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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문학 제20회 백일장 수상작품
초등부 운문 장원
가로수
문광초등학교4
최 미 정
차렷!
열중쉬어!
아직 줄이 안 맞아...
선생님의 호령소리
아휴 무서워...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이리저리 보아도
줄이 맞는다...
너희는 안 혼나겠다...
차렷!
열중쉬어!
내가 호령해도
꿋꿋이 서있는
멋진 가로수
초등부 산문 장원작
길
괴산명덕초6
정 은 기
어느덧 텃세를 부리던 여름이 물러갔다. 오늘 가을비가 괴산을 흠뻑 적신 것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여기저기 길에 코스모스가 만발하고, 높고 푸른 하늘이 내 마음을 채워준다.
가끔 동진천을 따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엑스포를 방문해서도 걷게 되는 것이다. 구름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 혼자 공상에 사로잡힌다.
또 난 길가에서 책을 본다.
걸어가며 책을 읽으면 뭔가 책속에 푹 빠져들게 된다. 대신 앞을 보지 못해 정말 자주 넘어진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책 속에 퐁당 빠져들 때이다. 역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나는 하늘을 보며 생각하기를 ‘내 인생의 길은 무엇일까? 또,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라면서 나의 진취적인 목적지를 열심히 찾아본다. 내 인생의 길은 이렇게 가꾸어 보고 싶다.
첫째, 열심히 집중해 달릴 수 있는 길, 나는 무언가를 배우면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기를 노력하는 타입이다. 그러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좀 실망하는 편이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기 위해 나를 위해 노력한다.
둘째, 힘들면 쉴 수 있는 모두의 길. 또한, 나는 쉴 때는 확실히 쉬어야 한다. 쉼을 좋지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각박해질 것이다. 모두와 함께 달리고 모두와 함께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을 조성하고 싶다. 마음의 휴식처가 꽃길, 즉 행복이 넘쳐나는 길인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모두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무성한 길이다. 모두를 위한 피톤치드를 내뿜는 나무처럼 내가 쉼터가 되어주고 싶다. 누군가의 길에서 웅장한 아름드리나무처럼 멋지게 품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서번트 리더’ 즉, 남을 위해 헌신하고 소통하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의 길은 세 가지가 각각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 ‘목적지’ 라는 곳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길의 최종 목적지는 타인을 위한 삶의 휴식처가 되고, 편히 기댈 수 있는 엄마가 되어 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물론 아직 시작에 불과해서 많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아이일지 모르지만, 나도 내 인생의 길을 정해 그 길을 가슴속에 새겨 둘 수 있기만 한다면, 비탈길로 삦;w; 않고 삐뚤삐뚤 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목적지를 생각하고 그 점을 이으려고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숲속 작은 옹달샘’이라는 곳에서 고도원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그분은 인생을 점에 비유하셔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점들을 이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드는 것이라 하셨다. 나도 때론 힘들고 지쳐도 마음에 뚜렷한 점을 찍고 나아가고자하는 길에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길을 위해, 그리고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이번 백일장도 그 길에 아름다운 선을 그어준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모두를 향해 감사하다고 할 수 있고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을 모두를 위해 쓸 수 있는 그런 날...
중등부 운문 장원
꿈
괴산북중1
진 선 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
과연 그것이 정말 꿈일까?
그것이 꿈이라면 왜 공부만 할까?
하지만 지금 내 꿈은 나를 이기는 것
높은 장벽을 뛰어 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나였다
장벽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꼭 알고 싶다
꿈을 찾는다는 건
장벽을 넘기 전 호흡을 가다듬는 것
꿈을 찾았다는 건
도움닫기를 하는 것
꿈을 이뤘다는 건
크디큰 장벽을 넘었다는 것
나도 꼭 그 장벽, 넘고 싶다
중등부 산문 장원
내가 찾아가는 나만의 길
청천중3
박유정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미 정해놓은 길이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같이 고민하는 척, 아직 정해놓지 않은 척 했지만 내가 커가면서 같이 커져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글로써 표현해보겠다. 7살 때 나는 어린이집을 다녀온 뒤,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슈가슈가 문을 보다가 그 만화가 끝나서 다른 채널을 찾고 있었다. 한 다섯 채널쯤 돌리니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을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고 싶어,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을 잊지 않고 의사라는 꿈을 이뤄 아픈 사람을 보듬어 줄꺼야!’라는 다짐을 했다. 2006년 8월19일 꿈을 찾은 나는 감기가 드셨던 할머니를 모시고 의사놀이도 해보고 난리법석을 쳤던 철없는 모습부터, 어느새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의사와 관련된 책을 읽고 있던 나까지 그렇게 나는 내 꿈들의 흩어진 조각을 맞춰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이 한 번에 쫙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승마체험을 다녀온 날 저녁부터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3일이 지나도, 5일이 지나도 도저히 가라않던 그 아픔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일주일이 지난 뒤, 이젠 걸음까지
똑바로 걷지 못했던 나는 바로 병원에 갔다. X-RAY부터 모든 정밀검사를 받고 엄마와 함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도 무척 초조해 보였지만, 나는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암흑 같았는지 모른다. ‘평생 입원해야 하면 어떡하지? 아니 설마 영영 걷지 못하면 어떡해 ㅠㅠ’ 라는 생각을 비롯해서 머릿속엔 이미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머리가 터질 지경에 이르자 의사선생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 내 병명은 고관절염으로 이 질환은 5~60대 노인 분들께 오는 병이지만 내가 걸린 이유는 선천적으로 무릎 뼈가 3배정도 안 맞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로 인한 무리가 골반 뼈 부근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무리하면 무릎 뼈가 아예 뒤집힐 거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 . 나는 한동안 머리가 멍해졌다. 이렇게 되면 의사란 나의 꿈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수술대에서 3~4시간은 서 있어야 하는데 2시간만 서 있어도 후들거리고 마비 오는 내 다리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부터 난 다시 꿈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 후 3년이 지난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야 다시 꿈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의약품 연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이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직업체험을 통해서도 아닌, 어이없게도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처음엔 그 직업이 멋져 보여서 하고 싶었지만 그 직업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아픈 사람을 직접 돌볼 순 없지만 뒤에서 약이라는 매체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아주 가치 있는 직업이었다. 또한, 실험과 데이터를 분석하고 좋아하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렸을 때 했던 방식 그대로 자료도 찾아보고 공부도 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길이어서 그런지 저번보다 더 확고해진 나의 꿈, 나만을 위한 길은 단단해져 갔고 대학도 해외로 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의약품 개발원이라는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갈 것을 맹세한다. 가끔 힘들면 걸을 수도 있지만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의약품 개발원이 되어 내 길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 내 길은 완벽해져 더 윤기 있게 빛나 보일 것이다.
고등부 장원작 없음
일반부 시, 수필 통합 장원
고구마(수필)
괴산명덕초등학교 교사
유 순 덕
못 먹는 음식이 거의 없는 내가 유난히 싫어하는 것이 바로 고구마이다. 맛이 싫어서가 아니고 먹고 나면 꾹 참아야하는 생리현상 때문도 아니다. 어쩌면 뚜렷이 기억나지도 않는 어느 날의 장면! 그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 그때부터 고구마를 안 먹게 되었다.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어려서 시골에 살아야 감성이 생긴다는 이유로 일곱식구를 데리고 전라도 삼례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셨다. 내 위로 언니가 둘, 오빠가 둘, 게다가 외할머니와 삼촌까지 한데 살게 된 시골살림은 정말 궁핍하고 어린 마음에도 늘 속이 상했다.
부모님은 돈을 벌기 위해 타지를 돌아다니고, 두어 달 만에 한 번씩 오실 때까지 우리는 큰 언니의 무관심, 큰오빠의 성마른 짜증, 할머니의 우는 소리를 참고 견뎌야 했다.
어느 날, 귀찮아하는 작은 오빠를 쫓아 산으로 들로 뛰어다나는데, 그날도 역시 배가 고팠다. 오빠는 처음엔 무밭에 들어가 뽑아온 시퍼런 무를 손톱으로 벗겨주다가 한 귀퉁이에 있는 고구마 줄기를 찾아내었다. 오빠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쑥 잡아당겨 뽑아낸 고구마, 거기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고구마들이 한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따라 올라왔다.
내가 철이 일찍 들었던 걸까, 아니면 마음 속 깊이 가난한 우리 집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걸까.
그 고구마 줄기, 맘 놓고 크지도 못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고구마들을 보는 순간, 그 고구마들이 우리 형제로 보였다. 화가 났다. 불쌍하기도 했다. 어쩌자고 이리 여러 개가 매달려있나 싶었다.
고구마가 싫어지고 먹어 보라고 입에 밀어 넣어주는 오빠에게 성질을 부리고는 혼자 한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지금도 나는 고구마를 먹지 않는다. 고구마를 볼 때마다, 손톱이 아리도록 무 껍질을 까주던 작은 오빠, 눈썹이 자꾸 눈을 찌른다며 눈물 섞인 눈곱을 매달고 다니던 할머니, 걸핏하면 삐지고 토라져 며칠씩 말을 안하던 그 시절의 나,
지금은 가끔 떠올리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정말 내가 그렇게 가난했던가, 그 가난 때문에 내가 그렇게 불행했던가, 결코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데 그걸 모르고 나는 커버렸다.
지금도 나는 부자도 아니고 남들 보란 듯이 명예도 없다. 하지만 고구마는 먹지 않아도 내가 가진 게 얼 만큼 가치 있고 귀한 것인지 알아보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내 손에 쥔게 많지 않아도 나눌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를 토닥거려 주고 아껴주던 내 오빠, 언니들, 그리고 할머니, 속 좁고 예민하던 나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크게 해 주었다.
이제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긍정의 힘을 가르친다. 사람 사이의 정을 말해주고, 울거나 속상해하는 아이를 안아주며 내 마음을 나누어준다.
좀 없으면 어때.
좀 모자라면 어때.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던 그 고구마줄기가 사실은 정이고 사랑이고 온기라는 것을... ... .
돌아오는 엄마 생신에는 오빠랑 언니들에게 고구마에 얽힌 내 속 좁았던 어린 시절 애기나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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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나 정많으시고, 포근하신 선생님~~~글에서도 훌륭한 인품이 느껴집니다~^^ 좋은글 읽어볼 수 있게 올려주신 부회장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