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시립미술관에 갔다.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 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술에 대한 사랑과 영구 보존, 그리고 대중과 함께하겠다는 기획답게 수집가들의 발자취가 한자리에 모였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가나문화재단 컬렉션까지 아우른다. 가슴 설레며 안내판을 따라간다.
김환기 <산월>,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천경자의 <나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벅찬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며 첫째 둘째 전시실을 거쳐, 마지막 전시실에 들어서서 깜짝 놀라며 바라본 그림은 왜가리였다. 작품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데, 파티에 어울리지 않은 초대 손님처럼 암울한 표정이다. 긴 목을 접어 어깨 위에 얹어 홀로 서 있다. 나는 그것을 왜가리 1이라고 나름 이름 붙였다.
왜가리는 백로와 같은 외모지만 회색을 띠고 있다. 백로와 왜가리, 두루미는 비상할 때 활짝 펼친 날갯짓이 춤추듯 아름답지만 비슷한 외모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학은 두루미다. 천연기념물이며 직선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연하장 謹賀新年이라는 문구와 잘 어울린다. 백로와 왜가리는 긴 목을 둥글게 접고 날아간다. 해오라기는 백로 중에 온몸이 하얗고 부리와 다리가 검은 쇠백로며 텃새이고 몸이 작다. 그림 속 왜가리1이 해오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깃털에 잿빛이 많다. 화폭에 가득 차서 몸집이 제일 큰 왜가리처럼 보인다. 작품들은 방문객을 미소 띠며 맞이해 주는데, 왜가리1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자기만의 고독에 빠졌나 보다. 초점을 맞춰 셔터를 눌린다.
이어서 또 다른 왜가리를 본 기억이 자석처럼 둘러붙어 소환되어온다. 이응노 사적지에서였다. 충남 예산군 수덕사 일주문 곁, 계곡 위 다리를 건너면, 이층 추녀 밑 검은 바탕색에 흰 글씨로 ‘수덕여관’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너럭바위에 추상 문자 암각화가 두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
‘이응노 그리다’
나지막한 철책이 둘러쳐져 있고, 푸른 신우대가 자라며 생기를 불어넣지만, 긴 세월에 흐려지고 탁본도 했는지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수덕여관은 ㄷ자형 한옥이다. 방이 많아 마당에 굴뚝이 여기저기 서 있고 방문마다 자물쇠가 걸려 있다. 열쇠로 열면 방마다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겠다. 유일하게 문이 열려있는 주인 방에는 액자 두 개가 걸려 있다. 첫째는 젊은 시절 이응노 박귀옥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 곁엔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 있는 왜가리2 그림이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박귀옥은 자신의 처지를 느끼진 않았을까.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다가 복원되어 마침내 이응노 사적지로 정해졌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 때,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녀를 청년 이응노는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으로 여겼다. 수덕여관을 자주 들르다가 이 산속 외진 곳에서 같이 기숙하며 파리의 환상을 키웠다.
나혜석이 “자네는 중이 될 상이 아닐세.” 하며 받아주지 않는, 수덕사 주지인 만공스님을 향해 오 년간 일인시위를 끝내고 떠나자, 이응노는 정든 수덕여관을 사들인다.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그는 홍익대 교수로 이화여대에서도 강의하다가 스무 살 연하의 제자와 함께 파리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아내는 수덕여관을 지킨다.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동백림 사건으로 이 화백이 돌아온다. 출옥 후 이 화백은 수덕여관에서 요양하며 그녀 곁에 머문다. 남편을 곡진히 병구완하는 동안 그녀는 세월의 한 자락을 뭉텅 잘라 돌려받는 느낌이었을까. 그런 부인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내를 위해 여관 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조각을 했다. 다시 이 화백이 프랑스로 떠나고 그녀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아흔둘에 영면한다.
오륜대에서 대나무숲 데크를 걷다가 돌아보면 산과 물, 숲과 갈대가 보인다. 갈대 앞에는 왜가리3이 서 있다. 줌인zoom in하여 찍으면 박귀옥의 방에 있는 액자 그림과 똑같아 놀랍다. 그 왜가리는 치마 두르듯 숲이 우거진 산속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서너 개 낳아 품어서 부화한 새끼를 애지중지 키울 것이다. 먹이를 날라다 주며 반쯤 소화된 걸 토해서 먹이기도 할 게다.
폭염 속에선 갓 부화한 새끼에게 큰 날개를 펴서 온종일 그늘을 만들어 줄 테다. 새끼들이 자라 이소했을까. 볼 때마다 어째서 혼자일까. 왜가리1과 2는 바람 한 점 없는 그림 속에 있어 미동도 없지만, 자연 속에 있는 왜가리3은 왜 그림처럼 서 있을까. 침잠하여 관조의 세계로 빠져든 모양이다. 오랜 시간 물속에 혼자 서서 명상에 잠겨도 괜찮은가. 왠지 수컷으로 보인다. 아내를 외롭게 해선 안 된다는 명제도 아랑곳없이 자기의 세계에 빠져 집안일을 아내에게 다 떠맡기고 혼자 자유롭게 쏘다니는 남성을 연상케 한다.
저녁 운동 후 온천천을 걸어 집으로 가는 길이다. 왜가리4가 캄캄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미동도 없이 서 있다. 흰 가슴 털이 단발처럼 일자로 자라 바람에 나부낀다. 눈 위에서 시작된 까만 털이 뒤통수를 지나 댕기처럼 보인다. 눈 주변과 다리는 노랗다. 긴 다리로 우아하게 걷는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왜가리4, 나를 향해 “왝~” 소리를 지른다. “언제부터 나만 보면 사진을 찍어대더니 아직 글 한 편도 못 쓴 거야? 얼간이 같으니라구.” 큰 날개를 활짝 펼치며 드디어 위로 솟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