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강원도청이 있음으로 원주보다 문화공간은 물론 학교, 체육시설 등 여러모로 발달되었다.
춘천은 원래 고대에 규모가 큰 원시부족국가였던 맥국貊國의 터로,
삼국시대에 백제ㆍ고구려ㆍ신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은 뒤 조선 태종 13년부터 춘천으로 불렸다.
강원도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강릉과 원주에 밀려 한적한 고을이었던 춘천이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것은 1888년이다. 그때 춘천은 유도부留都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강원도 도청 자리에 짓게 하였다. 궁궐이 들어선 뒤로 춘천은 강원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어갔고 결국 1895년에는 영서지방을 통괄하는 관청인 관찰부가 들어섰다. 이듬 해에 전국을
13도로 나누는 과정에서 영동지방, 즉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를 이곳에 두게 되었다.
춘천은 그때부터 강원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관찰부를 도청으로 바꾸었다.
서울에 난리가 일어나 조정이 위험해질 경우를 대비하여 임금과 신하가 피난할 궁궐(경희궁 2궁)을
원래 호텔 뒤에 불상이 있었는데 기독교 재단인 세종호텔 이사장이 불상을 철거하자
계속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더 이상 손대지 않고 불상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소양강댐은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 하류를 막아 세운 다목적 댐으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사업과 4대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한강의 수자원을 다목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다.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 의해 1967년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높이 123m, 길이 530m인 한국 최초의 중앙차수벽식 사력댐(zone fill dam)으로,
중앙에 진흙으로 심지를 박고 그 양쪽을 모래와 자갈만으로 쌓아올렸다.
댐으로 조성된 소양호는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 70㎢, 총저수량 29억t, 유역면적 2,703㎢에 이른다.
이 댐은 세계 4위의 규모로서 동양 최대이며,
댐 건설을 통해 축척된 기술은 한국의 해외건설 진출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도시로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각종 교통도 편해 관광객이 연간 1000만명에 달해 관광수입도 많다.
호수 외에 공지천유원지·고산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밖에 춘천 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으며
춘천향교春川鄕校, 춘천인형극장, 한국 유일의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등이 있다.
춘천의 문화와 미래를 펼치기 위해 애니메이션산업을 주력산업으로 선정하여 육성하고는 있지만
춘천시의 생각만큼 발전이 제대로 잘 될 것인지는 현재 상태로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춘천하면 1970년대의 유행가 '소양강 처녀'를 떠올리게 된다.
소양강에는 소양강 처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강둑에는 소양강 처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노래비 설명판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소양강 처녀'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이번 춘천 여행에서 알게 되었는데 소양강 처녀는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현재 63세인 윤기순씨가 그 주인공인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시집도 가지 않고
지금도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소양강 하면 쏘가리가 유명한데 소양강에는 대형 쏘가리 형상도 서 있다.
댐의 우안右岸 하류측인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는 1973년 발전을 시작한 소양강수력발전소가 있다.
연간 3억 5,3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생산된 전력은 154kW 송전선로를 통해 원주-제천 변전소로 보내져 영동지역으로 공급된다.
완공 당시의 발전용량은 한국 총수력발전용량 62만kW의 1/3에 해당되어,
세계적인 에너지 파동으로 곤란을 겪었던 국내 전력난 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다.
홍수예보설비, 관개용수설비, 전산시스템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댐에서 발전에 사용된 용수는 하류에 있는 의암·청평·팔당 발전소에서도 이용되어
연간 6,100만kWh의 발전량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춘천시·양구군·인제군에 걸쳐 있는 남한 최대의 인공호인 소양호는,
춘천시 북산면을 중심으로 6개면 38개 동리의 4,600세대가 수몰되어 조성되었다.
댐의 건설로 대규모의 전력생산뿐만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한강 하류권의 홍수조절 능력이
5억톤으로, 계획홍수량의 52%를 조절할 수 있다.
또한 농업·공업 및 생활용수 공급능력 12억 1,300만톤과 내수어족의 양식업 및 국민관광지로도
큰 몫을 하는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양호는 민물고기의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어종이 다양하여 낚시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호반의 북쪽에는 청평사회전문(보물 제164호)·3층석탑·부도 등이 남아 있는 청평사지, 고려정원터,
구성폭포 등이 있으며, 청평사계곡을 통한 오봉산 등산로는 1일 등반 코스로 인기가 있다.
소양호 선착장에서 양구를 잇는 정기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어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결되는
관광적 가치뿐만 아니라 내륙지방 교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금강산에 인접한 중동부전선의
안보관광권이 개발된다면 소양호·양구·인제 지역은 세계적 관광지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의암호 둘레로는 기가 막힌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와 자전거 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의암호 둘레길은 1코스 '실레 이야기길'에서부터 4코스 '의암호 나들이길'에 이르기까지
총57.7km로서 도보로는 1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삼악산의 수려한 산세와 의암호의 맑은 물이 잘 어우러진 그야말로 환성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문화축제로는 매년4월 김유정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춘천마임축제(5월), 춘천아트페스티벌(7월),
춘천인형극제(8월), 춘천국제연극제(9월), 춘천국제애니타운페스티벌(9월) 등이 열리고 있다.
그 외에도 널리 알려진 먹거리인 춘천닭갈비막국수축제(8월), 소양강문화제(9월) 등이 있으며
레져스포츠 축제로는 조선일보춘천마라톤대회(10월) 등이 매년 열리고 있다.
소양댐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송어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어양식은 '찬 물'과 '흐르는 물', '깨끗한 물'의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소양댐이 만들어지면서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장소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소양댐 완공 이후에 댐 아래 지역은 수온이 낮아서 농사가 안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온을 높이기 위해 만든 저수지를 운영하고 난 다음부터는 잘 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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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문학촌'에 다녀왔다.
'문학관'이라 하지 않고 '문학촌'이라고 명명한 것은 동네 전체가 김유정의 유적지라서 그렇단다.
그 밖에도 김유정 이름을 붙인 것들이 많이 있다. 도로, 우체국, 음식점 등등
도로명은 '박지성로', '황영조로' 등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것들이 많이 있으나
전국 3천 여개의 역이름 중에서 사람 이름을 붙인 역은 '김유정역'이 유일하다.
이 마을 촌장인 소설가 전상국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김유정 문학관과 생가를 돌아보았다.
전상국 선생은 1970년대 한국문학, 특히 분단문학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험난한 세월의 상처를 화해의 삶으로 체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 분이다.
황순원 선생에게 배웠으며 강원대 국문과교수로 재직했고 2003년부터 김유정문학촌장을 맡고 있다. 주로 자신의 생활이나 주변 인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토속어·비속어를 많이 썼다. 돈을 벌면 떠나야 한다고 하는 실레마을, 동네의 모양이 시루 모양이다.
시루는 밑바닥이 뚫려서 돈을 벌면 새어나가기 때문에 그 전에 떠나야 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장절공 신숭겸은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 출신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하였다고 한다.
태봉 말기에 홍유·배현경·복지겸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원보 김락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왕건은 간신히 피신했다.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동생과 아들을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년(성종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120년(예종15)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그래도 큰 호수인 의암호로 인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춘천의 닭갈비는 야채와 함께 버무르는 즉석요리이다. 웰빙식을 찾는 요즘에 안성맞춤이다.
신북읍 천전리에 가면 통나무집 닭갈비집이 있는데 유독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번호판을 들고 기다리는데 옆에 다른 식당이 있음에도 여기서 기다리면서 순번을 받는다.
여기서 닭갈비, 전병, 막국수, 춘천막걸리를 시켜 먹으니 다른 곳에 가지 않아도 될만큼 만족스럽다.
가볼 곳은 많은데 하루일정으로는 짧다고 한다. 여기도 가보고 싶고 저기도 가보고 싶다.
이것도 먹어 보고 싶고 저것도 먹어보고 싶다.
강원도는 청정지역이라 의암호, 소양호의 쏘가리도 일품이고 강원도에서 나는
산나물, 도토리묵, 강원도 한우고기... 그래도 춘천의 대표음식은 닭갈비와 막국수이다.
그러면 왜 춘천의 닭갈비가 유명하게 되었는가?
돼지고기가 귀하여 돼지고기 대신 닭갈비를 돼지고기 양념하듯한데서 유행되었다는데
냄비나 솥을 이용한 찜형태의 홍천 닭갈비, 연탄과 석쇠를 이용한 구이형태의 연탄닭갈비,
숯과 석쇠를 이용한 구이형태의 숯불닭갈비, 무쇠판을 이용한 볶음형태로 진화된 지금의
춘천닭갈비가 탄생하였다. 야채와 닭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현장에서 즉석요리한다.
한편 춘천의 대표 음식인 춘천 닭갈비와 춘천 막국수는 전국에서 유명한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닭갈비에 대한 유래가 고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김유정(1908~1937)은 1930년대 농촌생활을 투박한 토속어로 해학 넘치게 그린 소설가다.
고향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우직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 삶의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말더듬이였다고 하며 스물아홉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봄·봄>, <동백꽃>, <소낙비> 등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동백나무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 꽃이라고 한다.
그의 생가 앞뜰에 있는 생강나무를 보면서 젊은 소설가 김유정과 소설 <동백꽃>을 생각해보았다.
김유정의 작품들은 80여년 전의 작품인데 요즘 젊은이들도 <동백꽃>, <봄·봄> 등
그의 대표작들을 많이 읽고 있다고 하니 그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게 된다.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이고 어렸을 때 이름은 '멱설이'라고 한다.
아버지 춘식春植과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의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
고향을 떠나 12살 때 서울로 가서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안회남과 친하게 지냈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었고, 1929년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한 이래로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한때 금광에 손대기도 하고 무질서한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1932년 마음을 고쳐잡고
실레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소개된 것보다 4~5년 전에 야학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한다.
1935년 '구인회'에 가담해 김문집·이상 등과 사귀었다.
1935~37년까지 2년 동안 단편 30여 편과 장편 1편(미완), 번역소설 1편을 남겼다.
29세 때 누나 집에서 결핵과 늑막염으로 죽었다. 1968년 춘천 의암호 옷바위 위에 시비가 세워졌다.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 생가는 'ㅁ'자 형의 초가집인데 마당에 굴뚝이 세워져 있는 독특한 구조다.
물론 집밖에도 굴뚝이 있긴 하지만 집안에 굴뚝이 있는 형태는 특이하며 방충기능을 했다고 한다.
생가주변에는 현재 문학마을 조성을 위해 한참 공사중이었다.
'김유정의 실레 이야기 길'은 일반에게도 잘 알려져서 단체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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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춘천의 호반길이다.
의암댐으로 연결되는 박사마을에 가면 '박사선양탑'이 있는데
박사마을이 위치한 이곳은 아침 일찍 햇볕이 드는 따뜻한 곳이다.
춘천 시내를 바라보지만 강이 있어 비가 오면 학교에 가지도 못하는 지형이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140여명의 박사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대표적 박사마을로 알려졌다.
춘천시 서면은 1600세대 4천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면인데 1963년 송병덕 의학박사로부터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141명(여자 29명 포함)의 박사가 배출되었다.
인구수로 환산해보면 15가구당 박사 1명이 배출된 셈이다.
이 마을 남자 박사의 아들은 타지에서 태어나도 박사가 되면 선양탑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나
이 마을 여성 박사는 당대는 이름을 올릴 수 있으나 시집가서 타지에서 낳은 자식은 올릴 수 없단다.
수많은 풍수지리가들은 왜 유독 이곳에서 많은 박사들이 배출되었는지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50~60년대 서면은 육지속의 섬으로 춘천시내가 바라보여 도심지역인 동쪽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쪽으로 가는 유일한 수단인 나룻배를 통해 이 고을 밭 작물을 팔러나가는 어머니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한데 모이다 보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이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특히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룻배에 오르면서 고생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공부에 열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풍수적으로 이곳의 지세가 좋은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근처에 방동리 고구려고분이나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소,
조선 현종의 장인인 청풍부원군 묘소 등 유명인사들의 묘역이 많은 명당자리다.
특히 1968년 의암댐이 생겨나고 물이 만수위에 가까워오면서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의암댐이 생기면서 풍수에 변화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이런 근거는 춘천 서면 박사마을 외에도 영양군 주실마을, 임실군 삼계면 박사골 마을을 합해
3대 박사마을이라고 부르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동면과 서면 중간에 학교가 있었는데 동면 아이들은 해를 등지고 등하교를 했던데 반해 서면
아이들은 해를 받으면서 등하교를 해서 유독 서면에서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이곳이 이렇게 유명해지다 보니 신혼부부들이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이곳에서 신혼밤을 보내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박사는 많이 배출되었지만 큰 부자는 없다고 하며
산이 좋아야 인물이 나고 물이 좋아야 재물이 난다고 한다.
춘천은 대룡산의 정기를 받아 봉의산이 솟았으며 소양강이 봉의산을 감싸주며 생기를 복돋아준다.
부디 춘천의 산과 물길을 잘 보존해 강원도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주기를 바란다.
도시를 확장하고 도로를 개설함에 있어서 자연을 보호하고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지는 친환경 도시를
설계해 우리나라 전통적인 풍수사상이 잘 반영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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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 감자와 옥수수로 상징되던 도이며 춘천은 한우와 닭갈비, 메운탕, 메밀음식이 일품이다.
춘천의 지명은 우두산牛頭山-소머리에서 시작한 도시가 닭갈비로 더 유명한 동네가 되었다.
촉나라의 제갈공명은 위나라 조조의 대군을 한중漢中에서 맞아 싸웠다.
조조의 부대는 너무 지루한 원정에 보급도 시원치 않아서 천하의 조조인들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대군 앞에서 호령하기를 “계륵鷄肋”이라고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몰라서 서성대고 있는데, 주부 벼슬인 양수가 알아듣고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무슨 뜻이냐고 다른 사람이 묻자 “닭의 갈비는 뜯어먹자니 하찮고 버리자니 아깝다.
한중 땅도 닭갈비 같은 것이니 철수의 의향을 그렇게 구령으로 나타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별로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버릴 수 없는 사물이나 사리를 빗대는 말로
계륵(닭의 갈비)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선조들은 자신의 글재주를 겸손하게 여겨서 문집 이름도『계륵집鷄肋集』이라고 많이 붙였다.
이 고사에서 '계륵인심鷄肋人心'이란 말도 나왔다.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닭갈비를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어낸 곳이 춘천이다.
오늘날엔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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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UB의 국내문화탐방 활동이 매년 회를 거듭 할수록 발전하고 있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 전자사랑회의 집행부 지원과 답사, 사전자료준비 등을 위해 애쓰고 있는
김정인교수의 덕택이다 생각되어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금년에도 많은 회원들 참여하여 주시고 안전하고 유익한 문화 탐방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병오
# 배경음악 :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 & 효린의 'Let it Go'
첫댓글 덕분에 춘천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춘천의 내용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유정문학관과 금병산은 산행을 한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