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연가에 관한 시모음 3)
가을 연가 /김규성
마침내 전체주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단벌의 군복을 벗고
색색의 사복으로 갈아입은
제대병 행렬이 눈부시다.
최초의 해방자는 들판의 벼였다.
지난여름 보리는 세례요한이었다.
딱딱한 감은 말랑말랑해지고
신 포도도 그 일광욕만큼 달콤해졌다.
다람쥐 눈빛 한결 똘람똘람하고
풀벌레 울음 깊고 정교해졌다.
첫사랑이 새로 시작하자고 조른다.
아스팔트길에서
한 발짝만 슬쩍 헛디디면, 사방의
술 익는 냄새가 발길을 묶는다.
가야 할 길이 그리 남지 않았다
컬컬한 목의 단추 두엇 풀어놓는다.
가을 연가(戀歌) /조세용趙世用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은
황갈색 마지막 낙엽이
흐느끼며 떨어지는
늦가을 해거름 무렵이었지
서산 마루에 걸려 있던 태양
검은 피 토하며
어둠 속으로 막 사라졌고
호숫가 한가운데
살랑거리며 춤추던
검붉은 노을도
어느새 잠들어버린
너와지붕 카페에서
시곗바늘 잡아 놓고
마냥 얼굴 붉히며
시와 인생을 이야기했었지
좋은 시 쓰기 위해선
아름답고 올곧은 삶을
인생해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만
월척은 아니어도
준척이나마 건질 수 있다고
굳게 다짐했었지
그러나
지금
호숫가 그 카페는
사연도 남기지 않고
가뭇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싸늘한 색바람에
오갈든 낙엽만이
가년스레 흐느끼고 있었다.
가을 戀歌 4 /藝香 도지현
가을비가 눈물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가슴을 적시는 눈물 같은 비는
가슴에 긴 강을 만들어 흐르고 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내렸지
우산은 저만큼 가버리고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뜨거운 가슴, 불태우며 어쩔 줄 몰라 했지
우리의 사랑의 수위만큼 빗소리도 거셌고
거센 만큼 나뭇잎도 흔들리고
나뭇잎 흔들리는 만큼 마음도 흔들렸지
헤어짐이 안타까워 가슴에 흐르는 눈물
빗속에 눈물 속에 어느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온몸은 젖어 뜨거운 가슴으로 하얗게 김이 난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그때가 생각나
아린 가슴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니
서리꽃 머리지만 하얀 그리움이 가슴에 파동 친다.
가을 연가 /박진표
그 무더운 여름
말없이 아파하며
견뎌내더니
그 시련
이토록 아름답게
알록달록 화장을 한다
넓은 가슴으로
생명의 양식
소리없이 키워낸
착한 가을아
곱고 고운
이쁜 너에게
나는
고개를 숙인다
어여쁜 색시야
수줍은
붉게 물든 가을아
그런 네가
나는 시리게 좋구나
깊어가는 가을아
사랑의 노래야
가을연가 /장정애
구절초 향기 나는 들판에서
엣 동무 하나둘 떠올리며
그리움 담아 따뜻한 차 한 잔 하고 싶다
억새꽃 하늘거리는 산등성에서
가슴속 묻어둔 노래 부르면서
추억 담아 따뜻한 차 한 잔 하고싶다
홍엽 되어버린 잎새 마냥
말갛게 물들어 가는 마음 고이 접어
수취인 없는 엽서
설레는 마음 빨간 우체통에 넣어본다
가을
가을
깊어가는 가을이다
가을 연가(戀歌) /虗天 주응규
순홍색 빛살이 쏟아지던
오래전 어느 가을날
지독한 가슴앓이를 하던
마음의 창으로 들어선
해맑은 女人의 미소같이
풋풋한 女人의 향기같이
낯설잖은 정다움으로
다소곳이 피어나
그윽한 눈길로 매혹합니다
아련한 첫사랑의 안부를 거머쥔
휘지르는 스산한 갈바람이
여윈 가슴에 부대끼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공연스레 애틋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겹쳐 드는 날
바스러져 가는 아쉬운 마음을
쪽빛 가을 하늘에 담가
영영 빛바래잖게
소중히 숨을 죽여두렵니다.
*휘지르다: 여기저기 마구 다니다.
*숨을 죽이다: 채소 따위를 초벌 절임 하다.
가을연가 /임영준
솔바람이 찾아오니
텅 빈 허공만 남습니다
산기슭엔 가눌 수 없는
향수鄕愁가
황금노을을 따라
번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대
우리 청춘을 훑고 지나간
호수의 달빛
산사의 단풍을
기억하고 있나요
그대와 함께 바라보던
가을 몇 조각에
심혼이 뒤틀리고
흩어지곤 하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귀뚜라미소리가
그대를 불러일으켜
그대를 어루만지고
그대를 가득 품고
깊은 잠에 들게 합니다
가을 연가 /오석주
가을 하늘빛이
어느새
고독이 마음의 의자에 앉아
심심한 듯 덫을 놓고
나를 건드리고 있네요
길가에
가냘프게 핀 들국화
그리움이 가득한 몸
간드러지게 흔들어 대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듯이
가을은
내 마음 불러내고
외로움이 가슴에 안겨 와
그리움의
계절이라고 귓속말로 속삭인다
흰 들국화 꽃
나에게 살짝 다가와
사랑의 연민을
느껴 보라고도 말해주네요
사랑에 깊이 빠져들고 싶어지니까
가을연가 /채화 백설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링링링
맑고 서정적인
방울벌레 소리에
가을이 짙어간다
터질 것 같은
볼 빨간 석류가
너무 사랑스럽고
납작한 덩굴손으로
삭막한 벽 타기를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담쟁이넝쿨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긴 입자루에
신앙 같은 사랑을
숭배하며 꽃 피우는
키 큰 해바라기의
수줍은 듯 간절함이
정갈해서 좋다
가을 戀歌 5 /藝香 도지현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어 예던
매미가 가고 며칠이 가지 않았는데
뜰 아래서 귀뚜라미가
슬픈 노래를 청승스럽게 부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귀뚜라미의 슬픈 소리를 들으니
가슴을 비수로 촘촘히 저며대고
선혈이 흥건하게 고여 흘러내린다
평생을 영원히 지켜주겠노라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한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저 먼 나라로 갔으니 직무유기를 했지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가슴에 흘러넘치는 강이 된 눈물
눈물이 흘러넘쳐 넘실거리는 강물
이 밤도 출렁거리는 파도가 된 방
가을연가 /소암 이길선
낙엽 더미의 속삭임은
원색의 향수 뿌리고,
슬픈노래 바람 되어
은빛 날개로 하늘을 난다.
앙상한 가지들 연주는
마주 보는 눈빛의 지친 고독
협주곡을 공감하며
빈 마음 채운다.
지난날 흔적의 파노라마
기약 없는 질주를 부르고
자연이 허락한 벗들이
가슴으로 말한다.
가을 연가 /김재진
계절이 지나가네요
어찌 그렁그렁 지내시나요
지난 뒤에는 늘 아쉬움이 남네요
그때는 당신에 소중함을 몰랐네요
허허로움에 당신의 비움이 또렷해지네요
당신도 한동안 힘들었나요
내 사랑이 버거워 참 무뚝뚝했네요
가을 산들에 설렘이 오네요
우연이라도 만나자면 좋겠네요
가만히 다독여 살포시 안아주고 싶네요
귀뚜리의 사랑에 세레나데가 달빛에 젖네요
가을 연가 /임승훈
아쉬워 마라
네가 유난히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너를 무척 사모하기 때문이다
외로워 마라
네가 떠난 후에도 너를 못 잊는 것은
너의 충실한 인정이 가득해
그리워서 너를 놓지 못한
내 미련 뿐이다
일년이 가고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한다는
슬픔 후에도 그때의 아픔을 위로받던
이별이 아직도 두려운 것은
그냥 네가 좋아 너만 보이기 때문이란다
처음 기억한
그대로 미련한 인연에 목을 맨
내가 안스러워 보이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그 말
돌아가기에 너무 와버려서
변하면 아플까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음 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