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1.21. ) 말씀/히브리서 3:13 오늘을 살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여러분,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아시나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 이 말이 나옵니다. 영국의 보수 입시 명문고 웰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아이비리그로 진학하기 위해 마치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 양 책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교장은 졸업생의 75% 이상이 명문대에 진학했음을 자랑하며 전통, 명예, 규율, 우수라는 학교의 4대 교훈을 지킬 것을 외칩니다. 그의 좌우명은 원칙에 입각해 헌신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 영어 선생의 퇴직으로 이곳 출신 키팅이라는 선생이 부임하여 수업을 하는데 처음부터 파격적인 교수법을 펼칩니다. 우선 그는 자신을 선생이 아닌 ‘오, 캡틴 나의 캡틴’으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번스 박사가 쓴 도식적인 교과서의 머리말을 당장 찢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페 디엠’이라는 라틴어를 강조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진정한 목적은 사회, 문학, 낭만, 사랑이고 이러한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카르페디암‘ 곧 오늘을 잡아야 하는거야(영어로는 Seize the day) 그렇다면 오늘을 살라는 이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 미래 내일이 아니다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세상 형식과 제도, 규범을 쫓아 사는데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먼 미래만 준비하며 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주변에서 평생을 삶의 목적과 먼 법률, 의학. 경제, 천문, 수리를 공부하며 성공적인 인생을 이루었지만 정작 삶은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어느새 병들고, 늙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고,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은 많이 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삶은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키팅 선생은 자신이 그런 인생을 살아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새 교육을 시도한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우리는 시간의 안배를 잘 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의 삶은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오늘 현재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오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의 시간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입니다. 오직 현재의 시간을 인식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과거도 치유할 수 있고, 아름다운 미래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달리 과거를 생각하면 아프고 힘든 기억만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과거의 눈물도 불행이 아닌 행복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과거도 재 해석 되어 다시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우연은 없고 필연이라고 했는데 오늘이라는 시간들이 쌓여서 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모습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면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잘 살고, 잘 사는 미래를 바란다면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도 있습니다. 니체는 지금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일이 예전에 행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윤회한다고,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다시 태어나 반복된 삶을 산다고 해도 나는 오늘 이처럼 사는 것을 택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후회스럽고, 아쉽고..이렇게 살고 다시 싶지 않다, 차라리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재의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보람있게 즐겁게 사는 것이 윤회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 일을 미루며 살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령 성공을 한다고 해도 먼 훗날 되돌아보면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시편 39:6절은 이렇게 말 합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미래만을 위해 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도, 시간도 쌓아놓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잘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도 지금, 베푸는 것도 지금, 하고 싶은 일 하는 것도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것도 지금, 아내와 데이틑 하는 것도 지금, 자녀들과 소풍하는 것도 지금, 이웃 사랑도 지금,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것도 지금, 좋은 일 하는 것도 지금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는 것도 지금입니다. 실제 가용한 시간은 지금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꿈을 꿔도 미래는 가상이고, 내일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막상 머리로는 알아도 카르피디엠하는데 서투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선물이라는 개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과거로 자꾸만 넘겨 버립니다.우리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어 ‘present’는 ‘현재’와 ‘선물’이라는 두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가 선물이면 선물은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물 포장도 뜯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의 행복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9:9 .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고린도 후서 6:2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받는 것도 지금, 구원도 지금입니다. 히브리서 3: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피차 권면도 오늘입니다. 야고보서 4:13-14도 보십시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어떤 것도 내일은 없으니 오늘을 충실히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현재를 충실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직된 전통, 구조, 틀을 과감히 깨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관념과 전통, 율법적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바래새인들이 율법과 장로의 우전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등 파격적인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우리를 섬기시고, 죄인처럼 죽으심으로 율법과 죄와 전통에 갇혀 살아가던 우리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이 작품에서도 키팅 선생님의 행동은 아주 파격적 이었습니다. 그동안 영국의 보수 명문고 웰튼 아카데미의 전통은 아무도 깰 수 없는 틀을 깼습니다. 오직 학교의 방침과 학부형들의 바람에 부합하도록 오직 공부에만 매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키팅 선생을 만나서 의식의 전환을 갖게 되고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을 배웁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시작 모임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하고, 밤에 몰래 나가 인디언 동굴에 모여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공부가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친구들은 각자의 일탈을 시도합니다. 닐의 경우는 의사가 되라는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아버지에게 반발해 평소 꿈꾸었던 연극배우가 되고자 극단에 입단합니다. 심히 연습한 끝에 드디어 공연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은 물론 아버지까지 초대합니다. 연극이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이 닐에게 열광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만큼은 그를 강제로 집에 끌고 옵니다. 닐은 절망한 그날 밤 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합니다. 개봉 당시 관객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은 걸작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감독, 1989)가 오늘에도 감동을 주는 것은 여전히 세상은 자본주의로 인한 출세주의, 금전만능주의가 더욱더 심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스펙 만능주의와 기존의 악습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작품 평을 합니다. 작품을 해설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봐도 키팅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입니다. 자기애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운명애의 니체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이거나 무분별한 반항은 지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방종의 위험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키팅 선생이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은 획일적인 것도 아니고, 방종도 아니고, 기존의 삶의 일탈도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독특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에 나오는 키팅의 대사들 그 자체가 하나 하나가 어록이자 철학입니다.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라, 언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워라. 언어와 사상이 세상을 움직인다. 미와 낭만과 사랑은 삶의 이유이다. 너의 인생은 계속되는 극 속의 시가 된다.” 왜 언어를, 시를 배워야 하는지 정확하게 집어낸 명제들입니다. 우연히 키팅의 교수법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긴 한 동료 교수는 “현실을 직시하라.”라고 충고하지만 키팅은 개의치 않고 “난 자유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응수합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언어가 발전한 이유는 여자를 유혹하려다 보니.”라고 해석해 준 뒤 교탁 위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모두 책 상위에 올라가라고 합니다. 이 장면이 압권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공부하는 신성한 책상 위이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는 사람? 질문 합니다.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과거와 다른 각도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을 살기를 원한다면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독서할 땐 작가 생각뿐만 아니라 내 생각도 중요하다.”, “사고의 전환으로 새것을 개척하라.”, “인생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한다.”, “소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각자의 걸음걸이를 찾아서, 각자의 방향을 찾아 걸어라. 억지로 꾸밀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당당히 세상에 맞서라.” 깊이 생각해야할 말들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획일적인 틀에 갇힌 신앙이 당장에는 안전한 것 같지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정신은 자유입니다. 결코 전통이나 틀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자유가 먼저였습니다. “임의로”라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 자유가 없다면 생명나무와 그 많은 먹기 좋고 보기 좋은 아름다운 과실과 좋은 풍경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방종할 수 없는 하나의 질서가 법으로 주어졌습니다. 질서는 틀이 아닙니다. 자유가 자유 되기 위해 지켜주는 법입니다. 그 법을 어기고 인간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쫒겨났지만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18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자유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5:13절은 자유에 질서를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자유로 사랑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그게 진정한 자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 전통에 도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반대와 저항이 따르게 됩니다.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문둥병자, 혈루증 앓는 여인, 자신의 삶을 찾고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눈치도 율법도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믿음으로 도전해서 획득했습니다. 어렵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종속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키팅 선생님 시도는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지만 많은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은 자살을 하였고, 퇴학의 위기를 맞았고, 키팅 선생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이 헛되지 않아서 마지막 순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책상에 위에 올라가 선생을 배웅합니다.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감동의 장면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도 이런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무서운 전통, 구약의 율법이 있고, 전해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것을 따릅니다. 매일 손을 씻고 짐에 들어오면 물을 뿌리고, 죄인들과 밥을 먹지 말고, 주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샤워도 말고, 버스도 타지 말고, 물건도 사지 말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값고, 해마다 세 번씩 절기를 지키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그 외에 많은 절기들...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이고, 부모를 거역하면 죽이고, 간음해도 죽이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말고,,, 이런 율법들을 문자적으로 지키며 산다면 우리는 그 안에 갇히게 됩니다. 자유 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 필요한 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이지 우리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무균실에 가두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틀 속에서 신앙은 경직되고, 자유를 잃게 됩니다. 참 신앙은 복음 안에서 자유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면서 주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은사를 발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핵심적 질서는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모든 계명을 이루며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20년 전부터 개혁을 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자유였습니다. 잘 한 것이 없고 일한 것이 없어도 자유할 수 있다는 것, 다시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독특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 내 은사를 찾아 개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같으면 어떻게 목자가 베짱이처럼 악기를 연주하겠습니까? 과거 같았으면 어떻게 인문 고전 소설 철학 책을 읽고 니체를 배우겠습니까? 그러나 자유 속에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날마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며 사랑하며 배우라고 강권합니다. 겨울이어도 새벽 4시 50분이며 새벽 큐티 말씀이 시작 되고, 매주 수요일이면 일을 마치고 피곤 중에도 자발적으로 교회로 몰려와 책 읽기를 하고 배우고 생각한 바 서로 은혜를 나눕니다. 전번에는 이두인 장로님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독서모임을 참석하고 ,지난 주는 탈북여성 출신 이도희님이 독서모임 참석하고 돌아가면서 목사님 많은 은혜를 받고 갑니다. 인사를 전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각지에서 참여하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지체들의 먹고 마시는 모든 일상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스토리를 듣고 사진과 함께 우주적으로 나눕니다. 시간이 살 같이 빠르고 주일이 금방 돌아오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육신을 쇠패하나 정신과 영은 날로 새로워지니 늘 청춘입니다. 지홍 집사님은 주 5일 빡세게 우유달을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과정들 속에서 날마다 기쁨으로 춤추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한다고 하며 어늣 철학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현실감 없는 막연한 미래를 생가했는데 이제 국님 연급도 들고 실손 보험도 들고 현실에 준비성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중집사님은 요즘 인생이 영원히 회귀 된다 해도 그렇게 살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책을 잡고 저녁을 보내며 배우고 성장하는 재미에 흠뻑 젖어있습니다. 현옥 집사님은 직장에서 돌아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고 합니다. 아내의 존경을 받는다 이것은 최고입니다. 전에는 아직도 멀었다고 했는데 시간이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인데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이렇게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저도 행한다. 우리 지체들 속에 익어가는 냄새가 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오늘 하루 하루를 우리 모두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살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