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법치주의와 수오지심
요즘 뉴스를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공천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는 사람들은 너무 적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너무 극성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별스런 법들이 제정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법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묻어두려고 법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을 내세워서 세상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법 앞에서 사람들이 정당하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고 싶지만 그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현실들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법치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진 것을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이 제정되고 지켜져야 하는 근본적인 취지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잘못한 것을 제재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근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내려 주신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길을 마련해 주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이나 하느님의 법을 근간으로 세상의 모든 법이 생겨났고, 율법도 생겨났습니다. 율법이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제정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세상이 법을 무시하고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사랑을 논할 수 없습니다.
나도 사랑을 말하고 사랑하라고 강의하기도 하면서, 사랑으로 살라고 떠들면서 살았지만, 사랑에 대하여는 완전히 문외한(門外漢)이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이 없다면 또한 예수님의 복음이 없다면 교회의 가르침이 없고 교회 공동체가 없다면 또한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정말 세상은 파렴치한(破廉恥漢)이 엄청 많아졌을 것입니다. 예의나 염치를 아주 높은 가치관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운 사람.>과 상종(相從)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많이 늘었을 것입니다. 맹자는 그의 사단(四端)에서 인간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어서 짐승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지지하십니다. 그 율법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당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 당신의 역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소소하게 생각하는 율법이라도 지엄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겨서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하느님나라의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살고 있는 인격을 가진 도덕적인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맹세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옳고 그름을 식별하며, 착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악을 미워하며, 예의나 염치를 아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율법으로 완벽하게 정할 수 없고, 전부를 지칭할 수 없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이미 모든 것이 암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수오지심을 모르고 파렴치한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수오지심과 예의염치를 간직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고,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통계적으로 따져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주 작은 율법이라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기도합니다.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1.5-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5 보아라,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땅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9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축일3월 6일 성 치릴로 (Cyril)
신분 : 수도원장
활동 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 연도 : +1235년경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카르멜 회원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사제였다. 그는 소위 '성자와 함께'(Filioque)로 불리는 신학적인 문제로 발생한 그리스 정교회와의 논쟁을 주도하여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그에 대한 자세한 경력을 소개하지 않고, 다만 27년 동안 자기 수도회를 훌륭하게 운영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축일3월 6일 성녀 콜레타 (Coleta)
신분 : 수녀
활동 연도 : 1381-1447년
같은 이름 : 꼴레따, 꼴레뜨, 콜레따, 콜레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코르비(Corbie)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결혼 후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2월 6일)에게 기도해 딸을 얻자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보통 콜레트(Colette)로 불렸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 고장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목공 일을 하던 로베르 부알레(Robert Boilet)였고, 어머니는 카트린(Catherine Moyen)이었다. 어려서부터 기도와 고행을 좋아했던 성녀 콜레타는 17세 때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일하던 수도원 원장의 도움으로 잠시 수녀원에 머물다가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 뒤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어 1402년 9월 17일부터 베네딕토회 수도원 근처에 암자를 짓고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콜레타는 21살부터 코르비의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클라라 수도회)가 엄격하던 그들 본래의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이 영적 조언을 받고자 몰려들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도회가 초창기 정신에 따라 살도록 개혁하라는 환시에 응답하고자 자신의 은둔소를 떠났다. 성녀 콜레타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해 1406년 8월에 니스(Nice)로 갔다. 루나 신부는 먼길을 걸어서 아비뇽까지 온 성녀 콜레타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는 1406년 8월 29일 교황 칙서를 통해 그녀가 클라라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의 사명을 정식으로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 지방의 클라라 수도회를 개혁하려 노력했지만, 그 지방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즈음 클라라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 정신에서 벗어나 수도 생활이 매우 해이해져 있었다. 1407년 성녀 콜레타는 기증받은 브장송(Besancon)의 부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의 엄격한 회칙을 준수하며 절대적인 가난과 단식을 실천했다.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 수도원을 비롯한 기존의 몇몇 수도원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임신부(임산부)와 아픈 아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데, 이는 그녀가 행한 기적과 관련 있다. 그녀가 교황을 만나기 위해 니스로 여행하던 중 한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의 아내는 셋째 아이를 갖고 있었고 출산의 어려움으로 죽을 위험에 놓여 있었다. 성녀 콜레타는 즉시 그 지역 성당에 가서 기도했고, 어머니는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페트로닐라(Petronilla)라는 이름을 얻었고, 후에 성녀 콜레타가 설립한 수녀원에 입회해서 그녀의 비서 겸 전기 작가가 되었다. 또 한 번은 교황으로부터 클라라 수도회를 개혁할 사명을 위임받고 브장송에 수도원을 설립했을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얻기가 어려웠었다. 그 무렵 그 지역에 살던 한 여인이 사산아를 낳았는데, 아이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아버지는 성당에 가서 세례를 청했다. 그러나 사제는 그 아이가 이미 죽었다며 세례를 거부했다. 그래서 수녀원으로 달려갔을 때, 성녀 콜레타는 교황으로부터 받은 수도복으로 그 아이를 감싸주고 성당 사제에게 가라고 했는데, 성당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의식이 돌아와 울고 있었다. 사제는 즉시 그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해 나갔다. 그녀는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대로 1447년 3월 6일 평화로이 선종했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도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개혁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성녀 콜레타는 사망 직후부터 시성 조사가 시작되어 1740년 1월 23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 축일을 맞은 치릴로 (Cyril) 형제들과 콜레타 (Coleta)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