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리의 순이 ---임화 역사적 격랑 속에 침몰한 혁명시인 2012. 11. 26. 15:06 역사적 격랑 속에 침몰한 혁명시인-임화 2011년 6월23일 더불어숲 김한순 1.생애 임화( 1908년10월 13일 ~ 1953년8월 6일)는 본명 임인식. 시인,문학평론가 수려한 외모와 낭만적 기질이 다분한 모던보이 *1908 10월 13일 서울 낙산에서 출생 *1921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이상, 이강국과는 보성고 동기. 보성고보 학모에 반들반들하게 면도를 하고 휘파람을 불고 다니거나(김남천),여학생 꽁무니를 쫒아다니고, 벌써부터 귀밑의 면도를 하며 겉멋을 잔뜩 부렸다.(이헌구)는 증언에서 알수 있듯이 임화의 끼는 보성고보 시절부터 유명. 이미 보성고 4학년 때 동아일보 문예란에‘성아’라는 필명으로 6편의 시를 발표해 예술가적 끼를 마음껏 발산. *1925 졸업직전에 고등학교 중퇴 *1926 12월 경 카프에 가입 *1927 임화(林和)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 . 단편서사시의 최고의 시인으로 부상. *1928 <유랑>,<혼가>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 카프 중앙위원으로 활동 장안 여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름. 당대 최고의 섹시가이. *1929 박영희의 후원으로 동경 유학 떠남. 동경에서는 무산자사(無産者社)에서 활동. 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 극단 <신건설> 조직 *1931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 영화 <지하촌>에 주연으로 출연 카프 1차 검거시 검거됐으나 9월경 불기소 석방 임화의 첫 부인은 일본 유학 시절에 함께한 동지 이북만의 동생 이귀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있었는데, 임화는 그 딸을 생각하며 한국 전쟁 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은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숙청의 빌미로 삼았다 *1932 4월 카프 서기장이 됨. 기관지 <집단>의 편집책임 같은 해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도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 *1935년 자신이 서기장까지 지낸 카프를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KAPF 해산계를 제출. 순수 문학으로 전향 이귀례와 결별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음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소설가 지하련 주택. 2년 전 화재가 난 후 방치돼 있다. *1937 학예사 대리 경영. <사해공론>,<인문펴온> 편집에도 참여 *1943 문인 보국회 참여, 평론 수필부회에서 활동 *1945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직, 서기장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문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면서 남로당 노선을 걸음 *1946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1947 두 번째 부인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박헌영을 따라 월북 *1950 종군 *1953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사형 언도받고 처형됨 2.작품 1929년에 시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 시집으로『현해탄(玄海灘)』(1938),『찬가(讚歌)』(1947),『회상 시집』(1947)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이 작곡하여 한국 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 3. 임화 시의 특징 *해방전-단편서사시 (일정한 이야기를 담으면서 민중의 삶과 싸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는 특성-독자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주목적) 김기진-단편서사시라고 명명하면서 프로시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이라 격찬 홍명희-해방전의 시가 낫다. *해방후-선전선동시(현상을 단순화함으로써 싸움을 현장에서 독려하는 성격을 더 짙게 가짐(직접적으로 적을 공격하고 동지를 채찍질하는 것을 목적)--운문과 음악성을 회복 신경림-선전선동시가 가진 그 단순성, 짧은 호흡에 담겨있는 엄청난 폭발력,금속처럼 날카로운 전투성-아무도 그를 뛰어 넘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임화 초기 시 3편 감상 네거리의 순이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조선지광 82호, 1929.1) 근로하는 여자인 누이 순이의 연인 용감한 사내는 형무소에 들어가고 그래서 순이는 절망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된다. 그 용감한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내일을 준비할 때다.. 우리 오빠와 화로 (시인이 선정한 애송시 100편 중 36째 )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 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 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 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ㅎ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1929년> 이 시는 사건적이고 소설적인 데서 시의 소재를 찾았고, 소박하고 '된 그대로의 말'을 사용했고, 노동자들의 낭독에 편한 리듬을 씀으로써 카프문학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단편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사(製絲) 공장 여직공이었다가 이제는 백 장의 봉투를 붙이면 일전을 버는 일을 하는 화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애틋한 편지글 형식이다.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봐서 오빠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로에 '오빠' 혹은 '혁명가의 정신'을 빗대어서, 역경―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지는―이 지금 닥쳐왔지만 굴하지 않고 이겨내겠다는 뜻을 밝혀 놓았다. 양말 속의 편지 눈보라는 하루 종일 북쪽 철창을 때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 날 회사 뒷문에서 피켓을 모든 그 밤 같이…… 몇번 몇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코구멍 손가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프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와 굶은 아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 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너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어야 계집 자식이 다 무어야 세상에 사나이 자식이 어떻게 ○○이 보기 좋게 패배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추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 기계들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니 동해바다를 거쳐오는 모진 바람, 회사의 펌푸, 징 박은 구두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20일이나 꿋꿋이 뻣대오지를 않았니 해고가 다 무어야 끌려가는 게 무어야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뻣대고 나가자 보아라! 이 추운 날, 이 바람 부는 날! 비누 궤짝 짚신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구루마를 끌고 나가는 저 어린 행상대의 소년을…… 그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 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조선지광』, 1930. 3 “1930년 봄 평양에서 개최된 신간회 강연 막간에 내가 이 시를 낭독하였을 때 신간회 중앙간부들의 애매한 연설에 불만한 군중이 수차의 제청을 가지고 임화의 양말속의 편지를 환영한 것은 나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장면이었다.” -김남천의 [임화에 관하여] 5.해방 후 임화 시3편 감상 6.오늘날 임화 재조명 <고은 시인은 '만인보 20'에서 임화 추모시> 아직껏 한국문학사에는 버려둔 무덤이 있다 마른 쑥대머리 무덤 그 무덤 벙어리 풀려 열리는 날 그 무덤 속 해골 뚜벅 걸어나오는 날 임화는 오리라 아름다운 얼굴 다시 오리라 부신 햇살 뿜어 오리라 손무덤 박 노 해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을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
임화의 비극
[산하의 가전사]냉혈한 같은 한국 현대사
By 김형민/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2014년 08월 20일 02:54 오후
나는 팝송에는 한마디로 문외한이야. 특히 팝송에 특출한 관심과 깊이가 있어 뵈는 네가 언젠가 팝송 제목을 주워 섬길 때 솔직히 열에 하나 둘 정도만 알아들었다. 멜로디조차 낯설어서 아항~~ 이거 하면서 아는체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찔렸던지.
한창 음악을 듣던 청소년기에 나는 매우 편식을 즐겼는데 그 편식의 대상은 영화음악이었어. 특히 심야에 방송된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은 나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고 졸음을 쫓는 소중한 시간이었지. 그 전까지는 실컷 졸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졌던 기억.
그런데 영화음악실의 주인 김세원씨는 아버지를 오래 전에 잃었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일찌감치 생이별을 했던 거지. 그녀의 아버지는 김순남.
이름은 순해 보이지만 한때 북한의 국가처럼 불리웠고 빨치산이나 인민군들이 즐겨 부른 좀 험악한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곡가로서 월북한 음악가였거든.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 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달라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우리의 6.25 노래를 연상케 하는 이 증오와 분노 넘치는 노래의 작사가는 누굴까? 오늘 얘기할 시인 임화다.
임화
임화(사진=위키피디아)
<임화-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 출판사 서평에 보면 그는 이렇게 소개돼. “현대문학사를 통틀어 헤겔적 의미에서 임화만큼 문제적인 인물은 많지 않다.”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 촘촘히 박힌 쟁쟁한 문인들의 이름 가운데 ‘문제적’ 인물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한다는 얘기.
무엇보다 그는 천재였어. ‘조선의 랭보’에 비유되기도 했거니와 시나 비평 등 문학뿐 아니라 연극이나 영화 등에까지도 발을 뻗친 팔방미인이었지. 영화 시나리오 작업 정도가 아니라 배우로도 영화에 출연하여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 소리를 들었거든.
루돌프 발렌티노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배우로서 섹시가이이자 로맨틱가이자 쿨가이이자 터프가이이자 하여간 좋은 말은 다 갖다붙여도 되는 배우야.
그러니 임화의 외모 또한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내가 문래동 장동건을 운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지. 뭐 보성고보 시절부터 인근 숙명여고 학생들 사이에 ‘연애박사’에 ‘아이노꼬’ (백인 혼혈)로 불리웠다니 뭐 불을 보듯 뻔한 얘기.
열일곱 살 때 집안이 파산하여 다니던 보성고보를 때려치운 뒤 그에게 위안이 된 건 책이었다고 해. 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거리에서 그는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 치우는 한편 다다이즘에 매료돼 ‘임다다’로 스스로를 일컫기도 했다지.
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문학적 재질을 통해 문학 동료들과 교우 관계를 갖게 되고 <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우리가 국어 시간에 그의 작품보다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통탄으로만 배웠던 박영희 등등과 교류하면서 KAPF 동인으로 활동하고 나이 스물 넷에 그 쟁쟁한 이름들 사이에서 KAPF 서기장으로 떠올랐을 정도니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뭐 그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내가 더 할 얘기 없으니 그만하고, 그렇게 천재에 미남에 정치력까지 있는 이 남자에 어찌 사랑이 빠지지 않았겠니. 연애 사건은 일일이 짚을 수도 없으니 굵직한 두 명의 아내만 얘기해 보자.
그의 첫 아내는 KAPF 동료였던 이북만의 여동생 이귀남이엇어. 일본 동경의 이북만 집에 얹혀 살던 그가 친구 동생과 정분이 난 거지. 이 이귀례 역시 무산자 연극반에서 활약하는 강경 사회주의자였고. “귀남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우니 귀례로 바꾸시오.” 해서 이름을 바꾼 이귀례와 임화는 살림을 차린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어.
이귀례의 말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 입장에서 혼인식이란 형식적 허례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 그만두었다.” 이런 “혁명 전사들의 동지적 결합”이라니.
이후 KAPF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자 임화는 카프 해산계를 내는 등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글쟁이 임화보다 더욱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이귀례는 단호하게 임화를 내쳐 버렸다고 해.
소설가 김성동씨의 표현에 따르면 이귀례는 임화를 “카트쳐” 버렸지. 후일 인민군 소장 계급장을 달고 남한에 내려왔던 임화가 딸을 찾았지만 옛 아내와 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지.
그 슬픔을 드러낸 시가 “너 어디에 있느냐”야. 나는 임화의 시 몇 편 중에선 이게 제일 느낌이 좋더라.
“한밤중 어느 먼 하늘에 바람이 울어 / 새도록 잦지 않거든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와 /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 항상 마음 아프던 너의 엄마와 어린 동생이/ 너를 생각하여 / 잠 못 이루는 줄 알어라.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 너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서 나오는 ‘엄마’는 이귀례인지 아니면 임화가 재혼한 상대 소설가 지하련인지는 몰라도 ‘어린 동생’은 지하련과 임화 사이에 태어난 아들 원배일 거야.
임화는 폐결핵으로 마산에 내려가 요양했는데 여기서 지하련(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을 만나게 돼. 지하련은 임화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임화의 마음을 끌어냈고 둘은 결혼에 골인하지.
물론 아이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소리에 큰오빠한테 뺨을 맞는 등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서. 그리고 혼인신고 4일만에 아들을 낳는 등 속도위반을 곁들이고서. 1938년 임화가 쓴 ‘내 애인의 면영(面影)’의 애인은 이 지하련이었지.
“나의 애인은 역시 아름답습니다. 옷에 까만 외투를 입고 조그만 발에는 아담한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따금 버선 위에 고무신을 바꿔 신으면 짧은 발에 흰 발등이 살찐 비둘기 가슴처럼 포동포동합니다. 나는 그의 귀여운 발이 멀리 갔다가 나의 집 처마 아래 참새처럼 찾아드는 고운 걸음걸이를 한량없이 사랑합니다……. 사실 그의 입은 모든 사람의 그것처럼 먹기 위한 기관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입뿐 아니라 그의 얼굴의 모든 기관이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다지 크지 않은 동체(胴體) 위에 완연 아름다운 조각의 콤플렉스처럼 희고 동근 목 위에 받쳐 있는 갸름한 얼굴은 생물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기엔 너무도 아름답고 지혜롭습니다. ” 콩깍지가 임화의 눈 주변에 아주 두텁게 씌인 것을 알 수 있지.
임화는 그가 열렬히 추종하던, 거의 동성애적 감정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숭배하던 박헌영을 따라 월북해. 남쪽 바닷가 마산 출신의 지하련도 남편을 따라 38선을 넘는다.
임화는 전쟁이 난 뒤 서울 땅을 밟았고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북한에서 그의 운명은 길지 못했어. 박헌영 등 남로당 출신들이 싹쓸이되면서 임화 역시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낙인찍혔고 (하여간 남이나 북이나 상대방 간첩으로 몰아 죽이는 이 더러운 역사) 그가 슬픔 속에 지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인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염세적인 시로 매도됐고 한설야, 이기영 등 김일성의 총애를 받은 동료 작가들에게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나이 마흔 다섯. 딱 내 나이 때 이 천재는 쓰고 있던 안경알을 깨 동맥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다가 그나마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53년 8월 6일 총살당했다고 해.
안된 건 지하련이었지. 만주로 피난가 있던 지하련은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가버린 채 평양으로 들어왔지만 시신조차 제대로 거둘 수가 없었다고 해. 한때 “우리가 정을 속삭일 때 나를 사랑스럽다 불렀”고 “멀리 떨어졌을 때엔 반드시 ‘미더운 이’라 불렀던”, “서로 사랑함을 축복했고 서로 제 의무에 충성됨을 감사”했으며, 그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비둘기처럼 사랑함을 경계”했던 (임화, 윗글 중) 남편의 죽음은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월북한 지하련의 정신을 무너뜨렸지.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묶지 않은 채 평양 이곳 저곳을 헤매며 남편의 행방을 묻다가 평안북도 희천의 수용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병사했다고 해.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임화와 지하련의 이름은 남과 북 모두에서 완벽하게 묻혔다. 우리나라 현대사만큼 지독한 냉혈한이 또 있을지 몰라.
필자소개
김형민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