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정통풍수지리연구회, 전국풍수지리학회 합동 답사
☞ 일시 : 2008년 4월 20일 셋째주 일요일.
☞ 집결장소 : 대전시 중구청 앞 (08 :00 까지 시간엄수)
☞ 예정코스
08: 00 중구청에서 출발 ---> 중부고속도로 --->음성휴게소 (09:30)
---> 퇴계IC ---> 경춘고속도로 (46번)---> 마석IC ---> 녹촌리 창원초교 우회전
---> 능원대군묘 11: 00 ~ 12:00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192)
---> 중식 (별난버섯집 차산리 144-4 ☎031)592-6654, 011-9151-0230)
---> 기계유씨 묘역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775-4) 13:00 ~ 14:00
---> 의안대군 묘역 (남양주시 평내동 궁평마을) 14: 00 ~ 15 : 30
---> 남양주 출발 ---> 태릉도착 16 : 00
---> 서울 출발 (17 : 30)
---> 대전 도착 (19 : 30)
☞ 지참물 : 나경패철, 필기구, 간편한 복장
☞ 참가비 : 삼만원 (여성 2만원)
☞ 답산 지도 : 전국정통풍수지리학회 민중원 회장
대전정통풍수지리연구회 소암 정부연 고문
주최. 주관 : 전국정통풍수지리학회
후원 : 대전정통풍수지리연구회
1) 능원대군 이보(1598-1656)
위치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192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 정효(貞孝)
자 경숙(敬叔), 호 담은당(湛恩堂)
조선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具氏) 사이에서 제2남으로 태어났으며 인조의 동생이다. 11세 때에 선조의 왕자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의 계자(繼子)로 출계(出系)하여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졌고, 1631년(인조 9)에 능원대군(綾原大君)에 진봉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군신 부자가 응당 각기 충의를 다하여 종묘 사직을 위해 성을 등지고 결사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늠연하였다. 이후 일체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자에는 그대로 명나라 연호를 쓰고 청 조정에 대항하여 절의를 지켰다. 효종 초에 종실로서 궁궐에 나아가 추종하는 자가 많아지자 차자(箚子)를 올려 이들을 죄 줄 것을 청하면서, “법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친귀(親貴)한 자로부터 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도 비록 비복일지라도 엿보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무릇 고명(誥命)에 또한 위호(僞號)를 쓰지 않았다. 성품이 맑고 곧아서 무릇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는 일체 경영하지 않았다 한다.
묘역에는 문화부부인 유씨와 합장하고 있는데 곡장을 두르고 그 안에 8개의 호석을 둘러 봉분을 만들었으며 봉분앞에는 월두형의 묘표가 있다.
子坐 午向에 乙破이다.
2) 기계 유씨 (杞溪兪氏) 선영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775-4
차산리라는 지명 유래는 차산리에 있는 고개인 차유령(車踰領, 수레 넘이 고개) 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3) 4월 10일 전 자헌대부 호조판서 숙민공 유강이 돌아가시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 공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숙민공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 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 또는 수레넘이 고개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잇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차산리는 고종의 능을 안치할 장소로 물색되었던 곳이기도 한데 그 자리가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다. 화도읍 차산리 775-4번지에 잇는 숙민공(肅敏公)[휘 강(絳)], 이하의 후손인 자산공[휘 영(泳)], 선무량공[휘 대의(大儀)], 승지공 [휘 헌(櫶)], 등과 기계유씨 선조 9기의 묘가 세 곳에 위치해 있는데 타원형으로 늘어진 모습이 어머니의 젖가슴 모양이다. 차산리에서 많은 인물이 나온 이유도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이 기운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문 삼감사(一門 三監司)라 하여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둘이 감사를 지낸 적이 있는데 묘의 위치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의 삼감사 묘는 감사공[휘 성증(省曾)], 충간공[휘 황(榥)], 대사헌공[휘 철(㯙)], 군수공[휘 희증] 등 벼슬을 했던 네 분의 묘를 시작으로 하여 네 줄기로 뻗어 있는데, 각 후손들의 묘를 차례로 산 전체에 모신 전형적인 사패지(賜牌地)이다. 묘를 모신 산의 정면으로 운길산이 보인다. 재실은 최근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유성증(省曾)은 광해조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광해말년에 호조좌랑으로서 이이첨을 공박하는 영남유생들의 소를 대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하옥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지평이 되고 승지로 승진, 병자란때는 강화의 파수대장으로 분전했다. 이어 참의 도승지등을 거쳐 관이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유성증(省曾)의 두 아들 유황(榥 봉주)과 유철(㯙 취옹)그리고 그의 재종질 유계(棨 市南)는 인조 11년 같은 해에 모두 문과에 급제 했다.
유황(榥)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병자호란 때는 정언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했다. 또 청이 척화신들을 압송하려고 할 때 이에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척화로 말미암아 단양에 유배되고 관이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유철(㯙)은 병자호란때 이조좌랑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그 후 누진하여 39세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성망이 높았으나 대사간으로 서변옥사에 대해 진언하다가 효종의 진노를 샀다. 현종조에 다시 복관되어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거쳐 관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자료원 기계유씨 종중)
3)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묘(墓)
이화(李和)
?∼1408(태종 8). 조선왕조 개국 1등공신.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이요정(二樂亭). 이성계의 이복동생이다. 자춘(子春)과 삼취 정안옹주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회군공신에 봉해지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의안군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서훈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에 다시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에 서훈되었다. 그는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고, 도합 570결(結)의 공신전을 받아 조선 초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에 영의정부사로 임명되자,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형제를 청죄(請罪)하는 상소를 하여 무구 형제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기공친(朞功親)·대공친(大功親)이상의 종친은 사환(仕宦)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친으로서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영의정부사라는 최고 관직에 임명된 것은, 태종 때 태조의 직계가 아닌 왕족은 왕위계승의 권외로 밀려나는 대신, 그들을 일반문무관처럼 사진(仕進)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묘역은 평내동 궁평마을 협동농협산업단지 뒷편 산중턱에 있으며 서북향이며 옥녀산발형이라는 설도 있다.
4)태릉(泰陵), 강릉(康陵)
태릉(泰陵)은 제11대(第11代) 중종대왕(中宗大王) 제2계비(第2繼妃) 문정왕후 윤씨(文政王后 尹氏)의 릉(陵)이다.
문정왕후 윤씨(文政王后 尹氏)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여(女)로서 연산군(燕山君) 7년(1501년) 10월 22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중종(中宗)의 제1계비(第1繼妃)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중종(中宗) 10년(1515년) 3월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産後病)으로 7일만에 승하(昇遐)하자 2년 후인 중종(中宗) 12년(1517년) 7월 19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17세였다. 문정왕후(文政王后)는 소생(所生) 경원대군(慶原大君)이 인종(仁宗)의 대통(大統)을 이어 왕위(王位)에 나가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 인종(仁宗)의 외척(外戚)인 윤임 일파(尹任 一派) 대윤세력(大尹勢力)을 축출(逐出)하고 왕후(王后)의 친정(親庭)인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 일파(小尹 一派)가 득세(得勢)하는 을사화옥(乙巳禍獄)이 있었다. 봉은사 주지승(奉恩寺 住持僧) 보우(普雨)와 상론(相論)하여 성종(成宗)의 선릉 동강(宣陵 東岡)에 길지(吉地)가 있다하여 경기도 고양군(京畿道 高陽郡)의 중종 계비(中宗 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와 동원(同原)의 정릉(靖陵)을 천릉(遷陵)하여 후일 왕후(後日 王后)의 릉(陵)을 함께 하고자 명종(明宗) 17년(1562년) 9월 천봉(遷奉)하였던 것이나 하절(夏節) 홍수시(洪水時)에는 능소(陵所)까지 침수(浸水)되어 보토(補土)에 거액(巨額)을 허비(虛費)하였을 뿐 왕후릉(王后陵)은 양주 노원(楊州 蘆原)에 설릉(設陵)케 되었다. 왕후(王后)는 불심(佛心)이 깊어 유생(儒生)들의 반대(反對)를 무릅쓰고 승과(僧科)를 두었고 선·교 양종(禪 ·敎 兩宗)을 부활(復活)시키는 등 불교진흥(佛敎振興)에 진력(盡力)하였다.
명종(明宗) 20년(1565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昌德宮 昭德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春秋) 65세였고 소생(所生)은 명종대왕(明宗大王)과 4녀를 두었다. 이 해 4월 12일 시호(諡號)를 문정(文定)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하였다가 6월 4일 태릉(泰陵)으로 고치고 7월 15일 양주 노원면 대방리(楊州 蘆原面 大邦里) 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강릉(康陵)은 제13대(第13代) 명종대왕(明宗大王)과 동비(同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의 릉(陵)이다.
명종대왕비(明宗大王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청릉부원군 심강(靑陵府院君 沈鋼)의 여(女)로서 중종(中宗) 27년(1532년) 5월 25일 탄생(誕生)하였으며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명종(明宗) 22년(1567년) 6월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고 선조(宣祖)가 즉위(卽位)하였으나 유충(幼沖)하여 왕비(王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이듬해인 선조 원년(宣祖 元年)(1568년) 7월 철렴(撤簾)하였다. 선조(宣祖) 8년(1575년) 1월 2일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名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44세(春秋 44歲)였다. 이 해 1월 11일 시호(諡號)를 인순(仁順)이라 하였고 4월 28일 강릉 동편(康陵 東便)에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예장(禮葬)하였다. 소생(所生)으로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있었으나 명종(明宗) 18년(1563년) 13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였다.
왕릉 답사때 알아 두어야할 왕릉의 구조
왕실의 묘는 황제, 황후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세자와 세자비, 또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묘를 원(園)이라 하며,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과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묘(墓)
라고 한다.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여 각각 장례일 까지 빈전을 설치하고, 장례절차를 관장하고, 봉분 조성과
부대 시설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묘역은 전국에서 유명한 풍수가를 뽑아 상지관(相地官)으로 임명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백 리 안에 있는 지역에서 묘지의 선정과 능역의 조성 공사를 맡게 하는데 그 기간은
약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렸으며,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연인원 6,000명에서 9,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능 입구에 들어서면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데
홍살문은 묘역의 입구라는 표시로 신성한 곳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홍살문 오른쪽에 배위(拜位)라고 하는 절하는 곳이 있는데, 왕이 제사를 모시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는 곳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돌을 다져 깔아 놓은 길을 참도(參道)라고 하는데
중앙을 경계선으로 하여 왼쪽은 신이 다니는 길로 신도(神道)라 하며 약간 높고
오른쪽은 사람인 임금이 다니는 길로 어도(御道)라 하여 약간 낮다.
정자각은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제향을 하는 건물이다.
중국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정방(丁方)에 있기 때문에 정자형(丁字形)으로 하였다고 한다.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동쪽은 계단이 두 줄로 되어 있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신령과 사람이 같이 오르지만 제사를 지내고 내려 올 때는
신은 곧바로 능으로 가기 때문에 사람만 서쪽으로 내려온다.
<동입서출(東入西出)> 정자각 뒤 서쪽(정자각에서 묘를 보고 좌측)에는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돌로 만든 함이 있는데 이를 석함(石函)이라고 한다.
동쪽에는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하기 위한 비각(碑閣)이 있다.
능 위에 오르면 왕이 묻힌 봉분이 있고, 봉분 밑 부분은 12각으로 둘레석을 해놓았는데
병풍석(屛風石)이라고 한다.
대개 병풍석에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을 양각 해놓았다.
이것은 모든 방위의 수호신으로 외부로부터 침범하는 부정과 잡귀를 쫓아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봉분의 주위를 다시 난간석으로 둘러 보호했는데 기둥을 석주(石柱)라 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질러 놓은 횡석주를 죽석(竹石)이라고 하며,
죽석 중간에 바쳐준 작은 기둥을 동자석주(童子石柱)라 한다.
난간석 바깥쪽으로는 석호(石虎) 네 마리와 석양(石羊) 네 마리가 밖을 보게 배치되어
있는데, 석호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으로 산과 능을 지켜주고, 석양은 양 모양으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명복을 비는 뜻이 담겨져 있다.
추존(追尊)한 왕능에는 석호와 석양이 각각 2개씩 해놓아 일반 왕릉과 차등을 두었다.
봉분 앞쪽에는 직사각형의 혼유석(魂遊石)이 있는데 민간의 묘에서는 이를 상석(床石)이라
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왕릉은 혼령이 앉아 놀다가는 자리다.
민가에서는 산신에게 먼저 산신제를 올린 다음 조상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왕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이기 때문에 정자각에서 제사를 먼저 지낸 다음 산신제를
올리고 혼령은 혼유석에서 놀다 간다고 한다.
혼유석 아래에는 귀신 얼굴 모양을 새긴 북 모양의 고석(鼓石)이 상석을 바치고 있다.
고석에 험상 굿은 귀면을 새긴 것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한 쌍이 있는데 혼령이 망주석을 보고 무덤을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에 민가에서도 다른 석물은 설치하지 않더라도 망주석만은 꼭 세웠다.
혼유석 아래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는데 무덤에 불을 밝혀 신들이 놀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불이기 때문에 잡귀의 접근을 막는 역할도 한다.
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이 각 1개씩 석마(石馬)를 대동한 체 서 있으면서 언제든지 왕의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고,
그 아래 좌우에는 무인석이 1개씩 장검을 짚고 왕을 호위하면서 위엄 있게 서 있는데
역시 석마를 대동하고 있다.
또 능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앞을 제외한 삼면에 담을 둘러놓았는데 이를
곡장(曲墻)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홍살문 밖에는 재실을 지어놓고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정9품)이 상주하였으며,
능 인근에는 사찰(원찰)을 지어놓고 망인의 명복을 빌었다.
왕능 중에서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고종의 홍능(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은
왕을 황제로 일컬었던 만큼 명나라 태조의 효능(孝陵)을 본 따 만든 황제 능이다.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형으로 황제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
(침전)이다. 다른 왕능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장엄한데 특이한 점은 문인석과 무인석 석수
(石獸)들이 묘지에는 없고 침전(寢殿) 앞에 시립해 있는 것이다.
침전에서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두 마리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자료원 :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학회
형산답사기 열 번째이야기 중 일부
첫댓글 성황리에 답사를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 회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석회원 > 김기학. 백경애. 이백수. 이두영. 임광묵. 임홍균. 허환. 박노용. 인금희. 곽윤호. 최중호. 조연봉. 최인자. 전나영. 황운자. 이종숙. 이현순. 주영애. 최흥수. 조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