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 받으셨는가?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첫째,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0절)
-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표현을 두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하신 분이라고 오해 하면 안됩니다. 본문의 온전하게 되다의 뜻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제사장 직분의 사역을 수행할 만한' 완전한 자격과 능력을 충족시키셨다.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음으로 말마임아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제사장 직분을 담당하십니다. 그 죽음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으신 대제사장이 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에 관한 언급은 17절에 다시 나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인 죽음은 죽음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14절)
-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죽음을 무력화 시킵니다. 특별히 죽음으로 맞이하는 형벌을 무력화 시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없애기 위한 죽음으로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 대신 지신 고난이죠.
셋째, 죄를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17절)
- 예수님의 죽음의 고난은 죽음을 무력화 하고, 그에 따른 형벌을 무력화 시킨다고 언급했는데(14절) 당연히 형벌이 무력화 되었다는 것은 형벌의 기초가 되는 죄의 '정당한 속량'을 의미합니다. 정당한 속량이란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말마임아 받아야 할 고난의 대가를, 대신 고난받으시는 것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넷째, 시험받는 자를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18절)
- 시험받으시는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험받는 것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2. 형제, 자녀, 백성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향하여 부르시는 특별한 호칭이 나옵니다.
첫째, 백성입니다.(17절) 이는 우리가 구약을 통하여 익숙하게 들었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서 위치를 말합니다.
둘째, 자녀입니다.(14절) 여기서는 왕-백성의 차이보다 더 가까워 졌습니다. 부모-자녀의 관계로서 우리를 지칭하십니다.
셋째, 형제입니다. (2:11,12,17, 3:1) 왕-백성, 부모-자녀 보다 더 관계의 높낮이가 없어졌습니다.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3. 묵상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시는 고난과 함께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그의 백성이고, 자녀이며,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매우 사랑하셔서 가장 가까운 관계로 부르시고, 그에 따른 우리의 고통을 가져가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방이 받아야만 하는 고통을 자신에게로 이전시키는 사랑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수고를 내가 대신 자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들을 내게로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감각적이고, 쾌락적이며, 즐거움을 향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내것으로 여기는 대속적 사랑은 보기 어렵습니다.
자녀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한가지 형태로 여겨집니다.
연인간에 서로 이벤트와 선물은 많이 하지만, 그 사람이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하여는 소통하기 어려워 하고 같이 그 고통을 겪어나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부부 역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면 쉽게 이혼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평생 살아갈 바에는 이혼하고 새로운 사람(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을 찾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돈이 주는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주는 고통보다 크다고 여깁니다.
사랑은 고통도 기꺼이 내포하고 가는 일인데, 어느새 고통이 있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며, 짧은 인생 고통때문에 허비하지 말고 더 좋은 상대를 찾아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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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하루 하루, 혹은 한 주 한 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호소하며 채워달라는 요구 때문에 어느새 지친 마음으로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왜 내 주변에는 이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겨갈 수 있는 사람이 적은가? 이제 다들 스스로 조금만 더 성장하여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을 보면, 자신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한사람을 위해 고난 받을 때, 가장 거대한 사랑이 되었던 것처럼, 제 삶에도 누군가 때문에 대신 고통이 있다면, 제 삶에 하나님의 사랑을 그려나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저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며 저의 고통을 대신 채워주려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혹, 오늘 내가 가진 마음과 시간과 돈을 나 아닌 사람을 위해 허비 했다면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고 가꾸어 가시는 중이라는 사실에 감사와 감격이 있길, 그리고 위로가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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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름 문장 >
1.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10v)
2.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를 멸하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11~15v)
3.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하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해 몸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16~1v)
<본문의 명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우시기 위해 몸소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창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구원의 창시자이신지를 설명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와 자녀로 삼기 위해 우리처럼 혈육을 지닌 사람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10v)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므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임
⇒ 10절 우리를 구원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구원의 개척자’이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이 없고, 죽음 없이 영생이 없으며, 순종 없이 구원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구원의 주를 따라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께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고(빌립보서 2장 12절)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11v)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음
(12v) 그리하여 그분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다고 말씀하심
(13v)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 있다고 말씀하심
(14v)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고,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말마를 멸하시기 위함임
(15v)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음
⇒ 14, 15절 죽음을 무기로 인간을 사로잡은 마귀를 멸하는 방법은 또 다른 죽음, 즉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사망’이 되셔서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무력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죽음을 빌미로 횡포를 부리는 마귀에게 굴하거나 부활의 소망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16v)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 주심
(17v)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고,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임
(18v)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음
⇒ 16~18절 예수님 같은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공감하며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죄의 유혹이나 시련이 급습할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확신 있게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1v)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인 우리는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함
⇒ 3장 1절 우리는 장차 올 세상(2장 5절)에서 주와 함께 다스리기 위해 “함께 하늘의 부름을 받은” 순례자입니다. 그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앞서 가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선과 마음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숱한 시련과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기(2장 18절)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은 모세(3장 2절)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그분의 과분한 은혜이고, 신실한 순종입니다. 내 묵상과 삶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입니까, 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