 3년상을 치르고 그동안에 진사대왕을 죽이고 다시 떠난 것이다.
396년 침류대왕은 응신천황의 장자이자, 침류대왕의 형왕인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에게 천황자리를 승계토록 조치한다.
인덕천황은 백제와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지원으로 피폐해진 일본 국민들에게 3년간 과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한편 침류대왕枕流大王은 396년 고구려의 백제 침략에 보복하기 위하여, 왜군을 총동원하여 399년에 신라를 쳤다. [광개토호태왕비문 9년]
이들 왜군 병사들은 이듬해 400년에야 고구려 군대에 쫓기게 되니 399년 내내 신라 도성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399년 7월에, 중국 산동반도에서는 선비족 남연南燕 황제 모용덕의 침략을 받아서 산동반도를 선비족에게 다 빼앗기고, 산동반도 청주를 지키던 백제장수 벽려혼은 외롭게 전사하였다.
애석하게도 침류대왕은 북경에 보냈던 건절장군 여암 형제의 백제 군대와 유주자사 부여진의 요서 백제 병력, 그리고 벽려혼의 산동 백제 병사를 거의 다 잃었다.
침류대왕은 산동의 벽려혼과 백제군을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399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이듬해 400년, 신라 땅에서는 인덕천황의 지휘로 신라에 나가 있던 왜군 병사들도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그리하여 광개토호태왕의 고구려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399년 가을 침류대왕은 중국 땅에 다시 들어가서 침류소석枕流漱石(=枕石漱流 개울물에 씻기는 돌을 베고 자는 은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 진출의 원대한 꿈이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조국 백제가 만주와 대동강 이북을 잃고서 백제 본토가 반 토막이 나버린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떠돌지 않았으니 100일도 지나지 않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5년만에 성공한다.
그해 399년 11월에 마침 오두미교주五斗米敎主 손은孫恩의 해적海賊들이 동진東晋 동해안을 왜구질하므로 동진은 황명으로 해적 토벌을 명령하였고, 12월에 동진東晋의 장수 유뢰지劉牢之가 손은을 토벌하기 위해 지원병을 모았다.
침류대왕은 그 유뢰지의 휘하에 응모應募하여, 참군사參軍事가 되는데, 유우劉裕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당시 참군사는 의병대장 같은 격이라서 정규 병력을 내주지 않았고, 그 휘하에 그를 따르던 수십명 가신, 친위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수십인을 가진 유유劉裕는 해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정찰 명령을 받고서 수행하다가 수천명의 손은孫恩 군대를 맞닥뜨렸는데 그대로 돌진하여 부수어버렸다.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는 363년생으로 칠지도에 나타난 왜왕기倭王奇와 같은 인물이었다. 유유의 아명은 바로 기노寄奴였다. [송서 본기]에는 유유劉裕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후손이라고 줄줄이 족보를 엮어서 기록했는데, 이는 조작이거나 남의 족보를 빌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동시대 북조北朝의 정사正史인 [위서魏書]에는 섬오랑캐島夷 유유劉裕의 출신 근본을 모른다고 기록했다.
유유는 본래 성姓이 다른데 유劉씨로 개성改姓했다고까지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본래 유劉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서魏書》에서 유유의 수식어가 섬오랑캐 도이島夷 유유劉裕다. 《위서열전도이전魏書列傳島夷傳》이 바로 송나라 고조 유유를 위한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해외 만황의 오랑캐 종족海外蠻荒的種族을 의미한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송나라 때 도이島夷에 대해서 백제에 속한 왜인으로 설명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왜국은 측천무후 때에 일본국으로 개명했다. 백제 남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산다. 백여 소국인데 이들이 양주揚州(동진의 수도)의 동쪽으로서 도이島夷라고 한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又倭國,武皇后改曰日本國,在百濟南,隔海依島而居,凡百餘小國.此皆揚州之東島夷也.按:東南之夷草服葛越,焦竹之屬,越即苧祁也.
도이島夷로 기록된 인물은 유유劉裕 외에 환현桓玄(369~404)과 남제南齊를 세운 소도성蕭道成 등이 있다. [구당서/천문지]에서 남쪽으로 월越을 지나면 도이만맥인島夷蠻貊之人이 산다고 했는데 도이島夷를 남만蠻과 예맥貊인들로 기록한 것이다.[원사/본기]에서 세조世祖 황제는 말하기를 일본은 멀리 고립된 도이島夷라고 했다. 帝以日本孤遠島夷. 그후 일본을 계속 도이島夷라고 불렀다.
북조의 정사인 《위서》에 의하면 유유는 36세까지 미투리, 즉 짚신을 만들어 팔 정도로 가난했고, 그런데 짚신장수 격에 맞지 않게 도박을 좋아하여 무려 3만전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399년 11월 동군장수 유뢰지가 손은孫恩 등의 해적들을 소탕할 병사를 모집할 때에, 유유가 찾아가서 자원하여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동해안의 해염海鹽에서 손은의 군대에게 대승하여 그날로 황당하게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승진하고, 겸하여 하비태수下邳太守가 되었다. 태수는 지방왕에 해당한다.
[북위서]에 나타난대로 363년부터 399년 12월까지, 태어나서 무려 36년 동안 오로지 중국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짚신을 만들어 팔고, 말도 안되게 3만전이나 빚을 진 거액 도박이나 하던 건달이었다면, 36세에 느닷없이 수십명의 정병精兵을 데리고 전장에 나타나서 일당천의 괴력적 무용을 선보이고, 수천명의 적을 물리치고 게다가 높은 학식이 필요한 하비군 태수(왕)까지 399년 12월 전투 한번으로 곧바로 임명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후로 단 5년만에 동진東晋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도 없다.
오로지 유유劉裕의 근본이 백제 침류대왕 왜기왕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유는 수십인을 데리고 정찰하다가 수천인의 적군을 만나 즉시로 공격하니, 따르던 부하들은 다 죽고 유유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적들이 절벽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유유는 분투하여 장검을 휘둘러서 몇명을 죽이고 다시 기어올라와서 고함치며 추격하니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유는 쫓아가서 계속 적들을 많이 죽였는데 본부의 유경선이 유유가 돌아오지 않으니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나서서, 유유가 수천인의 적을 홀로 추격하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여 부대로서 적들을 쳐서 대파하여 수천명의 적을 베었다. 使將數十人覘賊。遇賊數千人,即迎擊之,從者皆死,裕墜岸下。賊臨岸欲下,裕奮長刀仰斫殺數人,乃得登岸,仍大呼逐之,賊皆走,裕所殺傷甚眾。劉敬宣怪裕久不返,引兵尋之,見裕獨驅數千人,鹹共歎息。因進擊賊,大破之,斬獲千餘人”
침류대왕은 남연국 선비족의 땅이 된 산동반도에 급히 왔다가 선비군에 밀려서 동진 땅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침류대왕은 이름도 유유로 바꾸고, 방탕하다가 동진 장수 유뢰지의 진영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침류대왕은 중국식 이름인 유유劉裕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하여, 399년 12월 그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지 단 5년 2개월만에, 405년 1월, 동진의 수도를 강탈했던 환현桓玄의 난을 제압하였다. 유뢰지는 이미 환현에게 죽었고 도성에서 쫓겨났던 동진황제를 수도 건강建康에 복귀시키면서 동진의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겸 9주제군사九州諸軍事 겸 2주자사二州刺史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5년후, 선비족 남연국을 멸망시켜 청주를 되찾고 벽려혼의 복수를 한다.
또한 몇년후에는 후진後秦의 장안성도 함락시키고 동진의 강역을 역사상 최대로 넓힌다.
결국, 동진東晋 황제 공제恭帝의 딸을 부인으로 얻은 후에, 공제의 양위를 받아서 유유劉裕는 420년에 송나라를 개국하여 고조무황제高祖武皇帝가 된다. 아쉽게도 3년만인 422년에 60세로서 붕어하였다.
송고조 유유의 뒤를 이은 18세의 소제少帝는 장부인張夫人의 소생이었다.
황태후가 된 장부인은 이름을 궐闕이라 하였지만 [송서宋書]에서 조차도 장부인의 출생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비록 노비 출신이어도 중국 출신이면 기록에 남는데 장부인은 백제 여자라서 기록이 없는 것이다.
2대 황제인 소제少帝가 사치하여 궁궐에 호수를 만들고 배를 띄어서 그 안에서 향락을 즐길 때에, 성정이 지나치게 포악하다고 즉위 3년만인 424년에 신하들이 폐위하여 내쫓고, 동진 황제 공제의 딸이 유유에게 시집와서 낳은 문제文帝를 즉위시킨다.
외척이 전혀 없는 송나라 소제가 외척이 많은 송나라 문제에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때 황태후 장부인은 황제 소제를 폐하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문제를 황제로 세운 대궐안의 권력자였지만, 스스로 궁궐을 나가버려서 동해안 오군吳郡으로 갔다가 2년후 사라진다. 백제, 혹은 왜국으로 건너가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426년에 죽었다는 그녀의 나이조차 기록이 없고, 능도 만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으니 죽은 나이를 기록할 수 없고 능도 만들 수 없었고 문제는 찾지 않았다.
송나라에 유유가 등장한 이후로 왜국은 갑자기 중국과 끊어졌던 교류를 되살려나가니 이때 중국 역사에 왜국이 다시 상세하게 등장한다. 이때, 왜국의 왜5왕이 교류한 중국 땅은 [일본서기]에서 항상 오吳나라였다. 즉 장부인이 머물던 오군吳郡이 강좌江左의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왜5왕倭五王은 왜찬왕倭讚王, 왜진왕倭珍王, 왜제왕倭濟王, 왜흥왕倭興王, 왜무왕倭武王 이다. 또한 백제는 송나라 문제의 원가력元嘉曆을 받아들여 사용한다. 백제가 송나라 원가력을 받아들인 것은 송나라의 연방 국가가 되는 것이다.
전후좌우 정황은 송나라 고조가 왜기왕이고 우치천황이고 백제 침류대왕인데, 백제 장수 벽려혼이 중국 산동 청주에서 제왕이 되었어도 실패한 것이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지, 혹은 왜구질을 싫어하는 중국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어서인지, 침류대왕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족보로 혈통을 꾸며서 중국을 통치하고, 스스로 백제왕이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송나라를 자신의 후예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에 송나라와 맞서던 북위北魏에서는 그를 성姓을 바꾼 섬오랑캐 도이島夷라고 기록하여 진실을 실마리를 전해주니 침류대왕은 백제가 낳은 또 하나의 영웅이다.
12. 진사왕과 아신왕
진사왕(재위384~391)
진사왕(辰斯王, 346~395)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2년(386) 봄에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3년(387) 봄 정월에 진가모(眞嘉謨)를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389) 가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6년(390) 가을 7월에 살별이 북하(北河)에 나타났다.
9월에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도곤성(都坤城)은 함경남도 덕성군의 압파천(押波川)으로 고려된다. 주변은 고대 철산지이다.
왕이 진가모(眞嘉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7년(391) 봄 정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으며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특이한 화초를 길렀다.
여름 4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赤峴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아 맞혔다. 8월에 또 횡악(橫岳)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8년(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6월 7일이다. 0392 Jun 07 05:55 A 82 0.082 0.987 27.8N 90.0E 85 45 01m26s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구원(狗原)의 행궁은 평안북도 개천군价川郡으로 고려된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391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에 잡혀갔던 본국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은 <백제기>에서 석현성 등 10성이니 관미성은 그 남쪽이다. 석현성(石峴城)은 고이왕 때 중국 진출을 위해서 열병을 했던 석천(石川)과 관련된다. 즉 석천(石川)에 석현(石縣)이 있는 것이다.
신금시(新金市) 서남쪽에 석하진(石河鎭)이 있는데 석천으로 유력하다. 석하보성(石河堡城)이 있다.
그 석하(石河)를 따라 올라가면 온가구성(溫家溝城)이 나오는데 설인귀와 싸운 온사문의 석성(石城)으로 고려된다. 서북쪽에는 고대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는데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곳이 바로 횡산이고 온사문을 잡았다는 곳이 석성이다.
이 온가구 석성이 바로 백제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이 391년 석현등 10성의 공취는 미천왕 때 차지한 낙랑 땅인 요양시 패수로부터 남하하여서 신금시까지 요동반도 서해안을 거의 장악한 것이다.
관미성 공취는 석현성 공략 3개월 후에 이루어진다.
석현성등 5성을 탈환하기 위해 아신왕의 장수 진무가 관미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므로 관미성은 석현성의 남쪽이 된다. 또한 일곱길로 공격한 것은 석하보 서남쪽의 칠정산진(七頂山鎭) 칠정산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관미성은 바로 칠정산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사왕이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宿彌,?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王而歸
한편 윗글에 석천숙네가 나오는데 그의 고향 석현성을 수복하러 원정갔을 것이다. 또한 그가 일본 땅에도 석천현石川縣을 건설했을 것이다.
아신왕의 즉위 직후 관미성 탈환 작전은 이들 왜군의 연합작전이었으나 실패한 것이다.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략은 근초고왕 때에 요양시 패하(백제 북계)에서 매복 반격하고서 패수 평양성 공략으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바가 있다.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346~395)로 나온다.
대산수명이 곧 진사왕이라는 사실은 [고사기]에서 침류왕의 대산수명 살해장면 기록에서 나온다.
진사왕은 응신천황(=근구수대왕)이 그를 태자로 하지 않은 것에 항상 원망을 가졌고, 394년 응신천황 서거 이듬해에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을 죽이려고 준비했다가 미리 대비를 갖춘 침류대왕에게 죽는다.
침류대왕은 그와 물놀이하다가 배를 뒤집고 빠져나가서 진사대왕을 강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서 익사시킨다. 침류대왕은 일부러 대마로 된 가벼운 옷을 입었고 진사대왕은 무거운 갑옷을 숨기고 있었다.
대산수명이 죽어갈때 강에서 떠내려가며 이르른 곳이 가와라詞和羅였다. 강가에 올라갈 수 있게 제발 가라고 가라 가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가와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니 가와라로 인하여 그를 위한 가라신사辛國神社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가라신사에 진사대왕 후손의 족보가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능은 보잘 것 없이 초라하여 10m 내외의 봉분을 했으며 나라현에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침류대왕이 그를 죽인 곳이 고라考羅의 나루터였다. 여기서는 진사왕을 참수하지 못하고 익사시킨 것에 대해 한탄하는 침류대왕의 노래가 적혀있고 이때 부왕을 생각하여 같은 부왕의 자식인 진사왕을 베지 못하여 이를 재궁단梓弓檀이라는 나무에 비유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이니 역시 가라로 읽었을 것이고 가라신사辛國神社의 유래가 된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 岡原連; 出自百濟國辰斯王子知宗也
진사대왕 후예의 일본 계보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귀수왕의 아들 진사왕의 아들 태아랑군의 아들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에서 3파로 갈라졌는데 모두 관야조신이 되었다.
百濟辰斯王後裔氏族の系譜
百濟貴須王→辰斯王(391년경 도래!)→太阿?王→亥陽君→午定君より三腹に分枝
①味沙→白猪史→葛井連、宿?→蕃良朝臣→菅野朝臣
②辰璽→船史→王後首→宮原宿?、御船宿?→菅野朝臣
③麻呂君→津史→津連→津宿?、中科宿?→菅野朝臣
이들이 모시는 신사가 하내국河內國 지기군志紀郡 후지이시藤井寺市藤井寺에 있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다.
등정사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
아신왕(재위391~414)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340~406)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
현지에서는 갈성씨 고분으로 알려졌지만 아신대왕릉이다.
일본의 오카누케후타마왕이 아신대왕인 것은 계체천황이 무령대왕의 서형庶兄으로 증명되면서, 즉 개로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개로대왕의 고조할아버지이자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아신대왕이 와카누케후타마왕이 된다.
[일본서기]에서 아신왕을 아가왕阿花王이라고도 기록했다.
아신왕(阿莘王372~424)<혹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하였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漢城)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 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8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2년(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무(武)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전지(~支)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서제(庶弟) 홍(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함흥 남쪽 정평)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4년(395) 봄 2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는 [아리모려 묘지]에서도 보인다.
"광개토대왕은 때어나서 웅대하여 남벌백제하고 북벌거란하고 또한 왜구와 싸워 탕진시켜 대승을 거두고 귀환하였고 다시 패수에서 (백제를) 대패시켜 팔천을 사로잡고 돌아왔다." 廣開土地大王生而雄[偉] 南伐百殘 北伐契丹 又戰倭寇 蕩盡大勝而歸 又大戰 浿水大敗 賊虜獲八千餘級而還
위 묘지에서 남벌백제는 391년, 북벌거란은 395년, 왜구와의 싸움은 394년 동해안 함흥 정평에서 있었던 수곡성 싸움, 그리고 패수전은 395년 가을8월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평안북도 희천군) 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軍)을 돌려 한산성(漢山城; 평양시 왕성탄)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이 직후에 광개토왕이 쳐내려왔다. 이는 광태토왕비문의 396년 전쟁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성은 아래와 같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 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58성을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1)壹八城 2)臼模盧城 3)若模盧城 4)幹弓利城 5)○○城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
(지도는 아래 보충설명에 있습니다.)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팔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온조 한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백잔남거한성이라고도 한다.
이어지는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항복하고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이때 아신왕은 한산성에서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아신왕은 이후에 고구려와 새로운 국경이 된 한수, 즉 대동강을 맞대고 있는 한성에 도읍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다.
[일본서기]에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원이라고 한다.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의 여인이라는 뜻)은 일본에 가서 천황의 비가 되었다. 따라서 신제도新濟都는 백제의 새도읍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때 아신왕의 임시 수도는 황해도 토산군 북포리로 고려된다.
토산군도 본래 도산(都山)을 의미이고, 물건너 동쪽의 강원도 철원군 안협현이다.
안협현의 옛이름은 아진압현(阿珍押縣)이다. 이는 신라장수 아진함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진함은 672년 당나라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667년에 아진함성이 등장하므로 이때 신라가 진입했던 것이다. 안나함이라고도 하였다.
안협현은 궁악현이라고 하였는데 궁악(窮岳)은 궁산(宮山)을 의미한다.
토산군 북포리가 성터이다. 물이름은 동대천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대천의 서쪽이 주인 성이다. 안협 만경산성이 더 중요하면 동대천이 아니라 서대천이어야 한다.
본래 임진강인데 그 상류는 고미탄천이라고 하였다. 즉 고마성이 있던 곳이다. 아래 삭녕군의 물이름은 금강(錦江)이라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 거성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데 거발성과 관련될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반정천황의 부인이 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新濟都)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신제도가 고마성이다.
북포리의 고성터는 강물이 감아 도는데 중간에 강물을 잘라서 참호를 만들었다. 북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중간에 대로가 있다.
대로의 동서 길이는 2000m 정도이며 그 안에 평지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동성왕이 임류각에서 놀면서 성문을 닫아 버리는 일이 있는데 이는 남성을 닫아 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서쪽 기달산(=고애주산)에 북소궁(北蘇宮)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궁궐 유기가 있다고 하였다.
소부리성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되니 고마성시대 사비성이라고도 하며 동성왕이 사냥하던 곳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북소궁 위치를 고도(孤島)라고도 하였고 지금 지명은 왕당리, 성내리다.
서북쪽 수안군에 새로운 위례성이 생겨난다. 제2 위례성이다.
위라진이 남아있고 위라천은 위례성천의 전음이다. 훗날 성왕 시대에는 충청남도 직산에 위례성이 세번째로 생겨났다.
서쪽은 부여성(사정성)이 생겨난다.
토산군 우봉현 위치에 우두성이 생겨났다.
북쪽에 사현성을 지었다. 새로 지은 왕궁이 있었는지 궁암면이라고도 하였다.
남쪽은 태백산성(대곡성)이 생겨나서 호위하였다. 다지성이라고 하였고 일본 반정천황이 태어난 곳이다.
남쪽 태백산성, 충청남도 사비성인 부소산성과 배치가 매우 유사하다.
그외 서쪽의 오곡성이 오관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자비령 동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백제 아신왕이 임시로 후퇴한 수도 아신한성은 임진강에 있었고 예성강은 주요 방어선이었다.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琠支)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에 한수, 즉 대동강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397년에 백제는 다시 대동강 남쪽에서 영토 수복 전쟁을 시도하였다.
7년(398) 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아신왕 7년(398년)에도 쌍현성을 쌓고, 개로왕 때에 쌍현성을 수리한 적이 있었다.
무령왕 때에는 한북의 주군민이 새로 쌓았으므로 한수, 즉 대동강 북쪽이다.
다루왕 4년에 횡악 아래서 쌍록을 잡은 일이 있다. 지금의 쌍아산(雙娥山)인데 백제 쌍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쌍아산이 있는 함종현은 아산현(牙山縣)이라고도 하였는데 쌍아산의 모양이 두 개의 상아, 혹은 두 개의 물고기가 뻗어나온 산의 모양이다. 쌍아산에는 남쪽의 내성과 북쪽의 산성이 보이는데 각각 책계왕이 쌓은 것과 무령왕이 쌓은 두 개의 쌍현성으로 고려된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곧 중지하였다. 9월에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쪽 돈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8년(399)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전역(戰役)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니 호구가 줄었다.
이때 백제와 왜국 연합군은 신라 수도 금성을 포위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399년에 일이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동황성)에서 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 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이때 광개토왕은 왕자 고진을 보내어 대마도를 거점으로 임나일본부까지 만들었다. 왕자 고진은 417년에 시코쿠에서 인덕천황을 죽이고 432년에 오사카로 들어가서 윤공천황으로 등극한다.
고구려 임나일본부 지도
9년(400) 봄 2월에 살별이 규(奎)와 루(婁) 별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7월 8일이다. 0400 Jul 08 03:24 T 91 0.414 1.050 47.4N 130.1E 65 183 04m00s
11년(402)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서 말랐다.
왕이 친히 횡악(橫岳)에서 제사지냈더니 곧 비가 왔다.
399년의 백제 왜 연합 수복 전쟁에서 백제는 대동강 이북을 일부 회복하였던 것이다.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12년(403)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404년에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 왕당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대방계가 요동반도 서남해안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적어도 압록강까지는 백제가 수복했다고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심양 서북쪽의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대를 많이 잃었고 패전 책임으로 아신왕은 다시 퇴위하고 일본으로 갔다.
14년(405) 봄 3월에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匹練과 같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384년 진사왕의 반란 때에 퇴위하고 404년 패전으로 인하여 두 번째로 퇴위하고 일본으로 가서 424년에 죽었다.
옥부산屋敷山 고분에 묻혀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곤은 관과 고대모음 "아래아"로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백제 팔곤성을 고구려에서는 곤팔성이라고 고쳐불렀는데 역시 백제 관방인 팔일성도 일팔성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관방이나 국경에 팔八자가 들어가는 일이 많다. 팔령, 팔령천 등이 그렇다.
따라서 일팔성은 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봉황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고향이라고도 전하는데 연개소문에 이르러 현재 규모로 커졌을 것이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岫巖縣 동북쪽 황화전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 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 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애하 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 둘레는 11600척(4000m)이고,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간궁산,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이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鳥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으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대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평안남도 성천 홀골성)을 수리하고, 사성(동해안 정평군 세류고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 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 둘레는 3만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 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운전군 목우산(牧牛山,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 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館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17번) 무명성頁○은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어체에서 수首를 대신한다.
1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군(龜城郡) 북쪽 굴룡산 산성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50척이었다.
1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龜城)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1만2335척이다.
20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고성退羅山古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1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22번) 무명성○○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2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25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주둔한 마읍산馬邑山도 이곳이다. 고려 때에 안술진安戌鎭, 혹은 安仁鎭이라고 쌓은 해변토성海邊土城의 위치로 보며, 당시에 성 둘레가 2490척이다.
26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7번) 무명성()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 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28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29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 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30번) 대산한성大山韓城은 백제 국성이었던 대동강의 북한산성 안학궁이다.
31번 이하는 대산한성 안학궁이 함락되면서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서 항복해서 얻은 성들일 것이다.
31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 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32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대성산성 동북쪽 산사면에 대성산성과는 다른 토성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토성 둘레는 5160척이라고 하였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3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5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이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6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Km이다.
37번) 무명성○婁城은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38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9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40번) 우루성于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于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于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1번) 소○성蘇○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 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함종咸從은 비류의 백성들이 비류가 죽고 온조 땅에 건너올 때 낙종樂從했다는 백제 건국기의 기록과 관련될 것으로 본다.
42번) 연루성燕婁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어을동토성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 둘레 6620m의 대성이다.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 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3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 둘레는 4630척이다.
44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5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6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7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0번) 취추성就鄒城은 알 수 없다.
51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2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알 수 없다.
53번) 윤노성閏奴城은 알 수 없다.
54번) 관노성貫奴城은 압록강 북쪽 관전현(寬甸縣)으로 추정된다.
55번) 삼양성三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동으로 추정된다.
56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 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래서 미성이었을 수 있다.
57번) 무명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고무주성(古撫州城)으로 추정된다. 토성으로 성둘레는 5947척이다. 영변군에는 단군시대 모한(慕韓)이 있었다.
58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 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 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대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13. 전지왕과 구이신왕
전지왕(재위405~427)
전지왕(琠支王)<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은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하였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爾辛)을 낳았다.
2년(406) 봄 정월에 왕이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으며,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해충(解忠)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漢城)의 조(租) 1천 섬을 주었다.
전지왕의 한성은 신제도였으므로 아신왕성인 임진강 고마성이다.
3년(407) 봄 2월에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았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으로 삼았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
407년에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보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가야을 쳤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 합전하여...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佳城,○○○,○○○,나○성 등을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那○城.
이때 408년에 백제 유주자사를 지낸 부여진이 죽어서 평양 덕흥리에 묻힌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 관직을 받았고 영락 연호를 사용했으니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 왕족이다.
4년(408) 봄 정월에 여신(餘信)을 상좌평(上佐平)으로 삼고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의 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고려의 총재와 같았다.
5년(409)에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夜明珠)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11년(415) 여름 5월 갑신에 살별彗星이 나타났다.
12년(416)에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13년(417) 봄 정월 초하루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2월 3일이다. 0417 Feb 03 00:17 A 76 0.441 0.927 9.5N 174.9E 64 303 09m59s
여름 4월에 가물어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에 동부(東部)와 북부(北部) 두 부(部)의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는데 병관좌평 해구(解丘)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사구성(沙口城)은 407년에 고구려군에게 함락당한 沙溝城과 같은 것으로 본다. 동부인을 동원하였으니 동해안으로 고려된다.
14년(418)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열 필(匹)을 보냈다.
15년(419) 봄 정월 무술에 살별이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12월 3일이다.0419 Dec 03 02:29 P 68 1.155 0.715 64.2N 172.6E 0
16년(420)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전지총 고분 기록에 의하면 391년에 태어나~432년까지 살았다.
일본의 기록을 보면 404년에 일본에 있던 전지왕자가 백제로 복귀하여 전지대왕이 되었다.
이때 동한東韓(원산元山 추정)의 지배권을 전지왕자에게 주었고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학문을 가르치러 왔다.
역시 404년에 백제로부터 진한秦韓의 후예인 궁월군弓月君이 인솔했던 120현민縣民을 데리고 왔다.
진한秦韓은 만주 요하遼河 하구에 있었고, 고구려의 점령 때문에 404년에 만주에서 피난해온 백제인들이다.
응신39년 427년에 백제 전지대왕?支大王은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 즉 황해도 평산의 대곡 한성의 여인이라는 뜻)을 천황에게 보냈다고 기록했다.
한편 404년 즉위한 백제 전지대왕?支大王(391~432)은 일본에서 대랑자大郞子 혹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라고 하였다.
의부부저왕이 아신대왕의 아들이자 계체천황의 증조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전지대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지대왕의 일본인 후예는 삼국군三國君, 파다군波多君, 식장판군息長坂君, 주인군酒人君, 산도군山道君, 축자미다군筑紫米多君, 포세군布勢君 등이 있다. 그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임련林連도 전지대왕의 후손이다.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의 이름 뜻은 앞의 의부意富가 크다는 뜻의 대大를 나타내며 뒤의 부저富杵는 우리말로 보시布施 혹은 부처다. 그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생전에 보시를 많이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전지대왕 대신에 직지왕直支王이라고도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일본에 세운 절 이름인 치은사置恩寺와도 관련되고 직지直旨라는 불교 용어도 있다.
갈성葛城의 치은사는 의왕산醫王山, 혹은 포시산布施山이라고 부르던 곳에 있으며 치은사는 포시씨布施氏(전지대왕의 후예인 포세군布勢君과 동일)에 의하여 현재까지 1600년간 관리되어 전해내려왔다.
치은사
치은사 북쪽에 있는 이총고분二塚古墳이 바로 전지대왕의 고분이다. 전장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며 현지에서 별명이 전취총?取塚이다.
전지대왕의 이름이 붙어서 전지총?取塚으로 아직도 고분 주인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 아무도 그 전지총의 유래를 모른다. 하지만 고분의 묘비문에 나타난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 백제 전지대왕이라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바 없으며, 비유대왕의 부왕이고 개로대왕의 조부이며 계체천황의 증조부가 된다.
전지총/ 전방후원고분이다.
포시산 성터
불교에 심취한 전지대왕은 왕비 팔수부인이 바람이 나서 왕권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삼국사기]에서는 419년에 전지대왕이 물러나고, 구이신왕久爾辛王이 즉위하였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419년경에 백제 장수인 목만치木滿致(木?滿致)가 백제의 국정을 어지럽혔다.
목만치는 382년 왜국에 있던 침류대왕의 신하로서 신라를 쳤던 목라근자木羅斤子의 아들이다.
목만치는 전지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八須夫人과 통정通情까지 하였다.
이에 423년경에 왜찬왕, 반정천황이 목만치를 왜국으로 소환하여 백제의 혁명적 사태를 수습하였다.
구이신왕은 도주하였는데 웅략 11년(469년)에 백제에서 도망쳐온 귀신貴信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전지왕은 [삼국사기]와 다르게 419년에 죽지 않고, 423년경에 백제왕위에 복위復位하였다.
[송서宋書]의 424, 425년조에 전지대왕이 아직 살아서 백제대왕으로서 중국과 친서親書를 교환하고 있으니 복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따라서 427년에 전지대왕이 왜찬왕, 즉 반정천황에게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을 시집보낼 수 있었다.
425년에는 침류대왕의 아들인 송나라 문제로부터 백제왕이자 진동대장군으로 승진 책명을 받았다.
같은해 왜찬왕倭讚王은 오히려 한 급 아래인 안동장군을 책명받았다.
427년에 비유대왕毗有大王(412~465)이 15세로 즉위하였다.
구이신왕(재위419~423)
구이신왕(久爾辛王)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8년(427)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15. 일본을 탈환한 개로왕(재위 455~475)
개로왕(429~475)은 <삼국사기>와 달리 위대한 백제 왕이었다.
고구려에 빼앗겼던 일본을 다시 백제계로 통일한 왜제왕(倭濟王)이었고
중국에도 진출하여 백제의 거점을 양자강 북쪽에 확보하였다.
개로왕의 일본정벌
438년 7월에 백제계 반정천황反正天皇이 교토 북쪽 미야쯔宮津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백제 비유대왕의 태자 개로왕자蓋鹵王子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개로대왕은 스스로 왜제왕倭濟王이라고 칭하면서 일본 왜왕으로 즉위하였다.
반정천황과 개로왕의 궁터는 해부씨(海部氏)들의 신사인 농신사(籠神社)로 고려된다.
미야쯔시 농신사
개로왕자의 왜제왕 재위시에 [삼국사기]를 보면 눌지왕 때인 444년에 신라 경주를 포위한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개로왕자 왜제왕은 일본 동북방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할 때에 후쿠이현福井縣에 있었으며 여기서 계체천황을 낳았다.
[계체천황기]에 계체천황의 부왕이 그곳 후쿠이현 삼미국三尾國 별업別業에서 진부인振夫人의 미색을 전해 듣고 초대하여 계체천황을 낳았다. 그후 버림받은 진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체천황을 길렀다. 진부인振比賣(434~485)의 고분에 쓰인 석곽은 배 모양(舟形) 석곽으로서 매우 크고 특이한데 후쿠이현의 족우산足羽山 산정고분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서 개로대왕은 여자를 많이 밝혀서 도미都彌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신하인 도미를 괴롭혔다. [삼국사기]에서 도미부인 이야기에서는 도미 부인이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도미가 화를 입고 눈이 뽑혀서 배를 타고 떠났고, 도미 부인도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갔다가 고구려로 갔는데 이 천성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알 수 없는 지명이라고 했다. 천성도泉城島는 바로 오사카에 있는 지명이며. 고구려계 일본천황인 웅략천황의 고분이 바로 천성도에 있으니 당시 웅략천황의 수도였다.
[일본서기/웅략천황기] 7년의 기사에서 예의 도미부인은 다사田狹라는 장수의 부인이었는데 다사의 부인 자랑으로 그 미모가 알려졌다. 천황이 듣고 다사를 대마도의 관리인 임나국사로 보내고 부인을 뺐었다. 이 천황은 웅략이 아니라 왜제왕인 개로왕이다.
단, 임나국사 문제에 있어서, 실제 상황은 왜제왕인 개로대왕이 다사田狹에게 오사카의 고구려를 치라는 것인데, 다사가 오사카 천성도에 가다가 개로대왕이 자기 부인을 뺏었다는 만행 소식을 듣고 고구려에 귀순하고, 천성도의 고구려계 웅략천황으로부터 신라땅인 대마도의 관리로 임명된 것이다.
즉 개로대왕의 도미부인 이야기는 [웅략천황기]의 다사 부인과 똑같은 인물의 이야기다. [웅략천황기]에는 이렇게 개로대왕의 이야기가 웅략천황의 이야기처럼 변조되어 실려있다. 개로대왕은 엄청난 정력가였던 것 같고, 변강쇠라고도 일컬어지는 가루지기전은 개로대왕의 이름자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으로 고려된다. 가루지기전의 상대인 옹녀도 개로대왕의 백제 수도였던 평양 출생이다. 개로나 가루는 칼의 고어 발음이다.
이어지는 [웅략천황기]기사에서 451년 개로대왕의 큐슈정벌이 나온다. 이는 [안강천황기]에 있는데 결론은 백제의 큐슈 남부 일부 회복이었다. 광개토왕의 400년 대마도 정벌로 인해서 큐수가 임나일본부가 되어서 고구려계로 넘어갔었다.
이 때 왜제왕의 일본 북부 회복의 공적이 송나라에 보고되니, 송나라는 451년에 왜제왕에게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책명을 내려주었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 계체천황의 계보가 나오는데, 응신천황의 아들로서 아신왕과 전지왕이 있고, 그중 전지왕이 비유왕과 개로왕을 낳았다.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왕의 아들이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의 아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의 아들 계체천황인데 [일본석기]와 서로 다르다.
개로대왕의 어머니는 모의도국조牟義都國造인 이사모라군왕伊斯牟良의 딸인 구류히메久留比賣命라고 하였다. 모의도국은 황해도 예성강의 우잠군牛岑郡에 해당하고, 이사모라는 이천伊川에 해당하니, 지금 지명은 금천군金川郡 우봉면牛峰面이고, 이사모라는 그 동북쪽 지금의 이천군伊川郡을 말하는데 토산군도 포함된다. 고구려 이진매현伊珍買縣이었고 토산군에 속했었다. 토산군의 서쪽에 예성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임진강臨津江이 흐른다. 임진강이 고대 이천伊川이었다.
개로대왕이 고구려 장수대왕에 의해 비명횡사하였는데, 일본에서 개로대왕릉을 만들었다. 인릉忍陵이라고 하는데, 오사카大阪府 사조철시四條?市에서 발굴되었다. 전장 87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묘비에 429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죽은 것은 458년인데 이 해가 웅략천황을 굴복시키고 다시 백제로 돌아간 해이다.
인릉신사
한편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기사년己巳年(429년) 개로왕의 즉위 때에 미녀를 청하여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適稽女郞을 데려왔다고 하였다.427년은 비유대왕이 백제대왕이 되었고 개로왕은 429년생이니 기사년은 도무지 틀린 것이고 기묘년己卯年 439년으로 교정해서 보면 왜찬왕 반정천황의 서거 다음 해이므로, 왜제왕倭濟王인 개로대왕의 왜왕 즉위년도가 된다. 왜제왕은 443년에 중국 송나라로 사자를 보냈다.
왜제왕이 개로대왕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뒤에 밝혀지는 왜무왕倭武王(462~523)이 시마왕斯麻王, 즉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인데, 그가 일본에서 왜무왕 자격으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증거가 들어있다. 국서 중에서 자신의 부왕이 개로대왕인데 이를 왜 제濟왕이라고 기록하였고, 동시에 475년 고구려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의 죽음을 奄喪 父兄, 부왕과 형들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즉 왜제왕이 개로대왕과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宋書》 臣亡考 濟……奄喪 父兄……申父兄之志……
개로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나와있다.
自昔祖?,躬?甲?,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즉 개로대왕 때에 동정을 통해서 후쿠이현으로부터 일본 동북부의 모인국 55국을 정벌하고, 중이衆夷 66국을 정벌하고, 해북海北 95국을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중이는 중국을 말한다.
451년에 왜제왕倭濟王인 개로왕자는 미야쯔시宮津市로부터 큐슈의 안라일본부를 정벌하였다. [웅략천황기] 9년 기사인데, 고구려 윤공천황은 신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사카의 고구려 왜국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고구려를 배반했던 신라인 안강천황의 큐슈임나일본부를 차마 처벌할 수가 없었다. 즉 [웅략천황기] 9년에 천황, 즉 왜제왕인 개로왕자가 큐슈를 친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 개로왕의 신하들이 친정을 말리고 4인의 장수가 나섰는데, 장수 이름이 기소궁숙녜紀小弓宿?、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대반담련大伴談連、소록화숙녜小鹿火宿? 등이었으니 모두 백제 신하들인 것이다.
천황(왜제왕)은 말하기를 “신라가 신하로서 조공을 위반하고 몸이 대마도 밖까지 나와서 쥐새끼같은 발자국을 잡라?羅에까지 드러내고 백제의 성을 뺏었으니...천벌을 가하라!”는 것이다. 新羅自居西土,累葉稱臣,朝聘無違,貢職允濟.逮乎朕之王天下,投身對馬之外,竄跡?羅之表,阻高麗之貢,?百濟之城.況復朝聘?闕,貢職莫脩.狼子野心飽飛,飢附.以汝四卿,拜?大將.宜以王師薄伐,天罰?行
큐슈 정벌 사유에 신라가 백제의 성을 뺏은 것이 들었으니, 이 교지를 내린 사람은 고구려계 윤공천황이나 웅략천황이 아니라 일본 북부의 왜제왕인 백제계 왜제왕, 즉 개로왕자인 것이 확실하다.
이때 451년에 신라 본토가 왜국에게 피침당한 기록은 [삼국사기/신라기]에 당연히 없다.
위 글에서 대마도 밖에 있던 잡라는 큐슈의 다라국多羅國, 안라국安羅國을 통칭한다. 큐슈의 구마모토 북부 구루메시久留米市에 다라국이 있었고 안라국은 그 남쪽 녹천綠川의 일성군溢城郡에 있었고, 김무의 아나호국穴穗國은 후쿠오카 서부 사와라구에 있었다.
451년 왜제왕인 개로왕자의 4인의 장수들은 신라 큐슈의 여러 군을 약탈하고, 깊숙히 들어가서 녹지?地까지 점령하였다.
녹국?國은 본래 한반도 거제도의 구사가야狗邪伽倻지만, 이 글의 녹지?地는 큐슈에 세운 구록口?(=?), 즉 구려句麗, 고구려를 의미하며, 구마모토시 남쪽 녹천綠川의 익성益城과 관련된다. 익성은 윤공천황 아들들의 일성溢城, 즉 이리성이었고 아소산을 낀 안라국지였다. 이때 개로왕자의 정벌에서 신라왕 김무는 녹지에서 겨우 살아서 도망하였다. 안라라국왕이라고도 했던 아나호왕 김무가 패주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큐슈의 병사들이 깊숙이 진격한 왜제왕의 4인의 장수를 다 물리쳤다. 4인의 장수 중에 두 명이 죽고 일부 땅을 뺏었다.
[웅략천황기]에서는 이때 백제왕(바로 일본에 있던 개로대왕이다.)이 패전하고, 살아남은 장수들을 불러서 장수들의 불화를 풀어주려고 장수들의 봉지를 확인해서 보여주겠으니 돌아오라고 했다.
於是, 百濟王 聞日本諸將 緣小事有隙, 欲觀國界. 請(=命의 조작)垂降臨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에 큐슈에서 전사한 기소궁숙녜紀小弓宿?의 아들인 기대반숙녜紀大磐宿?는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를 죽였다. 결국 개로왕자, 왜제왕의 큐슈 탈환은 거의 실패하였다.
신라왕자 김무가 안라일본부의 왕으로서 입장이 모호한 이때에 마침 453년 1월 윤공천황이 독살되었다.
[윤공천황기] 24년 기록에 천황의 국물이 응어리졌다고 하였다. 御膳羹汁凝以作?
윤공천황이 먹는 국물 속에 독이 들었던 것이다.
453년 1월 윤공천황이 죽자, 신라에서는 80척의 선단으로 조문사를 파견하였다. 신라에서 천황 조문사를 보내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들은 대마도에서부터 곡哭을 하였고, 큐슈에서도 곡을 하였고 오사카의 난파항에 도착할 때는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복 작전은 철저한 위장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윤공천황의 태자인 목리경태자를 습격한 것이다. 이때 목리경태자의 군대는 카루-화살輕括箭이라는 구리촉의 화살을 사용했고 신라인들의 조문 대표인 안강천황은 아나호화살穴穗括箭을 사용했는데 철촉이었고 이후로 일본에서는 아나호화살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의 김무 왕자는 제위 찬탈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한 것이었다.
목리경태자는 김무 왕자의 조문 위장 습격을 당하여 신하의 집으로 숨었으나 김무 왕자는 추격하여 포위하였다.《고사기》에서 당시 안강천황은 우박이 떨어질 때에 신하의 집에 도착하여 말했다.
“숙녜宿?들아, 가나金가 바다 건너 왔다”
須久泥賀, 加那 斗加宜...하략下略
(須久泥=宿?) (加那=金) (斗加宜=渡海)
두가이斗加宜는 도해渡海의 발음과 똑같다.
그러자 목리경태자를 보호하던 신하가 나와서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서 몸짓?으로 가나詞那에게 뜻을 전했다.
擧手打膝 “? 詞那(金) 傳” ....하략下略
신하들은 다음날 안강천황에게 투항하였다. 목리경태자를 죽였는지 고구려로 보냈는지는 알수 없는데 의통랑희가 먼저 떠났던 시코쿠四國島의 아이메현愛媛?松山市?原에 있는 카루노신사輕之神社의 전설에는 목리경태자와 의통랑희가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신라의 조문사는 대화에 무려 10개월을 머물렀다. 일본내 고구려계 도읍지에서 신라인 안강천황의 보위 승계 임무와 호위를 마치고, 10개월 후에 80척의 신라군이 돌아가면서 우네미산畝傍山(일본 천황 고분이 많이 있는 곳)에 들려서 새 소리를 듣고 노래를 하였다.
“우니미-하야, 미미-하야 / 宇泥?-巴椰, 彌彌-巴椰”
우는 소리가 참 좋다! 귀에(耳耳=彌彌) (듣기) 좋다!巴椰(=好也)는 뜻이다.
윤공천황 아들인 웅략천황이 이 노래를 듣고 이들 신라인을 잡아다가 황실의 우네미采女를 몰래 건드리지 않았냐고 시비하여 고문하고 돌려보냈다.
안강천황은 신라 군대의 호위 없이 왜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오오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408~454)를 죽이고 부인을 빼앗아 황후로 세웠다.
오오쿠사카 황자는 인덕천황의 막내아들이었고, 그의 부인은 윤공천황의 장녀로서 오사다노오이라쓰메長田大郞皇女(418~462)였다.
또 죽은 오오쿠사카 황자의 딸은 웅략천황에게 시집보냈다. 윤공천황의 장녀를 김무의 황후로 세운 것은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과 윤공천황 신하들의 지지가 김무 왕권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강천황은 바로 그 오오쿠사카 왕자의 어린 아들에 의해 3년만에 암살당했다.
신라인 안강천황의 후예는 공왕부수孔王部首라 하였는데 그 뒤는 알 수 없다.
[신찬성씨록] 孔王部首 穴?天皇《謚安康》之後也
그러나 안강천황의 동생이 미에현三重縣에 남아있었다.
[신찬성시록]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그리고 큐슈 사와라의 김무성金武城에 그 후손들이 전해져왔다.
윤공천황의 시노산市野山 고분은 230m의 전방후원릉이고, 안강천황의 고분은 모호한 상태이나 제사는 봉래신사蓬萊神社에 모셔져 있다. 안강천황 묘비는 최근에 사이다마현埼玉縣 관원고성菅原古城에서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 주인을 알수 없던 330m 길이의 하내대총산河?大塚山 고분에서 윤공천황의 묘지문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내대총산 고분이 본래 윤공천황릉이 되고, 이제까지 윤공천황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안강천황릉으로 고려된다. 현재 윤공천황릉은 시노산市野山고분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읽으면 시야산 고분이고 신라산이 되니 이는 신라 눌지왕의 왕자 김무 안강천황 신라산 고분이 합당하다.
457년, 개로대왕 때에 중국 송나라에 보내졌던 백제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이 있다.
청령천황이 된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와 동일인물로 고려된다. 453년, 개로대왕의 백제대왕 즉위 직후에 좌현왕, 우현왕 등이 이미 존재하는데 여기서 좌현왕은 일본을, 우현왕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하는 대백제 연합체제로 추정된다.
왜제왕倭濟王(443~458), 개로대왕蓋盧大王(456~475)은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했는데 중국에도 백제 영역을 넓혀나갔다.
458년 일본에 친정해서 웅략천황을 치기 전에, 개로대왕은 이미 중국에도 열한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중국 땅을 경영하였다.
458년에 개로대왕이 중국에 보낸 백제 장군은
관군장군우현왕 여기餘紀,
정로장군좌현왕 여곤餘昆(일본 청령천황이 되었다)
정로장군 여훈餘暈
보국장군 여도餘都(백제 모도대왕이 되었다.)
보국장군 여예餘乂
용양장군 목금沐衿
용양장군 여작餘爵
영삭장군 여류餘流
영삭장군 미귀?貴
건무장군 우서于西
건무장군 여루餘婁 등 11명이다.
이들 11명의 장군이 중국 땅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464년 경부터 송나라가 말기적 증세를 보였고, 각 지방에서 송나라 장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회수淮水 북쪽 땅을 잃고서 찾지 못했으며, 그 땅은 북위北魏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의 뿌리 부분인 청주靑州와 산동반도 남쪽 경계 동양성東陽城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동쪽인 청도시靑島市 동쪽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문등군, 동래군, 성양군 등 해안과 도서島嶼지역에서 위에 적힌 11명의 백제 장수들이 나와서 경영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또한 490년 모대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 내용에는 개로대왕이 465년에서 471년 사이에 백제의 3장군을 추가로 중국에 내보냈다. 송나라가 위나라에 잃은 회북淮北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건위장군、광양태수、겸 장사신 고달高達,
건위장군、조선태수、겸 사마신 양무楊茂
선위장군、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이미 송나라에 있었다.
개로대왕은 471년에 관군장군 불사후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장무張茂를 북위국에 사자로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황해도 봉산鳳山에 묻힌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고분은 468년에 만들어졌는데, 위에 나온 대방태수 장무의 부형父兄일 것이다.
이들이 중국에서 차지했던 지명은 488년과 495년에 중국 제나라南齊國에 보낸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의 국서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 때인 488년 겨울에 북위국北魏國이 산동반도의 백제를 쳤다. 산동반도의 백제군은 북위국의 수십만 대병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겨서 산동반도를 수호하였다. 모대대왕은 북위군北魏軍을 격파하고 나서 승전한 백제 장수들을 승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 10년 488년에 위魏나라가 백제를 치러오다가 패하였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제서齊書]에도 이 부분의 백제 기록이 파훼되었는데 남아있는 부분은 모대왕이 남제국南齊國에 올린 국서 내용이다.
“노고에 보상하여 이름을 길이남긴다. 영삭장군신 저근姐瑾 등 4인이 충효를 다하여 국난을 막았다.... 이 4인의 장수에 대하여 임시책명을 정식으로 황명을 내려 책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을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를,,,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餘歷을,,,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餘固를...건위장군, 불사후로 책명을 바랍니다.
이들 4명은 488년에,,,산동반도에 있다가 서북에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백제 장수들이었다.
490년에 모대대왕은 여기에 더하여 3장군을 산동반도에 보냈다.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신 고달高達,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신 양무楊茂
행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송나라에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나의 신하로 봉사중이다.
比使宋朝,今任臣使
그러한 선례에 따라서 이 장군들에게 새로 제나라의 책명을 바란다.
광양태수 고달高達은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조선태수 양무楊茂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참군 회매會邁는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남제 무황제武皇帝는 모대왕이 열거하고 원하는대로 백제의 세 장군들에게 군호를 내리고 중국의 태수로 임명하고, 모대대왕을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봉하였다.
詔可,竝賜軍號,除太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東大將軍.
그리고 사자를 백제에 파견하여 모대대왕에게 조부 모도대왕을 세습하여 백제왕이라는 책명을 주고 인장과 인수, 옥부, 동부, 호부, 죽부 등 여러가지 선물을 하였다. (여기서 모도대왕은 망亡자가 없으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는 일본에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한편 [남제서]에는 이때 490년에 다시 북위 수십만이 2차로 백제를 공략했으나 모대왕이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우나木干那 등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고 기록했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衆 襲擊虜軍,大破之.
495년에 모대대왕이 다시 보낸 국서에서는
“490년, 경오년에 북위 선비 오랑캐가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반격하게 하였다. 해일처럼 쓸어버리고 달려 추격하여 베어버리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
목우나木干那는 광위장군, 면중후
그리고 다시 파견한 장군은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신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신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겸 참군신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
등 4명인데 이들을 정식으로 책명해 달라는 모대대왕의 주청을 남제 명황제明皇帝는 다 들어주었다.
선비족 척발씨拓跋氏의 위나라北魏는 386년부터 534년까지 존재하였고, 439년 북조北朝를 통일하였는데 당시 척발씨 북위北魏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남제국南齊國의 [남제서南濟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위와 같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중국에 생겨나고 최후에 사라진 백제 진평군晉平郡은 하북성 형수지구衡水地區와 보정지구保定地區의 경계인 안평현安平縣이다. 서남쪽에 진현晉縣도 남아 있다.
백제 요서군은遼西郡은 하북성 노룡현 북쪽 천안현遷安縣 영지성令支城에 있었다.
백제 구이대왕(234~238)의 직함이 위영지령魏令支領으로서 오래전부터 백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385년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취하였으나 그해 말에 후연後燕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개로대왕 때에 다시 요서를 찾은 것이다.
광릉태수廣陵太守의 광릉군은 산동성 아래 회하淮河 남쪽 회계산淮稽山 유역이다.
청하태수淸河太守의 청하군은 제나라가 있던 곳으로 하북성 형수시 남쪽 황하 주변의 청하성이다.
광양태수廣陽太守는 북경시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385년에 북경을 취하여 13군 태수를 두었었으나 389년에 후연에 빼앗겼었다. (유주자사 진묘)
성양태수城陽太守의 성양은 산동성 산동반도 남동해안 청도시靑島市에 있었다.
동청주東靑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했으니 백제가 오래도록 보전하였으며 백제왕이 있던 곳이다.
조선태수朝鮮太守는 하북성 진황도시 비여현肥如縣에 있었다. 하북성 노룡현의 30리 북쪽이다.
수나라 때 대방태수帶方太守는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
위에 적힌 9군, 진평군晉平郡, 요서군遼西郡, 광릉군廣陵郡, 광양군廣陽郡, 청하군淸河郡, 낙랑군樂浪郡, 성양군城陽郡, 조선군朝鮮郡,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의미를 타당하게 고려하건대 시간적인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 8명의 백제 태수가 가장 최전선이라고 보면 북청주北靑州 7현, 제남군齊南郡 5현, 낙안군樂安郡 3현, 고밀군高密郡 6현, 평창군平昌郡 5현, 북해군北海郡 6현, 동래군東萊郡 7현, 동모군東牟郡 1현, 장광군長廣郡 4현 등 산동의 44현이 역시 백제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대대왕 때의 중국내 백제 자치군은 최소 15개군 이상이다.
대체로 회하淮河에서 제하齊河까지 태산泰山 이동의 산동반도를 소유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 많은 백제자치군이 중국 사서에 올바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북연왕 풍홍처럼 중국에 황제로서 자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백제로부터 통치를 받는 자치군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체적으로 25개군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송나라가 망하고 남제가 서는 변혁기에, 개로대왕이 11명의 장수를 서쪽으로 보낸 458년 이후로부터 백제 장수들이 활발한 대륙 경영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정말 위대한 개로대왕이다. 근개루대왕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백제가 488년과 490년에 산동반도에서 북위군을 연파한 것은 고구려의 살수 대첩 이상의 대첩이다. 특히 이는 내지에서가 아니라 점령지에서 싸움이기 때문이다.
454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이후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訥祗王은 응원군을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였다.
일본의 고구려계 웅략천황은 백제 개로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청하여 시집온 백제 공주를 457년에 나무에 달아서 불태웠다.
458년, 개로대왕은 딸이 웅략천황에게 극형으로 죽었으니 분노하였다.
개로대왕은 즉시 친정親征에 나서서 백제에서 달려갔다.
미야쯔宮津 해안에서 교토京都를 거쳐 순식간에 오사카大和(大阪)로 진격하였다.
나라현奈良縣 갈성산葛城山으로 도망치던 웅략천황을 협곡에서 포위하여 끝내 마주하였다.
웅략이 화살로 반격하였으나 15살의 어린 곤지왕자가 나서서 토벌하였다.
이 사실을 “등에?가 개로천황의 팔을 물고, 잠자리??가 날아와 등에를 잡았다”고 시가詩歌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등에?는 웅략천황이고 잠자리??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昆支王으로서 뒤에 왜흥왕倭興王이 되었고, 청령천황淸寧天皇(=??)(444~484)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시가는 매우 어렵다. 끝의 일부만 해석한다.
“고구려 웅략의 깃발을 쫓아와서, 마침내 만났는데 곤지왕자가 빨랐구나
은국隱國 일본 위에 나의 어검이 거침없이 아름답다.
왜국이라는 말이 오래되었으니 아기쯔시마로 국호를 바꾸노라.“
(원문) 다고모량이多古牟郞爾(=다카무라高牟良=雄川=許母理=koma) ; 고구려
아모가기도기阿牟加岐都岐(阿牟=幼武=雄略) ; 유무(웅략)의 깃발(牙旗)을 쫓아와서
회노아모원 會能阿牟袁 ; 유무를 마침내 만나니
아기두파야구비 阿岐豆(=昆支=??)波夜具(=速)比 ; 곤지가 빨랐구나.
가구노기도加具能碁登 ; 숨은(隱) 나라터(碁=은국隱國=일본) 위에
나이오가모도那爾?波牟登 ; 나의 어검御矛도
소라미도蘇良美都 ; 거침없이 아름답다.
야마도노구이표夜麻登能久爾表 ; 왜라는 이름이 오래되었으니
아기두지마도포阿岐豆志麻登布 ; 아기쯔시마(청령도)로 국호를 바꾸노라.
웅략천황은 개로대왕 앞에 무릎꿇고 빌었다. “누구이신지?”
“현인신現人神이다. 네 이름을 먼저 말하라.”
여기서 현인신은 현신現神을 의미하고 현신은 아기쓰카미로 발음한다.
이 아기쓰는 잠자리의 한자인 청령??과 같은 발음이니 고대로부터 일본 열도 모습을 형상한 말이다. 일본 열도가 잠자리처럼 생겼기에 왜국을 아기쓰시마??島라고 불렀었다.
즉, 청령도의 신이라고 한 것이니 개로대왕은 스스로 일본 열도의 왕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웅략천황은 “저는 와카무幼武라고 합니다.”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웅략천황의 이름은 고무高武인데 반대말인 유무幼武로 낮춘 것이다.
“나는 히토코노누시一言主神다.”
개로대왕 일언주신一言主神은 일사주신一事主神이라고도 하였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히토코노누시는 계체천황의 부왕인 히코누시彦主人과 동일인이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서는 한사왕汗斯王 이라고도 하였다. 한왕漢王, 또는 한성왕漢城王이라는 뜻이다. 개로대왕의 도읍은 대동강의 한성이었다.
[고사기]에서 웅략천황과 그의 백관은 이때 천황 복식과 관복을 벗기우고 무기를 받쳤다고 하였다. 확실하게 항복한 것이다. 즉, 왜국이 개로대왕을 섬긴다는 뜻이고 웅략천황이 왜국을 받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을 다시 통일하여 완전히 발 아래에 둔 개로대왕은 그 존호를 높여서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계 마지막 천황이었던 웅략雄略이라는 시호의 의미는 웅조雄朝, 고구려 왕계가 이제 끝略이 났다는 뜻이다.
웅략 4년 이후에 [웅략천황기]의 천황은 더이상 웅략천황이 아니니 백제계 천황이다. [웅략천황기]의 일부인 7년, 8년, 9년 기사는 개로대왕의 기록이고, 그후로는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 청령천황(444~484)의 기록이다.
개로대왕의 《인릉忍陵 비문》에 의하면 458년에 일본을 떠난 것이 된다. 이때 개로대왕은 곤지왕자를 데리고 귀국하였고, 또한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483)도 평양으로 데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461년에 곤지왕자를 일본 왜흥왕으로 내보냈는데, 이때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을 임신한 부인이 일본으로 따라왔다. 바로 반풍황녀다.
그녀는 딱 한 번 남자와 교합하여 여자의 도를 알았고, 그 한번에 임신하여 이상했지만, 이후로 평생 남자와 교합을 원치 않았다.
458년, 15세에 웅략천황을 사로잡은 곤지왕자는 백제로 돌아갔다가 461년에 다시 일본으로 왔는데 18세에 왜흥왕이라고 하였다.
458년부터 일본의 수도에 남아 왜왕의 지위를 누려온 도미 부인의 아들 성천황자星川皇子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곤지대왕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곤지대왕은 성을 태워버리고 성천황자를 죽였다.
이때 곤지왕자는 개로대왕비와 동행하였는데, 그녀는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로서 임신중이었고, 무령대왕을 일본에서 출산하였다.
반풍황녀의 궁은 갈성葛城의 아름다운 각자궁角刺宮이었다.
지금 각자신사角刺神社로 남아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당시에도 각자궁을 한번 구경하는 것이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다만 각자궁角刺宮은 부라궁夫羅宮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곤지대왕은 청령천황이 되어서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에 미카쿠리甕栗宮을 지었다.
왜제왕 즉, 개로대왕의 부인이었던 반풍황녀를 백제식으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봉하였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의 비인 갈성한원을 황태부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왜제왕의 부인인 반풍황녀를 황태부인으로 봉한 것의 오기이다. 갈성한원은 황태부인으로 봉하지 않아도 황후이다.
곤지대왕 청령천황은 부하장수를 시켜서 웅략천황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였다. 웅략 7년의 기사에서 미모로신三諸岳神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고무高武에서 고뢰高雷로 바꾸도록 하였다.
뢰雷의 발음에 “이가스시”가 있는데 [신찬성씨록]에서 다케하라竹原連는 신라국 아라라국왕의 동생 이가쓰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아라라국주는 안강천황을 가리키는데 신라왕자지만, 윤공천황의 양자였는지 웅략을 그 동생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이가伊賀는 미에현三重縣에 있고 그 중심성은 우에노성上城이다. 웅략천황(418~479)이 오사카에서 쫓겨나서 여생을 마친 곳으로 고려된다.
청령천황은 웅략천황이 죽자 안강천황을 따라왔던, 신라의 또다른 왕자로 추정되는 조일랑朝日郞을 공격하였다. 웅략이 이름을 바꾸어 은거했던 이가伊賀의 청묘靑墓에서 싸워 죽였다.
조일랑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서 낭자왕의 후예로 고려된다.
대가랑, 가랑성 등은 신라국 낭자왕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신찬성씨록] 大賀良 新羅國?子王之後也
[신찬성씨록] 賀良姓 新羅國?子王之後也
468년, 백제 개로대왕은 거꾸로 고구려 남변을 침범하였는데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예성강의 평산 한성에서 나라를 정비한 백제가 대동강 동북부까지 일부 수복한 것이다. 비유왕 때에 이미 평양 서쪽 서하군에 진출했었다.
이후 백제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병력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북한산성은 안학궁 대성산성이다.
쌍현성은 동해안 금야강의 영흥이다.
구천성仇天城으로 추정되는 순천군順川郡 은산殷山은 숭산崇山에 있는데 숭산의 북쪽까지 개로대왕이 방죽을 쌓았다. 개로대왕의 청목책은 이제까지의 희천군 읍성 아래 대추령大楸嶺으로 추정된다.
쌍현성은 무령대왕武寧大王 때에도 한북漢北 사람을 동원하여 다시 쌓았다.
이무렵 개로대왕은 부왕인 비유왕의 묘를 호사하게 꾸미기 위해 욱리하郁里河(=비류강, 대동강 중류)에서 대석을 날라오고,
강을 따라 나무를 심어 방죽緣河樹堰을 쌓았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까지로 되어 있다.
사성蛇城은 평양 북쪽 평성시 사현(巳峴), 사천(巳川) 부근으로 고려된다. 숭산은 성천 위례성으로 고려된다.
사성蛇城은 책계왕 때에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수리한 기록이 있었다.
한편 계체천황의 모후였던 개로왕의 부인 진히메의 석관은 후쿠이시 산정고분에서 발굴되었는데 배(舟) 모양이다.
후쿠이시 주형석관
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성悉直城을 공격하였다. 이후에 신라는 하슬라주 사람으로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실직은 강원도 삼척 땅이고, 하슬라는 강릉 땅 명주군이며 니하는 동해안 영흥의 용흥강이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대왕長壽大王은 3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476년 정월에는 백제의 수도인 개로대왕의 대산한성과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대왕을 아차성阿且城에 끌고가서 참살하였다.
이 아차성은 서울의 아차산성峨嵯山城으로 알려져 왔으나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의 읍성이던 아단성阿旦城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 북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이어 개로대왕이 있던 남성을 공격하여 서쪽으로 도망치던 개로대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북성은 북한산성이던 안학궁이고 남성은 한성이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 20년조에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개로대왕의 을묘년475년에 맥貊, 즉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치고,
칠일만에 왕성(王城),즉 한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위례성까지 잃었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의 국왕과 왕비, 왕자들이 고구려적에게 떼죽음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북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 즉 대산한성大山漢城이고 남성은 한성인데 성천의 위례성도 함께 잃었다고도 하였다.
다시 대동강 이북을 완전하게 고구려가 장악한 것이다.
이제까지 백제는 광개토왕에게 밀려나 남천하였던 아신왕 이후에 다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百濟記云,蓋鹵王乙卯年冬,貊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遂失尉禮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
개로대왕 후손도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11월 1일에 있었다. 0468 Nov 01 00:47 A 89 0.076 0.923 10.9S 165.6E 86 293 10m34s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
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北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爾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爾)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사론(史論):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걸루(杰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임금을 결박하여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이르기를 “그러면 오자서(伍子胥)가 영(逞)에 들어가서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어떠한가?” 하니, 이르기를 “양자법언(楊子法言)에 이를 평하여 ‘덕(德)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것은 인(仁)과 의(義)일 뿐이니 자서(子胥)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짊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걸루 등의 의롭지 못함은 명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