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강 선교의 모형
현대 선교에 대한 논쟁의 근원은 대체로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선교신학의 차이점을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두 주장은 흔히 말하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이다.
1.복음주의 선교 이해
1)복음주의자들은 이 땅의 세계를 본질상 악하게 보는 경향으로 세상과의 접촉은 최소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2)예수재림론자들은 하나님이 올 왕국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며 현재란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고 절실한 것은 미래의 영광 뿐이다.
3)복음주의자들은 사회 구조에 대하여 자신들을 관여 시키는데 있어서 상당히 소극적이다. 혁명 보다는 점진적인 인간 성숙이 곧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봉사활동이 복음화에 따른 결과라고 보기보다는 복음화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4)복음주의자들은 타 종교의 추구에는 타락한 인간의 참여가 반영된다는 견해다. 타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게 하는 동굴이다. 그러면서 만약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이교적인 자신의 과거를 단호하게 떠나서 복음의 메시지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5)복음주의자들은 선교에로의 부름을 지상위임령의 해석에 근거하여 개개인 신자에게 내린 직접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6)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회를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선교는 주로 교회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성도의 삶에 질적 성장은 주로 교회 내 활동에 대한 참여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7)오염이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멀리하려는 복음주의 경향이 있는 반면에 세상에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세상을 정복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있다.
2.복음주의자들의 선교의 주요동기
1)그리스도의 지상 대 위임령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우리가 선교하지 않으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감에서 오는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영광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3.에큐메니칼 선교 이해
이 입장은 대체로 복음주의 견해의 모든 이원론적인 면을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한다. 즉, 영혼과 일시적인 것, 영혼과 육체,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문화, 복음과 사회참여,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 구원과 해방,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세계사의 이원론을 없애자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교회와 세상의 통합이다. WCC는 1968년 웁살라 총회에서 이것을 공적으로 발표했다. 에큐메니칼 측에서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점은 바로 이 세속화이다. 특수한 상황에서 선교와 세계와의 관련이 정치적 또는 혁명적 행위 형태로 나타난다. 선교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보통 사람들의 형편을 더 좋게 해주는 사회 변화를 위한 기대와 운동의 물결이 오르는 것을 현실이 반영시켜주는 모든 사회 정치적 사건들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선교는 전적으로 세계를 위한 교회의 책임이다. 선교는 세계와 삶이 모든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와 세계간의 경계선과 구원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의 경계선이 점차로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이때, 교회의 존재의미는 중요하지 않고 교회의 행위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강조점을 교회의 세속화에 두고 있는 에큐메니칼주의자들과는 달리 타 종교들 가운데 있는 구원을 조명 시키려 하는 자들도 있다. 첫번째 견해에서 보면 교회와 세계 사이를 구별하는 선이 희미한 것과 같이 두 번째 견해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타 종교의 구별이 희미하다. 만약 교회 밖에 있는 세속 세계가 하나님의 활동에 광장이라면 마찬가지로 기독교 밖의 종교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세계에서부터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이전시키는 것이 필요치 않다면 또한 이방종교에서부터 기독교로 개종 시키는 것도 불필요하다. 결국 이들의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종교적 전통 안에서 최대한 구원에 이르는 접촉을 할 수 있도록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에 대하여는 힌두교인은 더 좋은 힌두교인이 되게 하고 불교 신자는 더 좋은 불교 신자가 되도록 돕는 것 의외의 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글을 모방하여 선교사는 무신론자에게는 무신론자가 되고 허무주의자에게는 허무주의자가 되고 교회 밖에 있는 자에게는 교회 밖의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없어도 되고 이미 있는 것도 처치 곤란할 정도로 선교를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세기 동안에 교회 밖의 구원은 없다라고 한 것은 점진적으로 교회 밖의 구원은 있다는 것으로 대치되었고 때로는 이미 교회 안에 구원은 없다라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제4-2강 선교의 성경적 근거
개신교 선교 신학이 그 정의에서 로마 카톨릭교보다 매우 성경적이라 할 수 있는가? 선교신학에 관한 논문에서 선교의 성경적 근거에 대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전개되는 내용이 더 성경적이라는 확증은 못 된다.
1.슈바이처의 입장
이전의 학자들은 각기 신약성경의 장마다 나사렛 예수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개념을 단순히 투영시켰다는 견해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 예수와 그의 활동을 재건한 것이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그는 성경의 그리스도는 단순히 역사가의 경험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2.복음주의 측
성경이 신학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관례를 따라 연역적인 출발을 한다. 성경이 한 특정한 시점이나 어떤 구절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를 분명하게 입증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 성도의 현재적 상황에서 그에게 적용되는 규범적인 시점을 그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에큐메니칼 측
에큐메니칼 측에서는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 실제로 전 상황을 출발점으로 택하고 성경을 그 상황에 비추어서 읽으려고 한다. 자기 상황이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
4.양자 중 어떠한 방법을 택할 것인가?
연역적 방법은 실행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로 철저한 연구를 할지라도 지난 1900년 동안의 자료와 가장 최근의 문헌을 동시에 다 얻을 수는 없다. 귀납적 방법은 실천가능성은 있으나 정당화 될 수 없다.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과 집단경험이 어떤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열쇠로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하다. 그러면 세 번째 방법은 가능한가? 즉 상대성과 제한성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두 가지를 다 사용하는 것이다. 선교학적 출판물들을 보면 이미 선교는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전제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의 우선적 과제는 이제 이렇게 정의된 자기의 전제에 맞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정립하려는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다. 선교에 대하여 철저한 정의와 변치 않는 개념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으로서 선교이해의 보다 넓은 바탕에서 다양한 접근과 강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5.성경에 접근하려는 방법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서로 격리되어서 또는 서로 대립하며 실천되는 경우에는 또 다른 단점을 가지게 된다. 복음주의 대 에큐메니칼의 대립과 논쟁은 대체로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 결과로 정경 속에서 또 하나의 정경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피하게 된다. 해방신학계에서는 출애굽기 이야기나 나사렛 회당에서의 예수의 메시지(누가복음 4:16~20)가 정경 속의 정경을 형성한다. 반면에 복음주의 선교사들 측에서는 지상 위임령(마태복음 28:18~20)이 선교에 대한 핵심적 명령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접근 방법은 성경을 마치 광산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광산인 성경 속에서 선교 본문을 어렵게 발굴하여 내서 모두 볼 수 있게 겉으로 드러내 준다. 그러나 바위와 돌맹이들 속을 조심스럽게 찾아보면 우리는 필경 진짜 금 덩어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인 룻과 나아만 같은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 이사야(40~66장)과 시편도 세계주의적 표현을 해준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와 유대인이 아닌 자들과의 만남을 기록해 준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선교와 선교사의 개념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덫 붙여서 이해해 왔다.
1)현대 선교의 초기는 유럽의 세계항로 발견의 출발과 우연히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화 하였다. 이방인들은 대양을 건너 먼 나라에 살고 있었다. 선교는 그들에게 ‘가는 것’을 의미했고 선교사들은 떠나가는 사람들 이었다. 그래서 선교 개념은 매우 강한 지리적 요소를 가진 것으로 발전되었다. 지상 위임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무엇을 하느냐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그 누구를 선교사라고 할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한 지역에서 떠나가서 다른 곳에서 일하도록 파송한다면 그는 선교사가 된 것이다.
2)현대 선교 운동은 대체로 서구 및 비 서구세계에 관한 식민지화와 같은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도적이 아니면서도 서구의 우월감, 힘, 지식의 요소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동정 주의적 개념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므로 선교는 전형적인 서구의 활동 범위적 범위내의 지리적 경계선을 넘어가되 되도록 멀리까지 넘어가서 열등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베풀어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3)만약 신학자들이 선교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런 선입관을 갖고 있다면 적어도 그들은 구약의 선교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 성격이라고 결론을 지을 것이다. 구약에서는 요나서 외에는 다른 나라를 복음화 하기 위하여 멀리 떠나가는 개념이 구약에 거의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나사렛 예수와 선교
사 복음서는 대체로 특수주의 바탕을 지닌다. 예수의 비전에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란 없는 것으로 비친다. 예를 들면 사 복음서의 자료를 갖고 논의할 때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함을 암시한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차원이 계시된 결과로서 예수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가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으로 신구약에서의 선교적 차원이다.