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 기맥 산행기
일시; 2013.3.30. 5:10—14:30
구간; 송천마을..바람재..농바우..달마산..귀래봉..
떡봉..도솔암/봉..불골이재..망집봉..사자봉(20km)
기분죤 회원 11명(좋은 사람들 산악회원과 함께)
해남, 땅끝, 달마산,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산을 오르 내리면서 가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시도 했던 곳,
오래전에 북한의 의사 가족 10명이 목선을 타고 월남을 했을 때,
그 가족이 따뜻한 남쪽 땅 해남을 정착지로 하고 싶다고 하였던 곳,
윤 선도, 윤 두서의 자취가 베인 녹우당이 있고,
일제 시대 때 영업을 시작한 남도 식당의 대명사 해남 천일 식당이 있는 곳,
그리고 해남 윤씨가 유명한 가문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해남을 가게 된 것이다.
산객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좋은 사람들 산악회”를 따라
저녁에 양재역에서 탑승하여(23:15) 일요일 새벽에 해남군 현산면 송촌마을에 도착 한다.(4:50)
큰 노송 두 그루가 반기는 송촌 마을 표지석 앞,
고요한 시골 마을에 두 대의 버스에서 내린 산객 50여명으로 개짓는 소리가 시골 새벽을 깨운다.
마을길을 따라 이곳 저곳에는 마늘 밭이 곱게 다듬어져 있다.
송촌 마을을 따라 펼쳐진 마늘 밭.
마을을 벗어나서 동백 꽃과 이정표가 함께 반기는 마을 뒷산으로 들어선다.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100미터, 나그네 님이 준비해 온 등산기를 확인하면서 이어간다.
오롯한 숲길이 한동안 이어 지다가 너덜 지대를 지나 암봉을 오른다.
오래지 않아 작은 안부 바람재에 도착.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바위 사이로 완도대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우측 능선에서 내려오는 길은 땅끝 기맥으로 이어지는 등로로 판단이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오늘 호남정맥에서 분기하는 땅끝 기맥의 마지막 구간을 산행하는 셈이다.
도대체 흙이라고는 한 줌도 없을 것 같은
삐죽 삐죽한 바위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등로를 선두가 잘도 찾아간다.
첫 암봉에 오르니 여명 속에서 바다 건너 완도가 드러난다.
희미한 불빛이 완도로 가는 다리 주변을 비추고
그 아래로는 남해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드러난다.
강진에서 구워진 청자는 저 물길을 지나 한양으로 이동하였으리라.....
농바우에서 바라 본 완도 방향(가운데 섬 같은 곳으로 완도대교가 지나 감)
진도와 완도는 아직도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좌 진도 우 완도 이렇게 기억하기도 하였고,
작은 놈은 완도, 큰 놈은 진도라고도 기억 하였는데 영 시원찮다.
“아..그게 왜 헷갈려..진도는 진도고 완도는 완도여.
완도를 거쳐 제주도를 갔었지, 옛날에는....“
강 감사님만 만나면 왜 그게 헷갈리느냐고 소리 지르는 통에 주눅이 들곤 했었다.
능선에 올라서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 깃을 여미게 한다.
바닷 바람이 만만치 않은데..,...아이구 추워...쑥맥님과 함께 새벽 공기를 탓한다.
이런 아침 공기도 아랑곳 없이
능선 곳곳에서 생강나무가 노란 꽃 망울을 터뜨리고 반긴다.
노란 생강나무
무질서하게 드러난 암봉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조심조심 걷다가
잠시 후 더 높은 암봉에 도착하니 아하...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건너 편으로 불쑥 솟은 암봉과 그 뒤로 숨은 듯 살짝 드러나는 돌탑이 나란히 서있다.
드디어 달마산 정상이 가시 거리에 들어 온 것이다.
연봉을 이루고 있는 멋진 풍광을 마주 하면서 함께 한 일행을 앞에 앉게하고
조심조심 셔터를 누른다.
잠깐 사이에 심술궂은 안개 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서둘러 일어선다.
470m봉과 달마산 불썬봉을 배경으로(434m에서 바라 본 원경)
안부로 내려서서 급격히 솟은 능선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선다.
오르막 내리막을 이어 가던 중 갑자기 강풍이 안개를 몰고 와서 시야가 더욱 흐려진다.
이리 저리 제 각각 솟은 암봉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본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니 완도 쪽에서 구름 속으로 해가 살짝 드러난다.
바람이 세고 안개가 짙어 조용한 아침 해를 보기는 틀린 것 같지만
쑥맥님과 함께 어둠속에서 포즈를 취해 보면서 일출에 대한 실날같은 기대를 해 본다.
일출(그 사이 짙은 안개로 인하여.....)
10여 미터를 분간 하기 어려운 짙은 안개속에서 눈 앞에 불쑥 나타난 달마산 불썬봉,
돌탑을 정성드려 쌓은 곳 옆에는 조그만 오석에 새겨진 달마산 정상석이 홀로 반긴다.
그 옛날 봉화대가 있던 곳으로서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쓴 곳 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그것은 경상도에서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달마산 불썬봉 정상에서.....
달마산, 달마대사
달마대사는 인도계 중국 스님이다.
남북조시대에 중국으로 건너와 숭산(崇山) 소림사少林에서
9년간 벽을 마주하고 앉아 하는 벽면 수행을 한 끝에 도를 깨달았다.
큰 눈과 턱수염에 험상궂은 표정을 한 달마 그림은 불교신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 불교 선종의 시조이기도 하지만 관상학(觀相學)에서도 시조에 가깝다.
그가 지은 ‘달마상법(達摩相法)’과 송나라시대 마의 도사(麻衣道士)의 ‘마의상법(麻衣相法)’ 과 함께
중국 관상학의 2대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 재원 님의 동양 고전학에서.....
한 차례 더 오르내림 후에 성벽 같이 큰 암봉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잠시 휴식을 한다.
협곡 좌우로 삐죽삐죽 솟아 있는 암봉도 위협적이지만
그 위로 이리 저리 걸쳐있는 바위들이 강풍에 떨질 것 같은 느낌이다.
잠시 선채로 휴식을 하는 사이 어떤 분이 건내는 사과 반 조각을 얻어 먹고 나서
급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로프를 잡고 한발 두발 조심스럽게 내 딛는다.
문 바위 오르기 직전(미황사, 서흥리 갈림길) 바위 협곡
커다란 암봉으로 된 정상을 우회하니 이번에는 급경사 하강,
나무 계단을 따라 급하게 떨어지는 끝 부분에는 붉은 꽃이 가득한 동백 나무 한 그루가 반긴다.
그 뒤로 올라서니 절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동굴 같은 것이 숨어 있다.
지도상에는 석문이라고 표시된 이곳은 매우 위험한 바위 절벽이지만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서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바위 사이로 드러난 석문은 마치 인수봉의 여우굴을 연상케 한다.
석 문
다소 완만한 능선을 이어 가다가 툭 터진 곳에 도착하여 주저 앉는다.
시간상으로나 장소로 봐서 아침 식사를 하기에 아주 적절해 보인다.
주변은 산죽나무가 둘러쳐져있고 옆에는 거대한 석조물의 출입구 같은 형상의 돌 기둥이 서있다.
펼쳐진 반찬은 말이 필요 없는 진수성찬,
줌마님이 싸온 유부 초밥과 사각 찬합의 반찬이 그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나그네 님이 끓여낸 누릉지가 뱃속을 따뜻하게 하고
거북선님의 수고로 만든 된장두부 찌개도 일품이라고 콩새님이 탄성을 지른다.
가족같은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로 오봇한 식사를 한다.
대밭 3거리에서 아침 식사
학생같은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가 혼자서 쭛빗 거리길레 뭉클님이 우리 주변에 주저 앉힌다.
맙소사, 비닐 봉지에 계란 만한 빵 3개가 전부다.
밥을 덜어주고 누릉지를 건네니 소리 없이 잘도 먹는다.
복장은 남한 산성 가는 듯하고 신발은 발목이 짧은 트레킹화를 신었다
“아빠하고 같이 신청 하였는데, 아빠는 안 오고 저 보고 갔다 오라고 했어요....“
이때는 이 젊은 여성이 산행 후반에 얼마나 애태울지 상상도 못하였다.
대밭 3거리에서
허기진 배가 두둑하니 발길도 가볍다.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능선과 지능선을 따라 솟은 암봉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다소 가파른 암봉을 오르니 넓직한 정상이 반긴다.
어떤 산악인이 사자봉이라고 써서 걸어 놓았지만 그 높이도 이름도 공식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로프를 잡고 내려서서 계단을 따라 건너 편 암봉으로 올라선다.
정상에는 귀래봉(471m)이라는 인식표가 나무 가지에 메달려 있고
내려다 보는 주변은 옅게 깔린 안개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다.
귀래봉
미황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마지막 봉우리로서 미려한 풍광을 많은 산객들이 담아오는 곳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개가 가시지 않아 야속하기 그지 없다.
처음 온 산객에게는 부처님이 호락호락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황사는 직접 가 봐야지,
이렇게 정상에서 훔쳐보면서 사진을 찍어가면 부처님도 섭섭해 하실 것 같다.
미황사는 신라시대에 건축한 천년 고찰 중 하나 이다.
발아래 미황사는 이곳 귀래봉과 우리가 지나온 달마산 암봉을 배경으로 그 경관이 전국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대웅전 축대에 걸터 앉아서 장엄한 낙조를 바라 보는 것 또한 비길데가 없다고 한다.
절 마당 한쪽에 서있는 달마대사의 석상을 보노라면 마음마져 느긎해 진다.
조금 더 진행을 하여 바위로 뒤 덮힌 봉우리(450m)에 올라서니
떡봉, 도솔봉 으로 이어지는 구불 구불한 능선이 용트림을 하듯이 뻗어있다.
450m 봉우리를 오르면서......
그러나 이곳에서 뒤 돌아 보는 능선은 더더욱 장관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귀래봉 능선의 아름다운 모습은 땅끝 기맥 해남구간의 진수이다.
땅속에 묻혀있던 바위들이 한꺼번에 지표를 뚫고 불쑥 솟아오른 듯한 모습 같기도 하고
주변에 흩어진 바위들이 지각변동으로 한꺼번에 중앙으로 밀려 솟아 오른 것 같기도 하다.
쑥맥님과 둘이서 말을 잊고 한 동안 바라본다.
이 능선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줄까......
진정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다.
450m 봉에서 뒤 돌아본 귀래봉
안부를 지나서 민둥민둥한 봉우리에 오르니 조망이 사방으로 트인다.
바다 쪽으로는 옅은 해무가 시야를 방해하지만 그래도 산들 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이름하여 떡봉, 왜 이리 장난스런 이름을 붙였을까....?
살짝 내려서서 밋밋한 봉우리에서 송지면 쪽으로 한번 더 눈 요기를 하고 내려선다.
도솔봉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떡봉에서 바라 본 도솔봉 능선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좌측 산 비탈을 따라 지그 재그로 올라오는 길이 아름답다.
느릿느릿한 저 길을 올라 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도솔암에 계신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겠지....
급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출타 하실일도 없을테니......
북평면 평암리에서 도솔암 능선으로 올라오는 길
산 비탈에 세워진 1자형 집 한 채, 도솔암 요사체를 비껴 지나서 능선 아래로 살짝 내려 선다.
서쪽을 바라보는 작은 암자가 바위 사이에 끼어있는 듯한 모습은 관악산 연주암을 연상 시키지만
입구 우측 층계 밭 같은 곳이 원래 도솔암이 있던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바위틈에 자리 한 도솔 암.
한 칸이 조금 넘을 듯한 도솔암,
사방으로 삐죽 삐죽 솟은 암봉으로 둘러 쌓인 도솔암은
손바닥 만한 마당 너머로 서쪽 바다까지 조망이 된다.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나무 한 그루는 태풍에도 끄덕 없을 것 같은 세월이 묻어난다.
은은하게 들리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봄 바람을 타고 절 마당을 지나 암봉을 넘는다.
도 솔 암.
주련에 쓰여진 글귀도 이곳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詩的시적으로 표현 하였다.
朝光莊嚴東海出 조광장엄동해출
동해에 솟아 오르는 일출은 장엄하기 이를데 없고
夜景寂靜海中月 야경적정해중월
바다에 달이 비추면 고요함의 경지에 든 야경을 이루네
도솔암 맞은 편 암봉
솟아 오른 아침 해에 장엄한 하늘이 열리고 달이 바다에 빠지면
천지를 빨아들일 듯 한 고요함이 저절로 연상된다.
주련의 글씨를 따라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장관에 잠시 젖어 들면서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도솔의 세계는 아마도 저럴지도 모르지....라고 되뇌어 본다.
일몰과 일출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이곳은
우주를 담고도 남을 기도 도량이라고 낡은 안내판에 쓰여 있다.
도솔암 측면 암봉
요사체를 지나 능선을 따르다가 군 부대가 자리한 도솔봉 아래를 지나는 사면길로 이어간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행락객과 산객이 줄을 지어 올라온다.
고즈녁한 숲길을 따르니 그동안 암봉에서 긴장했던 마음이 저절로 가라 앉는다.
암봉을 타고 기이한 문양을 그려내는 넝쿨 식물,
암봉위로 넝쿨 식물을 뒤집어 쓰고 마주보는 연인같은 암봉,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 자락 곳곳에서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듯 서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도솔암을 둘러 싼 암봉 능선이 만들어내는 기가 막힌 경관이다.
연인 바위(?)
기도 하듯 합장 하는 듯한 모습의 바위(도솔암 좌측 능선)
시끌 벅쩍,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도솔봉으로 올라오는 시멘트 길이 나타난다.
아침에 마련에서 올라오는 3 코스의 종착지로 판단된다.
뒤쳐진 뭉클님을 기다리다가 가짜 도솔봉으로 난 능선으로 접어든다.
삼면으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곳,
저 멀리 오늘의 종착지 사자봉 땅끝 탑이 아련히 보인다.
암봉도 험한 길도 모두 끝나고 이제 남은 구간은 육산이다.
헬기장을 겸한 시원한 정상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킨다.
가짜(?) 도솔봉 정상
도솔봉 정상은 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이곳에다가 가짜(?) 도솔봉을 만들어서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다소 섭섭 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은 것 같다.
능선을 따라 잡목으로 뒤 엉킨 좁은 등로를 헤쳐서 내려서니 다시 시멘트 길이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니 좌측으로도 꼬리표가 있고 산 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시멘트 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다른 그룹의 일행 7-8명이 그곳에서 기다린다.
‘ 어느길로 가야 땅끝으로 가지요...?’
지도를 보고 설명을 해 드리니,,,, 이런 고마울데가...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 길을 간다.
시멘트 길을 5분여 내려가다가 좌측에 새워진 안내판을 잠시 들여다 본다.
땅끝 천년 숲길로 명명된 이길은
이곳에서부터 나지막한 야산의 능선을 따라 땅끝까지 9.21km라고 표시되어 있다.
80년대 까지도 이 길은 숲과 잡목으로 인하여 등로가 없었으나
2010년에 해남군에서 이 길을 개척하고 이정표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정표의 거리는 땅끝 호텔 부근의 구름다리까지가 아닌가..라는 판단이 선다.
특히 종착 지점 부근의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불골이재에서 바라 본 도솔봉 능선
혹시나 하고 뒤쳐진 쑥맥님 일행을 기다리다가
행여 길을 잘못 들었을까 걱정이 되어 휴대폰으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불통이다.
혼자서 길을 이어 가다가
능선 저 멀리 앞서가는 일행을 보고 나그네, 등산조아님으로 판단하고 소리쳐 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휴대폰을 꺼내 조아님에게 연락을 해 보지만
“휴대폰이 꺼졌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나온다.
앞선 일행을 따라 갈까...뒤쳐진 일행을 기다릴까...?
어정쩡하게 가다가 뒤 따르던 쑥맥님 일행과 만난다.
능선 양지 바른 곳에서 휴식을 하면서 간식을 먹다가
뒤늦게 나타난 등산조아,줌마.나그네 콩새,맥주병 일행을 만난다.
아니...어데로 갔다가 이제사....?
우리가 내려선 시멘트 길 위 지점에서 좌측으로 떨어져서 연포산 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다.
어찌하여 그랬을까....?
그 쪽도 우리에게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아니, 연포산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무려 40여 분을 다른 길로 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다.
우리 일행과 같이 도솔봉을 거친 후 능선으로 내려서서
중도 시멘트 길에서 좌측 봉우리를 보고 진행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보다 젊은 탓인지 표정은 전혀 힘들어 하지 않다.
40분 팀원(?)......
합류한 일행 11명이 즐겁게 이어간다.
임도를 건너서 좌측으로 들어서니 땅끝 천년숲길 이라는 이정표와 함께 8.2km남았음을 알린다.
이 정도 거리라면 늦어도 2시간 반이면 될 것 같다.
능선에 올라서니 좌측으로는 아름다운 바다가 계속 따라온다.
능선을 따라 펼쳐진 통호리 앞 바다
숲 속에는 이곳 저곳에 산山 란蘭도 보이고 아직은 잎이 작지만 취나물도 눈에 뜨인다.
두릅은 손가락 한 개 크기 정도로 순을 내밀고 나오지만
쑥은 곳곳에 지천이고 엉겅키도 자주 보인다.
호사다마, 그런데 아침을 같이 한 젋은 여성이 앞선 그룹에서 쳐져서 우리 그룹속으로 합류한다.
우리 뒤로 후미가 있으면 천천히 오면 되겠지만 우리가 후미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모른 체 하고 가기에는 너무도 갸날프게 보인다.
스틱을 한개 건내고 걷는 요령을 알려 주지만,,, 노인이 지팡이 쓰듯이 힘이 없다.
“아빠하고 같이 신청 하였는데..아빠가 안간다면서 혼자 갔다 오라고 해서 왔어요....
산에는 좀 다녔나요 ?
아니요 오늘이 첨이라서....“
2조 그룹으로 출발, 미황사에서 올라 왔는데
복장과 배낭은 압구정동 바람 쐬러 가는 듯 한 형상이다.
학생 같기도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31세 여성으로서 안스럽기 짝이 없다.
오르막도 힘들고 내리막은 숫제 걷기도 힘들어 보인다.
“발이 아프고 미끄러 질 것 같아 빨리 못 걸어가요.....”
제법 규모가 큰 산소를 지나 시멘트 임도를 따라 올라서니
툭 트인 능선에는 어마 어마한 묘지가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잔잔한 바다가 큰 호수를 연상 시킨다.
호화 묘지 앞 공터에서 백일도를 배경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후 오르막 길을 이어 가는데
힘 들게 뒤 따라 오던 여성이 저만치서 느릿 느릿 걸어오고 있다.
시멘트 임도 이후 부터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면서 이어 오기를 거의 2시간...
마지막 개재봉이 바라 보이는 묘소 앞에서 우측 시멘트 길로 하산 하도록 설명을 해 준다.
이 상태로는 남은 봉우리 3개는 못갑니다. 너무 늦을것 같습니다.
여기서 오른쪽 마을 송호리로 하산하여 좌측에 보이는 저곳까지 오세요
저곳이 오늘의 종착지이고, 산악회 버스가 저기서 기다립니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선착장 부근으로 오세요
도착해서 시간이 남으면 거기서 저 멀리 보이는 땅끝 탑있는 곳을 올라가서 구경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서 식사도 하고 구경을 하세요
버스 있는 곳에 반드시 2;30 까지 와야 합니다.
3시에 정확히 버스는 출발 합니다.
이 산악회는 원래 그런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저녁에 버스에서 나눠준 지도를 건내고 산행 대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본인의 전화 번호도 내 휴대폰에 옮겨 적는다
돈은 있어요?.. 예. 배낭에 물은 있어요 ? 예...
그럼 됐습니다.가세요.
봄날 소풍가듯이 따라 나선 딸도 답답하지만
그런 딸을 훌쩍 떠나보낸 아버지는 더욱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선 일행을 따라 낮은 봉우리(개재봉)에 오르니 일행은 호텔 앞,구름다리를 통과하고 있다.
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니 갑갑하던 가슴이 툭 트인다.
임도를 따라 가다가 툭 터진 묘소에서 다른 그룹의 여성이 건내는 간식을 나눠 먹는다.
그동안 뭉클님이 공을 들인 탓에 여성 두 분이 빵에 과자에 커피를 꺼낸다.
발 아래 땅끝 마을(갈두)의 선착장이 바다를 안고 그림같이 펼쳐진다.
사자봉과 갈두리 선착장(길게 늘어진 섬은 백일도)
나무 계단 아래서 앞서가던 쑥맥님이 살모사와 눈 싸움을 하고 있다.
머리가 세모나게 생긴 놈이 30-40cm이나 되었을까....?
양지 바른 길에서 가만히 있는 모습이 작지만 위협적이다.
길고 긴 계단을 따라 조그만 정자가 있는 망집봉으로 올라선다.
송호리 해수욕장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해수욕장 너머 송지면에는 허준 선생이 유배를 왔던 조그만 어촌 중리가 있다.
송호리 해수욕장과 그 너머로 송지면 중리 마을
왜 해남이나 보길도, 제주도 같이 먼 곳이 유배지가 많았을까....?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유독 함경도 북청, 전라남도 지방에 유배가 많았던 것은
명나라의 유배 제도를 따라 천리,이천리, 삼천리 밖으로 정한 탓이다.
국토가 작은 우리나라는 천리 이상의 유배지는 사실 어렵다.
그래서 강원도로 갔다가 남해로,그리고 땅끝으로 유배지를 옮기면서 삼천리를 채웠던 사례도 있다.
땅끝 마을 기념비에 쓰여진 내용도 이곳에서 한양까지 천리라고 하였다.
망집봉을 내려서서 솔밭길을 걷는다. 정면의 사자봉으로 오르는 중턱 주차장을 지나고
산 비탈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현대식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눈 앞의 백일도가 커다란 해삼같이 구불 구불 이어져있고
그 오른쪽 멀리 아스라이 보길도가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바다에는 양식장의 시설물이 가로새로 줄을 지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다
곡식이나 채소를 심은 이랑같이
바다에도 저렇게 가지런하게 줄지어 설치된 양식장 시설물이 참으로 아름답다.
내려선 길에 세워 진 시비詩碑,
그 중에서 김지하 님의 시비 앞에서 잠시 서 본다.
21살 김 지하는 고향 목포에서 빈 털털이로 힘들게 보내면서 살아 갈 뜻이 사그라 질 때
목포 선착장에서 땅끝행이라는 깃발을 보고 자신이 마음의 땅 끝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자살을 기도 하기도 했던 시인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25년이 지난 후에야 땅끝 해남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원주에서 옥 살이를 할 때는 소설가이자 장모님이신 고 김 경리님이
시인의 옥 바라지를 위해 원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生에 절망적일 때 땅끝이라는 말만 들어도, 글씨만 봐도 용기가 솟아 났을까 ?
시 애련이 새겨진 김 지하 시비詩碑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애린 (김 지하)
고요하고 아늑한 바닷가에서 눈을 감는다.
그간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뤄진 산행,
새벽에는 안개 속에서 바람이 많았고,
아기자기하고 가끔은 위험 하기도 했던 암릉 구간은 참으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미황사를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능선을 따라 줄 지어선 암봉과 도솔암에서 바라보던 경관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솟아 있는 암릉과 바위는 설악의 용아장성 능선을 연상케 하였고
바닷가에 불쑥 솟은 능선은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작은 보물 같은 존재다.
친구같이 가족 같이 함께 한 10명도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후기;
산행 중에 본 것도, 상경시 버스 차창 밖으로 본 것도 기이한 것은
해남 지방의 땅은 붉은 고구마 색깔이었던 것이다.
황토색은 이곳에서는 붉은 색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산 자락에 자리한 봉분은 아주 크고 장식물도 많은 것이 경상도나 내륙지방과는 대조적이다.
두루 뭉실한 능선을 따라 늘어진 낮은 산들은
강원도나 경북의 내륙 지방 농민들에게는 모두가 농지로 보일 만큼 완만하다.
차창 밖 농가는 집도 집터도 널찍하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길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넋이 빠진다.
무안, 함평, 영광으로 이어지는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전라도를 이런 식으로 다녀 올 일이 아니다.
계획을 새로 짜서 구석 구석을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더구나 해남 땅끝은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국토 종주의 시발점이 아니던가.....
국무 총리가 3명이나 배출 되었다는 고창을 먼 거리에서 지나간다.
잠시 졸다가 눈을 떠보니 김제로 들어선다.
지평선의 고장 김제라고 쓰여진 입 간판 뒤로 펼쳐진 호남 평야의 진수...
태백산맥의 작가 조 정래가“징게멍게(김제만경) 외배미”라 했던 바로 그 곳을 차창 밖으로 바라본다.
풍요롭다는 말 한마디로는 설명이 안 되는 곳이다.
좁은 한반도라고 하지만,
땅끝 마을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면 해남에서 함경도 은성까지 삼천리라고 하였다.
상대적으로 다른 지방 보다 궁금하였던 전라도에 대한 호기심,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느낌으로 반추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일은 광주 출신 친구를 불러서 해남 천일 식당을 찾아 봐야겠다.
함께 한 기분죤 산악회 회원님들,
쑥맥,등산조아,나그네,뭉클, 맥주병, 거북선, 줌마, 콩새, 똑순이, 꽃님이(존칭 생략)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 소중한 달마산 산행 감사 합니다.
첫댓글 여태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산행기~~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는데,,
봄비 내리는 이아침에..편하게 달마산 한번 더갔다오고,
역사 지리 공부도 많이 하고 갑니다~`감쏴~~
와우~~감동의 글임당~~
후기를 읽으면서 다시한번 달마산을 연상케하네요~~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될것같아요~~
언제나 산행하고나면 기다려지네요~~고문님의 후기를....
감솨~~~~감솨합니다~~^^
저는요 발뒤꿈치도 못따라가겠습니다 .감동깊이 읽었습니다 ,거져 몸부림치고 발광하고 산행만합니다.
좋은 추억오래간직하고 .자주열어보겠습니다 ..
앞으로 산행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거라 여겨집니다
산행후기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산행후기 잘 읽었어요.
사과한쪽 건넨 하얀모자 입니다.
한시간정도 알바하느라 지쳐서인지 일행의 저질 체력으로 따라붙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왓네요..
생생한 후기를 읽으면서 종주를 못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기회가되면 다시한번 가고싶은 곳이네요.
어이쿠... 반갑습니다.
허기진 아침에 주신 사과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 산악회가 진행 중인 한북 정맥에서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뉘신지 알듯모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