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트로트의 국민가수: 이미자
1950년대 후반에 데뷔한 이미자와 패티김은 각자의 빅히트곡인 <동백아가씨>(1964)와
<초우>(1966)를 1960년대에 발표해 국민가수급에 등극했지만, 이들의 노래는 1970년대에도 주류음악계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들면서 이미지와 패티킴의 여가수 양강체제는 후배인 김세레나, 김부자, 조미미, 문주란, 하춘화, 펄시스터즈 등 후배들의 활약으로 무너지는 듯했으나, 두 가수의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여전히 빛났다.
이미지와 패티김도 남진과 나훈아의 대조적인 스타일 못지않게, 서로 차이가 많이 나는 음악적 특성과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정통 트로트를 불렀던 한국적인 이미지의 이미자는 근대화의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서민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했고, 스탠더드팝을 불렀던 서구적인 이미지의 패티김은 판타지라는 꿈을 꾸게 했다.
이미자는 1970년대에 들어서도 <아씨>(1970) <여로>(1972) <삼백리 한려수도>(1973) <모정>(1978)을 불러 히트시킨다.
그의 노래에는 사랑과 이별, 가족, 고향이 있다. 현란한 춤은 없다. 사랑도 마주보며 밖으로 마음껏 표현하는 사랑이 아닌, 속으로 삭이는 구슬픈 연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당대의 진한 정서를 대중과 함께 나누며 애가 哀歌라는 뜻의 ‘엘리지의 여왕’으로 불려왔다. 이미자 노래는 개발과 성장의 시대에 남자남편와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한국 여성들의 아픔과 고충을 위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119
대형가수: 패티김
도도하고 신비주의적 카리스마를 지닌 패티김은 전성기에도 친근하거나 편한 스타는 아니었다. 노래도 주로 서양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품위와 격조를 따졌으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피나는 절제의 습관을 유지했다.
패티김은 서민을 대변하는 가수는 아니었다. 대중과는 멀리 있는 존재였다. 당시 서민 정서를 대변하고 여성의 힘든 삶을 위무해주는 여가수는 애조띤 트로트를 불렀던 ‘이미자’였다.
이미자에 비해 긴 신장과 늘씬한 몸매로 <틸>, <파드레>, <초우> 등 스탠더드팝을 부르던 서양적 이미지의 패티김은 상류층의 우아한 파티문화, 살롱문화와 잘 어울렸다. 특히 작곡가 박춘석이 쓴 클래식한 곡들은 세련된 그녀가 부르기에 좋았다.
패티킴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타이틀이 붙는 걸 가장 싫어했다. 패티김은 한 인터뷰에서 “국민가수는 이미자와 조용필, 두 사람밖에 없다. 국민의 과반수가 좋아하니까”라며 “나는 국민의 10%만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패티김 앞에는 ‘대형가수’나 ‘글래머 가수’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렸다.
패티김은 대중과 멀리 떨어져 신비주의적인 길을 걷다보니 수많은 오해와 루머에 휩싸였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이중국적 논란에 시달렸고 “미국에서 용돈 떨어지니 한국에 돈 벌러 나왔다”라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고故 길옥윤과 이혼할 때에는 본인의 표현대로 부부문제는 부부밖에 모르는데도 대중의 독화살은 그녀에게만 향했다.
패티김은 국가대표 운동선수 같은 엄격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다. 70세가 넘어서도 몸무게 관리에 엄격했다. 그녀는 “나는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는 기분으로 무대에 선다. 3분 동안 내 노래로 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당할 것인지가 결정난다”라고 치열한 가수의 삶을 말하기도 했다. 패티킴은 1978년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120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는 이미자, 패티김 외에도 김세레나, 김부자, 조미미, 문주란, 김상희, 하춘화 등이 각자 차별화된 목소리와 스타일로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가요계에서 큰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작곡가 박춘석, 서양음악에 한국적 멜로디 가미해 대중음악 새 장 개척
‘검은 뿔테 안경’의 신사 고(故) 박춘석의 인생은 한국 가요사 그 자체다. 경기중 4학년 때 명동 ‘황금클럽’ 피아니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박춘석은 1954년 <황혼의 엘레지>를 시작으로 <아리랑 목동>,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가슴 아프게>, <공항의 이별>, <비내리는 호남선>, <초우>, <물레방아 도는데> 등 무려 2,700여 곡을 내놓았다. 40년간 한 달에 대여섯 편씩 만들어낸 셈이다.
박춘석의 인생은 우리 가요계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 대중음악 1세대로 자신보다 17년 선배인 박시춘(1996년 작고)이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으로 일제 강점기와 격동기를 관통하며 시대의 아픔을 달랬다면, 박춘석은 광복 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서양음악까지 적절히 가미했다. 모던팝과 발라드, 재즈를 토속음악과 접목해 변화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낸 트로트 음악을 개발했다.
동시대의 길옥윤이 패티김과 혜은이, 이봉조가 정훈희, 현미에게 집중적으로 곡을 줬던 것과 달리 박춘석은 가수에게 꼭 맞는 스타일과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어주는 맞춤형 작곡가였다. 그야말로 히트곡과 스타 제조기였다.
패티김에게는 주로 서양 느낌이 물씬 나는 모던한 감성의 팝발라드를 주고, 이미자에게는 한국여인의 한과 설움이 담긴 음악을 줘 가수의 재능을 돋보이게 했다.
가요평론가 임진모는 “가수들마다 일일이 캐릭터를 부여해준 한국 대중가요의 총설계자였다”라고 설명했다.
남진(가슴 아프게), 문주란(공항의 이별), 나훈아(물레방아 도는데), 하춘화(하동포구 아가씨), 패티김(<초우>, <못 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미자(<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아가씨>) 등 ‘박춘석 사단師團’은 자연스럽게 형성돼 모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박춘석은 이미자를 위해 무려 700여 곡을 작곡해 그녀를 ‘엘레지의 여왕’, ‘한국 최고의 가수’라는 칭호를 받게 만들었다. 이미자 노래의 작곡을 위해서는 전속사를 옮길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이런 명성으로 박춘석은 1978년에는 엔카의 전설로 불리는 일본 최고의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에게 곡을 주기도 했다. 그는 2010년 3월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첫댓글 아들사랑님의 정말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이미자 패티김이라는 불세출의 한세기를 관통하는 대형스타도
결국엔 작곡가를 잘 만나야 그 빛은 환하게 빛나는 별이 되는것이죠 !!!!!!!!!!
작곡가를 잘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
호롱불이 되느냐
태양이 되느냐의 가장 중요한 요소죠~~
가수에게는 !!!!!!!!!!
이미자와 박춘석과의 조합이 가수중의 가수 이미자를 만든 일등공신 !!!!!!!!!!!
우리 정서주 공주님도
알고보니혼수상태의 바람바람아 1 호곡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대히트곡들이 대 작곡가들과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탄생되길
학수고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