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국수
밀은 값도 싸고 빵이나 국수의 원료로 널리 쓰이는 곡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수입 밀을 쓰고 있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활발하지만 생산량도 아주 적고 가격도 수입 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
지형적으로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주식 곡물은 되지 못했고, 가루붙이 음식도 밀가루보다 메밀이나 녹말가루를 이용한 것이 훨씬 많다. 국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 시대까지 찾아볼 수 없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제례(祭禮)에는 면(麵)을 쓰는데 사원에서 만들어 판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 음식책에서는 밀을 진맥(眞麥), 밀가루를 진말(眞末)이라 하였다.
예부터 국수는 생일이나 혼인, 회갑 등 잔치 때의 손님 접대 음식으로, 평상시에는 점심때의 별식으로 먹어 왔다. 송나라 사신인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1123년)에 “고려에는 밀이 적어 화북에서 들여온다. 따라서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서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 10여 가지 식미(食味) 중에 면식(麵食)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려 말의 중국어 회화책인 『노걸대(老乞大)』에는 “고려인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하였으니 아마 더운 국물에 국수를 만 국수장국(온면)의 형태이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국수를 한문으로 면(麵)이라고 하지만 면은 원래 밀가루를 의미한다. 밀(小麥(소맥))은 중동 지역에서 처음 심기 시작하였고, 중국에는 한나라(1세기경) 때 들어왔으며, 밀을 빻은 가루를 ‘면(麵)’이라 하고, 면으로 만든 음식을 ‘병(餠)’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의 『고금사물고(古今事物考)』에서는 “면(麵)으로 만든 것을 모두 병(餠)이라 한다. 불에 구운 것을 소병(燒餠), 국물에 담근 것을 탕병(湯餠), 찐 것을 증병(蒸餠)이라 한다”고 하였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農書)이며 음식책인 『제민요술(齊民要術)』(6세기경)에 처음으로 국수의 시초인 듯한 음식이 나온다. ‘수인병(水引餠)’이 그것으로 “조미한 육즙으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젓가락 굵기로 다듬어 1척 길이로 자르고 불 속에 담갔다가 손가락으로 부춧잎 모양으로 얇게 눌러서 하나씩 냄비에 넣어 삶아 내는 것”이라 하여 탕병(湯餠)의 일종으로 나온다. 당나라의 『자가집(資暇集)』에 “식도(食刀)와 면판(麵板)이 없을 때는 손으로 밀었으나 지금은 식도와 면판이 있어서 밀지 않는다”고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칼국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국수 만드는 법을 보면 “국수를 익힐 때에는 냉수를 많이 쓰고 익혀 낼 때 또 냉수에 담가 뜨거운 김이 다 빠진 후에 건져 내어 초, 마늘, 장, 기름, 부추 등을 섞어서 다시 국에 말면 맛이 매우 좋다. 국수는 온갖 잔치에서, 조반이나 점심에 안 쓰는 데가 없으니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누구를 대접하든 국수가 밥보다 낫다. 국수에는 편육 한 접시라도 놓으니 대접 중에 낫다. 국수는 모밀의 속껍질이 조금 있어야 맛도 낫고 자양(滋養)에도 좋으니 시골에서 만드는 국수가 빛은 검으나 맛은 좋다. 또 국수를 많이 먹으면 풍이 동하고 훌친다 하여 산모는 많이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면을 국수 또는 국시라 하는데 어원에 대한 고증은 없다. 『아언각비』에서는 “중국에서는 밀가루를 면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를 진가루(眞末(진말))라 한다. 그 후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면을 국수(匊水)라고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하였다.
요즈음 서울에는 ‘국싯집’이 꽤 있는데 ‘국시’는 ‘국수’의 사투리이다. 주로 안동, 상주, 문경 등 경상도 내륙 지방과 논산, 부여, 예산, 영동, 청주 등의 충청도 지방에서 무를 무수 또는 무시, 여우를 여수 또는 여시라고 하듯이 국수를 국시라고 한다. 이규태는 국수가 한문에서 왔다면 ‘국수(麴水)’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물 속에서 면발을 움켜 낸다는 뜻이고, 범어(梵語 : 산스크리트어)인 ‘쿠시’란 말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국수 먹듯 빨아들이는 것을 ‘쿠시’라고 하기 때문이다.
찬물에 헹궜다가 토렴하는 국수장국
국수를 더운 장국에 만 것을 국수장국 또는 온면이라고 한다. 국수장국을 맛있게 하려면 미리 국수를 삶아 놓지 말고 먹을 때 바로 삶아야 한다.
국수를 삶을 때는 큰 냄비에 물을 넉넉히 끓여서 국숫발을 헤치면서 넣어서 곧바로 전체를 잘 젓는다. 끓어오르면 찬물을 한 대접 부어 가라앉히고 잠시 더 삶는다. 국숫가락을 하나 건져서 찬물에 헹구어 심까지 물렀나 확인한 다음 소쿠리에 쏟고 바로 찬물에 담근다. 국숫가락을 머리감듯이 가볍게 문질러서 여러 번 헹군 다음 일인분씩 사리를 만든다. 찬물에 충분히 헹구어서 풀기를 빼야 국숫가락이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장국은 약간 짠 듯하게 간하여 미리 준비해 둔다. 사리를 한 번 데워서 그릇에 담고 꾸미를 얹은 후에 더운 장국을 붓는다. 이렇게 밥이나 국수를 더운 국에 한 번 데우는 것을 ‘토렴’한다고 한다.
조리법
국수를 더운 장국에 만 것으로 온면이라고도 한다.
국수장국
재료(4인분)
가는 밀국수 300g, 쇠고기(양지머리) 300g(물 15컵, 파 1뿌리, 마늘 3쪽), 소금·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적량, 달걀 2개, 호박(또는 오이) ½개, 석이 5장, 실고추 약간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양지머리를 파, 마늘과 함께 덩어리째 삶아서 고기는 편육으로 얇게 썰고 육수는 소금과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2. 달걀은 황백으로 나누어 지단을 부쳐 채썰고, 호박은 씨를 빼고 채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꼭 짜서 살짝 볶고, 석이는 더운물에 불려 깨끗이 손질해서 가늘게 채썰어 살짝 볶거나 끓는 물에 데친다.
3. 물을 끓여서 국수를 삶아 냉수에 건지고 일인분씩 사리를 만들어 채반에 건져 놓는다.
4. 국수 사리를 더운 장국에 토렴하여 대접에 담고 편육을 얹는다. 위에 오색 고명을 고루 얹고 더운 육수를 옆에서 살며시 붓는다.
궁중 잔칫상에 올랐던 면신선로
궁중 음식 중에 ‘면신설로(麵新設爐)’가 있는데 고종 때 조대비의 환갑 잔칫상에 나왔다고 한다. 보통은 신선로(神仙爐)라고 쓰지만 ‘새로 생긴 화로가 붙은 냄비’라는 뜻으로 신설로(新設爐)라 표기하였다. 1800년대 후반의 궁중 음식 기록 문서인 몇몇 음식 발기(件記(건기))에서는 ‘면신션로’라고 하였다. 재료로는 메밀국수와 도가니, 묵은 닭(陳鷄(진계)), 달걀, 후춧가루, 간장(진간장)의 여섯 가지가 쓰였다. 도가니와 닭을 한데 무르게 삶아 장국을 만들고, 익은 고기는 잘게 썰어 장국과 함께 신선로틀에 담아 끓으면 삶은 메밀국수를 장국에 말고 고명으로 달걀 지단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인 한희순 상궁이 전하는 면신선로는 어물과 채소를 신선로에 끓이다가 따로 준비한 삶은 국수에 얹어서 먹는 해물 신선로이다.
조리법
신선로 틀에 쇠고기와 새우, 해삼, 여러 채소를 돌려 담고 끓여 국수에 말아먹는 음식이다.
면신선로
재료(4인분)
쇠고기(사태) 300g(물 15컵, 파 1뿌리, 마늘 3쪽), 소금·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각 적량, 패주(중) 3개(100g), 분홍새우 150g, 해삼(불린 것) 100g, 죽순(삶은 것) 100g, 실파 50g, 쑥갓 50g, 다홍고추 1개, 미나리 100g, 달걀 3개, 가는 밀국수 300g, 쇠고기(우둔) 100g
(가) 소금 1큰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후춧가루 약간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사태는 덩어리째 씻어서 파, 마늘을 넣고 무르게 푹 삶아서 고기는 얇게 저며 (가)의 양념 ⅔ 분량으로 무치고, 국물은 식혀 기름을 걷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2. 쇠고기 우둔살은 얇고 잘게 썰어 (가)의 남은 양념으로 무친다.
3. 패주는 가장자리의 막을 떼고 씻어서 결과 반대로 어슷하고 얇게 저미고, 새우는 꼬리쪽 한 마디만 남기고 껍질을 벗기고, 해삼은 불려 놓았다가 납작하게 저며 썬다.
4. 삶은 죽순은 반을 갈라서 빗살 모양으로 얇게 썰고, 실파와 쑥갓은 다듬어서 4cm 길이로 썰고, 다홍고추는 갈라서 씨를 뺀다.
5. 미나리는 다듬어서 10cm 길이로 끊어 가는 대꼬치에 위아래를 번갈아 꿴 다음 밀가루와 달걀을 씌워 미나리초대를 부친다. 달걀은 황백으로 나누어 얇게 지단을 부쳐서 넓이 3cm의 골패형으로 썬다.
6. 신선로틀에 ①의 삶은 고기와 ②의 날고기를 아래에 깔고 준비한 재료를 가장자리에 고루 돌려 담은 다음 더운 육수를 붓고 끓인다.
7. 밀국수를 삶아 따로 대접에 담고 신선로가 끓으면 국물과 건지를 떠서 국수에 붓는다.
평양의 명물 어복쟁반
향토 음식 중에 평양의 명물로 냉면과 더불어 ‘어복쟁반’이 있는데 보통 ‘쟁반’으로 통한다. 지름이 50cm 가량 되는 놋쟁반에 쇠고기편육, 특히 젖가슴(乳筩(유통)) 살을 얇게 썰어 양념을 하여 돌려 담고 삶은 달걀, 파, 배 채 등을 고루 덮어서 육수를 부어 끓인다.
쟁반 한가운데에는 초장 종지를 놓아 편육과 건지를 찍어 먹게 되어 있다. 편육이 거의 다 먹을 무렵에는 삶은 메밀국수 사리를 넣어 잠시 끓여서 먹는다. 서너 사람이 한 쟁반을 끓이면서 술을 곁들여 담소를 나누면서 먹는 데 묘미가 있는 음식으로, 국수를 장국에 말아먹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조리법
서너 명이 쟁반을 가운데 두고 끓이면서 술을 곁들여 담소를 나누며 먹는 데 묘미가 있는 음식으로 평양의 명물이었다.
어복쟁반
재료(10인분)
양지머리 600g, 유통 600g, 지라 600g, 우설 600g, 물 4리터, 파 1뿌리, 마늘 5쪽, 생강 1톨, 표고 100g, 느타리 200g, 달걀 2개, 파 200g, 배 1개, 쑥갓 150g, 메밀국수 10사리,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후춧가루 적량
(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1큰술, 소금 1작은술, 다진 파 4큰술, 마늘 2큰술, 참기름 2큰술, 후춧가루 약간
(나)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5큰술, 물 5큰술, 다진 파 2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후춧가루 약간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쇠고기 각 부위를 덩어리째 찬물에 담가서 핏물을 빼고 푹 무르게 삶아서 건진다. 끓이는 도중에 대파, 통마늘, 통후추 등을 넣어 한데 끓인다. 익은 고기는 건져서 식혀 얇게 썰고, 국물은 기름을 걷어내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으로 싱겁게 간을 맞춘다.
2. 버섯이 마른 것이면 불리고 생것이면 끓는 물에 데쳐서 채썬다. 쑥갓은 다듬어 짧게 끊어 놓고 파는 채썬다.
3. 편육과 버섯은 (가)의 양념장으로 각각 무친다.
4. 배는 껍질을 벗겨서 채썰고, 달걀은 완숙하여 껍질을 벗겨서 길이로 4등분한다.
5. 메밀국수는 약간 단단하게 삶아서 사리를 만든다.
6. 넓은 쟁반에 양념한 편육과 버섯을 고루 깔고 사이사이에 파채와 배를 돌려 담고 달걀을 놓는다. 가운데에 (나)의 양념장을 만들어 종지에 담아서 쟁반 가운데 놓는다.
7. 뜨거운 육수를 간을 약하게 맞추어서 쟁반에 붓고 불 위에 얹어서 끓인다. 먼저 편육과 버섯을 건져서 양념장을 찍어 먹다가 반쯤 먹으면 육수를 더 붓고 메밀국수와 쑥갓을 넣고 잠깐 끓여서 건져 먹는다.
우동은 일본말?
흔히 굵은 국수(가락국수)를 우동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이 말이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일본말이다. 『정장잡기(貞丈雜記)』에 “당대에 ‘혼돈(混沌)’이란 말이 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속에 소를 넣고 둥글게 만들어 삶은 음식으로 혼돈의 원래 뜻은 둘둘 말아서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氵)’변 대신에 ‘식(食)’변으로 적어 ‘혼돈(餛飩)’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에서 뜻이 바뀌어 밀가루 국수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다. 또 더운 국물에 말아먹기 때문에 ‘온돈(饂飩)’이라고도 표기하여 지금의 우동이란 말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성우 교수는 오늘날 중국에서는 혼돈이 북경어로는 ‘hwentwen’이지만 광동어로는 ‘wantan’이고, 중세적 한어 발음으로는 ‘오돈’이니 오히려 이쪽이 더 타당하다고 하였다.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1611년)에는 “오동(吳同)이라는 사람이 사면(絲麵)을 잘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칭찬을 한다”고 씌어 있는데 오동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말로 ‘Wu Tung’이니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