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아브라함 신부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사도행전 9,26-31
요한 1서 3,18-24
요한 15,1-8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 성모성월이여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5월 성모성월입니다.
이 부활 시기에 사랑하올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상경지례하고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모든 신자가 기쁨의 부활 시기를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신도들과 모임을 함께 하려 했으나
그들은 사울이 개종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는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을 낱낱이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바오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오로지 주님 말씀을 전하는데 나머지 인생을 투신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탄생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복음 15장1절-2절).”
여기서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지는 제자들, 믿는 이들, 우리를 나타냅니다.
가지인 제자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요한 복음 14장 38절)”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야로 가실 터이니(마르코 복음 16장 7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습니다(요한 복음 15장 9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 계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부활 시기를 살아가는 신자 여러분!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청주교구 김지수 아브라함 신부
2021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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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기 베드로 신부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사도행전 9,26-31
요한 1서 3,18-24
요한 15,1-8
‘잘려 나가면 어떻게 하지?’
‘참 포도나무’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장 먼저 저를 사로잡는 마음은 바로,
‘잘려 나가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신다.’라고 하시니,
이 불안한 마음은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걱정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싫어하게 만들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더 노력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노력한 대로 일이 잘 풀리면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늘 노력한 대로 잘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하지요.
‘하느님께서 실망하실 텐데….’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텐데….’ ‘잘려나갈 텐데….’
예를 들어, 어느 훌륭한 분이 계시는데 이분께서 나를 볼 때마다 나에게 실망하시고, 심판하시고,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신다면,
우리는 이분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고, 웬만하면 이분을 피해 도망 다니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좋아하기도, 가까이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더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에게서 떠난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 배은망덕한 일이 되거나 벌 받는다고 하니,
가까이 갈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숨막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며 죄책감과 좌절감 때문에 우울해지거나,
이렇게 애쓰며 노력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안일하고 이기적인 주위 사람들을 비난하고 미워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그럼 된다.’라고만 하시죠.
사실 잘 가꾸어진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알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이미 ‘깨끗해진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약하지만 이런 우리를 아끼시고 살피시는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이 좋아지고 함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너그러움을 만나면 감사하고 기쁘겠지요.
기뻐하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주님께 닮아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로움을 믿는것’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해서임을 눈치채고,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너그러우신 주님을 다시 만나면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비를 더 깊이 만날 수 있기를 청하시고 청한 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수원교구 조원기 베드로 신부
2021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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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 바오로 신부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사도행전 9,26-31
요한 1서 3,18-24
요한 15,1-8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요한 복음 15장 1절)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연병장에서 출발한 일 톤 트럭 뒤칸에 일용직 품팔이처럼 실려 도착한 곳은 동네 어귀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포도밭입니다.
길게 늘어선 지지대 사이로 허리춤 조금 위에 뻗은 포도나무 가지. 그 아래로 몸을 굽혀 들어갑니다.
이 빠진 낫과 녹슨 호미를 마른 손에 나눠 쥐고는 허리를 펼 수 없어 네 발로 땅을 기듯 김을 매고 잔돌을 치웁니다.
익숙지 않은 일에 부지런히 열심히 손을 놀리기는커녕 손목의 전자시계 분침이 채 한 바퀴도 돌기도 전에
지지대 밖으로 벗어납니다. 그제야 허리를 치켜세우며 지친 척 보이기 위한 거친 숨을몰아쉽니다.
포도밭 아래 선, 유독 느린 시계를 야속하게 바라봅니다. 아니 군 생활 내내, 시계는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밭 주인아저씨는 들락날락하기만 하는 미덥지 않은 군인 청년의 설익은 밭일에는 이미 익숙한 듯
무뚝뚝한 입술 사이로 뜻 모를 옅은 미소만 머금고, 가만히 지켜보며 한 켠에 서 있을 뿐입니다.
어찌 어찌 시간이 흘러 점심을 다 먹도록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떨떠름한 훈계나 타박조차 없습니다.
오늘처럼 복음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읽을 때면 가끔 기억이 납니다.
밭일엔 별 도움 안 되는 젊은 병사가 요령만 부리다 되려 밭을 망칠지 모를 일입니다.
한데 그런 이를 데려다가 일을 맡기는 헤아리기 힘든 농부 아저씨의 속내는 뒤로하고
농사일의 고됨을 과장 스레 포장해서 안주로 삼아 떠들수 있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복음 15장 5절)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 머물러 붙어있는 일상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은 아닐진대,
변명과 핑계로 주님과 그분의 일을 힘겨워하는 모습. 멀리하거나 모른 척하는 일이 내 삶에 자리하고 있음을
곱씹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가장 고된 일로서 고랑을 파고 지지대를 세우고 비료를 주고 이곳저곳을 살피는 참 노동은
밭 임자의 몫으로 남아있을 텐데. 그 주인은 복음말씀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이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돌보아 주시는 농부이신 하느님은 오늘도 묵묵히 일하고 계십니다.
한데 나는 그것을 당연하리라 여김으로써 감사의 기억을 내려놓고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작은 고됨에
힘겨워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고됨에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방관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믿고 신뢰하여 내가 마땅히 견디어 내기를 응원하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분노와 화를 감출 길 없는 일들이 더 자주 눈에 보이는 요즘입니다.
그렇지만 더더욱 기쁨과 감사의 일들을 찾는 것에 주목해야 할 요즘이기도 합니다.
후자가 나와 나의 일상을 변화시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오늘을 보내시길 기도해 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이현수 바오로 신부
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요한 14,7-14
그러나 우문(愚問)은 없다.
빵을 받아먹은 유다가 고별식장을 떠나 스승을 넘겨주기 위한 작업을 실행에 옮기고,
수제자 베드로까지 스승을 배반할 것이 예고됨으로써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공포와 불안에 싸여있는 가운데, 어제 복음에서 토마는 예수께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라는 대답으로써 토마 사도의 무지를 불식시키셨다.
무지의 불식은 동시에 불안과 걱정을 제거한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고별의 저녁시간이 깊어간다.
이 틈을 놓칠세라 지칠 줄 모르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된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7절)
예수께서는 문법상 미래형(알게 될 것이다)과 현재완료형(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완료형(이미 뵈었다)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교수(敎授)하신다.
예수님은 작별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피부로 느끼시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는 전제아래
속성법(速成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속성법의 의도가 빗나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필립보 사도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엉뚱한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람이다.
즉, 토마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7절)
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확실하게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스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난감해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필립보 사도의 소망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법도 하다.(8절)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시청(視聽)되었으며 감지되었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각적 차원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인간은 오직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다시금 예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으며(12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며(13절),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14절)을 의미하는 말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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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요셉 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요한 14,7-14
사도행전 13,44-52
땅 끝마다 우리 주님의 구원하심을 우러러보았도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부인이 악처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왜 그런 악처와 사십니까?”하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아, 그 사람과 살아서 내가 철학자가 되지 않았는가.”
시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법이지요.
시련은 사람을 아프게도 하지만 성숙시키고 승화시키는 은총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요즈음 계속해서 독서 말씀으로 사도행전을 듣고 있습니다.
특히 13장부터는 말 그대로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 후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 길을 달려갔지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런 바오로 사도를 ‘그리스도의 발명가’라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접 주님을 뵙는 큰 은총을 입은 바오로 사도는 그 후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시련과 박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지요.
이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은총을 주시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실까요?
다윗과 모세, 구약의 예언자들,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요셉, 신약의 사도들과 심지어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까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던 인물들은 모두 다 똑같이
시련 속에 살았습니다. 고통이 끊이지 않았지요.
오늘 독서에서도 시작하자마자 반대에 부딪히는 사도 바오로의 시련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듣고 몰려들지요.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시기심에 북받쳐 바오로 사도의 말을 반대하며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대꾸하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3,46-47)
유다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이제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독서에 계속 나오는 대로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사도13,50)라고 했습니다.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지요.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후서 11장에서 속된 것을 자랑하며 공동체를 유혹하는 거짓 사도들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참 일꾼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유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2코린11,23-27)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바오로 사도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증언하며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씨를 뿌리는 위대한 사도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우에 우리는 “왜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시는가?,
왜 내 가정, 내 자녀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주어지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치워달라고 기도하지요.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시련은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바오로 사도나 베드로 사도의 삶의 과정을 통해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오히려 시련과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지 않은 그 자체가 어려움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타협하며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길과 세상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이 편할 뿐더러 신앙 생활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여러 가지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므로 성당에 나온다고 하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님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며 세상과 부딪혀본 적이 있습니까?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파선을 당하고 추위와 굶주림, 헐벗음으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오로는
그 모든 고난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 모든 고통을 감싸고 남을 만큼 넘치도록 내린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4,8-10)
요즈음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계속 들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부활을 사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깨달은 대로 실천하고 있으신지요?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욕을 먹으며 심지어는 따돌림당하는 처지에 빠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고난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기쁨이 되고 실패로 보이는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오늘도 사도 바오로가 보여주고 있으며,
이천 년 그리스도 역사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한계를 절감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시련과 고통은 변하지 않지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복음 선포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또한 복음을 전하며 남편과 부딪힐 수 있고 자식과도 부딪힐 수 있으며
형제나 이웃과 부딪힐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변화시켜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흐름이 금방 변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통을 계속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은 역시 기도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좌절을 모르는 희망, 꺾이지 않는 힘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1코린2,10)
바오로 사도의 열정적인 선교를 마음에 새기고 좀더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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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3,44-52
요한 14,7-14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또는 내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다면 그분께 원하는 것을 다 달라고
청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표현은 직접 하지 않지만,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감춘 채 하느님을 내 마음속에
우상으로 만들어, 자동판매기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필립보의 말 속에는 이런 우리의 마음도 숨어 있습니다.
“당신이 해 주시기만 하면 …….”이란 조건을 걸고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우리 속마음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믿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손길과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 안에서 보는 사람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유다인들 앞에서 그랬듯이,
사람들의 모함과 박해에도 담대히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살아갑니다.
정작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을 찾으면 답이 보일 것입니다.
멈추고 내려놓는 일, 용서하는 일, 기다려 주는 일, 사랑하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